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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토템을 본뜬 재규어 전사]

 

전략 게임 중에는 중세 유럽을 소재로 삼은 것들이 많은데,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아마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임일 겁니다. 역사 시간에 한 번쯤 들어봤을 중세 문명이란 문명은 다들 건드려볼 수 있기 때문에 세세한 다양성이 강점인 게임이죠. 모 영화 때문에 갑작스레 유명해진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라든가 역사 시간에 귀가 따갑도록 들은 고트의 대이동,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해 회자된 살라흐 앗 딘, 20세기 최고의 지도자였다는 징기스 칸까지 푸짐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을 맛보는 기분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캠페인 시나리오가 짧고 가벼워서 역사적인 내용을 겉보기만 훑고 지나간다는 아쉬움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당시 나왔던 중세 전략 게임들 중에서는 이만큼 다양성으로 승부했던 작품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에야 <미디블 토탈 워> 같은 명작들도 많이 나왔지만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확장판에 들어서 북유럽, 중서부 유럽, 중동, 동아시아으로 나누어진 기존 문명 구도에다 남미 문명을 더했습니다. 아즈텍과 마야를 플레이 가능 문명으로 덧붙였는데요. 유럽과 중동, 동아시아가 서로 교류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안면을 트고 지낸 사이였다면, 남미는 이들과 아예 뚝 떨어져 지낸 터라 플레이 방식에 이질적인 면이 많습니다. 우선 당시 아즈텍이나 마야가 말이나 소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반영하여 남미 문명에는 기병 유닛이 없습니다. 그 어떤 문명도 약소하나마 기병 유닛이 있기 마련인데, 아즈텍과 남미에서는 말이라는 걸 구경할 수도 없어요. 화약 연구를 못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도축하는 가축도 양이 아닌 칠면조입니다. 마을 외부로 나가면 늑대 대신 재규어가 주민을 습격하기도 하죠. 어차피 양이든 칠면조든, 늑대든 재규어든 큰 차이는 없습니다만. 여하튼 열대 조류가 날아다니는 유카탄 지형은 이국적인 남미 면모를 부채질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라센과 함께 즐겨 플레이했던 문명이 아즈텍이었습니다. 캠페인 시나리오도 꽤 재미있었고요. 주력으로 등장하는 다른 문명들, 그러니까 브리튼이나 비잔틴, 페르시아, 중국 등은 도시적인 면이 강한 데 비해 아즈텍은 어느 정도 야생미를 간직하고 있어서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문명 대 야만 같은 게 아니라 자연친화적인 면이 많다는 뜻입니다. 동물 토템을 본뜬 재규어나 독수리가 전사로 나오는 것도 신기했고요. 빽빽한 밀림 속의 거대한 도시라는 것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일조했지요. 뭐, 남미 문명을 너무 환상적으로 바라본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허구한 날 판금 갑옷 입고 장검을 휘두르는 기사만 보다가 재규어 털가죽을 뒤집어 쓰고 밀림 속에서 창을 휘두르는 부대를 지휘하니까 느낌이 색다르더군요. 이런 점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매력 중 하나겠지요.

 

하지만 그런 만큼 아즈텍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 등장하기엔 어색한 일면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시기상으로 따지자면야 에르난 코르테스가 16세기에 아즈텍을 침공했으니까 12~16세기를 다루는 게임 배경에 등장해도 나쁠 건 없겠습니다. 캠페인 시나리오도 자연스러운 편이고요. 하지만 캠페인 시나리오를 벗어나면, 이 게임은 중동 사막에서 바이킹 광전사와 일본 사무라이가 칼부림하는 광경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플레이어가 원하는 문명을 아무 거나 택해서 서로 싸우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 덕분에 중무장한 프랑크 기사들과 재규어 전사들이 공성전을 벌이며 맞닥뜨리기도 하는데요. 솔직히 아즈텍이나 마야가 철기 무기를 갖추고 공성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지라 아무리 게임이라도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한 문명끼리 싸운다면야 대체 역사인 셈치고 그럭저럭 넘어가겠지만, 아즈텍과 마야는 다른 중세 문명이랑 붙여놓기가 껄끄럽다는 거죠. 물론 남미 역시 찬란한 도시 문명을 꽃피운 게 사실이지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같은 공성전 게임에는 그 도시 문명이란 게 별 일조를 못합니다.

 

게임 내에서 살펴봐도 아즈텍이 비잔틴이나 사라센 같은 문명을 이기기란 꽤 어렵죠. 강력한 기사가 없으니 돌격에서 일단 밀리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궁수가 없으니 치고 빠지기를 할 수도 없습니다. 공성 무기가 강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나마 보병이 좀 빠를 뿐인데 보병 하나 가지곤 어떻게 해볼 전략이 안 나옵니다. 튜턴 기사단처럼 갑옷으로 온갖 공격을 무시하고 쳐들어가는 방식도 아니고 말이죠. 기동성, 화력, 방어력 등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습니다. 이게 다 역사 속의 아즈텍 문명이 그랬다는 걸 바탕으로 만든 거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만. 실제로 아즈텍이 투르크랑 싸웠든 게임 상에서 아즈텍이 투르크랑 붙든 간에 남미 문명에 승기가 돌아갈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은 듯 보입니다. 동물 토템처럼 차려 입고 싸우는 모습이 신기하긴 하지만, 그게 판금 갑옷을 뚫을 힘을 주진 않지요. 개인적으로 아즈텍의 매력이라고 여겼던 부분이 실제 전력에서는 큰 도움이 안 된다고 할까요.

 

아즈텍이 나오는 전략 게임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만 있는 건 아닙니다. 코르테스가 남미를 침공한 건 대단한 사건이라서 이를 소재로 한 중세 전략 게임도 꽤 있는 편이죠. 하지만 그런 게임들을 봐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전략이나 병기 수준이 고대를 벗어나지 않은 상태라 다른 문명과 전투하면 어색한 건 마찬가지. 편파적으로 바라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아즈텍은 중세 문명들 사이에서 너무 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예전에도 한 번 이야기했지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저렇게 서로 다른 문명들이 격돌하는 모습이 대체 역사를 보는 듯해 재미있습니다. 물론 만약에 이랬다면?이란 가정도 없고 실제 역사를 비트는 면도 없어서 대체 역사 게임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그에 부합하는 재미를 주는 건 사실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