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라이터 (창작 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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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한 냄새가 차가운 밤공기와 뒤섞여 달려든다. 별 빛 아래에 서 있던 카카오타이의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언제나 맡아 오던 익숙한 냄새였지만, 그는 매번 처음 맡아 보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진저리를 쳤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는 냄새였다. 그가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기 때문은 신에게 맹세코 절대 아니었다. 지금은 우스운 꼴로 전락했지만, 한 때는 그도 전사였다. 그렇다. 한 때는 그도 분명 전사였고, 지금처럼 지독하게 역한 냄새를 맡을 필요도 없었다. 아니, 그는 지금 자신이 이 거름 밭에 빠진 것보다도 못한 운명에 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한 바가 없었다.
계속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는 지금과 같은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는 전장에서 생을 마감하리라 기대했었다. 적들의 손에 사로 잡혔을 때만 해도, 카카오타이는 이제 지상에서의 의무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했다. 적어도, 바로 앞의 동료들 머리가 서로 경쟁 하듯이 하늘 높이 치솟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운명은 지상에서 끝나는 것이었다.
<<내 잘린 목은 얼마나 높이 솟을까? 태양의 신 근처까지 가면 순식간에 타 버릴 텐데.>>
카카오타이의 이 불경스러운 농담 때문이었을까? 그로서는 순전히 별다른 의미 없는 마음속 고백이었는지 모르지만, 태양신은 카카오타이의 머리를 태워버리는 대신, 아예 그 근처에 올수도 없게 만들었다.
<오! 생명의 신이시여! 우리 어리석은 백성들을 풍요로 인도하소서.>
쉬어터진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당장에 눈을 뜨지는 않았다. 카카오타이는 그 때 눈을 뜬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차라리 그 저주 받을 눈을 통째로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생명의 신이시여 우리를 풍요로 인도하소서.>
눈앞에 펼쳐진 것은 구릿빛으로 번뜩이는 인간의 파도였다. 처음에는 하나의 장단에 맞추듯이 일사 분란하게 넘실거렸지만, 곧 여기 저기 들쑥날쑥한 움직임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생명의 신이시여 우리를 풍요로 인도하소서.>
지도자로 보이는 노인의 선창에 이어, 사람들이 같은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카카오타이는 자신들이 진 건 아마도 이 혼을 빼는 주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수수께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순간에 알았다면 카카오타이는 스스로 칼을 집어 들어 자기 목을 베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젊었다. 지금도 젊은이 측에 들긴 하지만, 태양이 3000번 넘게 뜨는 날 이전에는 더욱 더 젊었다. 막 성인식을 치루고 난 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개의 막 성인식을 치룬 어른 아이들이 그렇듯이, 카카오타이는 모든 일에 쉽게 빠져들었고, 탐닉의 극한을 추구했다. 순간순간 정신을 놓을 정도로, 아찔한 허쉬쉬 향취 속에서 카카오타이가 그 날 몇 명의 여자를 안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기억하기로는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여자들이 자신과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 더 정직하게 입을 열자면, 카카오타이는 열 세 명 다음으로는 수를 세지 않았다. 카카오타이는 일만의 몇 곱절까지도 수를 셀 수 있는 똑똑한 축이었지만, 열 세 명의 여자를 자기 손으로 죽인 이후부터는 절대로 수를 세지 않았다.
끈적끈적하게 손을 적신 피 냄새는 이전부터 전쟁터에서 숱하게 맡아왔던 그것과 동일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에는 사내들의 피 냄새였고, 지금은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죄 없는 아낙들의 피라는 점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카카오타이는 그렇게 여겼다. 그는 이 지옥 같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비릿한 냄새가 자기 주변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들이 자기 손에 죽어 갔는지 알지 못한다. 이 망할 놈의 부족에서는 어디선가 여자들만 열리는 나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나이도 꽤 들은 최근에는 자제력이라는 게 눈곱만치라도 생긴 모양인지, 매일 일상처럼 되풀이 되는 여자들의 동침을 거부하기도 했다. 카카오타이의 욕망이 나이 탓에 꺾인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젊은 측에 드는 사내였다. 한 때는 전사였던... 지금은 마구간 종마 신세에 불과하지만.
자신과 함께 밤을 보낸 여자들을 직접 죽이는 일은 전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게 싫었을 뿐이다. 아무리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라지만, 한 번 이상 몸을 섞은 상대를 죽이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여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몇 번이고 거부를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허쉬쉬로 가득 찬 방안으로 끌려 들어갈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다음 번 희생자가 될 밤 상대가 다소곳이 옆에 앉아 있었다.
이른 새벽빛에 내비친 그녀의 몸을 보건데 이미 일은 마친 뒤였다. 곧이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였다. 하지만, 카카오타이는 그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손에 강제로 들려진 칼날이 그 잔인한 눈빛을 희번덕 거릴 때면, 세상 모든 평정을 다 차지한 것 같던 여인네들의 얼굴은 곧 공포로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약에 취했다고는 해도, 그 추물들이 도저히 지난밤에 안았을 만큼, 욕정을 느끼게 한 얼굴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카카오타이는 자신의 이 더할 수 없이 답답하고 끔찍한 기분이, 그녀들의 괴물 같은 얼굴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검붉은 액체의 끈적거림과 역겨움은 아무리 물로 씻어 내려도 가실 줄을 몰랐다.
오히려 지금처럼 이 저주받을 피 냄새로 진동하는 옥수수 밭 한 가운데 있을 때야, 비로소 조금은 안정을 되찾곤 했다. 매우 역설적인 운명이었지만, 요 근래 카카오타이에게는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할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저 저급한 본능에 충실한 짐승처럼, 바로 코앞으로 다가오는 마음의 안정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오늘 밤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카카오타이는 피냄새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옥수수밭 지옥을 찾았다. 어스름한 달빛은 불길하게도 초승달이었다. 카카오타이가 어렸을 때는 악마의 뿔을 닮은 저 하늘의 차가운 불빛을 무서워했었다. 그것은 태양의 아우로써, 장차 이 땅에 재앙을 흩뿌릴 어린 싹의 징조라 했다.
할머니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던 어린 날의 카카오타이는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달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제 초승달을 무서워하던 그 어린 카카오타이는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지 않다. 오히려, 달이 낮 동안 피를 뒤집어 쓴 카카오타이를 무서워해야 했다.
갑자기 카카오타이는 날카롭게 눈을 부릅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했어도 그는 한 때 유능한 전사였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일은 작은 소리에 그는 호랑이처럼 소리쳤다. 카카오타이 스스로도 그 자신의 소리에 놀랐을 정도였다.
소리의 주인공은 그 소리에 놀랐는지 그 뒤로 기척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카카오타이는 알고 있다. 자신의 휴식을 망친 방해꾼이 지금 어느 곳에 숨어, 겁에 질려 꼴사납게 벌벌 떨고 있는지를.
<모습을 보여라!>
이어진 또 다른 호령에 이번에는 <<풀썩>>하는 작고 힘없는 둔탁함이 귓가에 전해졌다.
<<겁에 질린 토끼 새끼군 그래.>>
그는 속으로 조소를 삼키며 발소리를 죽인 채, 말썽꾼의 존재를 찾았다.
<이 건방진 토끼 놈!>
호랑이처럼 달려든 그 앞에 방해자는 정말 쫓기는 토끼처럼 껑충 튀어 올랐다. 어스름픗한 달빛에 비친 그 살결은 언뜻 보기에는 부드러운 젖빛을 띄었다. 하지만, 그것은 달과 어둠이 시도한 조악한 속임수였다. 매의 눈을 가진 전사에게 어둠과 달의 엉성한 씨실과 날실은 삽시간에 풀리고 만다.
젖빛 살결은 금세 강건하게 그슬린 본색을 드러냈다. 그것은 태양의 것이었고, 전사의 자질을 가졌을지도 모를 새끼 호랑이였다. 그것은 낮에 속하고, 생명에 속한 존재였다. 그 생명력 넘치는 윤기와 탄력이 열 발자국 이상 떨어진 카카오타이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밉상인 초승달을 닮기도 했다. 뾰족하니 각을 세운 듯한 날이 선 얼굴과 거기에 속한 여름 바다처럼 차가운 눈이 동시에 카카오타이에게로 향했다. 그는 낮과 밤을 동시에 본 기분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가 정말 신이 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여겼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 그것이 있었다. 낮과 밤이 동시에 앞에 서서 다소 오만한 태도로 카카오타이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누구냐?>
처음과 같은 물음이었지만, 그 음성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재차 물었다. 앞서 보다 더 부드러운, 그로서는 정말 자신이 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깊은 배려와 염려가 스며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카카오타이다. 이 땅에 생명을 내려주는 신이다. 알고 있는가?>
이번에는 다소 위엄을 실어 물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저쪽은 움찔했다. 한 눈에 보아도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처음 보았던 오만함이 담긴 눈빛만은 치우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오만이라기보다는 긍지를 가진 자의 등불이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위대한 카카오타이시여. 당신에게 무례를 범하고자 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질문에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왜지?>
일말의 호기심을 담은 카카오타이의 목소리는 마찬가지로 똑같은 얼굴 표정을 이끌었다. 상대는 되물어 온 답에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한 눈에 보아도 무척이나 고민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저는... 제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른다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거냐? 그 무슨 되먹지 못한 말장난인가!>
<용서 하십시오. 카카오타이. 어찌 미천한 제가 생명의 신인 당신을 모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그 노여움을 거둬 주십시오.>
카카오타이와 같은 사내에게 있어서 정복욕은 본능 그 자체였다. 그는 지금 이 벌레만도 못한 가련한 생물이 눈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무릎을 꿇게 하는 대상의 긍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쾌감은 더욱 커진다. 태초부터 신은 사내아이들의 가슴 속에 이 가학적인 충동의 씨앗을 심어왔다. 그래서, 사내들은 아이든 어른이든 간에,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연인이든 적이든 남자는 언제나 바로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의 정점에 서고 싶어 한다.
