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글 수 472
"아빠. 드래곤의 약점은 어디에요?" 이제 갓 10대에 접어든 아들 놈이 숙제를 한답시고 들고온 교과서에 나오는 문제였다. 한참동안 골머리를 앓았지만, 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 글쎄다. 한번 찾아볼까나."
"아빠 뭐에요! 옛날에 드래곤이랑 싸웠다더니. 다 거짓말이에요? 약점도 모르고 어떻게 이겨요?"
"그게 말이다. 드래곤이란 게 생각만큼 그렇게 강한 게 아니에요. 그저 약점이랄 것도 없어. 체력 닳을때까지 치고 치고 패고 패고 하면...."
"그래요?"
아들은 대충 납득한 듯 했지만 고개를 갸웃 거리며 사라졌다. 대충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돌아서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불룩하게 나온 배에 빠져가는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고 젊은 날엔 세상을 다 알것 같았고, 세상이 전부 내것 같았는데 이젠 망가져가는 육체 이외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처량한 중년의 모습이 거울 안에 있었다. 미소지어 봤지만 왠지 서글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다녀온 녀석은 인사조차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다. 걱정이 된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 있니?"
"나가요!"
나는 순간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의 기분을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이다. 녀석도 어느새 사춘기니까 반항도 하고 싶을테지.
"아빠는 거짓말장이에요. 아빠 때문에 이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놀라 물었다. 녀석 학교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착실하게 다니고 있던 차에 이게 무슨 말인가.
"아빠가 말해준대로 말했다가 반에서 놀림거리가 되었어요! 이젠 학교도 못 간다구요! 다들 거짓말장이라고 놀려요!"
나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교육체계에 대해 심각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들아, 날 봐라. 너도 이 아빠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아들은 눈물을 글썽이는 눈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자, 이제 가서 아빠가 그 증거를 보여주마. 너는 더 이상 드래곤의 약점따위 시시껄렁한 걸 가르치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요." 나는 아들놈을 끌어내어 이것저것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뭐 하는거에요?"
"보면 모르겠니? 여행을 떠나는 거란다. 아니 모험이라고 해야 겠지." 모험을 준비하는 것은 정말 오랫만이었다. 사소한 문제(황금갑옷이 배가 나온 관계로 더이상 맞지 않는다든가)가 있긴 했지만 한두가지를 포기하는 것으로 가볍게 해결할 수 있었다.
"진심이에요 아빠?"
"그럼. 진심이란다. 아들놈이 아빠를 믿지 않으니 아빠는 진실을 보여줄 수 밖에."
나는 아들놈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하룻동안 숲과 산을 50km 주파했지만 녀석은 찍소리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체력은 제대로 단련한 모양이었다.
"힘들지 않지? 산에 오니까 기분이 정말 좋다. 야호!!!!" 속으론 죽을 것 같았지만 호기롭게 길을 나선 이상 아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야호 하지 말랬어요. 몬스터들이 듣고 온다고."
"그럼 쓰러뜨리면 되지." 나는 들고 있던 검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야호 소리에 몰려온 몬스터들의 울음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지.. 진짜 나오려나봐요!"
"허허. 아빠를 믿어보라니까." 나는 뭐가 나오든 걱정하지 않고 단칼에 베어버릴 각오로 칼을 움켜 쥐었다. 시작이 중요한 것이었다.
한방을 날리는 그 기백으로 아들놈에게 아빠가 누구인지 보여줄 셈이었다.
그리고 풀숲이 열리며 나온것은 황금색을 번뜩이는 고블린 3마리였다.
"화...황금고블린!!! 그게 왜 이곳에!"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짐도 식량도 전부 놓아둔 채였다. 그저 아들을 옆구리에 끼고 달렸다. 산을 한개쯤 뛰어넘은 뒤에야 나는 놈들이 추격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에요 아빠! 식량이랑 짐을 다 버리고 오면 어떻게 해요? 겁쟁이! 고블린을 보고 도망치다니!"
