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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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슬이 님의 글이 거의 논란 글이 되어버렸기에 새로 씁니다. 왠만하면 성경을 가진 사람만 보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확인가능하거든요.
저는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했고 동시에 기독교동아리, 교회를 다니면서 이런 문제에 자주 부딪힌 사람이기도 하죠.
진화론을 부정하자니 내가 배우는 생화학이란 학문이 설 자리가 없고 그렇다고 긍정하자니 교회다니면서 할 말이 아닙니다.
이런 곤란 중에 성서를 보았는데 알게 된 점이 있습니다.
한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진화론은 어느정도 과학적인 토대 위에 세워진 이론이나 창조론은 그 토대가 되는
성서에서 따온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물론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부정한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방법이 문제죠)
왜 그런지는 끝까지 봐주셨으면 합니다.
근현대까지만 해도 우리가 익히 아는 창조론은 부정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죠. 그러나 현재는 극히 보수적인 사람외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성서에 대한 부족한 이해로 나온 산물로서 성서와 일치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술 더 뜨는 지적설계론같은 창조이론이 나와 버렸죠. 그러나 이것이 성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냐?
말하자면 심각하게 변질된 내용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창조이론은 점차적으로 성서와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죠.
이런 사례는 지적해 주신대로 중세의 평평한 지구이론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서와 무관하지는 않으나 잘못해석된 예라고
보시면 좋습니다. 성경구절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 구절을 중세관념으로 해석한 것이 땅끝이 진짜 존재하는 줄로 오해한 세계관입니다.
문제는 둥근 지구 사진을 찍어 보여주기까지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면 논점을 벗어난 해석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중세기에는 1000년 이상 믿었을 수 있지만요.
이렇게 보면 창조론도 그 토대인 성서에서 심하게 왜곡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성서를 왜 기록했을까? 의문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신이 세상을 창조한 방식을 반드시 성서에 기록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죠. 성서란 건 당시에 창조주를 믿는 이스라엘 민족들 외에는
볼 수 없는 책이니까요. 그리고 정말 순수하게 성경구절을 본 사람이라면 구절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창조론 역시 그 많은 해석 중 하나이지만 오류가 있음에도 다수가 믿어서 깨지지 않는 오류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죠.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아직도 머리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서를 펴 확인해보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창조의 레시피는 창세기1장에 나와 있는 구절들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해석이 있다면 한가지겠죠.
찾아보면 신이 어떤 빛을 만들어 어디에 비췄는지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머지 창조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고린도후서4:6 - 공교롭게도 당대 지식인인 사도바울의 서신이고 그 밑 각주에 인용구절이 선명하게 적혀있는데 창세기1:3이더군요.
결론적으로 창세기의 창조는 이런 물질세상의 창조를 말한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개 있으나 너무 길어질 듯 하군요.
어떻게보면 창조론 자체는 2000년 전에 오류가 지적될 수 있는 이론입니다만 지금까지 온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빅뱅 이"전" 은 불가능한 표현이란 말씀을 해주셨네요. (시간이 없다면 전후 개념이 없는 것)
확실히 빅뱅이론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분야입니다.
(시간이 없는 세계, 빅뱅이전에는 세계라는 개념조차 없겠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無"는 아닌 상태)
그런 상태를 상상해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고보니 빅뱅과 관련된 연구 중 많은 부분이 빅행 이후 몇 초( 당연이 단위는 초가 아니라 훨씬 작겠죠)
의 상황을 예측하는 방식이더군요. 마치 lim (t→0) 이런 느낌입니다.
lim (t→0) = 0 이라면 빅뱅이론을 완성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직 못하고 있고, 앞으로 가능할지도 의문입니다.
제가 그 부분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과학은 완벽하지 않다" 는 뜻이었답니다.
동시에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의학(서양의학이든 동양의학이든)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실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의학은 임상실험을 매우 오랫동안 해온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즉 내포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통계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높은 방법이라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사람 몸이라는게 수식처럼 같은 값 입력하면 같은 결과가 출력되지 않다보니,
한의학 같이 수 많은 오차실험을 해 본 경험적 지식을 무시못하는 것이겠지요.
"침" 같은 경우는 현대의학에서도 많이 쓰인다고 들었습니다.
