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흔의 전장 (목숨이 붙어있고 생활환경이 보장되는 한 연재는 계속됩니다.) - 08년 10월 27일 공군입대 합니다.
호루스 원정함대와의 격전을 치루고 나서 <제우스>에 도킹한 <콜로수스>는 그 어느 때 보다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단은 살았다.’라는 느낌을 받은 것일까….
일부 구획에서 폭발이 일어나도 승무원들의 표정은 일단 밝았다. 하지만 그들과는 유난히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었다.
극히 침중한 분위기 속에서 칼은 함장실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 한 개의 전언을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정보부의 미하엘 리처드 중장이 칼 어니스트에게. 이 내용은 <콜로수스>의 칼 어니스트 함장에게만 보여지며 향후 3일간은 최고 기밀에 속한다. 내용을 확인하는 즉시 이 암호로 정해진 통신주파수로 연결할 것.=
미하엘 리처드….
그 자는 연방군 최고 위치에 있는 장관이었다. 자신과도 약간의 친분은 있었지만 <제우스>에 도킹한지 며칠이 지나고 자신을 직접 불러주다니…. 사실 그에겐 상당히 의외였다. 그는 메시지에 적혀있는 암호를 천천히 눌러가며 그가 말한 통신 주파수로 연결을 시도했다. 기본적인 절차를 거치고 나자 휴대용 단말기의 스크린에 여러 문장들이 나타났다.
=길게 끌기 싫으니 짤막하게 말하도록 하지. 어제 지구표준시간으로 4월 27일 2500시 경에 헥셀라 레이클리 섹터에서 세비어인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함대와 교신했네. 그리고 그쪽으로 파견시킨 <천리안>급 통신선의 보고에 의하면 호루스의 2차 원정대와 교전을 벌였고 완전히 저지했다고 하네.=
‘세비어인이라고?’
칼은 세비어인이라는 말에 매우 당황했다. 그리고 호루스의 추가 원정대라니? 자세한 규모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규모가 굉장함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건 지극히 정석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전문을 읽어나갔다.
=…그들은 지금 태양계로 오고 있다네. 내일 오후 3시쯤이면 태양계 외곽 공역에 도착할 것이야. 대충 결론을 말하자면 약간의 문제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것일세. 내일 정오까지 페드릭 포터를 데리고 달기지로 와줄 수 있겠나? 이건 지극히 내 예상이지만 현재 오고 있는 세비어 함대에 연방 공용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네. 이건 명령은 아니니 오든 말든 크게 상관은 안하겠네. 현재 <콜로수스>의 상태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일세. 그래도 페드릭 포터만은 꼭 보내주길 바라네. 웬만하면 자네도 왔으면 하는군. 그럼 꼭 보길 바라네. 연방!=
전문의 내용은 그렇게 끝이 나있었다. 잊혀진 전쟁 이후 가장 큰 소식. 그것도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제 와서 나타나다니…. 칼은 말없이 단말기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 내용을 페드릭에게 어떻게 전해줘야 할지 말이다. 연방 내에서 페드릭의 존재는 거의 전설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는 페드릭에 대해 알만한 것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당시 30만에 달하는 동족들을 구하기 위해 그가 했던 행동이나 그 후에 리플렉터를 멸망시킬 수 있도록 한 그의 대전과를 말이다.
500년이라는 세월….
지구인에겐 그저 오래전 옛날 얘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페드릭이라면 어떨까. 가이아인 입장에서 보면 거의 불사의 수명을 지닌 존재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로써는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페드릭은 세비어인이다. 항상 그를 볼때마다 그 사실을 잊지 못한다. 특히 알티미리스에서 그의 힘을 두 눈으로 확인 한 이후에는….
