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양 국가의 공전기인, 제국군의 발퀴레와 동맹군의 스파르타니언은, 공중전 기동에 완전히 다른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제국군 발퀴레가 부스터와 엔진의 직접적 이동으로 움직이는 데 반해, 스파르타니언은 다방향 부스터를 장착하고 기총을 전방위 튜렛화 함으로서 발퀴레에 밀리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보완했다. 또한 발퀴레의 하이퍼 바주카에 대항하여, 대함용 미사일을 갖추고 있다. (자료 제공:Brain13님)

다양한 변형기를 갖고 있는 발큐레와는 달리 생산력이 떨어지는 동맹의 스파르타니언은, 연도에 따른 것 외에는 변화가 거의 없다.
그렇기에, 각 함의 파일럿들은 배속된 신인에 대해서, "알겠나,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것은 '스파르타니언인가, 그렇지 않은가?'인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한계에 불구하고 스파르타니언은 우수한 격추왕들과 함께했다고 전해진다.  

<<함명의 유래>>

고대 그리스의 유력한 폴리스의 하나. 스파르타니언은 이 폴리스의 시민을 말한다.

‘라케다이몬’이라고도 불린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이 두 명칭이 구별 없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전시대에는 ‘라케다이몬’은 도시국가의 정식 명칭으로, '스파르타'는 중심도시의 명칭으로 구별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도시국가를 일반적으로 스파르타라고 부른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반도 남부의 타유게토스와 파르논산 사이의 유로타스강 하곡에 위치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의 도편(陶片)이 출토되었다. 또 에우로타스 하류에 아뮈크라이라는 옛 주거지가 있으며, 그 남쪽에 황금잔[黃金杯]이 출토된 바퓌오의 벌집형 분묘가 발견되었다. 이 점으로 미루어 스파르타는 미케네 시대에 이미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BC 1200년경 남하해 온 도리아인이 선주민을 정복하고, 그들을 헬로트(helots:國有奴隷)로 만들어 폴리스를 세웠다.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 중에서 특히 영역이 광대하고 비옥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였다.

스파르타에는 정복자인 자유민 스파르타인과 피정복자인 헬로트 외에 반(半)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가 있었다. 스파르타는 2회에 걸친 메세니아전쟁(제1차는 BC 736∼BC 720 또는 BC 725∼BC 705?, 제2차는 BC 685∼BC 668 또는 BC 640∼BC 620?) 후 메세니아를 병합하고, 그 주민을 헬로트로 만들었다. 이 전쟁을 통하여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토지를 잃는 자가 증가하였다. 그래서 사회적 위기에 빠지자 토지의 재분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설적 인물인 리쿠르고스가 이 토지의 재분배를 단행한 동시에,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여러 개혁을 실시하여, ‘리쿠르고스 제도’라고 불리는 특이한 국가제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유시민 전원의 민회(民會)는 28명으로 이루어진 원로회(元老會)와 5명의 민선장관(民選長官)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토지를 헬로트에게 경작시켜서 수확의 절반을 징수하고, 자신은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남자는 집단생활을 하면서 군사훈련과 육체단련에만 열중하였다. 엄격한 병영적(兵營的)인 청년교육은 ‘스파르타 교육’으로 유명하지만, 여성의 체육도 장려하였다. 그것은 튼튼한 아이를 낳기 위한 우생학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남자의 외정(外征) 중 시민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헬로트의 반란을 여자만으로도 억제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스파르타 여성의 지위를 높여 주었다.

리쿠르고스는 경제적으로 쇄국책(鎖國策)을 채택하였고, 금은화(金銀貨)의 주조·유통을 금지하고 철화(鐵貨)의 유통만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 공동식사제도 등도 정하여 시민 사이에는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졌다. 스파르타는 일반적으로 과두정(寡頭政) 또는 귀족정의 폴리스라 하여, 아테네의 민주정과 대조적인 국가제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파르타 시민은 귀족적인 기사가 아니라 중장보병(重裝步兵)이며, 중장보병 시민의 민주정이 가장 잘 실현된 폴리스다. 그러나 참정권(參政權)이 없는 페리오이코이와 헬로트가 다수 존재하였으므로, 특권적인 스파르타 시민은 귀족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정체(政體)는 과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파르타의 역사로는, 일찌기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동맹을 결성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여러 폴리스를 지배하였다 전해진다. 그러나 특징 있게 발달해 온 문화는 강병 일변도의 국책 때문에 발전이 정지되었다. 그리스 제일의 강국이 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전쟁에서 그리스군을 총지휘하였다. 그러나 전후에는 파우사니아스의 실정과 BC 464년의 대지진, 헬로트의 대반란 등으로 그리스의 패권이 아테네로 넘어갔다.

BC 404년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승리로 다시 전(全)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강압적인 지배는 여러 폴리스의 반감을 사서 코린토스전쟁으로 곤경에 처했다. 또 지배하에 있는 폴리스로부터 금은화가 유입되는 등 점차 쇄국책이 무너져 리쿠르고스제도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BC 369년 에파메이논다스의 침입을 받은 후 쇠퇴하였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 중에서 예외적으로 원시적인 왕정을 오랫동안 지속하였고, 또 2개의 왕가가 항상 병존하는 특이한 정체를 채택하였다. 또 BC 3세기경에는 토지와 부가 소수인, 그것도 대부분 여성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BC 3세기 말 아기스 4세와 클레오메네스 3세(재위 BC 227∼BC 220)는, 부의 편재를 시정하기 위하여 부채의 정리와 토지의 재분배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였고, BC 146년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396년 알라리크의 약탈로 폐허화되었고, 9세기에는 슬라브인의 침략을 받았다. 그리스 독립 후 최초의 왕인 오토 1세 때 근대 도시로 재건되었다. 현재 에브로타스강(江) 연안 라코니아주(州)의 주도다. 감귤류·올리브유 등을 거래하는 상공업 중심지로, 이티온까지 도로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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