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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기업인의 기부금 횡령 사건이 사실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시 중앙보안청 수사본 발표에 따르면…”

 

이건 아니에요.

 

비사 보안서는 어제 길거리에서 자가용 인공수로 난동을 부리던 10대 세 명을 특수 폭력 및 난동 평의로 구속했습니다. 어제 새벽…”

 

이것도 아닙니다. 이런 우아하지 못한 게 아니에요.

 

그 동안 환경단체가 공해업소로 지적한 12개 기업이 감사결과 실제로 규정 공해배출량보다 훨씬 높은…”

 

아뇨, 이런 일은 제가 할 일이 아니죠.

 

비즈 프라센은 왼쪽 귀에 낀 이어폰을 톡톡 두드리며 뉴스에 집중했다. 오늘도 늘 그렇듯 평범한 하루다. 비즈는 어느 뉴스에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비즈에게는 그저 같은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자신의 시선을 끌려면 더 우아한 것이 필요하다. 눈꼬리가 올라간 연회색 눈은 고요했다. 마치 모래 속에서 금이라도 골라내는 모양이다. 책상 위에 턱을 괜 채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이어폰에서 들리는 리듬을 느끼며 살짝 고개도 까닥여본다.

 

 

살짝 눈을 떠보자 앞에서 필기를 하고 있던 담임과 눈이 마주쳤다. 올해로 나이가 서른 다섯인 깐깐한 지리 선생이다. 비즈는 미소로 대답해주려고 했지만 이미 선생은 재빨리 시선을 옆으로 돌린 뒤였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수업 열심히 하세요.’ 비즈가 선생에게만 들릴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아직 신혼의 즐거움을 만끽할 때였지만 선생의 얼굴은 얼음장을 걷는 것처럼 창백했다. 하긴, 이런 폭탄을 껴안고는 그리 편하게 살기는 힘들지. 확실히 선생 말고는 아무도 비즈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비즈는 다시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사회면 뉴스에 신경을 집중했다. 깊디 깊은 어둠 속에서 가장 깊은 어둠을 골라 실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 오늘은 어떤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평소와는 다른 일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안녕하세요 손님? 어떤 걸 찾으십니까?”

 

먼지 하나 없는 깔끔한 가게다. 은은한 하얀 조명이 천장과 바닥에서 흘러 나온다. 가게에는 어둠이 한 조각도 없다. 그저 빛만이 쌓여 있을 뿐이다. 넓고도 한적한 매장을 거니는 사람들도 가게처럼 산뜻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자는 점장의 인사를 받으며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가게 문을 열었다. 갈색 트렌치 코트에 중절모, 거기다가 슈트케이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이다. 점장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남자를 가늠하려 했다. 서른 살쯤 되었을까?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자른 남자는 동작이 절도 있게 곧다. 군인이라기 보다는 엘리트 은행원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이런 쪽이 씀씀이가 좋다.

 

다목적으로 쓸 걸 찾고 있습니다만.”

 

점장의 얼굴에 바로 화색이 돌았다. 클레임이나 AS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어떤 용도로 사용하실 겁니까? 가사전반이라면 터너 사바가 좋을 겁니다. 터너 사 제품이니 가격도 적당하고 성능도 괜찮으니까요. 청소나 요리뿐이라면 역시…”

 

가게 점장은 말없이 먼 곳을 처다 보는 남자를 보더니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남자는 정신이 딴 데 실려있는 모양이었다.

 

저기, 손님?”

 

남자는 점장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어깨를 잠깐 움찔거렸다. 남자는 민망한 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

 

, 죄송합니다. 오늘은 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오늘 여기 온 것도 그 일 때문입니다.”

 

점장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남자가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는걸 보니 꽤 중요한 일이긴 한가보다. 직장상사나 거래처 사람에게 큰 선물이라도 할 셈인지도 모르지. 점장은 가능한 부드럽게 웃으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선물이라면 에베노스 사의 것이 좋을 겁니다. 이름도 있고, 신뢰성도 높죠. 다른 회사 제품보다 뛰어나다는 건 자신할 수 있습니다.”

