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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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동물에는 호기심이 있게 마련이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중에서도 특히 호기심이 왕성하기로 잘 알려졌습니다. 무엇보다 눈앞의 사실에만 호기심을 갖는 여타 동물과 달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온갖 추상적인 것들에 관심을 두고 궁금해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내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 같은 앞으로의 일, 그리고 “비는 왜 올까?”, “하늘은 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지?”처럼 관찰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의 원인 등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며 이 답을 찾고자 합니다.
이제까지의 관찰만으로 볼 때 사실상 인간만이 가진 이러한 특성은 교육 등의 결과는 아닌 듯합니다. 실례로 이러한 호기심과 정답을 추구하는 행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어쩌면 말 못 하는 아기때부터) 보이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뇌가 그만큼 우수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인간, 아니 인류의 삶은 바로 이 호기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태초에 인간이 불을 발견할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문명의 발달은 ‘호기심’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 불을 찾아서... 인류의 문명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
인류 문명의 원천인 불은 호기심과 ‘정답’을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된 힘입니다. 오직 인류만이 가진 이 독특한 기술은 눈앞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이라는 존재를 처음 본 동물들은 대개 두려움을 가집니다. 그 중 일부는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지만 뜨겁고 아프다는 것을 알고 도망칩니다. 그들의 호기심이라는 것은 대개 그 정도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과 해를 주는 것을 가리는 정도로 만족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워하며 피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계속 그 정체를 파고든 끝에 이것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예 직접 불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얻어 속칭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이처럼 호기심이라는 능력으로 불이라는 힘을 얻은 인간은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질적으로 호기심 충족을 위해 노력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엄청나게 강력한 것이어서 만화나 영화 등에선 이 호기심 때문에 죽거나 다치는 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눈앞의 이익보다도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행동 때문인데, 사실 이는 현실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사례입니다. (이 역시 여타 동물과는 다릅니다. 여타 동물의 호기심은 대개 생존 본능과 직결되어 있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때때로 생존 본능을 넘어서니까요.)
호기심은 ‘정답’을 알았을 때 충족됩니다. 하지만, 그 정답에 만족하지 못하면(틀렸다고 생각하면) 다시 호기심이 생겨나고 정답을 알아낼 때까지 반복됩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때때로 정답을 아는 이에 대한 부러움, 존경, 그리고 숭배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물론 때로는 질시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지요.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직접 찾아보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누군가에게 물어서 해결하는 법이지요. 일부 사람들은 전자를 택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후자를 택합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호하지 않는다면 네이버 지식인 같은 서비스가 인기를 끌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에 대해 고민하고 직접 찾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존하는 것은 그만큼 한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네이버 지식인이라면 '내공'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오랜 옛날 A라는 인간이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하늘에서 차갑고 흐르는 것이 내린다. 그래 이걸 물이라고 부르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비라고 하자... 그런데 비는 왜 내리는 거지?”
그는 계속 고민했지만, 정답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도 그렇지요. 당시에는 기상학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얼음<->물<->수증기의 상변화에 대한 것도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계속 고민하던 A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이 풍부한 B에게 찾아가 물어봅니다.
“비는 왜 내리는 것인가요?”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B 역시 원시 시대의 인간, 비가 내리는 원인 따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도 모른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역시 연장자로서의 체면이 있으니까요.
한참을 고민하던 B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비의 정령이 있기 때문이다.”
A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왠지 타당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생각해 보니 조금 부족한 것 같습니다.
비의 정령이라는 게 있다고 치고, 왜 하필 하늘에 이상한 것(그걸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이 생기고 어두워지는 날에만 비가 내리는 것일까요?
그래서 다시 B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왜 비는 구름이 끼는 날에만 내리는 걸까요?”
한참 생각하던 B는 대답합니다.
“비의 정령은 구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A는 고개를 끄떡입니다. 그리고 B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지요.
한번 존경을 받기 시작한 B는 존경받는 맛(자랑하는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A가 물어보기도 전에 이것저것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B의 박식함에 그를 숭배하게 된 A는 B의 말을 마을 사람들에게 해 줍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심지어 B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조차- B를 존경하며 그를 추종합니다. 이것저것 질문할 때마다 막힘없이 대답하는 B가 정말로 대단해 보였으니까요. 그래서 심지어는 그에게 먹을 것을 바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B가 나이가 들어 죽자 A는 B를 대신하여 존경받는 자리에 오릅니다. 오랜 기간 B를 따라다닌 A는 B 다음으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조금 똑똑해지면서 B의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문을 제기하게 되지요. 그리고 ‘똑똑한 사람’인 A는 이에 대답하고자 머리를 짜냅니다. 그래서 B의 말이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모하여 만들어집니다.