빅뱅이론은 폐기된지 오래입니다. 인플레이션 이론으로 확정되었으며 현재 연구중인 영역은 왜 초기 우주가 그토록 엔트로피가 낮았는가를 찾고 있습니다. 같이 연구되고 있는 부분이 M-brain이론 따위죠.
빅뱅 이전을 상상하는 것은 그냥 소설의 소재정도로서만, 혹은 어떠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용도로만 만족하시길 바랍니다. 이미 현대물리학은 일반인이 그 발자국을 그대로 짚어가는 것 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도로 복잡해졌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상상은 현대물리학에 대한 오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의학이 경험적으로 어느정도의 진리값을 가진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만, 그 진리값이 의학보다 크다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방법론의 한계의 측면이기 때문에 한의학이 지금의 수단을 지속하는 한 절대로 현대의학과 비슷한 수준도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침의 경우 현대의학에서는 보조치료수단으로서 사용될 뿐입니다. 예를 들면 몸이 안 좋을 때 먹는 홍삼액기스. 이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과학이 완벽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을 종교의 일종으로서 파악하는 오류입니다. 과학은 방법입니다. 아무리 봐도 Kerberos C.님은 과학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회의주의자의 사전을 추천합니다.
빅뱅 이론은 폐기된 일이 없습니다. 인플레이션 이론이 빅뱅 이론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은 맞지만, 빅뱅 이론이 사라지고 인플레이션 이론으로 바뀐 것은 아닙니다. 인플레이션 이론은 빅뱅 이론의 업그레이드 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빅뱅 이론의 기본은 우주가 한 점에서 시작되어 급격하게 팽창하여 현재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빅뱅 이론으로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은하가 고르게 분포되었다거나 기타 여러가지 요인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팽창 과정에서 인플레이션 이론이라는 것이 추가되었습니다. (다만, 인플레이션 이론은 아직 완벽한 이론은 아닙니다.)
과학은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항상 완벽으로 나아가는 학문이라 생각합니다. 종교가 아니므로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추가되면서 현실의 우주에 가까워져 갑니다.
빅뱅 이론 -> 인플레이션 이론...은 그러한 사례 중 하나일 것입니다. 훗날 새로운 발견과 함께 인플레이션 이론이 좀 더 업그레이드되어 버스트 어택(^^) 이론이니 뭐니 하는게 나올 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빅뱅 이론이나 인플레이션 이론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중심 이론은 이미 수많은 증거에 의해 입증되고 있으니까요.
'과학은 완벽하지 않다' 라고 하는 것에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과학도 완벽하지 않다'가 좀 더 부드러운 표현 같습니다.
많은 경우의 학문은 정/반/합의 변증법을 토대로 발전해 왔다고들 합니다.
200년전에 맞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도 맞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종교 역시 비슷한 논리로 발전해 오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어떤 종교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의 교리를 완벽하지만 해석은 사람이 하기 때문에 틀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 또한 어떠한 현상을 잘 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로 잘 모른다고 매도하지 않는다면 공존하면서 발전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전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을거라고 막연히 믿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만
기독교의 성서는 신이 직접 적은게 아니라 인간이 대신 적은것이고 문자 역시 인간이 만들고 다듬어지고 변형된 기록방법인데
왜 그토록 성서에 집착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글이라는 것은 절대로 사물을 100% 정확히 전달할수 없다고 봅니다. 그 글을 기록한 인간의 제한된 감각기관 역시 100% 신뢰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신의 의도를 전부 이해할수 없으니 모든것을 맡긴다고 하는건가요?
카톨릭성서,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쉬운성경, 공동번역성서와 기타 4권의 영어성서를 바탕으로
'고린도후서4:6 - 공교롭게도 당대 지식인인 사도바울의 서신이고 그 밑 각주에 인용구절이 선명하게 적혀있는데 창세기1:3이더군요.
결론적으로 창세기의 창조는 이런 물질세상의 창조를 말한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몇마디 올려봅니다.
창세기 1:3은 신이 빛을 만들어 세상을 비춘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6은 창세기 1:3에서 나오는 빛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빛을 비춘다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서 오해하신 것은 창세기 1:3에서 나오는 빛과 고린도후서 4:6에서 나오는 빛을 동일한 빛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3에서 나오는 빛은 태양과 같은 항성에서 나오는 물리적인 빛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6에서 나오는 빛은 물리적인 빛이 아닌 깨달음이나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사도 바울로가 써낸 저서에 있는 영지주의적 견해와 표현에 오해하신 것 같네요.