 

가격도 단연코 높지만. 점장은 일단 찔러보자는 심정으로 한번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남자는 이번에도 멍하니 전등만 쳐다보고만 있다가 퍼뜩 놀라 다시 점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그랬죠. 선물. 여기 온 것도 선물 때문입니다. 저기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남자는 점장에게 자기가 들고 있던 가방을 쑥 내밀었다. 악어가죽처럼 보이는 것으로 코팅된 평범한 슈트케이스. 물론 요즘 세상에 악어가죽으로 가방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악어에게 무슨 짓이냐며 악어 보호 협회가 린치를 할거다. 애완 악어를 위해 집까지 지어주는 정신 나간 작자도 있는 세상인데 뭐. 점장은 대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나 싶어 가방을 다시 주의 깊게 살펴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조 악어가죽 슈트케이스다.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가방이 손잡이에서 떨어져버렸다.

 

괜찮으십니까?”

 

가게 점장이 깜작 놀라 묻자 남자는 소리없이 웃기 시작했다. 조용한 웃음이었지만, 점차 어깨가 격렬히 위아래로 흔들린다.

 

, 손님?”

 

이제 슬슬 점장이 보안군을 불러야 할까 고민하는 순간, 남자는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 쿡쿡 거리며 손을 저었다.

 

, 하하, 잠깐 저 떨어진 가방에 집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고개를 아래로 내린 점장의 눈은 가방으로 향했다. 가방의 뚜껑이 갑자기 벌떡 열리자 점장도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버렸다. 다음 순간에 비하면 놀란 것도 아니긴 했지만. 철컥 하는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열린 가방 안에서는 네모난 금속상자가 반짝거리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달리 문자반이나 정보판이 달리지 않은 심플한 디자인이다. 잠깐 침묵이 흐르자 가방 안에서 가게는 물론이요 거리 전체를 뒤흔들 만큼 커다란 소리가 터져나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폭탄이랍니다. 아마도 전 5분정도 지나면 이 가게를 통째로 날려버릴 만큼 커다랗게 터질 것 같아요. 인생을 마감하기에 이보다도 화끈한 결말은 없겠죠? 안녕하세요? 저는 폭탄이랍니…”

 

귀가 터질 만큼 커다란 소리에 점장은 귀를 막고 얼빠진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도 귀를 막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민망하다는 듯 씩 웃었다.

 

, 이런 선물이죠.”

 

남자는 대충 그렇게 말하려고 했으나 자기를 폭탄이라 주장하는 네모난 상자에서 나오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어차피 이 말을 들을 대상이어야 했을 점장도 비명을 지르며 가게 밖으로 달려나간 뒤다. 점장의 반응이 예상과 딱 맞아떨어졌는지 남자는 피식 웃어버렸다. 점장의 비명은 어느새 바깥으로 전염되어 사람이 가득한 거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폭탄에서 나오는 소리에 어리둥절하던 사람들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모습에 일이 터졌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곧 다른 사람들도 점장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공황상태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남자는 혼돈과 공포로 가득한 거리로 발을 내디뎠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군중 속에서 남자는 여유롭게 혼란을 즐기고 있다. 남자의 갈색 트렌치 코트가 점차 낙엽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그런 걸 신경 쓸 만큼 신경이 여유롭지는 못했다. 천천히 남자의 코트와 모자가 먼지처럼 부스러져 사라지기 시작한다. 갈색 낙엽처럼 바닥에 떨어진 코트는 이내 먼지가 되어 사람들의 발 아래 지워져 버렸다. 남자의 얼굴도, 머리카락도, 낙엽이 되어 지워져 갔다.

 

휴우.”

 

남자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아까의 평범한 모습은 사라졌다. 하얀 정장으로 몸을 감싼 대머리 사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군중 사이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푸른 넥타이에 바람 속에서 말없이 흩날리고 있다. 무작정 도망치려는 사람들과 사람이 내려서 도망치는 바람에 비어버린 차들이 도로를 메워버렸다. 사내는 담뱃불을 붙이더니 매부리코를 쓱쓱 긁고서 담배갑을 주머니 속에 되는대로 구겨 넣었다. 얼마 안가 뒤에서 시원스럽게 폭발음이 들려온다. 남자는 정장 앞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끼었다.

 

괜찮은걸.”

 

 

 

오늘 오전 11, 키루니 구 팔사가의 상점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상점 건물이 붕괴되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키루니 보안서는 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 중이라고 밝혔으나 현재 조사된 정황으로 보았을 때 불특정 대상을 노린 범죄로 추정됩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으나……”

 

괜찮은걸요.