시간이 흘러 B가 죽자, B를 따르던 이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인 C가 뒤를 잇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마가 계속 되면서 사냥을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민하고 고민하다 C를 찾았습니다.
“비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C는 곤란해졌습니다. A와 B의 지식을 모두 이은 그조차 비를 멈추는 법은 몰랐으니까요. 한참을 고민하던 C는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비를 내리는 것이 비의 정령이라면 비의 정령에게 빌면 될 것이라고...
그래서 C는 말했습니다.
“비의 정령에게 제물을 바쳐라. 내가 비의 정령에게 기도를 해 보겠다.”
그러면서 C는 정성을 다해서 비의 정령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비는 좀체 그치지 않았지만 절대로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비는 정령이 내리는 게 맞으니 비가 그치지 않는 건 자신의 기도 방법이 틀렸거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과연 비가 그쳤습니다. C와 마을 사람은 기뻐하면서 비의 정령이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사냥을 다녀와서 잡은 짐승으로 잔치를 열고 비의 정령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물론, 많은 사냥감이 C에게 전해진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C의 기도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감격한 D는 C의 제자가 되어 그의 모든 것을 배워나갑니다. 그리하여 정령을 화내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비가 많이 내리건 아니면 적게 내리건 상관없이 정기적으로 비의 정령에 제물을 바치며 기도합니다. D가 정성을 다하여 기도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도 비의 정령이 굽어 살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됩니다. 혹시라도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오직 정성이 부족하다고 여겼을 뿐….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E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웃 마을 출신인 E는 D의 기도는 잘못되었다며 비의 정령은 오직 과일만을 좋아한다고 주장합니다. D는 화를 내며 그를 쫓아내라고 하지만, 어느새 주변 사람을 설득해서 세력을 늘린 E는 D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강경하게 맞섭니다.
그리하여 마을에는 비의 정령에 과일만 바치는 파와 고기를 바치는 파가 나뉘어 대립합니다. 비의 정령을 모시는 일은 마을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일이기도 하니, 때로는 주먹다짐이 일어나기도 일수….
결국, E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 D는 자신의 권위를 위협할만한 존재를 완전히 없애고자 합니다. 그래서 과일 파인 이웃 마을을 ‘이단’이라 주장하며 침공해서 멸망시킵니다. 고기파는 이 승리야말로 자신들이 옳다는 증거라 여기며 D에 대한 숭배를 더합니다.
D를 중심으로 ‘비의 정령교’라는 것은 계속 번성합니다. 마을이 커지면서 비의 정령은 ‘비의 신’이라는 존재로 승격하게 되었고 수많은 다른 신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비의 신이 정말로 있는가?’, ‘정말로 기도는 효과가 있는가?’
이러한 호기심이 등장하면서 비의 신을 모시는 신관 F는 고민하게 됩니다. 이대로는 자신의 권위와 교단의 질서가 깨진다고 생각한 F는 비의 신을 믿지 않으면 죽어서도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남기지만, 그것만으로는 비의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무렵 G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농부인 G는 겨울에 내리는 눈이 봄이 되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을 끓이면 다시 수증기가 된다는 사실을 보면서 호기심을 갖습니다. 특히 수증기가 하늘의 구름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결국 구름 그 자체가 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나날의 변화를 관찰한 F는 비가 내리고 그치는 주기가 있으며, 비가 내리기 전에는 습해지거나 바람이 부는 등 특정한 조짐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비가 내리는 것은 기도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정리해서 ‘비의 흐름에 대해서’라는 책을 씁니다. 그의 이론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비가 내리고 그치는 것을 더욱 정확하게 측정하는 방법으로서 눈길을 끕니다.
이번에야말로 위기에 몰린 F는 결국 강경책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G를 이단이라 몰아붙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을 믿으면 비의 신이 분노하여 가뭄을 내릴 것”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G를 잡아다 처형하고 G가 남긴 책을 모두 불살라 버립니다.
그래도 G가 남긴 유산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자 G의 주장이 하나 둘 사실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H란 사람은 투명한 그릇 속에서 물의 상변화를 관찰하여 비와 비슷한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을 발표했고, I란 사람은 산 위에 올라가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기온이 내려가서 수증기가 쉽게 물로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심지어는 산 위에 걸친 구름이 안개 같은 것으로 단순히 공중에 뜬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렇게 수많은 사실이 드러났지만, 비의 신교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G의 희생 이후, 수많은 학자가 비가 왜 내리는지를 증명했지만, 비의 신교를 믿는 이들 중에는 그래도 비의 신이 비를 내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오직 종교의 이야기만이 진리이며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은 비가 내리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구름 속을 들어가 본 일이 없기에 과학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비는 신이 내려주는 것. 이 말을 의심하는 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러한 말이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심지어 산에 올라가 구름을 직접 본 이들조차 과학자의 말을 사실로 믿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산 위의 구름에 비치는 신비한 영상이 구름의 신의 정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신을 보았습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신의 권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을에서는 비의 신교가 번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한 비의 신교와 관련한 이야기는 현재 알려져 있는 종교의 이야기에도 대부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도 아이들이나 원시 사회를 유지한 종족들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기도 합니다.
