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 이 게시판은 최근에 의견이나 덧글이 추가된 순서대로 정렬됩니다. )
서점에 들렀다가 그간 살까 말까 고민하던 <살아 있는 지구>를 구입했습니다. BBC에서 만든 <Planet Earth>를 책으로 편집했죠. 사실 집에 이미 블루레이가 있기 때문에 사기를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똑같은 내용이라면 최강의 화질로 보는 게 낫지, 굳이 책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화질은 당연히 블루레이가 압도적이며, 책에 들어간 사진은 크기도 작고 해상도도 낮습니다. 거기다 블루레이는 동영상이고, 책은 정지 사진일 뿐이죠. 따라서 언뜻 생각하면 책을 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사놓고 보니 꽤 잘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일 좋은 점은 그냥 찾아보기 쉽다는 점. 원하는 때에 아무 장소에서나 읽고 싶은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블루레이를 텔레비전에 연결해놓은 환경에서라면 더 그렇습니다. 가족들과 TV 쟁탈전(?)을 벌여야 하니까요. 뭐, 컴퓨터 모니터에 연결할 수도 있겠지만, 크기가 작기 때문에 블루레이란 이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죠. 거기다 밖에 들고 나갈 수도 있습니다. 부피가 커서 문제긴 하지만, 들고 다니다 읽고 싶을 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장점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점은 책은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겁니다. 영상은 끊임없는 흐름이기 때문에 줄곧 눈과 귀로 따라가야 하며, 중간에 생각을 곱씹을 시간이 없습니다. 거대한 대양을 보고 와~ 하는 순간, 산호초를 찍고, 산호초를 보고 감탄하려는 순간, 상어가 나오고 등등. 이런 식으로 쉴새없이 정보를 주입하기 때문에 잠깐이나마 생각에 잠기면 내용을 놓칩니다. 하지만 책은 원하는 사진 하나를 오래도록 보며 세밀한 부분을 관찰할 수도 있고, 설명을 읽다가 앞뒤 내용과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열대우림의 탄소생산량이 이만큼이면, 사바나의 탄소 생산량이 얼마더라? 북극의 열에너지 흡수량은 이만큼인데, 온대 기후에서는 얼마나 되지? 이런 궁금증은 쉽게 풀 수 있죠. 책장을 넘겨 찾아보면 되니까요. 그리고 책은 독자를 기다려주기 때문에 설명을 읽다가 머릿속에 몇 번 굴리며 완벽히 자기 것으로 만들 시간이 생깁니다. 훨씬 여유 있게 정보를 습득할 수 있죠.
그리고 설명을 읽기 위해서라면 책이 훨씬 낫습니다. <살아 있는 지구>는 엄청난 화질과 장엄한 화면을 제공합니다. 눈 앞에 수 십 마리의 코끼리 떼가 이동하는 사바나의 대평원이 펼쳐집니다. 글보다는 그림이, 그림보다는 동영상이 자극적이기 때문에 그 와중에 설명이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하지만 책은 사진과 함께 글이 주요하기 때문에 영상의 자극을 피할 수 있습니다. 사진 하나를 충분히 음미한 다음 옆에 있는 글을 읽어도 되기 때문에 그림과 글의 비중이 조화롭죠. 도표와 그래프는 동영상보다 책으로 보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요. 특히, 자연 다큐멘터리는 특성상 설명보다 보여주기에 치중합니다. 치타가 가장 빠른 단거리 육상 포식자라는 건 다들 압니다. 하지만 탄력적인 허리를 퉁기며 물 흐르듯 달리는 모습은 영상으로만 봐야 그 경이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재가 동물인 자연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이기보다 감정적으로 편집하곤 하죠. (환경 보호 메시지를 전달할 때는 감정적인 게 더 유리하기도 하고요.) 객관적인 자료는 책이 낫습니다.
물론 책이 못 따라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책에서 아무리 사진을 보여주고, 묘사를 해도 백문이 불여일견일 때가 있죠. 상어가 바다 밑에서 솟구쳐 물개를 물고 공중제비를 넘는 장면은 눈으로 봐야지, 책에서 수없이 묘사를 해도 모자랍니다. 혹등고래가 수 십 km로 퍼뜨리는 노래의 신비는 귀로 들어야만 이해가 갑니다. 중요한 건 책과 동영상은 각각의 장점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최상위 화질을 자랑하는 블루레이라 할지라도 책의 장점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책에 사진만 들입다 집어넣는다고 책이 동영상처럼 되지도 않고요.
제일 좋은 방법은 책과 동영상을 둘 다 참고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처음 살 때는 망설였지만, 집에 와서 읽어보니까 좋긴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