사실상 물질적인 빛으로보면 성경 자체내의 오류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1:3에 빛의 창조가 나오고 이건 최초의 창조입니다. 그런데 창세기1:2을 보시면 최초의 창조 전에 땅도 있고 물도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창조 전에 있는 창세기1:2의 사건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창조로 보기에 어려운 것이죠.
창세기 2:4에는 창조된 대략이라고 하면서 땅에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먼저 만드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에덴동산을 만들죠. 그리고 거기에 나무가 나게 합니다. 희한하게도 창세기1장의 기록과 반대의 순서인데도 창조의 대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창조로는 절대 설명이 불가능하고 모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먼저 아무 초목도 없던 땅과 거기서 나는 안개는 창세기1:2의 땅과 물에 매치가 됩니다. 바로 나오는 사람의 창조는 빛의 창조와 순서상 매치가 되죠. 그런데 빛의 창조와 사람의 창조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는가? 즉, 고후4:6에 예수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본다면 창세기의 창조사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보이는 것이죠.
그러므로 창세기1:3 이후의 둘째 창조부터 마지막창조까지의 사건이 예수가 오고나서 일어나는 변화로 볼 수 있다는 거죠. 창세기2장의 최초의 창조가 사람의 창조였던 것도 바울이 아담을 오실자의 표상이라 말했던 구절이 있죠. 전부 매치가 되는 말입니다. 구약의 내용이 예수에 관한 것이니 그점에서도 오류가 없죠. 애써 오류를 덮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영지주의도 아니고 언약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입니다.
신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여호와는 사이비 신입니다. 성경이 그의 성서라면 말이죠.
우주의 경이로움을 아는 과학자라면 감히 신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신이 있다고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런데 기독교로 통일된 서구에서는 신=여호와의 등식을 가지므로 신이 있으면 여호와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동양적인 사상에서는 좀 더 자유롭죠. 심지어는 신적인 존재(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니까요.
창조주가 곧 여호와라는 등식에 얽매이지만 않는다면 훨씬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과학은 애시당초 구성의 원리가 되는 코드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프로그래밍 언어를 달리 쓴 프로그램이라고나 할까요...
적절한 비유가 될 지는 모르지만, 영어로 쓰여진 문학 작품과 한국어로 쓰여진 작품이 서로를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극도의 이질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영어와 한국어는 일단 생김새도 다르지만, 강세나 인토네이션, 조어법, 문법에 이르기까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과 감정 생각의 단편들을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차이점은 "화법"과 "해법"의 차이일 뿐이지, 이 점만 제외하고는 사실상 평등한 관계입니다. 똑같은 현상과 사건을 두고 어떻게 접근할까의 차이를 두고 종교와 과학 간의 우열관계, 서열 관계를 논하려는 건 그다지 생산성 있는 활동이라고 보이지 않는군요.
그리고 종교와 도덕성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일반적으로 인류 역사는 종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미개했던 유인원이 고도의 지능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종교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확립한 각종 종교 교리는 일상 생활의 규범처럼 자리잡게 됩니다. 매일의 일거수 일투족에 딱히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행동 원칙이 없던 인간에게 "도덕성"을 부여한 건 누구의 덕택이었을까요? 함부로 동물을 살생하지 말라던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든가, 악인에게는 벌을 줘야 마땅하다든가 하는 관점 제시는 누가 먼저 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를 도덕적 존재라고 규정짓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대부분 종교에서 이미 먼저 제시된 것들입니다. 그전까지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아무데서나 자고, 맘에 안드는 놈 있으면 돌도끼로 때려죽이고, 성행위를 하고 싶을 때 아무나 붙잡아 하룻밤을 보내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문명 문명하지만... 모든 문명의 초기 단계에는 종교가 그 문명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교화시키고 성숙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문명하면 보통은 "이성이 극도로 발달한 단계"를 떠올리기 쉽지만, 모든 문명의 출발점은 종교였습니다. 오히려 이성의 시대는 훨씬 더 나중에 도래했습니다. 인간이 극도로 불안정하고 빈약한 정신을 지니고 있으면서, 다른 동물에 비해 높은 지능을 감당하지 못해 정착지로 선택한 게 종교입니다. 그게 현대 사회의 지식인의 첨병이라고 불리우는 과학자들조차도 종교를 받아들이고 신앙인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종교 없는 삶은... 아직까지는 희망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무교인으로서 충분히 살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딱히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더라도 유사시 어떤 종교라도 받아들이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수님은 젊은 시절에는 철저한 무신론자, 자유주의자였다가 몇 년전에 소위 '회개'를 하고 기독교인이 되신 분입니다. 딱히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가 무신론보다는 우월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애시당초 인간이라는 동물이 종교 없이도 살 수도 있다면 왜 무신론자가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지적 모험을 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종교적인 본능을 가진 동물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과학적인 본능도 가지고 있지요.