<신을 모욕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짐짓 위압적인 목소리를 내 본다. 그런 가운데에, 카카오타이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설렘이 일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알고 있는 자의 대답이었나?>
<그건...>
<이곳은 어떻게 왔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온 것이냐? 장로회의 허락이라도 떨어진 게냐? 설마 이곳이 내 성지라는 것조차도 모른다는 건 아니겠지?>
깊이 가라앉는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카카오타이는 문득 어린 시절의 첫 번째 토끼 사냥을 기억해 냈다. 올무에 걸려 바동거리면서도 토끼는 끈질기게 도망치려했다. 그 바람에 올무에 채인 뒷다리는 살갗이 거의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진득한 피와 헤진 살 조각이, 잔인하게 조여 오는 밧줄을 흠뻑 적셨다. 무릇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본능적으로 살려는 길을 구하기 마련이다. 비록 그 노력이 실패할 것이 확실하더라도, 생명은 그 헛된 반항을 끊임없이 유도한다. 그리고, 그 덧없는 발버둥이 정복자를 더욱 더 즐겁게 만든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내 눈앞에서 비참한 몰골로 떨고 있는 너는 대체 누구냐? 생명의 신인 내가 너를 빚었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구나. 아이야, 대체 넌 누구냐? 너의 애비 되는 자는 또 누구더냐?>
<카카오타이시여, 저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있어도 없다고 말해야 되는 게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입니다. 아버지가 없기에 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며, 그 말조차도 존재의 일말을 남긴다고 하여, 말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제가 누구인지 당신에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없는 아이>>입니다.>
달빛의 변덕이었는지도 모른다. 카카오타이의 눈에 소년이 우는 것처럼 보인 것은. 긍지로 이루어진 그 눈은 눈물의 바다에 순식간에 휩쓸리는 작은 모래성이었을 뿐이다. 카카오타이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첫 번째 토끼 사냥 때도 그랬다. 몸부림을 치던 토끼는 제풀에 지쳐 점차로 기운을 잃기 시작했다. 뿌옇게 흐려가는 눈동자가 힘없이 카카오타이를 올려다보았다. 맹수처럼 살기를 담아 내지 못하는 연약한 짐승들의 눈은 항상 그랬다. 축제를 위해 도륙 당했던 소나 돼지도 그랬고, 자신과 동침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던 여자들의 눈동자 또한 언제나 마지막은 그를 향한 채 애처롭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저항을 포기한 그 눈동자는 카카오타이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 댄다. 전사들의 눈동자는 그렇지 않았다. 맹수들의 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카카오타이는 그들을 죽일 때는 이렇듯 가슴이 아팠던 적이 없었다.
<이리로 오너라. 오늘만은 특별히 너에게 아량을 베풀겠다.>
적당히 근육이 붙은 팔을 커다랗게 벌리며 카카오타이는 소년에게 턱짓을 했다. 소년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조심스럽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조금 전 보았던 그 당당함이 사라지자 카카오타이는 이내 낙담을 했다. 가까이 다가 온 소년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덜 자란 꼬마 녀석일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것은 모두 저 저주받을 달과 그림자의 기만 행위였던 모양이다.
<앉고 싶다면 앉아도 좋다.>
연신 번갈아 가며 다리를 굽혔다 폈다하는 소년을 보며 카카오타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역시나 평범한 아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철이 덜 든 시끄럽게 떠들기만 하는 아이 녀석들.
하긴, 그 나이에 어른의 긍지가 담긴 눈을 가진 아이는 본적이 없었다. 그가 알기로는 어린 나이에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것도 직접 그의 눈으로 본적은 없었다. 사람들에게서 들었을 뿐이다.
<긍지의 전사 카카오타이.>
한 때는 그런 전사라고 불리는 얼간이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름이 같은 종마 노릇을 하는 얼빠진 인간 하나만 있을 따름이다. 마치, 눈앞에 존재하는 <<없는 아이>>처럼.
아이는 카카오타이의 말을 듣고도 좀처럼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연신 눈치를 보는 그 꼴이 카카오타이의 부아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저급하고 긍지는커녕 비굴함으로 가득한 역겨운 모습이었다. 뻔히 보이는 속내가 도저히 주체할 수 없어, 터져 나온 둑의 물길처럼 사방에 넘쳐 났다.
한사코 거부의 표시로 고개를 흔들어 댔지만, 다리를 번갈아가는 주기는 점점 더 짧아만 갔다. 그리고는 결국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 것만 같았다.
약하다. 긍지를 가지기에는 너무도 연약한 육체였다. 아이들이라는 건 언제나 그랬다.
<앉으라고 말했다.>
조용한 한 마디에 아이는 애써 거절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것이 카카오타이의 심기를 더욱 더 자극한다.
<앉으라고 말했다.>
한 층 더 성마른 목소리와 함께 손이 뻗쳐졌다. 억센 사내의 팔에 잡힌 가늘고 여린 팔목이 저항을 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낚시를 하듯 낚아 챈 팔목을 자기 쪽으로 끌고 온 카카오타이는 의기양양한 미소마저 띄었다.
그것은 분명 전사로서 할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전사도 뭐도 아니었다.
<위대한 카카오타이시여,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곳에서는 당신 외에 어느 누구도 앉는걸 허락 받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 같은 <<없는 아이>>는 더욱 더...>
<그 위대한 카카오타이가 너에게 말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앉으라고.>
바위덩어리 같은 두 손이 가냘픈 어깨를 짓눌렀다. 약한 저항이 손 안에 느껴졌다. 카카오타이는 소년이 저항 할 수 있도록 최소한도의 힘만 주었다. 하지만, 힘의 차이는 확연한 것이었다. 이쪽의 장난과는 달리 소년은 온 힘을 다해 완강한 저항을 했다. 카카오타이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것은 곧바로 무의미한 행동으로 바뀔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유희가 가급적이면 오래 가기를 바랐다.
잔인한 유희를 즐기는 어른의 눈이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과 마주쳤다. 여전히 일렁이는 바다 안에서 위태위태한 모래성과 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카카오타이는 흠칫 하고 놀랐다. 그 성에 갇힌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의 몸이 간질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려 왔다.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제는 한계에 부딪힌 육체의 마지막 단발마인지도 모르고.
그 눈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났다면 그 날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눈 속에 들어 있는 아이의 감옥은 철옹성이었다. 그는 그 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인내심은 얼마 안가 곧 바로 한계를 드러냈다.
아이가 이겼다.
어른은 비겁하게 변명을 한다.
<<단지... 이 아이의 다리를 쉬게 하려고 했을 뿐이야...>>
스스로도 비겁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본능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비겁함을 집어 삼킨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아이는 우악스러운 힘에 밀려 그대로 땅바닥에 드러눕고 만다. 금기를 깼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카카오타이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악마 같은 본능의 꾐에 스스로를 던지고 만다.
위선적인 독백을 반복하면서.
아이는 그 독백에 저항 대신 미친 듯이 울음을 터트렸다.
카카오타이는 달을 원망했다. 저 저주받을 것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어른의 독백과 아이의 울음이 한 데 뒤섞인 가운데, 옥수수 밭은 언제 나처럼 옅은 바람에 춤을 출 뿐이었다. 짙은 향기가 두 사람을 덮었지만, 그들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에는 서로 간에 바로 눈앞에 있는 존재만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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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타이. 어째서 매번 저를 뒤에서 안는 거지요?>
아이의 물음에 카카오타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뛰어와 촉촉하게 맺힌 아이의 땀방울에 더 관심을 가진 채였다. 행여나 그 연약한 구슬이 부서질까 그는 매우 조심스레 손끝으로 닿을락 말락 어루만졌다.
<카카오타이!>
아이의 보채는 소리에 그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자신의 유희가 방해 받는 걸 사내들은 원치 않는다. 아이든 어른이든 간에 그것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카카오타이 어째서...>
참을성 없는 아이가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얼굴과 달리 유희를 방해 받은 카카오타이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어른 남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돌조각 같은 표정을 자주 짓는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더 지나면, 그 모습 외에는 얼굴 위에 어떠한 표정도 얹지 못한다.
아이는 어른들, 특히나 사내들의 그런 모습을 자주 봐 왔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행하던 일도 똑똑히 기억한다.
아이가 울먹이자 카카오타이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서린다. 그 모양을 본 아이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웃는 입가에 걸려 아슬아슬한 절벽 타기를 한다. 조그마한 손이 눈가와 그 입가를 지나려 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거대한 파도처럼 한 번 쓰윽 훑고 지나갔다.
혀끝에 닿은 손끝의 액체는 아이의 냄새와 맛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허쉬쉬를 했을 때도 이런 황홀감은 일찍이 맛본 적이 없었다. 다시 한 번 그 맛을 느끼고 싶었지만, 이번에야 말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헤프게 퍼 올린 샘은 언젠가 곧 마르기 마련이니.
<카카오타이, 어째서 매번 저를 안을 때는 등 뒤에서 안는 거지요? 제 작은 등으로는 당신의 심장이 뛰는 걸 느낄 수 없어요.>
<네 작은 가슴으로도 마찬가지란다, 얘야. 나는 단지 이렇게 너를 안는 것만으르도 행복한데 넌 그렇지 않니?>
<아닙니다. 행복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더 원합니다. 당신의 심장을 바로 이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바로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당신을 느끼고 싶습니다.>
아이의 눈이 작고 철없는 욕망으로 번뜩였다. 아직 세상의 더 큰 욕망을 담기에는 버겁도록 작은 눈동자였다. 그 안에 들어있는 욕망은 카카오타이와 매우 닮은 모습을 띄었다.
<너는 욕심이 많은 듯 하면서도 별로 없구나.>
오랜 세월 검을 잡아 왔기에 딱딱하게 굳은 커다란 손이 아직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볼을 슬쩍 스쳐 지나갔다. 몇 번이고 다시 스쳤지만, 곧바로 그것을 잡으려 고는 하지 않았다.
<무언가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 보렴.>
<카카오타이, 당신을 원해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욕심 없는 작은 가슴이 그의 단련된 가슴팍 안으로 파고들었다. 작지만 확실히 빠른 고동이 그의 가슴에 전해졌다. 힘차게 움찔거리는 심장은 화산을 분출시키듯이 입가에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오도록 만들었다.
<원하는 걸 하나 주마. 뭐라도 하나 말해 보렴. 정말 가지고 싶은 게 없는 게냐?>
<당신을 원해요. 그것 외에는...>
<나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테지만, 그 밖의 것들은 네 주위에 아무것도 없구나. 그 허름한... 옷가지라고 부르기 조차도 민망한 것 대신 비단옷은 어떠냐? 맨발로 부어터진 그 발을 부드러운 표범 털로 만든 신으로 감싼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르잖니?>
하지만, 아이는 한사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바람에 뜨거운 입김이 카카오타이의 가슴 언저리까지 흘러 넘쳤다.