아이들 중 누군가가 궁금한 것을 이야기할 때 그것에 대답하는 아이는 거의 대부분 정해져 있으며, 그 아이는 '똑똑한 아이'로 (조금 과장하면) 숭배됩니다. '똑똑한 아이'의 대답이 옳건 그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답은 대개 아이가 멋대로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질문을 던진 아이는 호기심을 해결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호기심은 인류 문명의 원천이나 개개인이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그 자신이 고민하며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모르는 것은 무조건 물으면 된다, 그리고 그 말을 믿으면 된다는 사고 방식은 그 자신과 인류 사회를 퇴보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 방식의 중심에는 '(신이 말했다는 진리를) 의심하지 말라'라는 내용을 담은 종교가 존재합니다.
여러 종교에는 물론 좋은 내용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에서 주장하는 '모든 이에 대한 사랑'이 대표적이겠지요. 하지만, 종교란 결국 궁금한 것,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을 모두 '신의 이름'에 넘겨 버리는 행위에 다름 없습니다.
'종교를 믿는 이가 더 도덕적'이라는 주장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이러한 주장의 근간에는 인간이라면 스스로 판단해야만 할 기본적인 도덕조차 신의 뜻에 맡긴다는 무책임한 사고 방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옛날부터 종교광들은 '신의 이름'이라는 말 아래 각종 만행을 자행한 것입니다.
인간은 의심하고 호기심을 갖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우리에게 파괴의 상징이자 재생의 상징인 불을 가져다 주었고, 우리 인류가 현재에 이르는 문명을 이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물론 모든 일을 의심하고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호기심과 궁금증을 홀로 해결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신의 말이건 정부의 말이건, 학자의 말이건, 모든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면 세상은 퇴보하고 어지러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힘들게 바뀌기 마련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 호기심을 억누르기보다 이를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생각하고 살펴보기를 권합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삶이니까요.
많은 종교에서 "의심하지 말라."라고 거듭 말하는 것 자체가 인간은 본래 '의심하는 동물'이라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여담) 하지만, 세상에는 종교 이외에도 조건 없는 신념이 많이 존재합니다. 각종 도시 전설, 각종 음모론 역시 이러한 조건 없는 신념 중 하나이며, "보라고 부르는 댐을 만들면 강물이 맑아지고 홍수를 막을 수 있다."라는 황당무계한(많은 나라에서 낡은 사고 방식이라고 드러난) 생각을 믿고 밀어붙이는 것 역시 종교나 다를 바 없는 조건 없는 신념, 의심없이 따르는 신념이겠지요.
그리고, 역사가 입증하듯, 이러한 '진리에 대한 의심없는 신념'은 항상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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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인도 호기심이 많을 수 있다는 데 공감합니다. 이성적일 수 있다는 데도 공감하고, 종교인도 비종교인만큼이나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한다는데 특히 공감합니다.
2. 다만 종교인이 논리적이라는데는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종교는 논리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 하나를 원천적으로 차단합니다. 확률적으로 봐서 신 (혹은 부처, 혹은 그 무엇이든)이 존재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훨씬 낮음에도, 종교인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니 믿겠다'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 자체는 비논리적이지 않습니다만, 똑같은 사람이 다른 확률이 낮은 선택 (예: 전재산으로 로또를 사서 당첨을 기대하는 것)은 하지 않으면서 유독 신앙에 대해서만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마음의 평화나 안정, 행복 등의 가치를 얘기하며 낮은 확률만큼 기대 보상이 크다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종교의 기능이나 가치일 뿐 신앙의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신을 믿는 게 더 행복하니까 신을 믿는다면, 그건 신앙이라기보다 자기 최면에 가까운 거죠.
즉, 존재 가능성이 적은 초자연적 현상 (신이든 유령이든 뭐든)을 믿는 종교인은 그 자체로서 완벽하게 논리적일 수 없고, 사고 체계 어딘가에 논리적인 허점이 존재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종교인이 비정상이라거나 문제라는 건 아닙니다. 비종교인도 거의 대다수가 마찬가지로 그런 가치관 상의 논리적 허접을 가집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비종교인이 종교인보다 더 논리적이라는 게 아니라, '종교인의 가치 체계에는 어딘가 논리적 허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는 겁니다. 오히려 평균적으로는 종교인이 더 논리적일 수도 있지요. 99점짜리 100명이 모이면 0점부터 100점까지가 골고루 모인 경우보다 평균 점수가 더 높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3. 과학과 기술이 사태를 악화시킨 경우는 비일비재 합니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이 없을 때, 더 악화시킬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불만족스러운 경우는 더더욱 많습니다. 전체적으로 봐서, 인간의 호기심과 탐구 정신은 인간에게 혜택을 가져왔습니다.