"니가 몰라서 그래요. 황금 고블린은 말이다. 그냥 고블린이 아니야. 그들은 에쎄랄 필드에서 자생하는 이차원 종족이야. 고블린과 비슷해 보이지만 뿔이 하나 나 있는데, 그 뿔은 이 세계의 물질로는 파괴할 수가 없어요. 멘탈 디비전에서 드레인 잡고 디멘전 소드를 소환해서나 해치울 수 있는 그런 상대란 말이다. 그것도 죽이는 게 아니라 강제귀환에 불과하지. 게다가 마법사와 마궁수, 바드에 양치기에 댄서, 갬블러까지 고루 갖춘 정통 파티정도는 되어야 한마리를 상대할 수 있는 건데 세마리? 어림도 없지. 살아난 게 요행이야."
녀석은 나의 변명을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빠는 거짓말장이! 허풍선이야! 난 집에 갈테야! 아빠따위 미워!"
아들놈은 앗 할 틈도 없이 달려나갔다. 나는 녀석을 잡으려 했지만 발이 꼬여 넘어져 버렸다. 다리에 쥐가 났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50km의 산악구보 후에 녀석을 안고 전력질주, 젊을때도 아닌 지금의 나에 그 정도의 체력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이미 온몸의 힘은 고갈된 상태, 녀석은 아직도 쌩쌩하게 멀리 뛰어 사라졌다. 넘어지면서 부딛혔는지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땅에 얼굴을 묻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때 나는 모닥불 옆에 누워 있었다. 왠 젊은 여인이 옆에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고개를 들려고 하자 그녀가 다가오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아직 움직이면 안되요." 머리가 띵하게 울려왔다. 손을 대 보니 붕대가 잘 감겨져 있었다.
"절 구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넘어지신 것 치고는 몸 상태가 너무 엉망인데요."
"조금 무리를 했어요 나이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나저나 솜씨가 좋으시군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직업이니까요." 여자는 생긋 웃어보였다. 힐러의 미소, 전장을 누비던 이들에게 그것만큼 반가운 것은 없었다. 그 의미는 이제 곳 살아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근데 이 여자의 복장은 힐러랑은 약간 달랐다. 뭔지 모르게 불길했다.
"근데 직업이.....?"
"닥터입니다."
"닥. 닥터!!"
닥터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로 이 세계에 생겨난 신종 직업으로 마법에 의지하지 않고 기술과 지식으로 병을 치유하는데 치유력도 높고 매우 숙달된 기술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다만 그들의 유일한 문제점은......
"치료비는 15만 골드입니다."
"허억!! 지금은 한푼도 없어요!"
돈을 과도하게 청구한다는 것이었다.
"저기, 지금 제 아들놈이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먼저 녀석을 구하고. 다음에 황금고블린들에게 잡혀간 보따리를 구하면 돈이 생길 겁니다."
"황금 고블린이라... 왠지 구미가 당기는군요. 돈 냄새가 나요."
이 여자는 분명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황금 고블린은 황금을 가지고 있어서 황금 고블린이 아니었다. 황금으로 이루어져 황금 고블린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금색이 나는 고블린, 뿔난 고블린에 불과했다. 물론, 그 강맹함은 논할 바가 아니었지만.
"그건, 무척 강합니다. 함부로 볼 상대가 아니에요."
"그건 내 알바 아니죠. 어차피 난 싸우는 사람이 아니니까."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황금 고블린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한창때엔 드래곤과도 싸워 이긴 적 있는 나였다. 황금고블린이 정식파티를 갖춰야 상대할 수 있는 존재긴 하지만 그런 파티도 드래곤에게 발리는 수가 허다했다. 각개격파하면 분명 승산이 있었다.
"좋아요. 갑시다."
"지금요?"
"놈들의 허를 노려야 해요."
한참을 야산을 달려 놈들을 만난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파헤쳐진 짐무더기와 식량이 있었다.
"음. 역시 돈은 남아있지 않군요. 놈들이 가져간 모양입니다."
"그럼 어쩌죠?"
"놈들을 부르겠습니다."
닥터가 말릴 틈도 없이 나는 야호를 외쳤다. 어디선가 숲이 움직이는 듯한 출렁임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칼을 잡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이 검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머릿속에 내가 배운 수많은 필살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기가 블레이드. 하이퍼 커터, 어에 스매시, 독고구검, 구두룡섬, 비연참, 고월참.....
그중 가장 파괴력있는 공격인 선광참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찰나, 풀숲을 가르고 무언가 칼날이 번뜩였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황금 고블린은 칼을 쓰지 않..... 는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이미 나의 칼은 상대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멈추기엔 이미 늦었다.