<뭐라도 말해 보렴. 그렇지 않으면 내가 편치 않겠구나. 명색이 신이 되어서는 이렇게 조그마한 아이에게 무엇 하나 줄 수 없다는 것도 내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란다. 아니, 그보다는 서글프기까지 하구나.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는 내 무력함이.>
순진무구한 눈동자 안에는 카카오타이, 그 외에는 더 이상 담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눈동자를 조금 더 크게 만들었으면 싶었다. 칼이라도 들이대서 커진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무슨 무지막지한 상상이란 말인가? 차라리, 카카오타이 그 자신이 지금 보다 더 작아진다면 어떨까?
이런 생각까지 들자 그는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지금까지 이런 한심한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여인들에게 이런 마음을 가진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말이다.
하긴 고향에 두고 왔던 아내에게 조차도 이런 마음은 들지 않았었다. 아내 역시 수많은 여자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고향에 홀로 남은 지금은 뭘 하고 있을지 이제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 때,
<카카오타이... 그럼, 이걸 제게 주세요. 당신의 목에 걸려 있는 그 반짝이는 돌이 달린 목걸이를...>
등골에 한 줄기 한기가 흘렀다. 마치 달에서 내려온 악마가 그 싸늘한 손길로 자신의 등을 쓰다듬은 것 만 같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카카오타이의 뇌리를 스쳤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너무도 교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부정이라도 저지르다 들킨 것처럼 당혹스러움과 그 보다 더한 수치심, 그에 대한 반발로 생긴 짜증으로 뒤범벅된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이의 추궁은 계속 되었다.
<당신의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이걸 가지고 싶어요. 이 아름다운 돌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마치... 마치 태양이 하나 더 있는 것 같군요. 사방으로 작은 빛을 뿌리는 게 정말 예뻐요. 광장 벽에 칠해진 황금 벽과는 다른 빛을 내는 게 너무 신기해요.>
그의 목에 걸린 수정 구슬을 만지작거리는 그 작은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던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카카오타이는 그 순간 인내심을 발휘하고자 했다. 사내들이란 그렇다. 설명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 오로지 인내심만을 찾을 뿐이다. 그것도 고작 한 움큼의 모래만큼도 안 되는 인내심을 말이다.
<그만 두어라.>
손에 잡힌 모래가 다 빠져 나가자, 그는 참고 참았던 한 마디를 꺼냈다. 아이는 그 갑작스럽게 돌변한 태도에 놀란 얼굴이다. 그렇지만, 손에는 여전히 구슬이 들려 있었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카카오타이의 목에서 뺏어낼 수 있을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고삐처럼 카카오타이의 목을 조금씩 파고 들어갔다. 그 역시 자신의 목에 힘을 준채였다. 어느 한 쪽이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목걸이라는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일직선을 이루었다.
카카오타이는 그제야 아이의 눈에 들어 선 자신 외의 욕망을 볼 수 있었다. 수정 구슬을 품은 아이의 눈은 세상의 탐욕이란 탐욕은 모두 다 집어 삼킨 것처럼 보였다.
이깟 구슬이 대체 뭐 길래. 그는 아이의 탐욕스러운 모습에 곧바로 실망했다.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이 장신구에 집착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그럼에도 카카오타이는 이 아이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 놀랐다.
<어째서요? 갑자기 왜 거부하시는 거지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저에게 뭐든지 다 들어 주신다고 했잖아요. 당신에게는 이 구슬이 그렇게 값어치 있는 물건인가요? 저보다 더 소중한 건가요?>
<<아! 정말이지 이 아이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
경멸의 감정이 그의 가슴을 떠나 곧바로 눈가로 전해졌다. 아이는 그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제까지 받아 왔던 대우를 깡그리 무시해 버린 그 눈길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고집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카카오타이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런 세속에 찌든 모습을 보고도, 그 자신이 여전히 열렬하게 아이를 원한다는 모순적인 갈망이었다.
<다른 걸 말해다오. 이 구슬 외에 다른 걸. 내 목숨이라도 달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 주겠다. 하지만, 이 구슬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모든 사내들이 신보다 더 높게 받들고 신봉하는 그 <<절대로>>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후회를 남겼던가? 아이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보는 카카오타이의 마음은 찢어 질 듯이 아팠다.
<제가 어떻게 당신의 목숨을 원하겠습니까? 당신 자신보다도 내게는 당신이 더 소중한데. 그런 슬픈 말씀을 하시면서도 어째서 그 작은 구슬은 저에게 주실 수 없는 건가요?>
<그렇게 내가 소중하다면 이제 그만 조르거라.>
<저에게는 당신뿐인데, 당신에게는 그 구슬이 더 소중한가 보군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 않느냐? 이런 물건 따위가 어떻게 너보다 더 소중하겠느냐? 내 마음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아니요! 모릅니다. 당신의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카카오타이. 어제까지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전혀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저를 사랑한다고 하신 말씀이 진실처럼 느껴졌지만, 오늘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이제까지 해오시던 말씀 전부가 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작지만 거대한 파도가 순식간에 그에게로 들이닥쳤다. 그 시발점이 되는 아이의 눈가는 이미 파도의 잔재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작은 손이 힘겹게 그 물줄기를 막으려고 한다. 거스를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아이는 한사코 눈가를 문질렀다. 얼마나 세게 문질렀던지 벌겋게 부어 오른 모습이었다.
카카오타이는 아이의 눈가로 손을 뻗쳤다. 하지만, 그 손은 이내 거부당했다. 자신과 아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라도 처진 것처럼 이후로는 함부로 그 앞으로 손을 뻗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그만 등이 카카오타이의 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벌판이라도 뛰고 온 듯이,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방금 전까지 움츠렸던 그의 손이 다시 한 번 장벽을 넘는 시도를 감행했다. 작은 저항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카카오타이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저항은 이내 그치고 말았다. 강제로 돌려진 얼굴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옅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걷어 내려는 카카오타이의 손길에 아이는 다시 한 번 저항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손길이 갔을 때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 귀엽지만 당돌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손길이 그의 가슴을 재빨리 훑고 지나간 것도 그때였다.
<무슨 짓이냐? 이리 내거라!>
놀라움과 분노로 뒤섞인 카카오타이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천진난만하고 교만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싫습니다.>
전리품을 높이 흔들어 보이며 아이는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댔다. 그 모습은 허쉬쉬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늙은 무당의 몸놀림과도 같았다. 천박하게 세속적인 욕심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무가치한 존재들.
<이리 내거라. 이것이 마지막 경고다.>
그의 말에 아이는 다시 한 번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인지, 눈물샘이 말라 버린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아이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로 우는 모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카카오타이의 마음 그 자체이기도 했다.
<당신에게 저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나간 태양들 아래에서 저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의 태양들 아래에서도...>
마지막 말은 미처 다 끝마칠 수 없었다.
표범 같은 사내가 덮쳐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용케도 카카오타이의 갑작스러운 기습을 피했다. 먹이를 놓친 짐승의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급격하게 솟아올랐다.
눈이 마주쳤는가 싶더니, 다리는 이미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고자 바삐 움직였다. 쫓기는 토끼처럼 겁에 질려 예민해진 귀는, 등 뒤에서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 사내의 숨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다.
<서라!>
악에 받친 외침이 귓등을 때리자 아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언젠가 말린 옥수수 가루를 훔치다 발각되었을 때 들었던 소리와 꼭 같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훔친 옥수수가루 만큼이나 셀 수 없이 많은 매질을 했었다.
이번에도 붙잡힌다면 아마 살아남지 못하리라.
<... 서라! 큰일 날 뻔 하지 않았느냐?>
아이의 멱살을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떨린 것은 허공에서 한 발작도 디디지 못하고 있는 아이의 가련한 다리였다. 그 아래에 펼쳐진 천길 낭떠러지 밑에는 지옥의 입구처럼 시꺼먼 바닷물이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다.
순간 반짝이는가 싶더니 작은 별 부스러기 하나가 이내 그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이의 눈은 그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의 초라한 다리 놀림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시 그 작은 다리가 땅을 밟았을 때까지도 아이의 눈은 한사코 바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그 눈이 자신에게로 향했을 때, 카카오타이는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아이의 얼굴은 전쟁에서 승리한 전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정을 숨기지는 않지만 결코 천박해 보이지 않는 위엄이 깃든 그 미소. 잊은 지 오래였지만, 카카오타이 역시 그 미소를 지어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죽게 내버려 두시지 그랬어요.>
<그 무슨 험악한 말버릇이냐?>
<당신이 저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걸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이것이 그가 느낀 전율의 정체였다. 눈앞에 있는 이 당돌한 꼬마 녀석이 스스로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이 말이. 이 행동이.
카카오타이는 말없이 아이를 와락 안았다. 저항은 이제 없었다.
그 작은 수정 구슬 하나를 끝도 없는 바다 속에 던져 버린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마지막 장벽 역시 저 깊은 무저갱 속으로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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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카카오타이. 이제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느리지만 단호한 늙은 무당의 음성은 카카오타이에게 종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 늙은이를 싫어했다. 자신을 잡아 온 부족민들 모두를 싫어했지만, 특히나 이 무당에게 만큼은 여름 한철 옥수숫대를 갉아 먹는 해충을 대하는 눈길을 주곤 했다. 그것은 혐오감을 넘은 경멸을 가득 담은 눈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망난 늙은이는 언제나 주름 속 깊이 감추어져 종잡을 수 없는 표정만을 내보일 뿐이다.
<금년의 태양신은 굉장히 관대하지 않았소? 곡식도 그 정도면 겨우내 한철은 물론 봄까지도 충분할 것 같소만.>
<물론입니다. 카카오타이. 그 모두가 위대하신 당신 덕분이라는 건 부족 전체가 알고 있습니다.>
카카오타이는 노인이 가증스럽게 자신을 추켜세우는데 에 잔뜩 경계를 했다. 그는 무당의 얼굴에 칼자국처럼 그어진 주름 속에는, 필시 뱀처럼 교활한 꾀들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전사는 몸에 새겨진 상처로 자신을 증명하지만, 교활한 늙은이들은 살아온 횟수의 계곡으로 존재 가치를 내보이곤 했다. 거기에는 긍지나 자존심이라는 게 필요치 않았다. 단지,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과 약간의 비굴함만 있으면 족했다.
