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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 인 컨플릭트는 매시브 엔터테인먼트가 2007년 발매한 실시간 전술/전략 게임입니다. 소비에트 어설트가 조만간 나올 판국에 다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워싱턴 트레일러. 참고로 게임 중에는 워싱턴이 날아가는 장면이 없습니다. 아마도 초기 단계에서 삭제된 시나리오일지도 모르고, 혹은 후속작에서 써먹을 이야기일지도 모르죠.

 어쨌건, 월드 인 컨플릭트(이하 WIC)는 1989년 소련의 미국 침공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련이 서독을 침공하고 유럽을 휩쓸다, 넉 달 뒤 상선으로 위장한 함대를 시애틀에 상륙시켜 미국까지 쳐들어오지요. 전자는 뭔지 모르게 톰 클랜시의 붉은 폭풍이 생각나고 후자는 영화 붉은 새벽이 생각나긴 합니다. 모티브라고 봐도 좋을 것 같고요. 근데, 소설에서 묘사되는 3차 대전의 이야기가 그럴듯한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전 잘 모르겠어요. 유럽을 제외한 나라들이 뭘 하는지는 몰라도 전쟁이 몇 달이나 질질 끌고 미국의 졸라짱쎈 6함대가 (어떻겐진 몰라도) 간단히 작살나고 그제서야 중국군이 한국으로 밀고내려오고 미국 본토에 상륙하는 부분에 이르면 뭔가 좀 이상한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큰 상관이 없는 게 WIC의 싱글플레이는 전장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데 치중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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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맞이한 아이. 그래픽 수준을 보면 제 컴 사양을 추정 가능합니다.

 WIC는 비교적 규모가 작고, 전술시뮬과 전략시뮬 사이의 애매한 공간에 적절히 걸쳐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플레이어는 일꾼 뽑아 자원 캐서 팩토리 올리고 유닛 뽑는 대신 지극히 제한된 숫자의 유닛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하죠. 게임 자체는 역시 그라운드 컨트롤을 만든 매시브라서 그런지 그라운드 컨트롤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그라운드 컨트롤 1편에서 꼭 있던 유닛의 스페셜 어빌리티가 고스란히 넘어왔습니다. 물론 SF물인지라 무인기관포탑 설치라던가 EMP 같은 요상한 기술이 많던 그컨에 비해서 시대가 현대니까 끽해야 TOW 미사일 발사라던가 연막탄 사용 정도가 고작이긴 합니다만 어쨌건 요긴한 건 마찬가지죠. 그컨 2편에서 적을 죽이거나 특정 지역을 점령하는 게 게임의 목표고 점령할 때마다 자원을 주는 방식 또한 고스란히 계승되었고요, 아, 그리고보니 그컨 2에서처럼 역시 수송기로 새 유닛을 떨궈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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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중간중간 나오는 일러스트 중에는 꽤 괜찮은 게 많더군요.

 이런 방식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공장 짓고 탱크 만드는 것보단 조금 현실적으로 보일는지 몰라도, 게임 자체는 현실성보다는 재미를 선택했습니다. 등장하는 유닛들은 가위바위보의 상성단계가 명확해서 이를 잘 이용해야 하고, 플레이어는 지원 포인트를 모아서 어디선지는 몰라도 순식간에 날아와서 떨어지는 포격이나 화려한 효과가 난무하는 공군 지원 등을 써서 엄청난 물량을 맞상대해낼 수 있죠. 운용할 수 있는 유닛의 숫자가 지극히 적어서 게임 방식이 난이도가 있어 보이지만 한편으로 손실된 유닛은 조금 기다리면 자원으로 고스란히 환원되고 유닛을 파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경험치가 없는 새 유닛을 사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큰 손실은 아닙니다. 뭐, 그렇다고 유리할 건 없지만 최소한 그라운드 컨트롤 1에서처럼 경험치 쌓인 유닛을 다음 미션으로 가져가는 것도 아니니까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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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라 강철의 비! 제 컴에서 찍은 거 올리면 괴로워하실까 봐 겜스팟에서 가져왔습니다.