 

 

비즈의 입에 걸린 미소가 살짝 진해졌다. 항상 비즈를 폭탄이라도 안고 있는 마음으로 예의 주시하던 지리선생이 그 미소에 감전이라도 당한 듯 움찔거렸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움찔거린 것은 아니다. 비즈는 잠시 선생과 눈을 마주치고는 싱글싱글 웃으며 이어폰에 들려오는 소식에 집중했다.

 

 

 

서쪽 부두의 밤은 적막하다. 밤에 부두에서 일하길 좋아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고, 특히 서쪽 부두는 좋지 않은 소문도 많다. 어차피 하역작업 같은 것은 낮에만 일해도 그럭저럭 끝나는 법이기에 구태여 밤까지 바쁘게 일할 필요는 없다. 물론 밤에 오는 배도 있긴 하지만 그런 배는 좀 더 설비가 잘 되어있는 테라시카 남쪽 부두를 이용하기 마련이다. 구태여 서쪽 부두를 이용하려 하는 사람을 얼마 되지도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깊은 밤에 서쪽 부두를 돌아다니는 것은 경비원과 경비용 인공수뿐, 그게 아니면 모두 수상한 작자라는 말이 된다. 그런 현실인지라 서쪽 부두 24구역의 담당 경비원 자레는 오늘도 가급적이면 아무도 만나는 일이 없으면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반쯤은 오기로 취업전선에 뛰어든 자레는 별 생각 없이 편한 일이라는 생각에 부두 야간 경비에 뛰어들었다. 일이라고 해봐야 가끔씩 초소에서 나와서 부두에 가득 쌓인 컨테이너 사이를 손전등을 들고 밤 동안 내내 돌아다니는 게 다다. 아직은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워낙 편한 일인데다가 시급도 나쁘지 않다. 부두의 도시와 접한 구역이라면 범죄조직과 관련된 거래가 벌어진다던가 화물을 노리는 강도 같은 것들이 있다는 소문도 들리지만 24구역은 부두 중심구역이라 달리 그런 일들도 없다. 자레는 오늘도 별 일 없는 밤이 되리라 생각하며 하품을 했다.

 

, 밤에도 열심이네 아가씨.”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자레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왠 덩치 큰 남자가 느긋한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자레는 허둥지둥 손목에 달린 버튼을 눌러 경비 인공수들에게 연락했다. 남자의 차림새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부두 일꾼 차림 그 자체였지만 그게 신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세요? 밤중에 여기 오면 안 된다고요. 일단 신원을 밝히시고요. 특별한 볼 일 없으면 빨리 나가주세요.”

 

자레는 혹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술꾼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남자를 살펴보았다. 덩치 큰 남자는 정색을 하는 자레의 모습에 민망해진 듯 모자를 벗고 옅은 금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이거 참, 요즘은 부두 경비들도 다 깐깐해 졌다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백이면 백 붙잡고 난리네. 오늘 따라 급히 빼내올 물건이 있어서 그래. 여기 공식 허가증도 있으니까, 물건만 빼내고 바로 갈게.”

 

자레는 혹시나 싶어 남자에게 멀찍이 떨어졌다. 자레가 경비용 디지캐스터를 키자 남자의 얼굴과 임시 허가증에 대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레가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가도 된다고 하자 작은 인기척 소리가 들리며 숨어있던 경비용 인공수 세 마리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도마뱀 모양새를 한 매끈한 경비 인공수들은 팔이 없는 대신 꼬리에 날카롭고 섬세한 손가락들이 붙어있다. 아까부터 인공수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깨닫자 덩치 큰 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 세상은 참 얄짤 없다니까. 아무튼 아가씨 일이니 어쩔 수 없겠지 뭐. 그럼 계속 수고해.”

 

남자는 손을 휘적휘적 흔들더니 커다란 컨테이너 앞에 섰다. 귀찮은 게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자레의심정과는 전혀 상관 없이, 남자는 한없이 느긋하게 컨테이너의 패널을 두들겼다. 컨테이너 문은 한없이 느려터진 남자와는 전혀 다르게 맥없이 열려버렸다. 어두워서 안의 내용물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크기나 모습으로 봐서는 어디의 공사용 인공수인 것 같았다. 이 근처 컨테이너도 모두 남자가 연 컨테이너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보면 분명히 그 컨테이너에도 저런 집채만한 인공수가 잔뜩 실려 있을 것이다.

 

아저씨, 뭐하실 거에요?”