<그런데, 왜...>
<하지만, 우리는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늙은 무당은 언제나 카카오타이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카카오타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녹슬었지만 여전히 미력하게나마 남은 전사로서의 육감이었다.
<지혜로운 샤만, 당신이 지금 말하는 그것은 당신의 이름과 전혀 걸맞지 않소. 준비를 하다니요? 대체 무엇에 대한 준비란 말이오?>
<신은 언제나 변덕이 심하신 분들이지요.>
늙은 무당의 발언에 카카오타이는 놀라운 보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누군가 이 소리를 들었었다면 늙은 무당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니, 카카오타이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칼로 내리쳐도 모두가 당연한 사실로 받아 들이 것이다. 신에 대한 모독은 그만큼 큰 죄였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라도 난건가?>>
<오늘의 행운이 내일도 계속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금년의 풍년이 내년에도 계속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그게 산 제물을 받치는 거랑 상관이 있는 이야기요?>
카카오타이의 직접적인 언급에 무당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만큼은 그 주름진 얼굴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수천 개의 거미줄 같은 틈들이 일제히 잔뜩 찌푸려졌다면 그는 분명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태양신의 변덕은 그 중에서도 특히나 심하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분께서 노하시기 전에 미리...>
<산 제물을 바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구겨진 그 얼굴을 보며 카카오타이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미친것들.>>
<태양신의 노여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난 뒤에는 이미 늦습니다. 그러니, 노여워하시기 전에 그 분을 달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지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현명한 방법으로 살아온 그 결과물이 바로 늙은 무당의 그 얼굴이라는 것을. 카카오타이는 혐오감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무당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늙은 무당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위대한 카카오타이시여. 최근에 소문 하나를 들었습니다.>
<소문?>
카카오타이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시답지 않은 장내 이야기를 이런 늙은이와 나눈다는 건 별다른 감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산 제물로 받쳐질 처녀들과 보낼 하룻밤이 더 걱정스러웠다. 그로서는 짧은 순간 동안 맛보았던 달콤한 꿈속에서 깨어나, 또 다시 지옥 같은 현실과 마주쳐야만 했다.
<요즘 한 아이와 가깝게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일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물음 아닌 물음이었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카카오타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이군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늙은 무당은 수긍해 버렸다. 카카오타이로서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 노망난 노친네의 입에서 어떤 청천 벽력같은 소리가 쏟아져 나올지 몰라 불안할 뿐이었다.
<아시겠지만 생명의 신인 당신은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부족 전체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런데, 그 비천한 아이가 감히...>
<그만하시오!>
카카오타이의 한 마디에 무당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일 뿐이었다. 마르지 않은 샘처럼 늙은이의 입은 계속 말을 쏟아냈다.
<... 당신이 그 아이에게 너무 빠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 천한 아이에게 눈을 돌릴 만큼 당신이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타락하지는 않으실 테니까요. 그렇지만, 규율은 규율입니다.>
<무슨...>
미처 항의를 하기도 전에 무당은 말을 종결시켰다.
<당신과 동침한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태양신을 위해 순교해야 합니다.>
그 순간, 카카오타이의 불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손에 짚이는 모든 것들이 힘차게 하늘을 날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요란한 파멸의 소리가 어지럽게 귀를 울리는 가운데에서도 노인은 묵묵히 카카오타이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카카오타이. 그것이 당신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름조차 없는 그 아이가 걸어갈 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눈앞에 서 있는 노인의 그 얇디얇은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완력이라면 여전히 카카오타이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하지만, 그의 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의식은 내일 아침에 진행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밤 아이를 들여보내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늙은 무당은 문을 나섰다. 카카오타이는 무력하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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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몹시도 어두웠다. 올빼미처럼 빛나는 눈을 가지지 않았다면, 카카오타이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작은 어깨와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앳된 얼굴위에 올려진 두 눈이 그를 향해 반짝였을 때, 카카오타이는 그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이의 눈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밤을 낮처럼 볼 수 있는 전사의 것을 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을 왜 지금까지 제대로 보지 못했단 말인가.
<카카오타이.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이미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소와 다르게 이처럼, 여인네들처럼 곱게 치장한 채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테니.
<그래도 마지막은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있어서 기쁩니다. 태양신을 모시게 되더라도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억센 팔이 아이를 와락 껴안았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평소와 다르게 가녀린 팔이 순순히 카카오타이의 목을 감아왔다. 팔 안쪽에 봉긋하게 솟은 작은 동산이 아이의 미래 모습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 그런 미래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와 함께 도망치지 않겠나?>
카카오타이 스스로도 놀랄 우리만치 뻔뻔한 소리였다. 그는 전사로써 지금까지 적에게 등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이미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치욕스럽게 살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이 과연 전사로써의 덕목에 걸맞은 삶인 걸까?
<<어차피 전사로써도 살아남지 못한 목숨이다...>>
그는 자기 합리화라는 무덤을 파고 있었다. 치명적이지만 편안하고 안락한 끝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운이 좋다면 이 아이와 남은 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카오타이. 제가 알던 분은 그런 말씀을 하시던 분이 아니셨습니다. 언제나 긍지를 잃지 않으셨던 분으로써...>
<날 봐라! 얘야! 지금의 내 모습 어디에 긍지가 있단 말이냐? 네 눈에는 이 늙어빠진 종마 같은 형상의 중늙은이가 보이지 않더냐?>
자포자기한 심정이 카카오타이와 달리 아이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취하셨군요.>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허쉬쉬도 마찬가지이다.
<달빛에 취하셨군요. 저 악마 같은 달의 꼬임에 빠지셨군요.>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어두운 하늘에 귀귀하게 빛나는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아이는 말했다. 카카오타이는 처음 아이를 만났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때도 달의 꼬임에 넘어갔더랬지.>
체념과 함께 달콤하면서도 쓰디 쓴 카카오 같은 추억을 돼내이며 그는 눈을 감았다. 달빛만큼이나 차디 찬 아이의 입김이 그의 눈을 감쌌다.
결심은 이미 섰다. 떠오르는 새로운 태양을 맞을 때까지도 카카오타이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지금 이 순간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그 결심은 부동의 위치를 잡을 것이다.
<꼭 살아 남으셔야 합니다.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카카오타이 당신만은 꼭 사셔야 합니다. 저는... 바람결에 제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그 한 순간만큼만 저를 기억해 주시면... 만족합니다.>
몹쓸 태양빛이 아이의 마지막 미소를 금빛 차양 막으로 가려 버렸다. 아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부서지는 파도처럼 허옇게 돋아난 치아뿐이었다.
이윽고 요란한 북소리와 야만적인 함성들이 들려왔다. 때가 된 것이다.
의식에 따라 아이가 먼저 앞장을 섰다. 쏟아지는 금빛 창살 사이를 걷는 아이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살아생전 그토록 아름다운 것을 본적이 있었던가? 이 저주받을 제물 의식이 이토록 환희로 넘쳤던 적이 일찍이 있었단 말인가?
재단 앞에 이르러 작은 손이 뱀처럼 일그러진 칼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곧바로 카카오타이에게로 향했다. 망설일 기색도 없이 그는 칼을 집어 들었다. 무릎을 꿇은 아이의 얼굴은 숙여진 채였다.
카카오타이는 마지막으로 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긍지 높은 전사의 싹을 간직한 순수한 눈을 보고 싶었다. 강제로 젖혀진 얼굴은 변함없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토록 그가 원하던 그 눈만큼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을 할 때였다.
서늘한 칼날이 목을 훑고 지나갔다.
평소의 의식 순서와는 달랐다.
좌중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요란한 북소리도, 무당의 숨을 헐떡이며 추는 춤사위도 세상의 모든 것이 일순간 멈추었다. 붉은 피가 재단을 흠뿍 적시고 난 뒤에 땅으로 스며들었다.
눈을 부릎 떴을 때야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야만인들의 함성이 다시 울려 퍼지고, 북소리가 다시 땅을 울렸다. 무당은 춤추듯이 비틀거리며 아연실색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모두가 바라던 함성도, 북소리도, 춤도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아이의 존재 역시 그들이 원하던 바는 결코 아니었다.
용기를 가진 다리가 내달렸다. 미련을 가진 머리가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만, 결국은 다리의 고집이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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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무당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이미 살만큼 산목숨이었다. 카카오타이의 죽음 이후에 부족은 쇠퇴에 쇠퇴를 거듭한 끝에 결국 이웃 부족의 침략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이미 부족의 영욕을 끝까지 보아온 자신이었다. 이제 살만큼 살아온 늙은 목숨이 이대로 거두어진다고 한들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힘찬 발걸음이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차례가 온 것이다. 땅을 딛고 선 발의 주인은 무척이나 젊은 것 같았다. 강인한 힘줄이 그의 다리 곳곳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땅을 박찬다면 단박에 태양까지라도 닿을 성 싶었다.
젊은 손이 늙고 초라한 턱을 들어 올렸다. 태양빛 속에 선 젊은이의 얼굴은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었지만,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삶의 의욕이나 패배에 대한 분함은 조금도 없었건만. 이 무례한 젊은 애송이의 비웃음은 그러한 잃어 버렸던 욕망을 부채질 한 것이다.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정복자. 태양처럼 빛나는군 그래. 그에 비하면 이 가련한 노인네는 당장에라도 꺼져가는 등불만도 못한 존재라네. 마지막 불을 힘겹게 지피기 전에 자네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당신도 알고 있는 이름이요.>
<내가 알고 있는 이름 중에 자네와 같은 얼굴을 한 자는 없었다네. 전사여. 위대한 정복자여. 자네의 이름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네. 만약, 자네를 알았다면 내 생의 크나 큰 영광이었겠지.>
<그 이름을 알아도 당신은 영광으로 생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 미천한 불을 끄는 선물로 이름만은 알려 드리지요.>
<고맙네. 젊은이. 덕분에 죽어서 눈은 편하게 감겠군.>
늙은 무당은 눈을 감았다. 동시에 칼날보다도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내 이름은 카카오타이다!>
2008년 5월 6일 새벽 12시 33분 완료.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는 냄새였다. 그가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기 때문은 신에게 맹세코 절대 아니었다. 지금은 우스운 꼴로 전락했지만, 한 때는 그도 전사였다. 그렇다. 한 때는 그도 분명 전사였고, 지금처럼 지독하게 역한 냄새를 맡을 필요도 없었다. 아니, 그는 지금 자신이 이 거름 밭에 빠진 것보다도 못한 운명에 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한 바가 없었다.