 솔직히 WIC는 자원 따지면 혼자서 한 다스 유닛도 굴리기 꽤 힘든 게임입니다. 사실, 1024*768 해상도에선 20유닛 이상 뽑으면 유닛 아이콘이 게임 화면에 전부 표시가 안 됩니다! 허나 무슨 TRPG도 아니고 명색이 전쟁인데 대규모 물량을 동원하는 맛이 있어야 할 터, 매시브는 컨트롤 숫자를 늘리지 않고도 이게 가능하게 하기기 위해 싱글플레이에서는 AI 유닛을 대거 동원하고, 멀티에서는 플레이어간의 협력이 필수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당연히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유닛 숫자가 작을수록 마이크로매니지먼트가 중요하고 게임이 실시간이니만치 정신없이 마우스를 놀리게 되는, 액션 게임에 가까운 경향이 짙어집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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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씬에서 항상 뒷모습만 보여주는 친구가 주인공 파커입니다. LC2 차고 M16 들고다니는 것 보면 병과가 분명 보병인데 어째서 기갑과 헬기까지 지휘하는 건지는 의문. 참고로 왼쪽부터 배넌, 소이어, 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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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어는 파커라는, 알렉 볼드윈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지만 플레이어의 감정이입을 위해서인지 얼굴을 보여주지는 않는 미 육군 중위(이상한 건, 미션 시작 전의 나레이션에선 목소리가 나오는데 컷씬에서는 파커가 말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는 뒷모습만 나옵니다)의 역할을 맡아 미국 본토의 소련군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중위라는 계급에서 알 수 있듯이 파커는 중대장이고, 더 많은 물량은 보통 다른 중대장 두 명이 운용하게 되죠. 매시브에서는 이게 콜 오브 듀티 같은 게임에서 AI 아군들이 플레이어와 함께 돌격하며 전쟁 분위기를 연출해주는 데서 영감을 따서 전략게임에도 적용시켜 보자고 한 거라는데, 기실 시나리오를 보면 플레이어는 상관의 미친듯한 잔소리를 들으며 나머지 AI 중대장 두 명 뒤치다꺼리 해주러 뛰어다니느라 정신 없긴 합니다. 늘상 파커! 배넌이 못 버티니 네가 가서 대신 막아! 파커! 웹도 힘들다니까 후퇴할 시간 좀 벌어봐! 파커! 다른 두 명이 빌빌대는 동안 네가 공격해! 따위로 진행되지만, 사실 AI는 괜찮은 편이고 나름 꽤 잘 싸우기에 직접적인 부담은 안 되는 편입니다. 역시 콜 오브 듀티에서처럼 플레이어에게 힘든 일은 다 시켜먹는 부려먹기의 일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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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너처럼 형편없이 후퇴하진 않았을 거다!"라고 압도적인 소련군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전쟁터 한복판의 아들에게 외쳐대는 월남군 참전용사 아버지.

 물론 싱글플레이 시나리오도 규모가 큰 전쟁 자체보다는 보다 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그리 치밀하거나 엄밀하게 전개되는 건 아닙니다. 플레이어 이외의 다른 두 명의 중대장인 웹과 배넌, 대대장인 소이어, 그 가족들과 워싱턴 주방위군 병사 두 명 같은 등장인물들에 대해 게임 중간마다 짧은 컷씬으로 각자가 처한 상황과 성격을 보여줍니다. 붉은 폭풍의 공저자인 래리 본드가 각본을 썼다고 하는데, 컷씬들은 영화적이면서도 부담 없도록 자연스럽게 처리되어 있고 목소리 연기 등도 굉장히 그럴듯합니다. 차라리 이런 그럴듯한 스토리에 다소 아케이드적인 게임 성향이 안 어울리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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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어머니.

 물론 가장 비중있는 인물이라면 일견 무능하고 까칠해 보이는 배넌일 겁니다. 시애틀 침공에서부터 게임이 시작되었다가 갑자기 시간대를 뒤로 돌려 전개되는 싱글플레이는 순전히 배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니까 말이죠. 어쨌건 싱글플레이 시나리오는 지나치게 많은 걸 설명하거나 언급하지 않은 채 다큐멘터리마냥 최소한도의 정보만 ‘보여’주고도 전쟁에 휩싸인 세계(world in conflict) 속에서도 어쨌건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서, 충분히 플레이어의 감정을 움직일 만한 반응을 이끌어내지요.


뉴욕 트레일러. 평화롭게 시작해서 천천히 상황을 드러내 보이는...이 게임의 연출은 뭔가 싸한 게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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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싱글플레이에서는 블랙유머에 가까운 디테일에 신경 쓴 모습도 여럿 보입니다. 위의 컷씬에서는 관광 안내판을 떼다가 전술 지도랍시고 쓰고 있습니다! 핵폭탄이 떨어지는 마을 한복판에는 미사일 동상이 세워져 있고요,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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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적으로는 물론 좋은 컴퓨터가 필요하겠지만 눈 돌아가는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략게임이 FPS 수준에 가까운 그래픽을 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WIC는 인게임 그래픽을 캐릭터들이 클로즈업으로 나오는 인게임 컷씬으로 써먹어도 이질감 없을 수준의 그래픽을 자랑하죠. 완전 실시간이라 게임이 워낙 정신없이 돌아가는 판국에 구경하긴 쉽지 않지만 크리스마스 트리라던가 간판 같은 소소한 것까지 신경을 많이 썼고, 자유의 여신상이나 시애틀 타워 따위도 근사하게 등장합니다. 연막효과나 광원효과 따위도 말할 나위 없고요. 무엇보다 최적화도 괜찮게 된 편이라 2004년에도 그리 좋지 않았던 제 컴퓨터로도 최하옵(물론 제가 보기엔 거의 플레이스테이션 1 수준의 화면이지만, 이건 화면에 오브젝트가 넘쳐흐르는 전략게임이란 말입니다.)에서, 화력 지원과 폭격이 도배될 때도 꽤 안정적인 30프레임을 낼 수 있더군요. 음향효과도 우수하고, 사운드트랙 또한 적절합니다. 80년대 음악이 중간중간 흘러나오고 작은 오케스트라 데려다 만든 자체 OST도 퍽이나 근사해서 게임의 분위기를 잘 고조시켜 주죠. 당장 위에서도 보셨지만 컷씬에서 음악 써먹는 수준만 해도 예술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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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B2와 이걸 바라보는 아이.

 어쨌건 WIC는 충분히 근사한 게임입니다. 싱글플레이는 격렬하면서도 재밌으며 멀티플레이 역시 마찬가지죠. 인터페이스부터 게임 시스템은 깔끔하기 그지없고, 다른 여러 부분들도 충분히 완성도 높으며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전개됩니다. 딱히 욕할 부분이 없으니 리뷰는 당연히 짧아집니다. 남은 것은 후속작을 기다리는 것 정도일까나요.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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