캉!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나의 칼은 상대의 칼을 동강내고도 모자라 상대의 목을 베어버렸어야 했겠지만 무엇엔가 막혀 있었다. 나는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나의 칼은 상대의 칼 앞에 처음 소개팅 나간 요조숙녀의 몸가짐처럼 다소곳하게 멈춰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내 칼이 이렇게 늙었던가!" 상대를 다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자괴감이 밀려왔다. 칼을 쥔 손이 떨려왔다.
"이 썅! 언넘이 암데다가 칼질이여! 아주 그냥 칵!"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 목소리는 설마.....
"언넘이 감히 왕족에게 칼질이여! 엉! 죽고잡냐!"
"너 혹시 안굴왕자!?"
"뭐? 너 누긴데 나를 아는 척 하냐? 니가 나를 온제 바따꼬...."
"나다. 기억 하냐?" 나는 달빛 아래 얼굴을 내밀었다.
이미 같이 늙어가는 처지였지만, 그가 나라를 떠나 수행할때 나는 그와 함께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도 나에게 준할 정도의 검의 수련을 쌓은 것이다. 그 후, 그가 자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왕위찬탈을 도운 덕에 왕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그 뒤론 본 일이 없었다.
"너... 이.. 개새끼가 안 죽고 살아있었냐!" 안굴왕자는 반가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호통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왕자님!!!" 뒷쪽에서 그의 수하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근데 너 여기서 뭐하냐...?" 나는 부둥켜 안은 두 사내의 모습에 당황해하는 수하들의 시선은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뭐하기넌, 이 근방에서 상서런 금색 동물이 나왔다기에 사냥하러 왔지비."
"여기 너희 땅 아니잖아."
"뭐 땅이야 필요하면 따먹으면 되는거 아닌가."
하긴 녀석은 예전부터 개념이 좀 부족하긴 했다. 뒤에 움직이는 수하들의 수는 어림잡아 10만은 되어 보였다. 녀석의 말대로 사냥만 하고 돌아갈 생각은 아닌 듯 했다.
나는 내 아들놈에 대한 걱정을 녀석에게 털어놓았다. 녀석은 혼쾌히 웃으며 수하에게 손을 까닥거렸다. 잠시후 수하는 피떡이 된 소년 하나를 끌고 왔다. 나는 한눈에 녀석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들아!!!!"
"이 넘이 내 하렘을 엿보지 않았게써. 죽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비."
"다. 닥터! 내 아들을 좀 치료해 주세요!"
"아.. 치료비도 못 받았는데. 또 환자라니." 닥터는 투덜거리며 붕대를 꺼내어 들었다.
"안굴왕자, 내 아들을 폭행한 죄는 묻지 않을테니 돈이나 좀 주지?"
"왕자에게 칼을 들이댄 죄랑 하렘을 엿본 죄는 사해줄테니 사냥에 길잡이나 좀 해주지비?"
"조까." 나는 녀석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주었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거라믄 내 양보하겠디만, 그렇지 않으면 길잡이좀 해도야 게써."
"내 아무리 개념이 희박하다지만, 이 군세가 어딜 봐서 사냥을 위해 나온 군세냐? 침략군이지. 글고 난 드래곤이랑 싸우러 가야 해."
"드래곤? 아직도 그런거 잡으러 다니나? 니가 아가? 니는 언제 철들래?"
"우씨! 아들 학교 숙제때문에 그런거란 말이다!"
"니들은 학교 숙제가 드래곤 채집이가? 애들 씨게 키우나 보네."
"아. 도와주기 싫음 관둬!"
나는 아들놈의 결박을 칼로 끊어내었다. 내가 휘두른 칼을 보고 안굴왕자의 수하들이 쑥덕거렸다.
"조낸 멋지다."
"왕자님 친군가봐."
"와우"
나는 칼집에 칼을 집어 넣고는 아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나 간다. 사냥을 하든 뭘 하든 맘대로 해." 안굴왕자는 그런 내 뒷모습을 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뭐에요? 저 사람들?"
"옆나라. 왕자와 부하들이죠."
"그럼 외침 아닌가요?"
"그런 셈입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어요?"