계속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는 지금과 같은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는 전장에서 생을 마감하리라 기대했었다. 적들의 손에 사로 잡혔을 때만 해도, 카카오타이는 이제 지상에서의 의무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했다. 적어도, 바로 앞의 동료들 머리가 서로 경쟁 하듯이 하늘 높이 치솟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운명은 지상에서 끝나는 것이었다.
<<내 잘린 목은 얼마나 높이 솟을까? 태양의 신 근처까지 가면 순식간에 타 버릴 텐데.>>
카카오타이의 이 불경스러운 농담 때문이었을까? 그로서는 순전히 별다른 의미 없는 마음속 고백이었는지 모르지만, 태양신은 카카오타이의 머리를 태워버리는 대신, 아예 그 근처에 올수도 없게 만들었다.
<오! 생명의 신이시여! 우리 어리석은 백성들을 풍요로 인도하소서.>
쉬어터진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당장에 눈을 뜨지는 않았다. 카카오타이는 그 때 눈을 뜬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차라리 그 저주 받을 눈을 통째로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생명의 신이시여 우리를 풍요로 인도하소서.>
눈앞에 펼쳐진 것은 구릿빛으로 번뜩이는 인간의 파도였다. 처음에는 하나의 장단에 맞추듯이 일사 분란하게 넘실거렸지만, 곧 여기 저기 들쑥날쑥한 움직임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생명의 신이시여 우리를 풍요로 인도하소서.>
지도자로 보이는 노인의 선창에 이어, 사람들이 같은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카카오타이는 자신들이 진 건 아마도 이 혼을 빼는 주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수수께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순간에 알았다면 카카오타이는 스스로 칼을 집어 들어 자기 목을 베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젊었다. 지금도 젊은이 측에 들긴 하지만, 태양이 3000번 넘게 뜨는 날 이전에는 더욱 더 젊었다. 막 성인식을 치루고 난 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개의 막 성인식을 치룬 어른 아이들이 그렇듯이, 카카오타이는 모든 일에 쉽게 빠져들었고, 탐닉의 극한을 추구했다. 순간순간 정신을 놓을 정도로, 아찔한 허쉬쉬 향취 속에서 카카오타이가 그 날 몇 명의 여자를 안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기억하기로는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여자들이 자신과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 더 정직하게 입을 열자면, 카카오타이는 열 세 명 다음으로는 수를 세지 않았다. 카카오타이는 일만의 몇 곱절까지도 수를 셀 수 있는 똑똑한 축이었지만, 열 세 명의 여자를 자기 손으로 죽인 이후부터는 절대로 수를 세지 않았다.
끈적끈적하게 손을 적신 피 냄새는 이전부터 전쟁터에서 숱하게 맡아왔던 그것과 동일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에는 사내들의 피 냄새였고, 지금은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죄 없는 아낙들의 피라는 점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적어도 카카오타이는 그렇게 여겼다. 그는 이 지옥 같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비릿한 냄새가 자기 주변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들이 자기 손에 죽어 갔는지 알지 못한다. 이 망할 놈의 부족에서는 어디선가 여자들만 열리는 나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나이도 꽤 들은 최근에는 자제력이라는 게 눈곱만치라도 생긴 모양인지, 매일 일상처럼 되풀이 되는 여자들의 동침을 거부하기도 했다. 카카오타이의 욕망이 나이 탓에 꺾인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젊은 측에 드는 사내였다. 한 때는 전사였던... 지금은 마구간 종마 신세에 불과하지만.
자신과 함께 밤을 보낸 여자들을 직접 죽이는 일은 전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게 싫었을 뿐이다. 아무리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라지만, 한 번 이상 몸을 섞은 상대를 죽이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여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몇 번이고 거부를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허쉬쉬로 가득 찬 방안으로 끌려 들어갈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다음 번 희생자가 될 밤 상대가 다소곳이 옆에 앉아 있었다.
이른 새벽빛에 내비친 그녀의 몸을 보건데 이미 일은 마친 뒤였다. 곧이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였다. 하지만, 카카오타이는 그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손에 강제로 들려진 칼날이 그 잔인한 눈빛을 희번덕 거릴 때면, 세상 모든 평정을 다 차지한 것 같던 여인네들의 얼굴은 곧 공포로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약에 취했다고는 해도, 그 추물들이 도저히 지난밤에 안았을 만큼, 욕정을 느끼게 한 얼굴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카카오타이는 자신의 이 더할 수 없이 답답하고 끔찍한 기분이, 그녀들의 괴물 같은 얼굴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검붉은 액체의 끈적거림과 역겨움은 아무리 물로 씻어 내려도 가실 줄을 몰랐다.
오히려 지금처럼 이 저주받을 피 냄새로 진동하는 옥수수 밭 한 가운데 있을 때야, 비로소 조금은 안정을 되찾곤 했다. 매우 역설적인 운명이었지만, 요 근래 카카오타이에게는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할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저 저급한 본능에 충실한 짐승처럼, 바로 코앞으로 다가오는 마음의 안정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오늘 밤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카카오타이는 피냄새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옥수수밭 지옥을 찾았다. 어스름한 달빛은 불길하게도 초승달이었다. 카카오타이가 어렸을 때는 악마의 뿔을 닮은 저 하늘의 차가운 불빛을 무서워했었다. 그것은 태양의 아우로써, 장차 이 땅에 재앙을 흩뿌릴 어린 싹의 징조라 했다.
할머니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던 어린 날의 카카오타이는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달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제 초승달을 무서워하던 그 어린 카카오타이는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지 않다. 오히려, 달이 낮 동안 피를 뒤집어 쓴 카카오타이를 무서워해야 했다.
갑자기 카카오타이는 날카롭게 눈을 부릅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했어도 그는 한 때 유능한 전사였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일은 작은 소리에 그는 호랑이처럼 소리쳤다. 카카오타이 스스로도 그 자신의 소리에 놀랐을 정도였다.
소리의 주인공은 그 소리에 놀랐는지 그 뒤로 기척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카카오타이는 알고 있다. 자신의 휴식을 망친 방해꾼이 지금 어느 곳에 숨어, 겁에 질려 꼴사납게 벌벌 떨고 있는지를.
<모습을 보여라!>
이어진 또 다른 호령에 이번에는 <<풀썩>>하는 작고 힘없는 둔탁함이 귓가에 전해졌다.
<<겁에 질린 토끼 새끼군 그래.>>
그는 속으로 조소를 삼키며 발소리를 죽인 채, 말썽꾼의 존재를 찾았다.
<이 건방진 토끼 놈!>
호랑이처럼 달려든 그 앞에 방해자는 정말 쫓기는 토끼처럼 껑충 튀어 올랐다. 어스름픗한 달빛에 비친 그 살결은 언뜻 보기에는 부드러운 젖빛을 띄었다. 하지만, 그것은 달과 어둠이 시도한 조악한 속임수였다. 매의 눈을 가진 전사에게 어둠과 달의 엉성한 씨실과 날실은 삽시간에 풀리고 만다.
젖빛 살결은 금세 강건하게 그슬린 본색을 드러냈다. 그것은 태양의 것이었고, 전사의 자질을 가졌을지도 모를 새끼 호랑이였다. 그것은 낮에 속하고, 생명에 속한 존재였다. 그 생명력 넘치는 윤기와 탄력이 열 발자국 이상 떨어진 카카오타이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밉상인 초승달을 닮기도 했다. 뾰족하니 각을 세운 듯한 날이 선 얼굴과 거기에 속한 여름 바다처럼 차가운 눈이 동시에 카카오타이에게로 향했다. 그는 낮과 밤을 동시에 본 기분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가 정말 신이 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여겼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 그것이 있었다. 낮과 밤이 동시에 앞에 서서 다소 오만한 태도로 카카오타이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누구냐?>
처음과 같은 물음이었지만, 그 음성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재차 물었다. 앞서 보다 더 부드러운, 그로서는 정말 자신이 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깊은 배려와 염려가 스며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카카오타이다. 이 땅에 생명을 내려주는 신이다. 알고 있는가?>
이번에는 다소 위엄을 실어 물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저쪽은 움찔했다. 한 눈에 보아도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처음 보았던 오만함이 담긴 눈빛만은 치우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오만이라기보다는 긍지를 가진 자의 등불이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위대한 카카오타이시여. 당신에게 무례를 범하고자 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질문에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왜지?>
일말의 호기심을 담은 카카오타이의 목소리는 마찬가지로 똑같은 얼굴 표정을 이끌었다. 상대는 되물어 온 답에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한 눈에 보아도 무척이나 고민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저는... 제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른다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거냐? 그 무슨 되먹지 못한 말장난인가!>
<용서 하십시오. 카카오타이. 어찌 미천한 제가 생명의 신인 당신을 모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그 노여움을 거둬 주십시오.>
카카오타이와 같은 사내에게 있어서 정복욕은 본능 그 자체였다. 그는 지금 이 벌레만도 못한 가련한 생물이 눈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무릎을 꿇게 하는 대상의 긍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쾌감은 더욱 커진다. 태초부터 신은 사내아이들의 가슴 속에 이 가학적인 충동의 씨앗을 심어왔다. 그래서, 사내들은 아이든 어른이든 간에,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연인이든 적이든 남자는 언제나 바로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의 정점에 서고 싶어 한다.