겉으로는 평범한 청년일 뿐이지만 그는 분명 아주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지구인은 상상도 못할 수백 년간 쌓인 지식과 온갖 문제들을 헤쳐 나가는 지혜, 그리고 고독함. 애써 아닌 척 하지만 그와 대화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500년간의 세월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세월을 페드릭은 동족과 이별하고 홀로 지낸 것이다. 처음으로 그에게 찾아갔을 때도 그랬다.
북부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가장 외딴 지역. 온통 눈으로 뒤덮인 평야에는 어울리지 않을 아담한 집 딸랑 한 채. 그는 외부와 거의 끈을 단절시켜 놓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페드릭에게 처음 찾아갈 때에는 존경심이라도 있었는데….
칼은 일단 전투정보실에 있는 부함장으로 승진한 케이스 에비게일 소령을 호출했다. 그는 원래 조이 크라이튼 중위와 사이좋게 전술참모를 맡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보직을 맡고 있었으나 성격은 서로 틀렸다. 한참 상갑판의 보수 작업에 대해 소리를 지르던 그의 목소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급격히 조용해지자 칼은 작게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림소스 브로콜리 스파게티, 프렌치프라이, 삶은 감자, 완두콩 통조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멀건 액체….
달랑 숟가락과 음식이 든 식판 하나만 들고 온 그는 빈 탁자에 앉아 오늘의 저녁 메뉴를 감상했다. 함내에 갇혀버린 이상 아무런 흥미 요소가 없었기에 일단은 ‘먹고 보자’ 라는 심보로 가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교 식당이라 그런지 뷔페식이었고 그와 경쟁이 될 만한 존재는 없었다. 주위에는 언제나 부담을 주던 떡대의 몸집을 자랑하던 취사병도 어디론가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절대적으로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거의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수리작업에 투입됐다고 추측이 되었다.
그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만찬이다 싶어 기이한 속도로 식판의 내용물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프렌치프라이와 삶은 감자를….
페드릭은 숟가락으로 대충 먹으며 양이 바닥을 드러낼 때 쯤 염력을 개방했다. 실생활으로 인해 단련된 그의 염력은 실용성이 참으로 엄청났다. 먹을 때에는 일단 숟가락만 있으면 된다. 액체는 유일하게 중력에 예민하게 반응하는데다가 기체보다 분자밀집도가 훨씬 빼곡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염력으로 다루기 굉장히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밥 먹으면서 쓸데없이 힘 뺄 필요는 없었다. 포크도 필요 없이 염력을 써서 감자튀김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마치 중력이 거의 없는 우주공간에서 음식을 먹듯. 페드릭은 그렇게 홀로 자신만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기이이잉.
한참을 식사에 여념하고 있을 때 페드릭의 단말기로 진동이 울리자,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았다.
“네에. 페드릭 포터입니다.”
-대령님. 함장님께서 당장 오시랍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부함장인 케이스 소령이다. 언제나 불쌍하게 칼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존재감이 확고하게 박히지 못한 안타까운 인물. 그는 지극히 형식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케이스 씨. 빨리 가야 하나요?”
그는 존댓말로 답하는 페드릭의 말투에 익숙해졌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도 페드릭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대령님. 함장님께서 페드릭 대령님께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제 측에서 명령을 받을 때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지금 어디십니까?-
“아아…! 여기 식당이요. 일단은 빨리 오라고 했으니까 식사 다 하고 하루 후에 가도록 할게요. 괜찮겠지요?”
-예. 그럼 내일 뵙…, 어? 대령님!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내일이라뇨! 함장님께서는 지금 당장 만나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에이. 생각을 해보쇼. 여기 지금 함수쪽 AF33E 장교 식당인데 지금 당장 뛰어가도 거까지 갈라면 4시간은 걸리는데 어떻게 가라고요!?”
-어차피 대령님은 여까지 걸어오시지도 않잖습니까! 뻑하면 전송빔으로 움직이면서 자기 불리할 때만 핑계대시는 겁니까!? 어차피 거기 안계신거 지금 다 아니까 빨리 식사하시고 오시기나 하시죠!-
부함장의 말발이 생각보다 거세자 페드릭은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일단은 20분 내로 오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연방!-
“…….”