 

자레가 높은 곳에 달려 있는 인공수의 조종석으로 버둥거리며 올라가는 남자의 엉덩이를 향해 물었다. 남자의 커다란 엉덩이가 공중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모습은 그리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지만 그로테스크한 흥미를 끌긴 했다. 남자는 대답 없이 올라가더니 시동을 키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이런걸 할거지.”

 

순간 자레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공사용 인공수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그냥 공사용 인공수가 아니었다. 공사용 기구일 줄 알았던 인공수의 팔은 아무리 봐도 굴착기나 천공기는 아닌 모양이다. 훨씬 더 투박하고, 무지막지하고, 값비싸 보이는 그것은 조개가 입을 벌리듯이 쩍 벌어지더니, 흉측한 내용물을 드러냈다. 자레도 입을 쩍 벌리고 뭐라 소리치려고 했지만, 인공수의 팔에서 퍼부어지기 시작한 것들이 낸 굉음이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자레의 머리 한 귀퉁이는 조용히 현재 상황을 분석하려고 했다. 커다랗고 짐승같이 생긴 인공수가 양손에서 무언가를 신나게 갈겨대고 있다. 흔히 말하는 테러라는 거겠지. 주변에 있는 컨테이너들을 무차별적으로 발사하는 모습이 좀 무시무시하다. 아무래도 이번 일의 책임은 자기에게 돌아올 것 같다.

 

잘리겠네.”

 

마침 옆에 있던 컨테이너가 미사일에 맞아 폭파당했다. 충격으로 나뒹군 자레의 이성은 최선을 다해 즐거운 일을 생각하며 도피를 시작했다. 저번에 남자친구와 데이트 갔던 공원은 풀빛이 참 아름다웠다. 샌드위치도 맛있었고.

 

이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자기도 모르게 자레는 혀를 내밀어 피의 맛을 보았다. 익숙지 않은 쇠 비린내가 입안을 가득 메운다. , 한심하기도 해라. 자레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아직도 신나게 뭔가를 갈겨대는 인공수의 조종석이 다시 열렸다. 뚱뚱한 남자가 느긋하게 가슴팍을 타고 내려온다. 시끄러운 총성을 막으려고 귀마개까지 쓴걸 보아 이런 일에 꽤 익숙한가 보다. 자레는 마침내 안심하고 기절할 수 있었다. 덕분에 뚱뚱한 남자의 허물이 벗겨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대머리 남자는 씨익 웃으며 자레에게 다가왔다. 자레의 모자를 제대로 고쳐 씌워주며 남자는 자기 손에 낀 하얀 가죽장갑을 바라보았다. 화염과 폭풍이 주변을 덮쳤지만 남자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하다.

 

정말 훌륭하군.”

 

 

어제 밤 서쪽 부두에서 벌어졌던 테러의 용의자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베나 보안서의 테루고 경감은 범인이 테러 직후 인공수를 무인 모드로 변경한 뒤 탈출한 것으로 보고 주변지역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부두 경비원 자레 기르카 씨의 인터뷰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공식 허가증을 들고 와서 그냥 들여보낸 거에요. 복무규정도 어긴 거 없어요. 전 그냥 배운 대로만 했을 뿐이에요. 설마 겨우 이 일 때문에 잘리지는 않겠…]

 

테러로 인해 관련 기업이 입은 피해액은 총 2 5천만 델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현재퀘스파이어 보험은 인공수로 인한 테러는 피해보상 범위에 들어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기업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곧 소송으로 이어지리라는……

 

 

, 이건 정말 훌륭하군요.

 

비즈는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남학생이 잠깐 고개를 돌렸지만 비즈가 살며시 웃어주자 얼굴을 붉히며 칠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리선생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변한 뒤다.

 

 

 

[글로쉬 부트! 글로쉬 부트의 선제타! 아아~ 크롱이 쓰러집니다! 글로쉬 부트의 호쾌한 어퍼컷을 견디지 못하고 크롱이 쓰러집니다. , 글로쉬 부트가 올라탔군요! 양 주먹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이런, 크롱이 손도 못쓰고 당하고 있어요. 이렇게 허무하게 지는 걸까요? 말하는 순간 크롱이 꼬리로 글로쉬 부트를 밀쳐냈습니다. 크롱의 반격!]