<신을 모욕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짐짓 위압적인 목소리를 내 본다. 그런 가운데에, 카카오타이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설렘이 일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알고 있는 자의 대답이었나?>
<그건...>
<이곳은 어떻게 왔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온 것이냐? 장로회의 허락이라도 떨어진 게냐? 설마 이곳이 내 성지라는 것조차도 모른다는 건 아니겠지?>
깊이 가라앉는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카카오타이는 문득 어린 시절의 첫 번째 토끼 사냥을 기억해 냈다. 올무에 걸려 바동거리면서도 토끼는 끈질기게 도망치려했다. 그 바람에 올무에 채인 뒷다리는 살갗이 거의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진득한 피와 헤진 살 조각이, 잔인하게 조여 오는 밧줄을 흠뻑 적셨다. 무릇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본능적으로 살려는 길을 구하기 마련이다. 비록 그 노력이 실패할 것이 확실하더라도, 생명은 그 헛된 반항을 끊임없이 유도한다. 그리고, 그 덧없는 발버둥이 정복자를 더욱 더 즐겁게 만든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내 눈앞에서 비참한 몰골로 떨고 있는 너는 대체 누구냐? 생명의 신인 내가 너를 빚었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구나. 아이야, 대체 넌 누구냐? 너의 애비 되는 자는 또 누구더냐?>
<카카오타이시여, 저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있어도 없다고 말해야 되는 게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입니다. 아버지가 없기에 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며, 그 말조차도 존재의 일말을 남긴다고 하여, 말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제가 누구인지 당신에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없는 아이>>입니다.>
달빛의 변덕이었는지도 모른다. 카카오타이의 눈에 소년이 우는 것처럼 보인 것은. 긍지로 이루어진 그 눈은 눈물의 바다에 순식간에 휩쓸리는 작은 모래성이었을 뿐이다. 카카오타이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첫 번째 토끼 사냥 때도 그랬다. 몸부림을 치던 토끼는 제풀에 지쳐 점차로 기운을 잃기 시작했다. 뿌옇게 흐려가는 눈동자가 힘없이 카카오타이를 올려다보았다. 맹수처럼 살기를 담아 내지 못하는 연약한 짐승들의 눈은 항상 그랬다. 축제를 위해 도륙 당했던 소나 돼지도 그랬고, 자신과 동침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던 여자들의 눈동자 또한 언제나 마지막은 그를 향한 채 애처롭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저항을 포기한 그 눈동자는 카카오타이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 댄다. 전사들의 눈동자는 그렇지 않았다. 맹수들의 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카카오타이는 그들을 죽일 때는 이렇듯 가슴이 아팠던 적이 없었다.
<이리로 오너라. 오늘만은 특별히 너에게 아량을 베풀겠다.>
적당히 근육이 붙은 팔을 커다랗게 벌리며 카카오타이는 소년에게 턱짓을 했다. 소년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조심스럽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조금 전 보았던 그 당당함이 사라지자 카카오타이는 이내 낙담을 했다. 가까이 다가 온 소년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덜 자란 꼬마 녀석일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것은 모두 저 저주받을 달과 그림자의 기만 행위였던 모양이다.
<앉고 싶다면 앉아도 좋다.>
연신 번갈아 가며 다리를 굽혔다 폈다하는 소년을 보며 카카오타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역시나 평범한 아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철이 덜 든 시끄럽게 떠들기만 하는 아이 녀석들.
하긴, 그 나이에 어른의 긍지가 담긴 눈을 가진 아이는 본적이 없었다. 그가 알기로는 어린 나이에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것도 직접 그의 눈으로 본적은 없었다. 사람들에게서 들었을 뿐이다.
<긍지의 전사 카카오타이.>
한 때는 그런 전사라고 불리는 얼간이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름이 같은 종마 노릇을 하는 얼빠진 인간 하나만 있을 따름이다. 마치, 눈앞에 존재하는 <<없는 아이>>처럼.
아이는 카카오타이의 말을 듣고도 좀처럼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연신 눈치를 보는 그 꼴이 카카오타이의 부아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저급하고 긍지는커녕 비굴함으로 가득한 역겨운 모습이었다. 뻔히 보이는 속내가 도저히 주체할 수 없어, 터져 나온 둑의 물길처럼 사방에 넘쳐 났다.
한사코 거부의 표시로 고개를 흔들어 댔지만, 다리를 번갈아가는 주기는 점점 더 짧아만 갔다. 그리고는 결국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 것만 같았다.
약하다. 긍지를 가지기에는 너무도 연약한 육체였다. 아이들이라는 건 언제나 그랬다.
<앉으라고 말했다.>
조용한 한 마디에 아이는 애써 거절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것이 카카오타이의 심기를 더욱 더 자극한다.
<앉으라고 말했다.>
한 층 더 성마른 목소리와 함께 손이 뻗쳐졌다. 억센 사내의 팔에 잡힌 가늘고 여린 팔목이 저항을 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낚시를 하듯 낚아 챈 팔목을 자기 쪽으로 끌고 온 카카오타이는 의기양양한 미소마저 띄었다.
그것은 분명 전사로서 할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전사도 뭐도 아니었다.
<위대한 카카오타이시여,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곳에서는 당신 외에 어느 누구도 앉는걸 허락 받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 같은 <<없는 아이>>는 더욱 더...>
<그 위대한 카카오타이가 너에게 말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앉으라고.>
바위덩어리 같은 두 손이 가냘픈 어깨를 짓눌렀다. 약한 저항이 손 안에 느껴졌다. 카카오타이는 소년이 저항 할 수 있도록 최소한도의 힘만 주었다. 하지만, 힘의 차이는 확연한 것이었다. 이쪽의 장난과는 달리 소년은 온 힘을 다해 완강한 저항을 했다. 카카오타이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것은 곧바로 무의미한 행동으로 바뀔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유희가 가급적이면 오래 가기를 바랐다.
잔인한 유희를 즐기는 어른의 눈이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과 마주쳤다. 여전히 일렁이는 바다 안에서 위태위태한 모래성과 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카카오타이는 흠칫 하고 놀랐다. 그 성에 갇힌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의 몸이 간질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려 왔다.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제는 한계에 부딪힌 육체의 마지막 단발마인지도 모르고.
그 눈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났다면 그 날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눈 속에 들어 있는 아이의 감옥은 철옹성이었다. 그는 그 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인내심은 얼마 안가 곧 바로 한계를 드러냈다.
아이가 이겼다.
어른은 비겁하게 변명을 한다.
<<단지... 이 아이의 다리를 쉬게 하려고 했을 뿐이야...>>
스스로도 비겁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본능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비겁함을 집어 삼킨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아이는 우악스러운 힘에 밀려 그대로 땅바닥에 드러눕고 만다. 금기를 깼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카카오타이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악마 같은 본능의 꾐에 스스로를 던지고 만다.
위선적인 독백을 반복하면서.
아이는 그 독백에 저항 대신 미친 듯이 울음을 터트렸다.
카카오타이는 달을 원망했다. 저 저주받을 것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어른의 독백과 아이의 울음이 한 데 뒤섞인 가운데, 옥수수 밭은 언제 나처럼 옅은 바람에 춤을 출 뿐이었다. 짙은 향기가 두 사람을 덮었지만, 그들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에는 서로 간에 바로 눈앞에 있는 존재만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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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타이. 어째서 매번 저를 뒤에서 안는 거지요?>
아이의 물음에 카카오타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뛰어와 촉촉하게 맺힌 아이의 땀방울에 더 관심을 가진 채였다. 행여나 그 연약한 구슬이 부서질까 그는 매우 조심스레 손끝으로 닿을락 말락 어루만졌다.
<카카오타이!>
아이의 보채는 소리에 그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자신의 유희가 방해 받는 걸 사내들은 원치 않는다. 아이든 어른이든 간에 그것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카카오타이 어째서...>
참을성 없는 아이가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얼굴과 달리 유희를 방해 받은 카카오타이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어른 남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돌조각 같은 표정을 자주 짓는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더 지나면, 그 모습 외에는 얼굴 위에 어떠한 표정도 얹지 못한다.
아이는 어른들, 특히나 사내들의 그런 모습을 자주 봐 왔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행하던 일도 똑똑히 기억한다.
아이가 울먹이자 카카오타이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서린다. 그 모양을 본 아이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웃는 입가에 걸려 아슬아슬한 절벽 타기를 한다. 조그마한 손이 눈가와 그 입가를 지나려 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거대한 파도처럼 한 번 쓰윽 훑고 지나갔다.
혀끝에 닿은 손끝의 액체는 아이의 냄새와 맛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허쉬쉬를 했을 때도 이런 황홀감은 일찍이 맛본 적이 없었다. 다시 한 번 그 맛을 느끼고 싶었지만, 이번에야 말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헤프게 퍼 올린 샘은 언젠가 곧 마르기 마련이니.
<카카오타이, 어째서 매번 저를 안을 때는 등 뒤에서 안는 거지요? 제 작은 등으로는 당신의 심장이 뛰는 걸 느낄 수 없어요.>
<네 작은 가슴으로도 마찬가지란다, 얘야. 나는 단지 이렇게 너를 안는 것만으르도 행복한데 넌 그렇지 않니?>
<아닙니다. 행복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더 원합니다. 당신의 심장을 바로 이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바로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당신을 느끼고 싶습니다.>
아이의 눈이 작고 철없는 욕망으로 번뜩였다. 아직 세상의 더 큰 욕망을 담기에는 버겁도록 작은 눈동자였다. 그 안에 들어있는 욕망은 카카오타이와 매우 닮은 모습을 띄었다.
<너는 욕심이 많은 듯 하면서도 별로 없구나.>
오랜 세월 검을 잡아 왔기에 딱딱하게 굳은 커다란 손이 아직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볼을 슬쩍 스쳐 지나갔다. 몇 번이고 다시 스쳤지만, 곧바로 그것을 잡으려 고는 하지 않았다.
<무언가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 보렴.>
<카카오타이, 당신을 원해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욕심 없는 작은 가슴이 그의 단련된 가슴팍 안으로 파고들었다. 작지만 확실히 빠른 고동이 그의 가슴에 전해졌다. 힘차게 움찔거리는 심장은 화산을 분출시키듯이 입가에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오도록 만들었다.
<원하는 걸 하나 주마. 뭐라도 하나 말해 보렴. 정말 가지고 싶은 게 없는 게냐?>
<당신을 원해요. 그것 외에는...>
<나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테지만, 그 밖의 것들은 네 주위에 아무것도 없구나. 그 허름한... 옷가지라고 부르기 조차도 민망한 것 대신 비단옷은 어떠냐? 맨발로 부어터진 그 발을 부드러운 표범 털로 만든 신으로 감싼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르잖니?>
하지만, 아이는 한사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바람에 뜨거운 입김이 카카오타이의 가슴 언저리까지 흘러 넘쳤다.
