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양한 점에서 미루어볼 때 적들은 페드릭 포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싸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말았다. 어느 영화나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극히 빠른 움직임을 구사한 것이 아니었다. 적병들은 마치 질식하듯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을 뿐이었다.
  “뭐…. 근데 생각해보니까 마땅히 갈 데가 없네. 벤젠 저 녀석은 도움이 안되네. 쩝….”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호루스 보병이 들고 있던 기다란 총기를 쥐어오는 페드릭. 중사를 비롯한 대원들은 그의 행동에 할 말을 잃었다. 대원들은 페드릭을 처음 만났을 때도 저 현상과 비슷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정신적인 충격도 이 정도에 그칠 수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염력.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설명으론 단순히 원하고자 하는 대상의 물체를 맘먹기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나와 있지만 직접 당해보면 그런 설명은 단순한 과학자들이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강하작전이 개시되기 일주일 전 쯤 페드릭이 자신에게 해준 말이 있었다.
  (백날 뛰어봐야 니들은 벼룩에 불과해. 왠지 아러? 벼룩의 눈으로는 무슨 발악을 하든지 세상을 볼 수 없걸랑. 그 눈만 좀 어떻게 바꾸면 참 좋을 텐데…. 아쉽네 그려.)
  “…….”
  그때는 뭔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이 행성에 강하하고 나서부터 그 말이 점차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페드릭이 뜻한 것은 인류를 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나저나 저 작자는 왜 하필 자신 같은 인간에게 그런 말을 해준 것일까.
  “으으….”
  뒤늦게 의식이 돌아온 벤젠이 진지한 눈망울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페드릭에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따악!
  “아니. 왜 때리신데?”
  “어쭈. 반말? 아직 잠이 들 깼냐?”
  “아!? 죄송합니다.”
  “…….”
  도저히 생사가 오고 가는 작전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두 인물의 태도는 실로 가관이었다. 분명 그 둘의 휴대용 생체감지 센서에서도 추가로 적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을 텐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떠들고 있었다. 잔뜩 진지해진 허버트 중사가 페드릭에게 다가가 적의 접근을 알리려 했으나 되려 싸움에 휘말리는 꼴이 돼버렸다.
  “야…! 중사. 나한테 온 김에 뭣좀 물어보자. 내가 잘못했냐? 얘가 잘못했냐?”
  “예? 무슨 말씀인지….”
  “난 여기 뛰어들기 전에 분명 대원들한테 신호를 보냈어. 그치? 그런데 저 녀석 혼자 바보같이 엎드려 있다가 죽자 살자 간신히 왔잖아! 이래도 내가 잘못한 거냐? 난 사전에 분명 내 뜻을 전했어.”
  “아니, 대령님. 그건 좀 너무 한거 아닙니까? 아무 말도 없이 멋대로 뛰가놓고 저한테 그러시다니요! 전 통역관만 맡고 있을 뿐이지 제국법적으로는 군인이 아니라서 그런 찌질한 손동작이 뭘 의미하는 건진 하나도 모른다고요! 분명 연방에 협조할 때 말했잖습니까! 군 관련 업무 중 생명에 지장되는 일에 대해선 절대로 간섭을 받지 않기로요. 아깐 뭐였습니까. 그리고 아주 아까도 그렇구요! 제가 아까 대령님 그냥 그대로 내버려뒀으면…!”
  “바퀴벌레 다리털 뽑아 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내가 그깟 호루스 애완동물들한테 당할 정도로 약해보이냐? 니는 1회용이여. 그리고 협조 조건 중에 그런 게 어디 있냐? 애당초에 호루스랑 맞선다는 거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구먼. 넌 자기 나라에서 직접 써논 걸 바꿀 셈이냐? 이왕 애들 오는 김에 잘됐다. 허버트 중사! 아까 정찰 나갔다고 하던 대원은 어떻게 됐지?”
  나름대로 기나긴 말다툼이 잠시 휴전을 맺기 무섭게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오는 베레튼 상병을 가리키며 허버트 중사가 말했다.
  “적 보병한테 쫓겼나봅니다. 아주 왕창 몰고 오는데요.”
  아까만 해도 있었던 진지함은 어디로 갔는지 중사는 극도의 냉정을 유지하며 그가 달려오는 너머로 소총을 겨누기 시작했다. 페드릭은 뒤늦게야 생체감지 센서에서 점점 수가 불어나는 개체들을 의식하고는 벤젠에게 장교용 권총 한 자루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잘났으면 아까 나까지 덩달아 태울 기세로 한번 저놈들이나 해결해봐라.”