"저는 은퇴했거든요."
"아저씨 보기보다 거물인지도 모르겠네요."
"한때는 좀 이름 좀 날렸지만. 이젠 칼질하는 것도 지겨워요. 손 씻은지 오래되었죠."
닥터와 나의 대화를 듣던 아들이 묵묵히 말했다.
"아빠 정말이었어요?"
"응?"
"아빠가 드래곤 잡았다는 거."
"그럼."
"진짜 드래곤 잡으러 가는 거에요?"
"응."
그리고 녀석은 말이 없었다. 한참을 걸었다. 검게 그을린 나무의 흔적과 녹아내린 암석의 파편을 보고 나는 이 근처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들아 일단, 이것만은 알아둬라. 나는 네게 내가 젊었을때 드래곤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엔 드래곤이 나를 얕잡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있고, 또한 그때는 분명 저 덜떨어진 왕자라든가 마검과 같은 도움의 손길도 분명 있었다. 게다가 그땐 젊었지. 지금은 나이먹고 늙어서 예전의 힘도 기술도 남아 있지는 않다. 오늘 내가 여기 싸우러 와서 승산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내가 진다고 해도 슬퍼하지는 마라. 아버지는 약속을 위해서 싸우는 거니까."
아들은 아무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진짜 드래곤이랑 싸우러 가는 거에요?"
"네."
"죽으면 돈을 받을 수 없잖아요."
"네."
"진짜 죽으러 가는 건가요?"
"죽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산다는 보장도 없는거네요."
"싸워 봐야 알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앞에 뻥 뚫린 레어 앞에 섰다. 그리고는 크게 외쳤다.
"나와라 드래곤!!!!"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오란 말이다!"
재차 외치자 안쪽에서부터 음산한 기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에에에에....
후끈한 열기가 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들과 닥터를 한쪽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홀로 검을 꺼내어 들고 그 앞에 마주 섰다.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초고열 플라즈마 브레쓰였다. 이걸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각오로는 드래곤을 잡을 수 없었다. 마지막 한 걸음까지 전진하며 싸울 뿐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칼을 종횡무진 휘둘러 화압을 제어했다. 검풍이 마주 쏘아져 나와 브레쓰를 튕거내 주었다.
영원과도 같은 30초가 지나갔다. 브레스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칼을 다시금 움켜 쥐었다.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칼을 놓게 종용했던 그녀의 기억이 떠올랐다.
브레스가 멈추자 나는 레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저 안에 드래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치열한 혈투가 벌어졌다. 레어 안은 용혈과 소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인간! 죽고싶냐!"
"죽으러 왔다. 죽여다오!"
쾅!
굉음과 함께 나는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온몸은 이미 피투성이였고 어깨와 팔뚝의 근육은 파열되다시피 하여 검을 쥐는 것도 무리였다. 흘러내리는 피로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제길. 너무 쉬었나 보군."
"인간아!" 안에서 걸어나오는 것은 거대 도마뱀이었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닥터! 회복을!"
"이 상처로 싸우는 건 무리에요. 닥터 스톱을 권유합니다."
"무슨 힐러가 이따위야!"
"저는 닥터에요! 힐러 따위가 아니에요."
"관둬 그럼 그냥 싸울테니!"
"인간아! 너의 공격은 매서웠지만 촛점이 없었다. 그런 흐트러진 공격으론 날 쓰러뜨릴 수 없다. 후훗. 네가 만약 내 약점을 공격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때였다. 쏜살같이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내 아들이었다.
"드래곤이시어! 묻노니 그 약점이란 무엇입니까!"
"너는 누구냐. 대체 왜 그런 것을 묻는 것이지?"
"저는 저 전사의 아들입니다!"
"아들아... 난 아직 전사하지 않았다."
"아저씨, 그런 유머를 구사하면 주위에서 따 당하지 않나요." 닥터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비의 복수를 할 셈인가? 아직 너는 너무 어리다. 자비를 베풀때 돌아가라."
"아뇨! 학교 숙제입니다!"
드래곤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했다. 그건 나나 닥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드래곤을 앞에 두고 뒤로는 나라를 짓밟을 침략군을 뒤로 하고 지금 논하는게 고작 학교 숙제라니!
"흠.. 그래. 그렇다면 말해주겠다. 내 약점은!"