어떤 음식이 몸에 영양소를 주고 맛도 좋지만, 냄새 나는 배설물을 발생시킨다고 해서, 그 음식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니 먹으나 안 먹으나 똑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먹으면 확실히 건강에도좋고 허기도 충족되지요. 비록 화장실은 가야 하지만 말입니다.
4. 아메리카 원주민이 조화롭고 평화롭다는 것은 아마존 조이 족이나 아프리카 부시맨이 조화롭고 평화롭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진실입니다.
환경과 평형 상태에 있는 모든 생물은 조화롭고 평화로와 보입니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도 자연의 섭리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 남북아메리카 대륙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 평화롭다는 북 아메리카 원주민, 혹칭 '인디언'들이 얼마나 많은 동물을 멸종시키고 서로를 죽여왔는지를 안다면 쉽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당시의 유럽인보다 상대적으로 적을 죽일 능력이 부족했을 뿐, 그래서 적을 죽이려면 자신도 그만큼 죽어야 하니 함부로 전쟁이나 학살을 일으키지 못했을 뿐, 본질은 유럽인과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1은 공감한다 하셨고,
2. 위에서 설명하신 비유에 공감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생각하기가 힘들겠군요. 제가 말하는 논리적이라 함은, '출발하는 전제가 다른 상황'에서 나온 겁니다. 보통 종교인들, 특히 제가 아는 한 기독교인들은 확률로써 신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처음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 명제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순간부터 종교인이 될 수 없겠지요('의심을 가지는 신앙인'은 될 수 있을려나요...) 그 순간 기대할 수 있는 반응은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과 역학에 의해) 존재할 것이다'라고 가정을 하죠. 그렇게 하여 새로운 종파나 교파가 탄생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정통'과 '비정통'이 있었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논리들을 만들어냅니다. 게 바로 우리가 아는 수많은 교리들이죠. 과학에서도 우주론 분야에 초끈 이론, 평행 이론 등 수많은 설명과 해석 방식이 존재하듯이요(아직 정설은 없는 걸로 압니다). 어찌됐든 세상에 실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종교인은 광신도 밖에 없어!" 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적었습니다.
3.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생존에 더 이로운 면이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자신만의 생존을 꾀하고자 할 때는 이 길이 정도지요.
인간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지성을 이용해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고 사과나 배와 같은 유용한 작물을 길러 먹고 살았습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동물을 죽이고 얻은 가죽을 입고 겨울을 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들이 그다지 '과학적으로' 크게 진보되지는 않았습니다. 호기심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지식은 문자나 언어로 된 게 아니라 그들의 삶과 생활 속에 있었습니다. 도구를 만들었지만, '자신들의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은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서 노력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호기심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높은 책임성이 요구된다는 게 전제가 될 뿐입니다. 유사 이래로 인간의 창조 행위로 인해 무수히 많은 파괴적인 활동들이 있어 왔지만, 그에 상응하는 만큼 자연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얻은 많은 유용한 물질을 수많은 도구를 만들었지만 대부분이 자연에 환원될 수 없는 형태로 조작되고 변형되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함부로 유기되고 방치될 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잘 아실 겁니다. 이를테면 플라스틱은 수백년 동안 썩지 않습니다. 그게 바다 위에 떠다니다가 열대 바다의 거북이의 호흡 기관에 끼여 죽일 수도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제조한 화학 약품이 수많은 인명을 살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하더라도, 공장에서 배수관을 통해 근처의 강에 유출되었을 때 수질 오염을 일으켜 수많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먹이 사슬 상에서 이러한 부분적인 재앙이 연쇄 반응처럼 일어났을 때, 과연 인간은 적시적재에 아주 유효한 대응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물론 내놓을 수는 있겠죠.
제 논지는 '불필요한 생명체의 소모를 막자.'는 겁니다.
창조 행위에는 철저한 책임 의식과 관리 의식이 필요합니다. 적절히 제어되지 않은 호기심은 결국 인간 전체의 생존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어느 순간에 그것이 동식물 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에게도 해를 끼치고, 심지어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사죄함으로써 모든 것을 없었던 일처럼 치부할 수는 없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러한 일은 선진국보다 후진국에서 보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데,
발달된 과학 기술을 가진 국가에서 수행한 모든 과학 실험의 결과는 전 지구적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로켓을 하나 쏘아올리는 데 드는 비용은 둘째 치고라도, 그게 유발하는 대기 오염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하지도 않은 욕구를 채우는 데 수많은 자연 자원을 소모합니다. 아마존 밀림은 원래 멀쩡한 대규모 삼림지역이었는 데, 이 지역이 소실될 경우 지구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에 궁극적으로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 안될 겁니다.