심리검사를 해 보면 남들보다 종교적 감수성이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도 있어요.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좀처럼 해도 그런 종교적 몰입이 불가능한 사람도 있죠.
전자라면 아무리 사소한 일, 개가 똥을 싸는 것조차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후자라면 절대 그럴 일이 없죠.
기독교인이 되는 건 지적 모험도 아니고 그냥 취하는 종교적 입장의 변화일 뿐입니다
몇 년 뒤에 그 분이 다시 '에라이 이런 썩을' 하면서 종교를 버리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때가서 그 분의 사례를 종교란 무의미하다는 증거로 써야 할까요?
그럴 필욘 없습니다. 사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종교가 완전무결하다거나 인간에게서 종교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무엇보다 오늘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성격을 냉철한 관점으로 다시 한번 되짚어 본다면
과연 그 종교라는 것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보이지 않을까 싶네요.
과연 이것은 인간의 영적 본능을 채워주는 사회적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종교가 타락하고 속세에 찌들어서 영적 고양감을 돈을 받고 파는 것이나 다름 없는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그 속에 순수한 의지가 몇 보인다고 해서 타락하고 부패한 전체의 조직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늘날 구조화된 거대종교들 중에 부패하고 타락하지 않은 곳이 한군데라도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종교가 우리 사회와 문명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에 보이는 합리성을 종교의 이름으로 무시한다든가
종교의 이름이 서로를 미워하고 상처주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 종교의 효용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종교와 과학이 충돌하는건
충돌시키는 자들이 '서양인'들 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인들의 사고 방식은 동양인들과 사뭇 다른데..
기독교와 현대과학의 사상은 거의 대부분 서양 철학=서양의 사고방식으로 체계가 잡혀왔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동양인들과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은 차이가 큽니다.
서양인들은 보려 하고 동양인들은 되려 한다는 말이 있죠.
현재에도 같은 대상을 놓고도 대답하는 방향이 서양과 동양이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동양적 사상과 서양적 사상의 차이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써
회화에서 서양의 투시법과 동양의 역투시법이 있습니다.
보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투시법
사물이 중심이 되는 역투시법.
동양과 서양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란히 늘어서 있는 사물들 보고 어느쪽이 앞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자기 한테서 가장 먼쪽이 앞쪽이라고 답하고 대부분의 동양인들은 자기한테서 가장 가까운 쪽이 앞이라고 답하죠.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동양.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는 서양.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도 서양은 일단 더 이상 나누어 질 수 없는 자신=INDIVIDUAL을 정의 한 후
관찰과 분석을 통해 이해하려고 하죠.
그래서 서양의 학문들은.. 대부분 잘게잘게 나눔으로써 발전을 해 왔습니다.
원자라는 개념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떠오른거죠.
말 많은 사람을 배척하는 동양과는 달리 서양은 말하기 능력을 중요시 하죠.
그들은 습관적으로 토론을 통해 서로=잘개 나누어진 개인간의 정의를 '충돌' 시켜 진리를 얻어 내려고 합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성서는 더 이상의 충돌을 용납하지 않는..
인간=서양인 들의 이성을 뛰어 넘는 진리=수정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라고 여겨졌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성서가 아니니까..)
따라서 끊임 없이 충돌과 충돌을 거듭해 발전해온 과학=서양의 사고방식으로 발전된 학문 중 생물학에서 성서와 충돌하는 내용이 나오자
마치 움직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것 처럼 수백년간 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과학이라는 카테고리에서는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금새 한쪽으로 기울게 되지만..
이놈의 성서는 그렇지 않다는것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