  “아… 아니. 잠까ㅡ. 아까 그건 상황이 여의치가….”
  아까와는 다르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벤젠. 사실 페드릭은 궁금한 마음에서 그를 떠보려한 것이었다. 아까 그 넓은 범위를 대상으로 힘을 퍼붓고도 멀쩡하게 서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옵니다!”
  다급해진 목소리로 외치는 허버트 중사 덕에 벤젠은 얼굴이 시퍼레졌다. 그리고 뒤이어 복도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외침소리와 각종 총성들. 소리들이 점점 커져오자 벤젠과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한 소대원들은 각자 사격 자세를 갖추고 적들이 오고 있는 방향을 향해 조준했다.
  “대령님. 적 보병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젠 기습이라는 말조차 무색합니다. 어쩌죠?”
  “뭘 어찌해? 그냥 초토화시키면 되지.”
  “하지만 지금 이 병력으로는 아까 대령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밀리게 될 겁니다!”
  허버트 중사는 단어 하나하나를 강조하며 그에게 말했다.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라고 수도 없이 겪어 왔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더 이상은 볼 것도 없었다. 이건 막장이다. 그것도 주체할 수 없는 막장인생. 저 인간의 정신세계는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특히 가이아 연방국에서 인간의 신체적 한계 능력을 거의 극한까지 끌어 올리는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슈퍼 솔져나 다름없는 군인의 눈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5달 전 외계인과 있었던 격전 이후 극히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고 연방국에선 전설적인 인물이라 불리는 존재가 직접 지휘를 한다고 해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왔는데 정작 만난 인간의 정체는 바로….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와 심히 불량한 말투를 자랑하는 청년이었다.
  거의 한 4달 동안 허버트 중사를 비롯한 20명의 대원들은 페드릭과 같이 살아야만 했다. 군사 훈련이라곤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 보이는 저 청년에게 그들은 말투와 성격이 개조될 정도였다. 그들이 저 청년을 “대령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까지 걸린 시간도 그와 같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앞서 그가 자신에게 말해준 것 듣지 않은 걸로 쳐보자. 솔직히 말해 자신이 그에 대해 최대한의 성의를 가지고 표현하고자 한다면 단 3글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싸이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허버트.”
  “예. 대령님.”
  허버트 중사는 대답 뒤에 꼬박꼬박 대령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약간 거슬린 모양이었다.
  “…뒤에 호칭은 좀 빼주면 안될까. 심히 거슬리는데. 아, 그건 그렇고…. 혹시 가져온 장비 중에 수류탄 같은 건 없나? 벤젠 저 녀석 내뺐으면서 은근히 갈 기세인데….”
  “설마 저 분까지 같이 폭사시킬 생각은….”
  “아니야.”
  “…….”
  “그러니까 일단 줘봐.”
  마지못해 건네주자 페드릭은 잽싸게 충격 신관으로 작동되는 수류탄을 낚아채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대상은 막 힘을 방출하려는 벤젠에게. 그는 아직 페드릭의 알 수 없는 의도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화아아아….
  보이진 않지만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리기 시작했다. 페드릭을 비롯한 대원들은 벤젠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광경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조용히 그를 보던 페드릭은 기대된다는 듯 허버트 중사에게 말했다.
  “잘 봐둬. 저런 거 평소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야. 그런데 저놈은 불 쇼는 안하고 기온만 높이는 건가. 애매한 능력일세.”
  휙!
  페드릭은 중사가 저지할 틈도 없이 곧장 손에 들고 있던 자그마한 수류탄을 벤젠에게 던졌다. 하지만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수류탄은 바닥에 떨어져도 폭발하지 않았다. 허버트 중사를 비롯한 대원들은 경악한 얼굴로 페드릭을 쳐다봤다.
  설마 했는데 진짜 던질 줄이야.
  “신관이 녹아버릴 정도인가 보네…. 저 녀석이랑 파티플레이는 글러먹었군.”