인간이 무수히 많은 파괴 활동을 벌이지만, 그건 인간만이 그러는 건 아닙니다. 생태계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생존 경쟁에서 밀리면 당연히 도태되겠지요. 하지만 도태도 대안은 있는 상태에서 진행됩니다.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계획적인 상호 말살 과정이 아니라, 죽으면 다른 게 태어나서 먹이 사슬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되고 이렇게 해서 전체 생명체의 보존을 꾀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활동은, 이 자연적인 과정에 전방위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균형을 순식간에 깨뜨려 놓습니다. 인간의 활동에 의해 한 생명체가 멸종될 수 있습니다. 그게 나쁜 건 아닙니다. 태어났다가 죽어 소멸하는 게 자연이 돌아가는 원리이니가요. 문제는 섣불리 아는 지식으로 이 과정을 계획적이지 않게 확대 재생산하는 행위는 자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4. 전 모든 인디언들이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평화롭고, 문명에서 자유로우며, 자연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조화롭게 살고자 노력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떤 인디언 부족들은 확실히 그렇게 이상적인 삶의 자세를 취했죠. 제가 저렇게 말하는 근거는, 예전에 시애틀 추장이 워싱턴의 백악관에 있는 '고위 추장', 즉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서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들의 터전을 돈으로 사겠다고 제안해온 백인들에게 장문의 답신을 보내, 원한다면 그리 하라고 했죠.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들을 먹여 살려준 대지를 잘 보존해달라고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했습니다.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찬 백인들을 훈계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대통령은 그 전언을 보고 그대로 잘 했을까요...? 수없는 자연 파괴 활동을 벌인 다음에야 자신들이 잘못한 게 무엇인 지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죠. 그것도 20세기 중후반에 가서요.
확실히 부족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터전으로 이주해온 백인들의 침략에 맞서 군사적으로 맞섰던 경우도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커스터 장군이 이끌던 백인 기병대를 인디언 부대가 전멸시킨 사건이 대표적이죠. 인디언들도 백인들만큼이나 호전적이고 투쟁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인디언들도 도끼와 활만 쓴 게 아니라, 백인들로부터 탈취한 총기도 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디언이 비록 호전적이었다고 해서 유럽인들의 끝없는 호기심이 결코 책임성 있는 행위는 아니겠지요. 무의미한 상호 학살이 없었어도 될 일을 자신들의 신대륙으로 건너옴으로 인해, 불필요한 전쟁을 통해 증오심과 복수심을 기르게 되었을 경우 그 전보다 상황이 나빠졌을 것이니까요. 그 이후에도 유럽인들은 서부로 진출하고, 하와이까지 가서 거의 무력 시위로 미국의 제 54번째 주로 만들었죠.
제국주의 열강들은 전부 자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을 뿐, 타 민족과 국가의 백성들이 가혹한 식민지 쟁탈전에 휩싸이게 해서 굉장한 선의의(?) 피해를 입혔음에도, 지금까지 일언반구 반성의 목소리가 없습니다. 보상도 당연히 없었고요.
한국만 하더라도 그 시절에 일제의 침략에 온 백성에 신음하고 있고, 지금도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이 그 점에 대해서 일본에 철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최근에 겨우 '고려해 봐야지 않겠느냐'는 반응이 나왔을 뿐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침략 행위는 당연히 자국의 미래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겠고, 밀려드는 서구 열강들 앞에서 자기들의 몫을 챙겨 살아남아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겠죠. 그 시절에 이룬 경제 성장과 발전 덕분에 그 나라는 지금도 세계에서 선진국 대열에 서 있고, 그에 반해 피해자 입장이었던 한국은 철저히 착취 당하고 난 다음에 쇠약해진 국력으로 뭐하나 제대로 못해보고 6.25 당해서 또 한번 나라가 내려 앉았습니다.
일본은 731부대의 생물학 실험으로 무수히 많은 의학 정보를 얻었고, 소련군이 진격해 올 때 일본으로 피신해서, 그 사람들은 후에 일본 의학계의 거성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헛소문이거나 음모론이면 지적 바랍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실험을 한 덕분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질병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해방되었겠죠. 하지만 그 덕분에 희생당한 조선인들이나 중국인들(개중에는 소수의 소련인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이 입은 정신적, 육체적 피해가 정당화 되거나, '인류의 발전과 번영과 생존을 위하여 어쩔 수 없다'거나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연 파괴에 관해서만 짧게 써 볼까 합니다.