드래곤의 말에 다들 숨을 죽였다.
-중략---------------------------------------
"그.. 글쎄다. 한번 찾아볼까나."
"아빠 뭐에요! 옛날에 드래곤이랑 싸웠다더니. 다 거짓말이에요? 약점도 모르고 어떻게 이겨요?"
"그게 말이다. 드래곤이란 게 생각만큼 그렇게 강한 게 아니에요. 그저 약점이랄 것도 없어. 체력 닳을때까지 치고 치고 패고 패고 하면...."
"그래요?"
아들은 대충 납득한 듯 했지만 고개를 갸웃 거리며 사라졌다. 대충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돌아서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불룩하게 나온 배에 빠져가는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고 젊은 날엔 세상을 다 알것 같았고, 세상이 전부 내것 같았는데 이젠 망가져가는 육체 이외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처량한 중년의 모습이 거울 안에 있었다. 미소지어 봤지만 왠지 서글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다녀온 녀석은 인사조차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다. 걱정이 된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 있니?"
"나가요!"
나는 순간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녀석의 기분을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이다. 녀석도 어느새 사춘기니까 반항도 하고 싶을테지.
"아빠는 거짓말장이에요. 아빠 때문에 이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놀라 물었다. 녀석 학교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착실하게 다니고 있던 차에 이게 무슨 말인가.
"아빠가 말해준대로 말했다가 반에서 놀림거리가 되었어요! 이젠 학교도 못 간다구요! 다들 거짓말장이라고 놀려요!"
나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교육체계에 대해 심각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들아, 날 봐라. 너도 이 아빠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아들은 눈물을 글썽이는 눈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자, 이제 가서 아빠가 그 증거를 보여주마. 너는 더 이상 드래곤의 약점따위 시시껄렁한 걸 가르치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요." 나는 아들놈을 끌어내어 이것저것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뭐 하는거에요?"
"보면 모르겠니? 여행을 떠나는 거란다. 아니 모험이라고 해야 겠지." 모험을 준비하는 것은 정말 오랫만이었다. 사소한 문제(황금갑옷이 배가 나온 관계로 더이상 맞지 않는다든가)가 있긴 했지만 한두가지를 포기하는 것으로 가볍게 해결할 수 있었다.
"진심이에요 아빠?"
"그럼. 진심이란다. 아들놈이 아빠를 믿지 않으니 아빠는 진실을 보여줄 수 밖에."
나는 아들놈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하룻동안 숲과 산을 50km 주파했지만 녀석은 찍소리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체력은 제대로 단련한 모양이었다.
"힘들지 않지? 산에 오니까 기분이 정말 좋다. 야호!!!!" 속으론 죽을 것 같았지만 호기롭게 길을 나선 이상 아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야호 하지 말랬어요. 몬스터들이 듣고 온다고."
"그럼 쓰러뜨리면 되지." 나는 들고 있던 검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야호 소리에 몰려온 몬스터들의 울음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지.. 진짜 나오려나봐요!"
"허허. 아빠를 믿어보라니까." 나는 뭐가 나오든 걱정하지 않고 단칼에 베어버릴 각오로 칼을 움켜 쥐었다. 시작이 중요한 것이었다.
한방을 날리는 그 기백으로 아들놈에게 아빠가 누구인지 보여줄 셈이었다.
그리고 풀숲이 열리며 나온것은 황금색을 번뜩이는 고블린 3마리였다.
"화...황금고블린!!! 그게 왜 이곳에!"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짐도 식량도 전부 놓아둔 채였다. 그저 아들을 옆구리에 끼고 달렸다. 산을 한개쯤 뛰어넘은 뒤에야 나는 놈들이 추격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에요 아빠! 식량이랑 짐을 다 버리고 오면 어떻게 해요? 겁쟁이! 고블린을 보고 도망치다니!"
"니가 몰라서 그래요. 황금 고블린은 말이다. 그냥 고블린이 아니야. 그들은 에쎄랄 필드에서 자생하는 이차원 종족이야. 고블린과 비슷해 보이지만 뿔이 하나 나 있는데, 그 뿔은 이 세계의 물질로는 파괴할 수가 없어요. 멘탈 디비전에서 드레인 잡고 디멘전 소드를 소환해서나 해치울 수 있는 그런 상대란 말이다. 그것도 죽이는 게 아니라 강제귀환에 불과하지. 게다가 마법사와 마궁수, 바드에 양치기에 댄서, 갬블러까지 고루 갖춘 정통 파티정도는 되어야 한마리를 상대할 수 있는 건데 세마리? 어림도 없지. 살아난 게 요행이야."