  대원들의 생각들이 들릴 리 없는 페드릭은 나름대로 불만 가득한 어투로 투덜거렸다. 벤젠이 서있는 곳에서 슬슬 화끈한 열기가 전해져 오고 그와 동시에 대규모로 추정되는 적 보병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소리가 시작했다. 벤젠이 본격적으로 몸속에 있는 힘을 끌어내기 시작하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열기가 그의 상체를 삼켰다. 벤젠의 의지로 이루어진 영체가 물질화가 되면서 주변 공기를 가열하자 그가 입고 있던 장갑복을 서서히 녹이면서 약하게 빛을 내뿜었다. 그는 아직 제 기능을 하고 있는 무전기를 통해 페드릭에게 물었다.
  -정찰 나갔다던 상병은요?-
  그도 베레튼을 의식하고 있었다. 괜히 아군까지 태워버렸다간 일이 곤란하게 될 테니 말이다. 페드릭은 허버트 중사의 보고를 듣고 바로 대답했다.
  “이제 금방 보일거야. 내가 중사한테 먼저 말해놨으니까 상병이 지나가면 곧바로 처리해버려. 기대한다.”
  -…….-
  한 15 초 정도가 지나자 베레튼 상병이 허겁지겁 달려와 벤젠을 지나쳤다. 그리고 벤젠은 기다렸다는 듯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모아놨던 모든 힘들을 앞을 향해 방출 시켰다. 직후 가이아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영체들이 폭이 8미터를 간신히 넘는 복도 전체로 죽음의 파도가 되어 쏟아져 나갔다. 마치 안개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의 영체는 페드릭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각지도 못한 이변까지도….

  제 1진으로 추정되는 병력들이 초토화가 되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오는 무리들의 저항은 호루스의 전투방식을 알고 있는 벤젠조차도 예상치 못한 난수였다. 그는 아까보다 힘의 세기를 더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찢어지듯 아파왔지만 그는 최대한 견디려했다. 페드릭은 그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이상 징후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족으로써 염력 사용으로 인한 후유증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벤젠, 그 정도면 충분해! 엄호할 테니까 뒤로 빠져라. 전대원 사격개시!”
  페드릭은 그의 몸 주위를 역장으로 감싸며 뒤로 빼냈다. 힘을 사용한 이상 사실상 벤젠의 기력은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했으니까. 이제 부하들이 빛을 발할 때였다. 극도로 안정된 사격자세와 난사 중임에도 전혀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 R6 루만 소총. 소총에서 빠져나온 1.85 밀리미터 구경의 레일건 탄환은 극초음속으로 반대편에 있는 적 보병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물론 중무장한 적 보병 측에서 반격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벤젠이 처리한 1진의 병력은 대부분 리플렉터가 많았고 호루스 보병의 차림새는 대체적으로 경장갑에 아주 기본적인 모양새만 갖추고 있었다고 하면 될 것이다. 확실히 적들은 기술적으로 앞서갔다. 반대편에서 난생 처음 보는 섬광들은 탄속은 느렸지만 한번만 맞아도 그 폭발력이 충분히 위협적이었고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할 점은 빗나간 적탄이 반대편 벽에 충돌하면서 일부 리플렉터 블록을 활성화시켜 벽을 살아있는 리플렉터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슬슬 온다.’
  벽에서 활성화가 되어가는 리플렉터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페드릭은 다시 단신으로 적들에게 몸을 날렸다. 저 너머에 뭔가가 있었다. 방금 전 벤젠의 염력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그 파동. 예감이 불길하다고.
  “우리도 전진한다! 자세 낮추고 최대한 상체만 노려!”
  허버트 중사는 웬일로 페드릭의 의도를 엇비슷하게나마 추측하고는 곧바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특수부대용으로 만들어진 중장갑복은 강습형 장갑복에 비해 기동성과 방어력이 월등히 뛰어나다. 저 외계인들이 아무리 기술력이 앞서갔더라도 최소한 치명타 한두 방 정도는 막아줄 것이다.
  쒜엑! 펑! 퍼버벙!! 파악!
  위협적인 에너지 덩어리들이 대원들이 위치한 곳을 향해 수도 없이 날아갔다. 허나 대부분은 역시 빗나가서 벽에 박히며 폭발하는 꼴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적들은 이쪽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뒤늦게 그 점을 깨달은 적들은 주위 조명을 향해 총격을 가했지만 그때는 이미 페드릭이 성공적으로 적진에 난입한 상황이었다.