얼마 전에 인류는 멸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글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인간이 발생시킨 환경 오염도 자연의 큰 범주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한 물질을 만들어내고 이것들이 생물들에 위협이 된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결국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아마 합리화되고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포장되었으리라는 것도 사실일 겁니다. 이번에 멕시코만에서 크게 터져 문제가 되는 원유 유출은 자연의 산물인 '원유'가 바다에 흘러들어 문제가 된 사건입니다. 이번에는 물론 인위적인 시추 작업에서 문제가 생기긴 했습니다만, 만약 지진이나 화산 등에 의해 이런 유전이 파괴되어 '유출'되었다면, 그렇게 발생한 환경 대재앙은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요? 인간이 그런 문제를 가속화시킬 수도 있고, 때로는 완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틀' 속에서의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환경 파괴를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저 역시 되도록이면 자연의 '원래 형태'를 보존할 수 있는 방향의 발전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과 자연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죠. 인간의 행동 역시 자연적인 것입니다.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죠.
발제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지만, 왠지 한 번 끼어들고 싶어져서 ^^;
혹시 이에 관련된 글이 길어지면 따로 발제글을 올리는 게 낫지 싶네요.
지구상의 인간이 다른 생물에 비해 너무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에는 저도 공감은 합니다. 하지만 적당한 선 이라는 값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문제를 인식 할 수는 있으나 해결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어찌되었든,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푸르른님의 글중에 '종교나 과학이나 검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라는 것에에 대한 반론 입니다.
과학적인 분야에도 검증되지 않거나 가설 정도에 그치는 것은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종교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것이, 과학적인 분야의 가설은 '현재는 이 이론이 가장 우세하나 검증 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변경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그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 입니다.
종교처럼 검증이 불가능 하지만 이것이 진리이다. 라는 것과는 성격이 다른 문제라고 생각 합니다.
시애틀 추장은 그런 편지를 쓴 적이 없습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1971년에 ABC TV극본용으로 쓴 조작이에요.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는 했습니다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그 시나리오 작가가 조작한 내용에선 자연을 보호해 달라고 했습니다만, 실제로는 이것과 비슷하게 썼습니다.
"But should we accept it, I here and now make this condition that we will not be denied the privilege without molestation of visiting at anytime the tombs of our ancestors, friends, and children."
"우리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우리 조상들과 친구들의 무덤을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는 특권을 인정해달라"고 말이죠.
물론 실제로 보낸 편지글 자체도 충분히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만, 여러가지로 다른 내용입니다.
여기서 확인하세요.
출처 : [영한대역]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by 새벽안개
* "중세의 기독교"라고 하면 대중적으로 자리잡은 '암흑의 시대'의 이미지가 너무 크기 때문인지 침묵과 공포의 神政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기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다양한 상상력과 호기심의 발로, 그리고 굳건한 신앙과 인간성 사이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노력은 늘상 존재해왔습니다. 적어도, 본격적이고도 절대적인 도그마 아래 다른 견해를 묵살하고 말살하는 종류의 행동은 특정한 시대, 시기를 중심으로 격화된 것에 불과하지 기독교 본래의 모습 따위는 절대로 아니지요.
*. 애초에 어떠한 신념체계라도 '맹신'을 요구하는 부분은 존재합니다. 예컨데, 근대적 사회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민주주의는 인권의 사상에서 출발했고, 만인이 평등하다는 인권의 개념은 사실, "神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에서 출발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이 모든 인간에게 그 자체로써의 권리를 부여했다"는 믿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기독교적 인식에서 출발했다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러한 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기실 오늘날 우리가 "이성적으로" 당연시하는 많은 개념과 관념의 근원적 정당성을 찾아들어갈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이 '신에 대한 믿음'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특정한 '그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컨데, '과학'은 세상의 모든 것이 뚜렷한 법칙에 따라 이루어져있다는 믿음 아래 존재하며, 애초에 이러한 과학은 (역시 대중적으로 왜곡된 이미지와는 달리) 기실, 근세의 모든 과학자들은 미혹과 미신의 그릇된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 '현실의 배후에 존재하는 진정한 신의 섭리를 밝혀내고 증명하는 것이 진정한 신자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또한 작은 아이러니 중 하나이지요.
자꾸 말이 새는데, 어쨌든, 기본적으로 과학은 만물이 합법칙적인 구조 아래 생성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이러한 제반 법칙을 꾸준히, 누차 발견해온 경험은 과학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가 됩니다. 문제는, 개인의 레벨에서 우리 대부분은 과학이라는 특정한 법칙 아래에 세상은 해석되고 증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믿을 뿐이지, 개인적으로 그 원리를 모두 이해하기 때문에 과학을 믿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믿음'의 소박한 특성 상, 이러한 과학에 대한 믿음은 종교인의 신에 대한 믿음과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없어요. 세상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방식 중 신학적 원리가 진실에 근접해있느냐, 아니면 과학적 원리가 진실에 근접해있느냐와는 전혀 무관한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신념에 따라 어느 쪽을 믿을지, 혹은 어느 쪽을 더 무겁게 여길지를 미리 선택한 이후에 그것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논리와 이성을 체택한다는 것이에요.