녀석은 나의 변명을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빠는 거짓말장이! 허풍선이야! 난 집에 갈테야! 아빠따위 미워!"
아들놈은 앗 할 틈도 없이 달려나갔다. 나는 녀석을 잡으려 했지만 발이 꼬여 넘어져 버렸다. 다리에 쥐가 났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50km의 산악구보 후에 녀석을 안고 전력질주, 젊을때도 아닌 지금의 나에 그 정도의 체력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이미 온몸의 힘은 고갈된 상태, 녀석은 아직도 쌩쌩하게 멀리 뛰어 사라졌다. 넘어지면서 부딛혔는지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땅에 얼굴을 묻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때 나는 모닥불 옆에 누워 있었다. 왠 젊은 여인이 옆에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고개를 들려고 하자 그녀가 다가오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아직 움직이면 안되요." 머리가 띵하게 울려왔다. 손을 대 보니 붕대가 잘 감겨져 있었다.
"절 구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넘어지신 것 치고는 몸 상태가 너무 엉망인데요."
"조금 무리를 했어요 나이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나저나 솜씨가 좋으시군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직업이니까요." 여자는 생긋 웃어보였다. 힐러의 미소, 전장을 누비던 이들에게 그것만큼 반가운 것은 없었다. 그 의미는 이제 곳 살아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근데 이 여자의 복장은 힐러랑은 약간 달랐다. 뭔지 모르게 불길했다.
"근데 직업이.....?"
"닥터입니다."
"닥. 닥터!!"
닥터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로 이 세계에 생겨난 신종 직업으로 마법에 의지하지 않고 기술과 지식으로 병을 치유하는데 치유력도 높고 매우 숙달된 기술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다만 그들의 유일한 문제점은......
"치료비는 15만 골드입니다."
"허억!! 지금은 한푼도 없어요!"
돈을 과도하게 청구한다는 것이었다.
"저기, 지금 제 아들놈이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먼저 녀석을 구하고. 다음에 황금고블린들에게 잡혀간 보따리를 구하면 돈이 생길 겁니다."
"황금 고블린이라... 왠지 구미가 당기는군요. 돈 냄새가 나요."
이 여자는 분명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황금 고블린은 황금을 가지고 있어서 황금 고블린이 아니었다. 황금으로 이루어져 황금 고블린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금색이 나는 고블린, 뿔난 고블린에 불과했다. 물론, 그 강맹함은 논할 바가 아니었지만.
"그건, 무척 강합니다. 함부로 볼 상대가 아니에요."
"그건 내 알바 아니죠. 어차피 난 싸우는 사람이 아니니까."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황금 고블린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한창때엔 드래곤과도 싸워 이긴 적 있는 나였다. 황금고블린이 정식파티를 갖춰야 상대할 수 있는 존재긴 하지만 그런 파티도 드래곤에게 발리는 수가 허다했다. 각개격파하면 분명 승산이 있었다.
"좋아요. 갑시다."
"지금요?"
"놈들의 허를 노려야 해요."
한참을 야산을 달려 놈들을 만난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파헤쳐진 짐무더기와 식량이 있었다.
"음. 역시 돈은 남아있지 않군요. 놈들이 가져간 모양입니다."
"그럼 어쩌죠?"
"놈들을 부르겠습니다."
닥터가 말릴 틈도 없이 나는 야호를 외쳤다. 어디선가 숲이 움직이는 듯한 출렁임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칼을 잡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이 검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머릿속에 내가 배운 수많은 필살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기가 블레이드. 하이퍼 커터, 어에 스매시, 독고구검, 구두룡섬, 비연참, 고월참.....
그중 가장 파괴력있는 공격인 선광참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찰나, 풀숲을 가르고 무언가 칼날이 번뜩였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황금 고블린은 칼을 쓰지 않..... 는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이미 나의 칼은 상대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멈추기엔 이미 늦었다.