이미 통화가 종료된 단말기를 찌그러진 표정으로 쳐다보며 그는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직후 반대편 벽에 충돌한 후 맥없이 바닥에 나뒹구는 단말기. 기술이 발전해서 그런지 단말기에는 충돌음과는 달리 작은 흠집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 원…. 이젠 식사도 맘 편히 못하게 하네.
페드릭은 어느새 깨끗해진 식판을 내버려두고 마지막 남은 정체불명의 액체용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는 알아서 치우라지…. 거의 정당화시키다시피 하며 그는 곧바로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전송실로 향했다.
칼은 갑작스레 함장실 안에서 밝은 광원과 함께 페드릭이 튀어 나오자 당황했다. 면적이 채 20 제곱미터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전송빔을 통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물론 전송기의 오차 범위는 1킬로미터에서 수 밀리미터 밖에 안될 만큼 정교했지만 실제로 그럴 배짱이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칼도 보통 인간이었기 때문에 페드릭의 행동을 보고 당황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저녁 먹다가 케이스한테 억수로 욕먹고 왔다. 무슨 일이야?”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페드릭의 말에 칼은 순간적으로 시계로 시선이 갔다. 지금은 분명 아침일 텐데? 저 인간이 지금 시간 개념을 잃어버렸나? 칼은 전혀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곧바로 말했다.
“일단 본론부터 말하지. 거기 앉으려면 앉고.”
“아…?”
평소답지 않은 칼의 표정에 그는 마땅히 대꾸할만한 말을 찾지 못하고 옆에 있던 인공 가죽 재질의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페드릭이 자리에 앉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자 칼은 마치 아주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입을 열었다.
“세비어.”
단 한마디.
그 단어만으로도 페드릭은 칼이 무슨 뜻을 자신에게 전했는지 깨달았다. 그동안 너무 잊고만 살아 왔었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페드릭을 보며 칼은 말을 이었다.
“자네 동족들, 세비어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네.”
“…….”
“내일 오후에 태양계 외곽에서 그들을 영접하러 갈 거야. 그리고 이건 극비리에 행해지는 것이고 내가 자네한테 말한 이유는 설명 안 해줘도 알겠지. 출발 시간은 지구표준시간 기준으로 내일 오전 11시네. 일단은 그렇게 알아두고 복장이나 그런 건 그냥 간단하게 지금같이 입으면 될 것 같네. 참고로 말해보지만 예전부터 지금, 그리고 미래에 일어나고 있는 일, 자네나 나나 똑같이 휘말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누군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와서 인과율이라도 뒤집어논걸까.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에 대해서 말이야.”
칼은 끝내 자신의 생각을 말에 담았다. 페드릭이 지난 500년간 여기에 삶을 보내서야 느꼈던 것을 칼은 자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짧은 수명을 사는 동안 느낀 것이었다. 대체 칼 어니스트라는 인간의 정체는 뭐지.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런 점을 절대 느낄 수 없었다. 설마 이 세상의 시간 흐름을 읽고 있는 건가.
에이. 설마….
아직 가이아인들은 아니다. 아직은 이르다고.
그는 더 이상 생각을 접기로 했다. 지금은 동족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왜 하필 이때일까. 정확히 500년 만에. 그것도 이런 타이밍에. 그는 칼의 말이 끝나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 함장실을 빠져나갔다. 이미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니란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 말도 안 되는 흐름에 관해선. 몇 년간은 잊고 지냈는데 생각지도 않고 있던 존재 덕에 다시 생각날 줄이야. 그는 허탈함에 웃으며 자신이 머무르는 내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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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째 뻘글성 스토리만 계속 전개가...
이 점에 대해서는 차마 어쩔 수가 없군요 ㅠ
죄송합니다.
이제 다음화가 고비인건가...
그럼 다음 회에 조심스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부족한 소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