즉, 논리와 이성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믿음이나 신앙과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서로 비교 자체가 적절하지 않은 전혀 다른 것들이에요. 신앙이니, 과학이니, 민주주의니, 절대주의니 기타등등 여러가지 근원적 신념이 목적이라면 논리와 이성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논리와 이성은 그 자체가 (대중적으로) '비논리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신앙이니 마법이니 주술이니와 비교되었을 때 자동적으로 우월성을 획득하는게 아니라는거죠.
따라서,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 할 수 없는 이상,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 방식을 체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이 종교에 비해 논리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아쉽게도) 되지는 못합니다. 애초에 논리는 "이치를 논하는 것이고", 그러한 이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어떠어떠한 이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이치에 합당(합리)하고 어느 것은 그렇지 않다(불합리)]는 기초적인 전제가 필요해요. 그 전제가 달라지면 논리와 이성 그 자체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 기본적인 전제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그들이 비논리적으로 비춰지는 것 뿐이지요.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누구의 전제가 옳은가 틀린가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정치와 종교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다 정답입니다. 따라서 입씨름해 봐야 소용 없습니다. 만인이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가지고 있을 수 있죠.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떤 의견을 갖던 그건 자유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의견과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옳은 데 왜 동의하지 않느냐 - 동의 안하면 너는 악(惡)이다.... 이렇게 몰고 가면 바로 폭력이 되는 것이죠. 종교의 폭력성,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은 '신념'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더더욱 강하게 남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념'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많고, 그 과정에서 폭력성을 띄게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신념'이 멋져 보일런지는 몰라도 자칫하면 폭력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장 자크 아노의 <불을 찾아서>는 J. H. 로스니(J. H. Rosny)의 선사 시대 SF 시리즈 중 하나를 원작 소설이 쓰여진 지 100 여년 만에 영화화한 것이었죠. 선사 시대에 불씨 하나를 구하기 위한 눈물겨운 모험담이 엄청납니다. 다만 오래 전에 나온 영화여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더군요.
호기심에 종교가 '설명'을 해주었긴 한데, 문제는 이게 올바른 설명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설명은 시대가 흐를수록 바뀌기 마련인데, 기존 권위가 워낙 크다보니 이걸 바꾸지 않으려는 게 문제….
종교계의 최고봉에 있을 정도로 똑똑하고 어마어마한 시스템을 거느리는 사람이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해 본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힘드네요. 오히려 가장 신의 존재가 없다고 명확하게 아는 논리적인 두뇌의 소유자야 겠죠.
다만 신의 존재에 맹목적인 저레벨의 추종자들에게 호기심이 없는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절대로 리더가 될정도로 똑똑하지 않은)
논리적이면 자동적으로 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고, 비논리적이고 맹목적적이면 신을 따르게 된다는 생각이야말로 지극히 비논리적이에요. 혹시 위에 제가 쓴 내용을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논리는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결론을 내포하고 있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전제에서 출발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로 그 '결론'이 달라집니다.
애초에 다른 '전제들'에서 출발하는 신념체계 사이의 우열은 '논리'로 가려지지 않는다는거죠.
역설적이만, 도킨스가 제시한 '밈'의 원리는 도킨스 그 스스로가 '주장하는 내용'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거죠.
결국 모든 것은 '지식'인 셈이죠. 과학은 올바른 지식을 얻는 가장 유용한 도구일 뿐이구요.(물론 도구를 잘못 사용하면 잘못된 지식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를 검증함으로서 해결해나가고 있지요.)
과학이 중요한 것은 그것은 기존의 어떤 체계도 이루어내지 못한 '폭발적인' 지식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종교와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대립'이 아니고 그냥 기존 종교의 '저항'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인간에게서 종교가 소멸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질 수 없는 절대 지식을 습득하는 날이 오지 않는 한, 언제나 미지의 것이 남아 있다면 종교는 어떠한 모습이든 생존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온갖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이언톨로지'와 같은 과학에서 출발한 기이한 종교도 있지요. 물론 이 종교도 '별나라'에 헤메는 느낌입니다만...
어느날 우주의 절대지식 '42교'가 정립된다면 모두 평정되리라 봅니다.^^
종교인에게 호기심이 없다고 하시는 건 너무 극단적인 편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의 예로 드시는 일화는 여러 가지 종류의 종교인 중 하나를 드러낼 뿐이고, 사실 종교인들도 비종교인만큼이나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죠. 그 증거가 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종파들, 교파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다름을 떠나서, 소위 '정통'과 '비정통(=이단)'을 통틀어서 개성 넘치는 교리로 대중을 품었던 종교들이
많습니다. 위의 예에서 드러나는 종교인은 "무조건 믿쓥니다" 식 교리를 내세우지만, 어떤 종교는 치밀한 논리와 설득력을 가진
교리로 다가가기도 합니다. 때문에 종교인들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호기심과 사고력, 비판 의식이 결여된 우매한 인간' 정도로 몰아가시면 안됩니다. 종교인들도, 비 종교인들만큼이나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극히 감성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이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극히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논리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인간도 있죠. 종교도 '발전했습니다.'