캉!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나의 칼은 상대의 칼을 동강내고도 모자라 상대의 목을 베어버렸어야 했겠지만 무엇엔가 막혀 있었다. 나는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나의 칼은 상대의 칼 앞에 처음 소개팅 나간 요조숙녀의 몸가짐처럼 다소곳하게 멈춰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내 칼이 이렇게 늙었던가!" 상대를 다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자괴감이 밀려왔다. 칼을 쥔 손이 떨려왔다.
"이 썅! 언넘이 암데다가 칼질이여! 아주 그냥 칵!"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 목소리는 설마.....
"언넘이 감히 왕족에게 칼질이여! 엉! 죽고잡냐!"
"너 혹시 안굴왕자!?"
"뭐? 너 누긴데 나를 아는 척 하냐? 니가 나를 온제 바따꼬...."
"나다. 기억 하냐?" 나는 달빛 아래 얼굴을 내밀었다.
이미 같이 늙어가는 처지였지만, 그가 나라를 떠나 수행할때 나는 그와 함께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도 나에게 준할 정도의 검의 수련을 쌓은 것이다. 그 후, 그가 자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왕위찬탈을 도운 덕에 왕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그 뒤론 본 일이 없었다.
"너... 이.. 개새끼가 안 죽고 살아있었냐!" 안굴왕자는 반가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호통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왕자님!!!" 뒷쪽에서 그의 수하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근데 너 여기서 뭐하냐...?" 나는 부둥켜 안은 두 사내의 모습에 당황해하는 수하들의 시선은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뭐하기넌, 이 근방에서 상서런 금색 동물이 나왔다기에 사냥하러 왔지비."
"여기 너희 땅 아니잖아."
"뭐 땅이야 필요하면 따먹으면 되는거 아닌가."
하긴 녀석은 예전부터 개념이 좀 부족하긴 했다. 뒤에 움직이는 수하들의 수는 어림잡아 10만은 되어 보였다. 녀석의 말대로 사냥만 하고 돌아갈 생각은 아닌 듯 했다.
나는 내 아들놈에 대한 걱정을 녀석에게 털어놓았다. 녀석은 혼쾌히 웃으며 수하에게 손을 까닥거렸다. 잠시후 수하는 피떡이 된 소년 하나를 끌고 왔다. 나는 한눈에 녀석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들아!!!!"
"이 넘이 내 하렘을 엿보지 않았게써. 죽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비."
"다. 닥터! 내 아들을 좀 치료해 주세요!"
"아.. 치료비도 못 받았는데. 또 환자라니." 닥터는 투덜거리며 붕대를 꺼내어 들었다.
"안굴왕자, 내 아들을 폭행한 죄는 묻지 않을테니 돈이나 좀 주지?"
"왕자에게 칼을 들이댄 죄랑 하렘을 엿본 죄는 사해줄테니 사냥에 길잡이나 좀 해주지비?"
"조까." 나는 녀석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주었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거라믄 내 양보하겠디만, 그렇지 않으면 길잡이좀 해도야 게써."
"내 아무리 개념이 희박하다지만, 이 군세가 어딜 봐서 사냥을 위해 나온 군세냐? 침략군이지. 글고 난 드래곤이랑 싸우러 가야 해."
"드래곤? 아직도 그런거 잡으러 다니나? 니가 아가? 니는 언제 철들래?"
"우씨! 아들 학교 숙제때문에 그런거란 말이다!"
"니들은 학교 숙제가 드래곤 채집이가? 애들 씨게 키우나 보네."
"아. 도와주기 싫음 관둬!"
나는 아들놈의 결박을 칼로 끊어내었다. 내가 휘두른 칼을 보고 안굴왕자의 수하들이 쑥덕거렸다.
"조낸 멋지다."
"왕자님 친군가봐."
"와우"
나는 칼집에 칼을 집어 넣고는 아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나 간다. 사냥을 하든 뭘 하든 맘대로 해." 안굴왕자는 그런 내 뒷모습을 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뭐에요? 저 사람들?"
"옆나라. 왕자와 부하들이죠."
"그럼 외침 아닌가요?"
"그런 셈입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어요?"
"저는 은퇴했거든요."
"아저씨 보기보다 거물인지도 모르겠네요."