  허버트 중사를 비롯한 소대원들의 신중하고 정확한 엄호 사격에 페드릭은 마음 놓고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수 십 마리의 리플렉터들이 천장, 벽, 바닥 등 사방에서 몰려들긴 했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그에게는 위협적인 요소가 되지 못했다. 온몸에서 폭발할 듯 방출되는 오라에 신중하게 대처하는 일부 병사들을 보며 그는 뭔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것은 아까 전에 느꼈던 느낌과 일치했다. 그리고 그 느낌이 극에 달했다고 생각한 순간!
  뿌연 금색 오라가 2진이 위치한 곳 뒤에서 피어오른 것을 본 페드릭은 거의 반사적으로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양팔을 감쌌다.
  쿵!
  마치 맨땅을 해머로 내려치는 듯 한 둔탁한 소리. 그와 동시에 페드릭은 어깨뼈가 박살나는 듯한 통증과 함께 벽에 부딫히는 신세가 되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그는 기절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통증보단 오히려 자신을 친 존재가 정확히 뭔지 궁금했다. 뒤에서 엄호 사격을 해주던 대원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꽤나 당황한 모양이었다.
  타다다다다닥!!!
  리플렉터들은 잠시라도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500년 전 카르나드에서 승무원들을 구했을 때와 완전히 같은 느낌.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때를 회상했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대신 리플렉터에 대한 막대한 증오심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염력을 방출하며 리플렉터 무리들의 접근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정체불명의 오라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급조한 공기 덩어리를 날렸다. 그러자 멀리서 호루스 보병 하나가 얼굴 정중앙에 피격당하며 쌍코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녀석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적병이 쓰러지면서 잠시 동안 보인 윤곽은 페드릭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금빛 오라 속에서 유독 푸르게 빛나는 두 눈과 거대한 몸집. 페드릭은 굳은 표정으로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이제야 좀 상대할만한 가치가 있는 놈을 찾은 것 같구먼.”
  그의 말투에선 여유로움이 풍겨졌지만 정작 상황은 그러지 못했다. 양측 간에 총격은 얼마든지 페드릭에게 중상을 입힐 정도로 위협적이었고 덩달아 호루스 보병의 진영 속에 있었던 초능력자는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다방면에서 페드릭을 압박했다.
  샤아악! 사삭!
  “!?”
  무수한 금색의 칼날들이 페드릭의 몸을 훑고 지나가자 방검을 갖추고 있는 강화전투복이 무력하게 갈라놨다. 역시 평범한 물질로는 영체를 간섭하지 못하는 건가. 페드릭은 적병의 추가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곧장 반격을 가했다.
  좁디좁은 복도에서의 전투 양상은 회피와 방어를 포기한 채 무식한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호루스 보병도 기다란 막대기 같이 생긴 무기를 들고 냅다 들이갈기고 있었고, 연방의 특수 부대원들도 그에 질세라 미친 듯이 총질을 해댔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위협적으로 포탄이 교차하는 곳에 페드릭이 있었다.
  그는 온몸에서 영체를 내뿜으며 의도적으로 대기와 마찰시켰다. 옛날 같았으면 엄두도 못 냈을 행동이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자신에게 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걸까…. 염력을 쓸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렇게 여유롭진 않았을 터.
  소리 없는 마찰.
  코앞에서 서로 다른 영체들이 충돌하며 마찰을 일으킨다. 하나는 옅은 금빛,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약간 푸르스름한 빛. 지금 여기 있는 존재 중에선 자신과 저 호루스인, 아이오와 벤젠이나 볼 수 있을 것이다. 페드릭의 표정은 주변 상황과는 극히 모순된 것 같았다. 자조적인 웃음. 여유로운 자세. 언제 어디서 그의 몸을 단발에 파괴할 수 있는 에너지 덩어리들이 초음속으로 스쳐 가는데도 그는 오히려 자세를 높이고 가볍게 호루스 병력이 위치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그 자리에서 바로 적탄에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입니다! 당장 그만 두십시오! 이런 젠장, 키스텀! 내 뒤 쪽으로…!-
  콰앙!!
  부하들이 우려하던 상황이 말끝나기 무섭게 일어나고 말았다. 호루스 보병이 쏜 에너지 덩어리가 페드릭이 있었던 자리에서 폭발했던 것이다. 대인화기치고는 엄청난 위력이다. 저 정도면 유탄의 것과 맘먹는 수준이었다. 가장 먼저 변화를 눈치 챈 것은 호루스였다.