또 이런 얘기에 약방의 감초처럼 떠오르는 중세 기독교 유럽을 떠올려 보면...
유럽 대륙을 장악한 중세인들이 국가와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 퍼져들어갔을 때의 사회를 상상해보십시오. 중세 기독교 제국은 기독교적 사고력, 상상력으로 가득찬 문명입니다. 그들은 신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뜻을 헤아려 철저히 자기를 복종시켜 살아가는 데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 시대의 독특한 철학이 반영된 수많은 업적들과 유산들을, 우리는 유명한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호기심을 잃어버리고 비판을 할 줄 몰랐던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래서 저열하고 비겁한 권력 싸움-종교 권력과 비종교 권력 간의-으로 물든 무가치한 기억이기만 했을까요?
현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기준은 '인간이 자기 이외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갖는냐, 아니면 인간 자신에게 더 관심을 갖느냐'라고 생각합니다.(이미 그 현상은 르네상스와 근대에 이미 시작되었지만)
위의 일화에서는 종교인에게만 책임을 묻고 있지만, 실상 문제는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사회의 특정 집단이 지배 권력을 잡고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시작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부분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풀기 위해 스스로 무진 애를 써서 답을 알게된 사람들이 세상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인간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되었나...하는 점입니다.
맞습니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 진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본래의 호기심을 좀 더 발휘하기가 쉬워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면에서 '정신적으로' 더 자유로워 졌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과학적 탐구 정신'은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덕분에 예전에는 생각도 못하고 상상하지 못한 수많은 도구들이 생겼습니다. 진귀하고 신기한 기능을 하는 기계들이죠. 로봇, 인터넷, 인공위성, 로켓, 우주선 등등... 생존을 도와주는 것들.
하지만 애써 들쑤시지 않아도 될 일을 구태여 일을 크게 벌여서 상황을 이전보다 더 악화시킨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물건들이 필요한 것일까요...?
평화롭게 잘 살던 터전에 삽질을 하고 드릴질을 하거나,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고, 불도저로 숲을 밀음으로써, 깊은 해저에 시추공을 박아 넣음으로써, 예전의 안정성을 유지했던 자연의 질서는 붕괴되고 그 안에 사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생존의 위협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없던 위기를 만들어내서, 결과적으로 그 위기라는 이름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다른 수단을 더 강구해 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에도 호기심은 제 역할을 해내겠죠. 언젠가는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때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낼 겁니다. 하지만 끝없는 위기-해결-위기-해결....의 무한 순환 고리에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얼마나 피곤한 일일까요?
아메리카의 인디언들 얘기를 해보죠.
그들에게 서양인들이 들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과학적 탐구 정신'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대지와 자연이 자신들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걸 파헤쳐서 뭔가를 알아내려고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감히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모든 것을 품는 어머니이며
우리 인간은 그의 일부로서 살아가야한다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가르침을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욕심이나 투쟁으로 얼룩지지도 않았고, 서로 어울려서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체득하고 있었던 위대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서양인들은 인디언들을 미개한 족속이라고 경멸했겠지만, 오히려 인디언들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무지한 건
서양인들이었겠죠.
나중에 개척민들은 인디언들을 그들의 원래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고, 학살하고, 착취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인류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 유산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신대륙을 자신들의 소유물로 만들어 버렸죠.
결과적으로 그때까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던 아메리카 대륙의 풍요로운 대지는 서양인들이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인디언들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훌륭한 전통들을 지금의 인류는 어떻게 복구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끓어 오르는 호기심을 만족시켰을 때, 분명히 '어떤 종류의 사람'의 마음 속은 해갈을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우리는 이제 분명히 압니다.
자신이 수행한 탐구적 행위의 대가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깨닫게 된 것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극히 최근에 일어난 각성이었습니다. 과학적 탐구 정신으로 충만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업적을 두고 분명 자랑스러워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그리고 지금도)
지식을 한없이 쌓아올려서, 스스로를 낡은 구습과 미신으로부터, 그리고 불합리한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서
갑자기 예전에는 없었던 '자유'를 마음껏 만끽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축적한 힘을 타자를 파괴하고
정복하고 억압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침략해서 식민지화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망각할 수 없는 역사의 한 단면이고, 교훈입니다.
호기심에 대해서 균형잡힌 생각을 갖자는 차원에서 졸글을 한 번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