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지구표준시각 1525시. 태양계 59 - 292.52 섹터.
  무표정한 얼굴의 페드릭. 그리고 약간은 표정관리 중인 칼과 그 외 여러 장교들. 거의 5성 호텔의 로비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브리핑 룸 안에서는 두 가지로 구분되는 제복을 입은 장교들이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견장 하나 없이 검푸른 색을 띄는 무리들과 흰색이지만 약간 은빛을 띄는 무리들. 딱히 회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의사소통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뿐.
  “페드릭. 뭐라 말 좀 걸어봐!”
  분위기가 심히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칼이 페드릭에게 계속 눈치를 주었다. 계급이나 나이 모두 비슷비슷 한 것 같지만 저들이 자신보다 이미 수백 년을 더 살아온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뭔 말을 하라고?”
  “지금 저쪽이나 이쪽이나 통역병이 없잖아! 지금 유일하게 저들과 의사소통이 되는 건 너 뿐이라고! 말이 안 통하는데 우리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확실히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양측 간에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지금 유일하게 두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존재는 페드릭 뿐인데….
  사실상 페드릭도 동족들과 직접 대면하자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금 그의 앞에 나란히 앉아있는 동족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이는 추측할 엄두도 못했으며 대부분 자신보다 훨씬 연장자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오래 전 옛날에 주로 봐왔던 인상이 아니었다는 것. 섣불리 말을 걸기가 매우 부담스러웠다.
  덜컥!
  그렇게 약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전혀 엉뚱한 곳에서 그 문제가 해결됐다. 바로 제국군 측에서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한 젊은 장교 때문이었다. 페드릭보다 더 작은 체구에 가벼운 걸음걸이. 보는 입장에선 장교라기 보단 오히려 일개 사병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그는 칼이나 다른 연방군 장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제국어로 뭐라 주절거리며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페드릭. 저게 무슨 말이야?”
  “5분 늦은 거 가지고 억수로 뭐라 하는구먼.”
  “……?”
  별 생각 없이 답하는 페드릭의 말에 칼은 오랜 시간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새로 등장한 젊은 장교는 같이 가져온 서류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제국어가 아닌 연방 공용어였다.
  “아.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다가 잠깐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말입지요. 전 아이오와 벤젠이고 108함대에서 유일한 통역관입니다. 허나 아직 제대로 공용어를 하진 못하니 미리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을 아이오와라 칭한 그는 품에 있던 서류를 자리에 있던 연방 장교들에게 나눠 주었다. 문장들의 표현이 약간 이상하긴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칼을 비롯한 다른 장교들은 그가 전해준 서류를 보고 절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촉감은 일반적인 종이와 완벽하게 똑같은데도 표면에 뭔 짓을 해논건지 마치 홀로그램 스크린에서나 나올법한 글자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준 것은 단 한 장이었지만 그 종이 속에 들어간 자료의 양은 전혀 제한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용자의 시선을 따라 각 정보를 나열하는 신비한 물건. 이런 것은 가이아 연방에선 아직 개념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아마 과학계에 알려진다면 꽤나 신선한 충격이 될지도 몰랐다.
  “이건….”
  한참을 보다 가장 처음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칼은 서류에 나타난 수많은 좌표들과 유난히 연방국 식민 점령 섹터에만 분포된 몇 개의 점들을 보고 대충이나마 이들의 목적을 파악해낼 수 있었다. 좀 더 생각해낼 때 아이오와가 설명을 덧붙였다.
  “가이아연방 최외곽 궤도에서 최근 8개월 동안 관찰되었던 모든 적대적 함선들의 활동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 쪽 무인 위성에서 관측 결과 호루스인들은 태양계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옆의 자료를 보면 지난 몇 달 동안 호루스 함선에 의해 피격되었던 연방군 함선들의 위치와 함급이 나타나 있습니다. 저희 측 추측이지만 아마 호루스인들은 격침시킨 연방함선을 통해 지구의 위치를 알아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비록 자동적인 정보보안체계가 구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호루스인들의 크랙킹 기술을 막아내긴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폭 설정도 미리 하기도 전에 실시간 레이더 탐지범위 밖에서 발사되는 초고속포탄 덕분에 함내에 모든 생물체가 즉사하겠지만요. 어쨌든 지금 중요한 점은 호루스가 지구의 위치를 알아냈다는 것입죠….”
  아이오와는 말끝을 흐리자 다른 사람들도 약속이나 한 듯 조용했다. 그러다 세비어 측의 일부 장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가이아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연방 측에서 유일하게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고 있는 존재가 있긴 했지만, 대화 내용이 어쨌든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페드릭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본론이 뭐죠.”
  무감정한 목소리. 듣는 사람 입장에서 딱히 기분이 나쁘고 안 나쁘고 하기도 애매했다. 아이오와는 페드릭의 물음에 깊이 생각하다 한 5초 정도가 지나자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는 페드릭을 가이아인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음…. 연방 기준 시간으로 6개월 안에 호루스가 연방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습을 가할 것입니다. 공격 목표는 연방군 함대의 모든 식민 행성과 민간인 거주 위성. 호루스가 노렸던 첫 원정대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는 단순히 연방함대의 병력을 태양계로 집중시켜 최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거기에 태양계까지 덤으로 함락시켰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었겠죠. 어찌 됐든 지금 상황에서 6개월 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100% 저지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박살을 내려는 모양이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장교들의 얼굴이 굳어져갈 때 아이오와는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박살이라기 보단 가이아인의 멸살을 목표로 하고 있지요. 6개월 후에 말입니다. 저희가 지금에 와서야 당신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쩌면 연합이란 의미가 다시 만들어질 수도 있겠군요. 수십 년 동안 우리가 호루스로부터 알아낸 것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우리는 6개월 후에 호루스가 당신들에게 총공세를 가하기 전에 역으로 총공격을 가할 것입니다. 세비어인 역사상 이례 없던 초대규모 작전을. 예전에 진 빚은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당신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니, 뭐 제안이라기 보단 요청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군요.”
  궁금증만을 남기고 말을 끊은 그에게 연방측 장교들은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후로도 아이오와의 설명은 약 1시간가량 계속 되었다. 무언가를 조건으로 가이아인들에게 제안을 하는 아이오와 벤젠과 오랜 세월 끝에 동족과 만났지만 매우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는 페드릭 포터. 아마도 그는 평생 동안 고독 속에 갇혀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마치 먼 옛날 스피카 전쟁이 400년 만에 막을 내리고 자신이 동족과 이별을 나눌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후.
  5달의 시간이 지났다.


-------------------------------------
다음 회에 계속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