  적 에스퍼가 먼저 알았는지 보병들에게 알린 모양이다. 허버트 중사는 아직 적 에스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지휘관을 잃은 이상 중사는 침투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퇴를 명령하려 해도 어떻게 빠져나가는지는 모른다. 뒤에서 거의 탈진 상태로 뻗어 있는 벤젠은 신경도 안 쓰고 그는 최후까지 저항하기로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적병력 측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방심하고 있던 적병들이 하나 둘씩 뭔가에 맞아 쓰러지고 벤젠은 그 광경을 보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저 사람…. 아직 죽진 않은 것 같은뎁쇼.”
  “?”
  같은 에스퍼로써 그의 시야 전체는 온통 푸르스름한 영체로 뒤덮여 있었다. 조명이 다 박살난 관계로 주위는 극히 어두웠지만 영체가 내는 특수한 파장의 빛이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적외선이나 자외선 같은 빛이 아니었다. 오직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은 세상. 마치 물안경 없이 맨눈으로 물속을 보는 느낌과 같다. 허나 한 가지 납득이 되지 않는 사실이 여전히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주위를 지배하는 저런 고밀도의 영체는 벤젠이 아는 한 일개 사람의 몸이 견뎌낼 수 있는 최대한도를 훨씬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적어도 세비어인 기준으로는. 벤젠의 입장에선 페드릭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단순한 염력 능력자라고만 알고 있지만 자신이 보기엔 그건 단순히 광고에 불과했다. 하나 분명한건 그의 능력이 이미 세비어인의 그것을 초월했다는 것이다.
  연기 속에서 어렴풋이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푸른 안개 속으로 보이는 형체.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일부가 찢겨지거나 본래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도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번에 즉사했을 테지만. 찰나였지만 벤젠은 페드릭의 몸에서 말로는 설명 못할 변화에 머릿속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그때 적 병력이 있는 방향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자신보다는 못하나 그렇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금빛의 영체들이 피어올라 곧바로 페드릭이 있었던 위치로 날아갔다. 비군인이나 다름없는 자신이 보기엔 적 지휘관이 그동안 숨겨왔던 것을 이제야 개입시킨 것처럼 보였다. 적 에스퍼는 단 한명이다. 호루스와의 전쟁 기간 중에 에스퍼를 발견했다는 보고는 한 차례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놀랍거나 하진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으니까.
  벤젠은 페드릭이 안전이 우려되어 즉시 영체를 방출해 적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문제는 그게 희망사항에 불과했다는 것이지만….
  “이런….”
  제국어로 중얼거리며 그는 무력하게 상황을 지켜봤다. 금빛의 영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수한 칼날이 되어 광범위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것도 갑자기 고체로 변해가면서 말이다.
  “!!”
  “악!?”
  시야에 갑자기 엄청난 수의 칼날이 날아오자 중사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거의 기겁하다시피 반응하며 본능적으로 사격을 멈추고 총 전면으로 얼굴을 보호했다. 벤젠은 거의 반사적으로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부으며 대원들이 위치한 곧 바로 앞에 고온의 역장을 생성시켰다. 순간 일반인의 눈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다. 적 에스퍼가 그랬듯 염력을 쓰는 원리는 모두 같았다. 저 앞에 있는 단 한사람만 빼곤 말이다.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무력하게 박살나거나 녹아내리는 칼날들의 모습에 대원들은 반쯤 얼이 빠진 모습을 보였다. 자신들이 아직 죽다 살아난 건 모르고 있었다. 힘겹게 식은땀을 닦아내며 벤젠은 추가 공격의 가능성에 대비해 역장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의 2차 공격 가능성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이어지지 않았다.
  적 병력들 거의 대부분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보병들은 하나같이 뭉툭한 뭔가에 맞아 곳곳이 움푹 패여 중상을 입어 쓰러져 있었다. 벤젠은 영체가 빠르게 거두어지는 것을 보고 전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
  자욱해진 연기를 해치고 생사가 묘연했던 페드릭의 몸체가 둔중한 무언가에 맞은 듯 무식하게 튕겨져 나온다. 한 5~6미터쯤 날아가 무력하게 처박히는 페드릭. 이번엔 또 무슨 일인거지? 이유를 알 리 없는 벤젠에게 어느새 자세를 갖춘 페드릭이 다짜고짜 외쳤다.