"한때는 좀 이름 좀 날렸지만. 이젠 칼질하는 것도 지겨워요. 손 씻은지 오래되었죠."
닥터와 나의 대화를 듣던 아들이 묵묵히 말했다.
"아빠 정말이었어요?"
"응?"
"아빠가 드래곤 잡았다는 거."
"그럼."
"진짜 드래곤 잡으러 가는 거에요?"
"응."
그리고 녀석은 말이 없었다. 한참을 걸었다. 검게 그을린 나무의 흔적과 녹아내린 암석의 파편을 보고 나는 이 근처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들아 일단, 이것만은 알아둬라. 나는 네게 내가 젊었을때 드래곤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엔 드래곤이 나를 얕잡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있고, 또한 그때는 분명 저 덜떨어진 왕자라든가 마검과 같은 도움의 손길도 분명 있었다. 게다가 그땐 젊었지. 지금은 나이먹고 늙어서 예전의 힘도 기술도 남아 있지는 않다. 오늘 내가 여기 싸우러 와서 승산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내가 진다고 해도 슬퍼하지는 마라. 아버지는 약속을 위해서 싸우는 거니까."
아들은 아무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진짜 드래곤이랑 싸우러 가는 거에요?"
"네."
"죽으면 돈을 받을 수 없잖아요."
"네."
"진짜 죽으러 가는 건가요?"
"죽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산다는 보장도 없는거네요."
"싸워 봐야 알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앞에 뻥 뚫린 레어 앞에 섰다. 그리고는 크게 외쳤다.
"나와라 드래곤!!!!"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오란 말이다!"
재차 외치자 안쪽에서부터 음산한 기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에에에에....
후끈한 열기가 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들과 닥터를 한쪽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홀로 검을 꺼내어 들고 그 앞에 마주 섰다.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초고열 플라즈마 브레쓰였다. 이걸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각오로는 드래곤을 잡을 수 없었다. 마지막 한 걸음까지 전진하며 싸울 뿐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칼을 종횡무진 휘둘러 화압을 제어했다. 검풍이 마주 쏘아져 나와 브레쓰를 튕거내 주었다.
영원과도 같은 30초가 지나갔다. 브레스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칼을 다시금 움켜 쥐었다.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칼을 놓게 종용했던 그녀의 기억이 떠올랐다.
브레스가 멈추자 나는 레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저 안에 드래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치열한 혈투가 벌어졌다. 레어 안은 용혈과 소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인간! 죽고싶냐!"
"죽으러 왔다. 죽여다오!"
쾅!
굉음과 함께 나는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온몸은 이미 피투성이였고 어깨와 팔뚝의 근육은 파열되다시피 하여 검을 쥐는 것도 무리였다. 흘러내리는 피로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제길. 너무 쉬었나 보군."
"인간아!" 안에서 걸어나오는 것은 거대 도마뱀이었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닥터! 회복을!"
"이 상처로 싸우는 건 무리에요. 닥터 스톱을 권유합니다."
"무슨 힐러가 이따위야!"
"저는 닥터에요! 힐러 따위가 아니에요."
"관둬 그럼 그냥 싸울테니!"
"인간아! 너의 공격은 매서웠지만 촛점이 없었다. 그런 흐트러진 공격으론 날 쓰러뜨릴 수 없다. 후훗. 네가 만약 내 약점을 공격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때였다. 쏜살같이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내 아들이었다.
"드래곤이시어! 묻노니 그 약점이란 무엇입니까!"
"너는 누구냐. 대체 왜 그런 것을 묻는 것이지?"
"저는 저 전사의 아들입니다!"
"아들아... 난 아직 전사하지 않았다."
"아저씨, 그런 유머를 구사하면 주위에서 따 당하지 않나요." 닥터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비의 복수를 할 셈인가? 아직 너는 너무 어리다. 자비를 베풀때 돌아가라."
"아뇨! 학교 숙제입니다!"
드래곤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했다. 그건 나나 닥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드래곤을 앞에 두고 뒤로는 나라를 짓밟을 침략군을 뒤로 하고 지금 논하는게 고작 학교 숙제라니!
"흠.. 그래. 그렇다면 말해주겠다. 내 약점은!"
드래곤의 말에 다들 숨을 죽였다.
-중략---------------------------------------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