<뭐라도 말해 보렴. 그렇지 않으면 내가 편치 않겠구나. 명색이 신이 되어서는 이렇게 조그마한 아이에게 무엇 하나 줄 수 없다는 것도 내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란다. 아니, 그보다는 서글프기까지 하구나.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는 내 무력함이.>
순진무구한 눈동자 안에는 카카오타이, 그 외에는 더 이상 담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눈동자를 조금 더 크게 만들었으면 싶었다. 칼이라도 들이대서 커진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무슨 무지막지한 상상이란 말인가? 차라리, 카카오타이 그 자신이 지금 보다 더 작아진다면 어떨까?
이런 생각까지 들자 그는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지금까지 이런 한심한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여인들에게 이런 마음을 가진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말이다.
하긴 고향에 두고 왔던 아내에게 조차도 이런 마음은 들지 않았었다. 아내 역시 수많은 여자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고향에 홀로 남은 지금은 뭘 하고 있을지 이제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 때,
<카카오타이... 그럼, 이걸 제게 주세요. 당신의 목에 걸려 있는 그 반짝이는 돌이 달린 목걸이를...>
등골에 한 줄기 한기가 흘렀다. 마치 달에서 내려온 악마가 그 싸늘한 손길로 자신의 등을 쓰다듬은 것 만 같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카카오타이의 뇌리를 스쳤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너무도 교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부정이라도 저지르다 들킨 것처럼 당혹스러움과 그 보다 더한 수치심, 그에 대한 반발로 생긴 짜증으로 뒤범벅된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이의 추궁은 계속 되었다.
<당신의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이걸 가지고 싶어요. 이 아름다운 돌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마치... 마치 태양이 하나 더 있는 것 같군요. 사방으로 작은 빛을 뿌리는 게 정말 예뻐요. 광장 벽에 칠해진 황금 벽과는 다른 빛을 내는 게 너무 신기해요.>
그의 목에 걸린 수정 구슬을 만지작거리는 그 작은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던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카카오타이는 그 순간 인내심을 발휘하고자 했다. 사내들이란 그렇다. 설명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 오로지 인내심만을 찾을 뿐이다. 그것도 고작 한 움큼의 모래만큼도 안 되는 인내심을 말이다.
<그만 두어라.>
손에 잡힌 모래가 다 빠져 나가자, 그는 참고 참았던 한 마디를 꺼냈다. 아이는 그 갑작스럽게 돌변한 태도에 놀란 얼굴이다. 그렇지만, 손에는 여전히 구슬이 들려 있었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카카오타이의 목에서 뺏어낼 수 있을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고삐처럼 카카오타이의 목을 조금씩 파고 들어갔다. 그 역시 자신의 목에 힘을 준채였다. 어느 한 쪽이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목걸이라는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일직선을 이루었다.
카카오타이는 그제야 아이의 눈에 들어 선 자신 외의 욕망을 볼 수 있었다. 수정 구슬을 품은 아이의 눈은 세상의 탐욕이란 탐욕은 모두 다 집어 삼킨 것처럼 보였다.
이깟 구슬이 대체 뭐 길래. 그는 아이의 탐욕스러운 모습에 곧바로 실망했다.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이 장신구에 집착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그럼에도 카카오타이는 이 아이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 놀랐다.
<어째서요? 갑자기 왜 거부하시는 거지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저에게 뭐든지 다 들어 주신다고 했잖아요. 당신에게는 이 구슬이 그렇게 값어치 있는 물건인가요? 저보다 더 소중한 건가요?>
<<아! 정말이지 이 아이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
경멸의 감정이 그의 가슴을 떠나 곧바로 눈가로 전해졌다. 아이는 그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제까지 받아 왔던 대우를 깡그리 무시해 버린 그 눈길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고집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카카오타이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런 세속에 찌든 모습을 보고도, 그 자신이 여전히 열렬하게 아이를 원한다는 모순적인 갈망이었다.
<다른 걸 말해다오. 이 구슬 외에 다른 걸. 내 목숨이라도 달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 주겠다. 하지만, 이 구슬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모든 사내들이 신보다 더 높게 받들고 신봉하는 그 <<절대로>>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후회를 남겼던가? 아이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보는 카카오타이의 마음은 찢어 질 듯이 아팠다.
<제가 어떻게 당신의 목숨을 원하겠습니까? 당신 자신보다도 내게는 당신이 더 소중한데. 그런 슬픈 말씀을 하시면서도 어째서 그 작은 구슬은 저에게 주실 수 없는 건가요?>
<그렇게 내가 소중하다면 이제 그만 조르거라.>
<저에게는 당신뿐인데, 당신에게는 그 구슬이 더 소중한가 보군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 않느냐? 이런 물건 따위가 어떻게 너보다 더 소중하겠느냐? 내 마음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아니요! 모릅니다. 당신의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카카오타이. 어제까지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전혀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저를 사랑한다고 하신 말씀이 진실처럼 느껴졌지만, 오늘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이제까지 해오시던 말씀 전부가 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작지만 거대한 파도가 순식간에 그에게로 들이닥쳤다. 그 시발점이 되는 아이의 눈가는 이미 파도의 잔재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작은 손이 힘겹게 그 물줄기를 막으려고 한다. 거스를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아이는 한사코 눈가를 문질렀다. 얼마나 세게 문질렀던지 벌겋게 부어 오른 모습이었다.
카카오타이는 아이의 눈가로 손을 뻗쳤다. 하지만, 그 손은 이내 거부당했다. 자신과 아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라도 처진 것처럼 이후로는 함부로 그 앞으로 손을 뻗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그만 등이 카카오타이의 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벌판이라도 뛰고 온 듯이,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방금 전까지 움츠렸던 그의 손이 다시 한 번 장벽을 넘는 시도를 감행했다. 작은 저항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카카오타이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저항은 이내 그치고 말았다. 강제로 돌려진 얼굴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옅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걷어 내려는 카카오타이의 손길에 아이는 다시 한 번 저항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손길이 갔을 때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 귀엽지만 당돌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손길이 그의 가슴을 재빨리 훑고 지나간 것도 그때였다.
<무슨 짓이냐? 이리 내거라!>
놀라움과 분노로 뒤섞인 카카오타이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천진난만하고 교만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싫습니다.>
전리품을 높이 흔들어 보이며 아이는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댔다. 그 모습은 허쉬쉬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늙은 무당의 몸놀림과도 같았다. 천박하게 세속적인 욕심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무가치한 존재들.
<이리 내거라. 이것이 마지막 경고다.>
그의 말에 아이는 다시 한 번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인지, 눈물샘이 말라 버린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아이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로 우는 모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카카오타이의 마음 그 자체이기도 했다.
<당신에게 저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나간 태양들 아래에서 저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의 태양들 아래에서도...>
마지막 말은 미처 다 끝마칠 수 없었다.
표범 같은 사내가 덮쳐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용케도 카카오타이의 갑작스러운 기습을 피했다. 먹이를 놓친 짐승의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급격하게 솟아올랐다.
눈이 마주쳤는가 싶더니, 다리는 이미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고자 바삐 움직였다. 쫓기는 토끼처럼 겁에 질려 예민해진 귀는, 등 뒤에서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 사내의 숨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다.
<서라!>
악에 받친 외침이 귓등을 때리자 아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언젠가 말린 옥수수 가루를 훔치다 발각되었을 때 들었던 소리와 꼭 같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훔친 옥수수가루 만큼이나 셀 수 없이 많은 매질을 했었다.
이번에도 붙잡힌다면 아마 살아남지 못하리라.
<... 서라! 큰일 날 뻔 하지 않았느냐?>
아이의 멱살을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떨린 것은 허공에서 한 발작도 디디지 못하고 있는 아이의 가련한 다리였다. 그 아래에 펼쳐진 천길 낭떠러지 밑에는 지옥의 입구처럼 시꺼먼 바닷물이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다.
순간 반짝이는가 싶더니 작은 별 부스러기 하나가 이내 그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이의 눈은 그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의 초라한 다리 놀림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시 그 작은 다리가 땅을 밟았을 때까지도 아이의 눈은 한사코 바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그 눈이 자신에게로 향했을 때, 카카오타이는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아이의 얼굴은 전쟁에서 승리한 전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정을 숨기지는 않지만 결코 천박해 보이지 않는 위엄이 깃든 그 미소. 잊은 지 오래였지만, 카카오타이 역시 그 미소를 지어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죽게 내버려 두시지 그랬어요.>
<그 무슨 험악한 말버릇이냐?>
<당신이 저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걸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이것이 그가 느낀 전율의 정체였다. 눈앞에 있는 이 당돌한 꼬마 녀석이 스스로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이 말이. 이 행동이.
카카오타이는 말없이 아이를 와락 안았다. 저항은 이제 없었다.
그 작은 수정 구슬 하나를 끝도 없는 바다 속에 던져 버린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마지막 장벽 역시 저 깊은 무저갱 속으로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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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카카오타이. 이제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느리지만 단호한 늙은 무당의 음성은 카카오타이에게 종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 늙은이를 싫어했다. 자신을 잡아 온 부족민들 모두를 싫어했지만, 특히나 이 무당에게 만큼은 여름 한철 옥수숫대를 갉아 먹는 해충을 대하는 눈길을 주곤 했다. 그것은 혐오감을 넘은 경멸을 가득 담은 눈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망난 늙은이는 언제나 주름 속 깊이 감추어져 종잡을 수 없는 표정만을 내보일 뿐이다.
<금년의 태양신은 굉장히 관대하지 않았소? 곡식도 그 정도면 겨우내 한철은 물론 봄까지도 충분할 것 같소만.>
<물론입니다. 카카오타이. 그 모두가 위대하신 당신 덕분이라는 건 부족 전체가 알고 있습니다.>
카카오타이는 노인이 가증스럽게 자신을 추켜세우는데 에 잔뜩 경계를 했다. 그는 무당의 얼굴에 칼자국처럼 그어진 주름 속에는, 필시 뱀처럼 교활한 꾀들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전사는 몸에 새겨진 상처로 자신을 증명하지만, 교활한 늙은이들은 살아온 횟수의 계곡으로 존재 가치를 내보이곤 했다. 거기에는 긍지나 자존심이라는 게 필요치 않았다. 단지,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과 약간의 비굴함만 있으면 족했다.