  “벤젠, 한 놈이 아니다! 엄호 부탁해!”
  “에…?”
  콰앙!!
  순간 벤젠이 있던 곳 바로 옆에서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났다. 어느새 여기까지?
  먼진 몰라도 적 에스퍼들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만은 확실했다. 허버트 중사를 비롯한 부하들은 지금은 전혀 도움이 되질 못했다. 긴박함에도 불구하고 멍한 표정으로 대기 중인 무리들. 아마 대령이 명령을 내려도 그에 따르진 않겠지. 이건 완벽한 정신 통제였다. 자신까지 영향이 가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그렇게 강력한 존재는 아닌 게 분명하다. 하지만 여차하면 자신도 저 꼴이 날 가능성이 있었다. 설마 했는데 호루스인에게도 정신계열의 능력자가 있었을 줄ㅡ.
  “!”
  심장이 압박을 받고 한순간 전신으로 전해지는 피의 흐름이 중단된다. 시야가 한 점으로 좁아졌다가 이내 빛을 찾는다. 벤젠은 헛숨을 내뱉으며 쓰러질 뻔하다 간신히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현상에 저항하듯 거세게 반응하는 영체의 폭발.
  “쿨럭….”
  “정신 똑바로 차려 이놈아! 니까지 당하면 나 혼자 어떻게 버티라는 거냐?”
  호흡곤란에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을 힘겹게 참아내고 있을 때 페드릭이 벤젠에게 외쳤다. 벤젠은 지친 눈으로 페드릭을 쳐다봤다.
  ‘혼자 다 하고 있으면서….’
  이것 외에 떠오르는 생각은 딱히 없었다.
  웅웅웅….
  방심하고 있을 때. 어차피 자신에게는 반격할 기력도 없었으나, 암흑 속에서 금빛 칼날이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쇄도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허나 미처 뭘 해보기도 전에 푸른 색 역장이 벤젠을 보호했다. 이 모든 게 찰나의 시간이었다.
  페드릭이 자신을 쳐다보며 뭐라 씨부렁거렸다. 억양으로 볼땐 욕설을 내뱉는 것 같았으나 연방 공용어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 아주 오래된 언어인 것 같았다. “이런. 굼뷔쉵….” 이후로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별 생각 없이 호루스에게 달려드는 페드릭을 보며 문득 납득이 되지 않는 궁금증이 생겼다.
  어째서 50주기 전 제국군은 저런 에스퍼를 보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지, 지금 자신이 받는 대우도 상당한데 어째서 저 존재는 스피카 대전에서 승리한 후 가이아인에게 붙게 한 것일까 말이다. 당시에 제국이 굉장히 위기였다고는 하지만 스피카 대전 이후 50주기 동안 페드릭 포터를 데려올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부에서는 50주기간의 시간 동안 페드릭을 데려올만한 기술력도 충분했고 그럴만한 가치도 충분했다. 아무리 인류 중에서 신체적으로 가장 타고난 세비어인이라도 방대한 양의 영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존재는 굉장히 희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상부 층에서 그에 대해 일절 관심을 끊었다는 것은 뭔가 그의 존재를 대신할 만한 존재가 생겼다고나 하는 것 밖에.
  하지만 전에 그런 존재에 대해선 그 어디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역사상으로 미루어 볼 때 페드릭은 제국과 연방국에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기여를 한 전설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으나 최상층 지도부에서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페드릭 포터는 어떠한 이유로 인해 양측 군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제국이나 연방에게 이렇게 찬밥 신세를 받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마 대령이라는 계급의 최고 영관급 장교가 최전선에서 홀로 적들에게 맞서고 있다는 법칙은 세상의 어느 군대를 뒤져봐도 없을 것이다.
  그런걸 아는지 모르는지 페드릭은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힘을 방출하며 오른손에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전에 보여주던 푸른색과는 전혀 상반된 느낌의 순백색의 영체였다. 몽롱하게 흘러나오는 빛이 벤젠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강하게 그것을 부정했다.
  마치 천사의 탈을 쓴 악마라고나 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그가 호루스 에스퍼들에게 달려든 이후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백색 섬광이 퍼져 나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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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무엇을 쓰고 있는 건가.
프롤로그 마지막화 이후 최장길이 달성했는데 이야기 전개는 50%로 느려진 기분입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군대갈 때가 되니까 연재속도가 급 빨라지는 이유는 대체...)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