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라이터 (창작 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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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나는 역사서를 편찬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탑의 나선형 층대는 양피지와 죽편으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지만 사서와 고명한 저술가들은
그 난잡함이 자신들의 작업에 불가결한 요소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탁자에 놓인 종이뭉치를 밀어내고 남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 한번 이야기를 들어보세.
그는 남루한 차림의 병사였다.
진실이란 걸 정말 알고싶으십니까? 글쓰는 분에게 그게 저주라는 거 알고는 계시겠죠?
굳이 얼굴을 뒤덮은 흉터가 아니더라도 하얗게 센 머리와 깊은 주름 때문에 남자의 인상은 범상치 않았다.
굳이 얼굴을 뒤덮은 흉터가 아니더라도 하얗게 센 머리와 깊은 주름 때문에 남자의 인상은 범상치 않았다.
질그릇 깨지는 듯한 목소리에 때로 이빨빠진 입에서 침이 튀어 나오기도 했다.
나는 집중하기 위해 커피를 한잔 더 시켜야 했다.
남자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허공을 쳐다보다가 불쑥 말을 시작했다.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쩌다 보면 축복받은 아이가 태어나곤 하죠. 네. 그 녀석 축복받은 아이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신들의 은총을 듬뿍 받게 됐는지 설명하자면 깁니다. 근데 얘기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군요. 그 애가 한 살이 되던 날 그 애 부모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주 비참한 죽음이었다고 그러더군요. 보통은 저주를 퍼붓거나 남의 탓을 하지 않습니까? 억울하게 당할 때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안 그랬습니다. 평생 덕을 쌓았지요. 그리고 죽을 때도 참 고결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거죠. 마무리 말입니다. 믿으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신들도 감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내려보내는 것이죠. 요람에 누워있던 그 애는 우는 대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살인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아무도 그 아이를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야기 했죠? 이 아이는 제마의 은총을 받았다고. 천사가 내려와서 신의 은총을 선물했거든요. 마물들도 난폭한 짐승도 사악한 기운을 가진 것은 그 어느 것도 이 아이를 침범할 수 없었습니다. 해치기는 커녕 그 녀석 눈빛만으로도 어둠이 수그러들 정도였습니다.
음, 필시 대단한 영웅이 될 운명을 타고난 거로군.
예. 장군이 되었다면 제국을 위험에서 구해내고도 남을 그런 영웅이 됐겠죠.
그런데 그러지 못했고?
바로 그렇습니다. 그 아이의 눈빛은 무서웠습니다. 아니 사람들이 무서워했습니다. 자기들의 간악한 부분이 그 애 눈에 거울처럼 비치는 걸 보았던 게 틀림없습니다. 유모는 그 아이를 주막에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 애 부모가 베푼 은혜는 벌써 다 잊어버렸던 겁니다. 주막 주인은 그 애가 울 때마다 뺨을 때렸다더군요. 결국 장로들은 그 아이를 영주에게 데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영주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대체 언제쯤 벌어진 이야기인가?
서른해 전입니다. 더하고 덜하고 할것 없이 꼭 삼십 해 전이죠. 그 마물들과 제국이 무섭게 전쟁을 벌이던 바로 그 시절이지요.
그렇군. 계속해보게.
아. 그 영주 말입니다. 비겁한 자입니다. 뭘 보면 알 수 있냐면, 그 아기의 처우에 관해서 내린 결정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죠. 그 부모가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통에 토호들이 거진 그랬지만, 영주는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채권이 아이에게 상속되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를 죽이면 빚은 모두 탕감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영주는 믿을만한 부하를 불렀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아이를 죽여서 숲속에 버리라고 그러더군요.
남자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뭔가를 회상하듯 눈을 감고 우물거렸다.
나는 그가 다시 말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 아이는 제마의 축복을 타고났습니다. 사악한 것은 그를 해칠 수 없습니다. 제가 가슴에 품은 사악한 기운은 그 애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단숨에 날아갔습죠. 저는 도저히 해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저는 그 아이를 할수 있는 한 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숲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마물들이 나타나기 전에 아이를 버렸습니다.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땅거미가 내리는데 마물들의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그 기묘한 신음과 욕지기과 비명같은 그 소리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악마의 소굴에 떨어진 그 애는 신의 은총을 받은 아이입니다. 그 어떤 괴물들도 아이의 털끝하나 건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그의 입을 쳐다보며 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제국의 역사와 연결되는지에 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가 다음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전혀 그 내용을 예상할 수 없었다.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마물들의 왕이 된 건 그래서였습니다.
잠깐, 지금 이 얘기가 제국의 절반을 불태운 그 마왕에 대한 건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강한 마물도 그 아이에겐 당해낼 수 없습니다. 마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는 무적입니다. 마물의 왕이 된 건 당연합니다. 좀 흥미가 동하십니까?
아무도 그 마왕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마물들과 인간 사이에는 교류가 없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진기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걸 내가 사서에 적을 수 있을까?
식어버린 커피잔을 잡은 나는 그 맛이 엄청나게 쓰리란 걸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