<그런데, 왜...>
<하지만, 우리는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늙은 무당은 언제나 카카오타이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카카오타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녹슬었지만 여전히 미력하게나마 남은 전사로서의 육감이었다.
<지혜로운 샤만, 당신이 지금 말하는 그것은 당신의 이름과 전혀 걸맞지 않소. 준비를 하다니요? 대체 무엇에 대한 준비란 말이오?>
<신은 언제나 변덕이 심하신 분들이지요.>
늙은 무당의 발언에 카카오타이는 놀라운 보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누군가 이 소리를 들었었다면 늙은 무당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니, 카카오타이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칼로 내리쳐도 모두가 당연한 사실로 받아 들이 것이다. 신에 대한 모독은 그만큼 큰 죄였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라도 난건가?>>
<오늘의 행운이 내일도 계속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금년의 풍년이 내년에도 계속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그게 산 제물을 받치는 거랑 상관이 있는 이야기요?>
카카오타이의 직접적인 언급에 무당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만큼은 그 주름진 얼굴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수천 개의 거미줄 같은 틈들이 일제히 잔뜩 찌푸려졌다면 그는 분명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태양신의 변덕은 그 중에서도 특히나 심하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분께서 노하시기 전에 미리...>
<산 제물을 바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구겨진 그 얼굴을 보며 카카오타이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미친것들.>>
<태양신의 노여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난 뒤에는 이미 늦습니다. 그러니, 노여워하시기 전에 그 분을 달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지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현명한 방법으로 살아온 그 결과물이 바로 늙은 무당의 그 얼굴이라는 것을. 카카오타이는 혐오감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무당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늙은 무당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위대한 카카오타이시여. 최근에 소문 하나를 들었습니다.>
<소문?>
카카오타이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시답지 않은 장내 이야기를 이런 늙은이와 나눈다는 건 별다른 감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산 제물로 받쳐질 처녀들과 보낼 하룻밤이 더 걱정스러웠다. 그로서는 짧은 순간 동안 맛보았던 달콤한 꿈속에서 깨어나, 또 다시 지옥 같은 현실과 마주쳐야만 했다.
<요즘 한 아이와 가깝게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일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물음 아닌 물음이었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카카오타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이군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늙은 무당은 수긍해 버렸다. 카카오타이로서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 노망난 노친네의 입에서 어떤 청천 벽력같은 소리가 쏟아져 나올지 몰라 불안할 뿐이었다.
<아시겠지만 생명의 신인 당신은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부족 전체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런데, 그 비천한 아이가 감히...>
<그만하시오!>
카카오타이의 한 마디에 무당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일 뿐이었다. 마르지 않은 샘처럼 늙은이의 입은 계속 말을 쏟아냈다.
<... 당신이 그 아이에게 너무 빠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 천한 아이에게 눈을 돌릴 만큼 당신이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타락하지는 않으실 테니까요. 그렇지만, 규율은 규율입니다.>
<무슨...>
미처 항의를 하기도 전에 무당은 말을 종결시켰다.
<당신과 동침한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태양신을 위해 순교해야 합니다.>
그 순간, 카카오타이의 불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손에 짚이는 모든 것들이 힘차게 하늘을 날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요란한 파멸의 소리가 어지럽게 귀를 울리는 가운데에서도 노인은 묵묵히 카카오타이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카카오타이. 그것이 당신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름조차 없는 그 아이가 걸어갈 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눈앞에 서 있는 노인의 그 얇디얇은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완력이라면 여전히 카카오타이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하지만, 그의 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의식은 내일 아침에 진행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밤 아이를 들여보내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늙은 무당은 문을 나섰다. 카카오타이는 무력하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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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몹시도 어두웠다. 올빼미처럼 빛나는 눈을 가지지 않았다면, 카카오타이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작은 어깨와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앳된 얼굴위에 올려진 두 눈이 그를 향해 반짝였을 때, 카카오타이는 그대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이의 눈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밤을 낮처럼 볼 수 있는 전사의 것을 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을 왜 지금까지 제대로 보지 못했단 말인가.
<카카오타이.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이미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소와 다르게 이처럼, 여인네들처럼 곱게 치장한 채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테니.
<그래도 마지막은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있어서 기쁩니다. 태양신을 모시게 되더라도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억센 팔이 아이를 와락 껴안았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평소와 다르게 가녀린 팔이 순순히 카카오타이의 목을 감아왔다. 팔 안쪽에 봉긋하게 솟은 작은 동산이 아이의 미래 모습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 그런 미래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와 함께 도망치지 않겠나?>
카카오타이 스스로도 놀랄 우리만치 뻔뻔한 소리였다. 그는 전사로써 지금까지 적에게 등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이미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치욕스럽게 살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이 과연 전사로써의 덕목에 걸맞은 삶인 걸까?
<<어차피 전사로써도 살아남지 못한 목숨이다...>>
그는 자기 합리화라는 무덤을 파고 있었다. 치명적이지만 편안하고 안락한 끝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운이 좋다면 이 아이와 남은 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카오타이. 제가 알던 분은 그런 말씀을 하시던 분이 아니셨습니다. 언제나 긍지를 잃지 않으셨던 분으로써...>
<날 봐라! 얘야! 지금의 내 모습 어디에 긍지가 있단 말이냐? 네 눈에는 이 늙어빠진 종마 같은 형상의 중늙은이가 보이지 않더냐?>
자포자기한 심정이 카카오타이와 달리 아이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취하셨군요.>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허쉬쉬도 마찬가지이다.
<달빛에 취하셨군요. 저 악마 같은 달의 꼬임에 빠지셨군요.>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어두운 하늘에 귀귀하게 빛나는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아이는 말했다. 카카오타이는 처음 아이를 만났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때도 달의 꼬임에 넘어갔더랬지.>
체념과 함께 달콤하면서도 쓰디 쓴 카카오 같은 추억을 돼내이며 그는 눈을 감았다. 달빛만큼이나 차디 찬 아이의 입김이 그의 눈을 감쌌다.
결심은 이미 섰다. 떠오르는 새로운 태양을 맞을 때까지도 카카오타이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지금 이 순간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그 결심은 부동의 위치를 잡을 것이다.
<꼭 살아 남으셔야 합니다.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카카오타이 당신만은 꼭 사셔야 합니다. 저는... 바람결에 제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그 한 순간만큼만 저를 기억해 주시면... 만족합니다.>
몹쓸 태양빛이 아이의 마지막 미소를 금빛 차양 막으로 가려 버렸다. 아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부서지는 파도처럼 허옇게 돋아난 치아뿐이었다.
이윽고 요란한 북소리와 야만적인 함성들이 들려왔다. 때가 된 것이다.
의식에 따라 아이가 먼저 앞장을 섰다. 쏟아지는 금빛 창살 사이를 걷는 아이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살아생전 그토록 아름다운 것을 본적이 있었던가? 이 저주받을 제물 의식이 이토록 환희로 넘쳤던 적이 일찍이 있었단 말인가?
재단 앞에 이르러 작은 손이 뱀처럼 일그러진 칼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곧바로 카카오타이에게로 향했다. 망설일 기색도 없이 그는 칼을 집어 들었다. 무릎을 꿇은 아이의 얼굴은 숙여진 채였다.
카카오타이는 마지막으로 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긍지 높은 전사의 싹을 간직한 순수한 눈을 보고 싶었다. 강제로 젖혀진 얼굴은 변함없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토록 그가 원하던 그 눈만큼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을 할 때였다.
서늘한 칼날이 목을 훑고 지나갔다.
평소의 의식 순서와는 달랐다.
좌중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요란한 북소리도, 무당의 숨을 헐떡이며 추는 춤사위도 세상의 모든 것이 일순간 멈추었다. 붉은 피가 재단을 흠뿍 적시고 난 뒤에 땅으로 스며들었다.
눈을 부릎 떴을 때야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야만인들의 함성이 다시 울려 퍼지고, 북소리가 다시 땅을 울렸다. 무당은 춤추듯이 비틀거리며 아연실색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모두가 바라던 함성도, 북소리도, 춤도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아이의 존재 역시 그들이 원하던 바는 결코 아니었다.
용기를 가진 다리가 내달렸다. 미련을 가진 머리가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만, 결국은 다리의 고집이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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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무당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이미 살만큼 산목숨이었다. 카카오타이의 죽음 이후에 부족은 쇠퇴에 쇠퇴를 거듭한 끝에 결국 이웃 부족의 침략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이미 부족의 영욕을 끝까지 보아온 자신이었다. 이제 살만큼 살아온 늙은 목숨이 이대로 거두어진다고 한들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힘찬 발걸음이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차례가 온 것이다. 땅을 딛고 선 발의 주인은 무척이나 젊은 것 같았다. 강인한 힘줄이 그의 다리 곳곳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땅을 박찬다면 단박에 태양까지라도 닿을 성 싶었다.
젊은 손이 늙고 초라한 턱을 들어 올렸다. 태양빛 속에 선 젊은이의 얼굴은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었지만,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삶의 의욕이나 패배에 대한 분함은 조금도 없었건만. 이 무례한 젊은 애송이의 비웃음은 그러한 잃어 버렸던 욕망을 부채질 한 것이다.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정복자. 태양처럼 빛나는군 그래. 그에 비하면 이 가련한 노인네는 당장에라도 꺼져가는 등불만도 못한 존재라네. 마지막 불을 힘겹게 지피기 전에 자네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당신도 알고 있는 이름이요.>
<내가 알고 있는 이름 중에 자네와 같은 얼굴을 한 자는 없었다네. 전사여. 위대한 정복자여. 자네의 이름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네. 만약, 자네를 알았다면 내 생의 크나 큰 영광이었겠지.>
<그 이름을 알아도 당신은 영광으로 생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 미천한 불을 끄는 선물로 이름만은 알려 드리지요.>
<고맙네. 젊은이. 덕분에 죽어서 눈은 편하게 감겠군.>
늙은 무당은 눈을 감았다. 동시에 칼날보다도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내 이름은 카카오타이다!>
2008년 5월 6일 새벽 12시 33분 완료.
너는 참 유리 같구나... 그래, 사실 난 방탄 유리야.
eBook탐정 이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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