 

두꺼운 강화창에 사람들이 벌떼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거대한 두 금속덩어리들이 치고 받는 광경에 환호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구경이라는 건 의외성이 있어야 재미있는 법이다. 지나가다가 남이 핀 캠프파이어를 보고 환희에 떠는 사람은 어지간하면 병원에 가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싸움구경이 상업화하기는 가장 편하다. 사람 둘만 데려와서 서로 치고 박게 만들면 구경꾼은 오게 되어있으니까. 생각해보면 싸움 구경은 정말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망각 시대 이전의 역사서를 봐도 고대 로마 시절부터 커다란 콜로세움까지 만들며 검투사들이 싸워댔고, 전자시대 이전부터도 격투기는 철저하게 상업화되어 있었다. 하다못해 지금은 어떠하랴. 커다란 기계 거인들이 온갖 상황 아래서 치고 박아댄다.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탄소 근섬유로 이루어진 이 괴물들이 어떤 무지막지한 놈들인지는 망각시대가 잘 증명하고 있다. 옛날 인공수 격투기는 불법이었어도 법을 피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투기장이 만들어졌다. 하물며 인공수 격투기가 합법화된 현재에는 야산이나 사막, 파괴된 시가지에서 비살상 화기로 벌여대는 서바이벌 매치에, 지금처럼 지하벙커를 개조한 특설 링 위에서 몸만으로 싸워대는 럼블 다운까지 온갖 종류의 인공수 격투가 만들어졌다.

 

푸지스, 넌 누구에게 걸었어?

 

강화유리에 코를 박고 있던 깡마른 남자가 옆에서 깡마른 남자와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유리창에 코를 박은 키 작은 남자에게 물었다. 체크남방에 멜빵 청바지. 척봐도 시골뜨기 같은 두 남자였지만 공통점은 그뿐이었다. 모래색 머리칼에 흐리멍텅한 푸른 눈의 마른 남자는 아무리 봐도 어설펐지만, 당근 같은 시뻘건 머리를 한 키 작은 남자는 불독 같은 체구에 불독 같은 얼굴, 불독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크롱.”

 

불독이 짧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모래 머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크롱이야 푸지스.”

 

두 남자가 두 인공수가 주먹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제 3의 인물이 나타났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초로의 신사다.

 

크롱은 못 이겨. 내가 확신하지.”

 

두 남자는 거의 반사적으로 신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멋지게 늙었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 신사는 두 사람에게는 이미 익숙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점심 때면 홀로 투기장을 찾아와서 돈을 거는 남자였다. 이 신사는 항상 따는 축이었다. 가끔씩 잃을 때도 있긴 했지만, 언제나 집에 갈 때는 지갑이 두둑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노신사를 항상 신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치들은 늘 그런 법이지만 그 신사는 어딘가 수상쩍은 데가 있었다.

 

근거가 뭐유 영감.”

 

불독이 물었다.  말이 적은 불독치고는 꽤 적극적인 편이다. 노신사는 대답대신 지팡이로 강화유리 저편을 가리켰다.

 

저걸 봐.”

 

두 남자가 시선을 돌리자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싸우고 있는 두 인공수보다 두 배는 커다란 싯누런 인공수가 경기장 문을 거칠게 뜯어내고 있었다. 인공수 투기가 합법화 될 수 있던 조건은 철저한 규격화와 법 준수였다. 규정에 벗어나는 기체는 절대로 경기장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두 남자에게 노신사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난 오늘 아무에게도 안 걸었어.”

 

누런 괴물딱지가 크롱의 머리를 뜯어내는 것을 보며 노신사가 웃었다. 글로쉬 부트는 이미 커다란 인공수의 발 아래 짓밟혀 있었다. 삽시간에 관중석은 혼돈의 본산지로 변했다. 아무도 노신사가 허물을 벗는 모습에 집중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어느덧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지리선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교실을 나가려 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필사적인 자기 방어 시도는 그의 앞을 가로 막은 소녀에게 저지당했다.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띈 비즈는 두 손을 열에 들떠 빨개진 볼에 가져다 댄 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첸펄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몸에 열이 생겼습니다. 이대로라면 다른 학우들의 면학분위기를 해칠 것 같답니다. 정말 실례되는 일이지만 이만 오후 수업은 조퇴할 수 있을까요?”

 

지리 선생은 항상 듣는 비즈의 핑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그 일이다. 비즈의 본 직업. 첸펄이 한 번 그 실체를 직접 경험하고는 밤 마다 식은 땀에 절어 깨어나게 한 공포의 존재.

 

, . 그러려무나. 진료서는 꼭 끊어오고.”

 

비즈는 빨간 볼에 싱그럽게 미소를 띠었다. 보는 사람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표독스럽고 지독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다.

 

 



삼치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