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3부 알파룸
“뭔가 방법이 있을거야. 격벽을 뜯어내면….” 석철수는 알파룸으로 진입하기 위해 설계도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건 비겁한 방법이지요. 그리고 타키온 항행중에 외벽을 뜯어낸다면, 모두 다 죽을지도 몰라요.”
“어차피 너는 안 죽으니 나 혼자 죽는다는 의미겠군. 그럼 로봇을 조종해서 외부 선창을 지나서 알파룸으로 진입시킨 다음 변신 버튼을 누르게 하는 거야!”
“타키온 항행중에 선체에서 0.001마이크로미터라도 떨어지면 타키온 우주에서 이탈, 정상우주로 튕겨 나가는 거 알고 계시죠?”
“그럼…알고 있…. 정말이냐!?”
“네. 그건 실험으로도 증명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설프게 우주선 밖으로 나가면 그 순간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점프한 꼴이 되는 거죠. 그러고 보니 좋은 농담이 생각났어요.” 노가디아는 어제부터 계속 시시껄렁한 농담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그만! 궁금하지 않아! 농담은 이제 그만.”
“그러니까 농담이 싫으시면 조크를 할께요. 에.. 비행기에 일본사람 미국사람 한국사람이 타고 있었어요. 그런데 비행기가 고장난거에요. 한국사람이 어떻게 했게요.”
“나라면 비행기를 고쳤을 거다. 추락하기 전이라면 시간은 충분해. 아니면 지구링에 견인을 요청했겠지.”
“아니에요. 한국 사람은 헐값에 비행기를 샀대요. 호호호호호!” 노가디아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었다. 인공지능이 웃기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지만 인간과 유모어감각을 공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듯 보였다.
“뭐야 그게! 웃기지도 않고 개연성도 없잖아! 대체 미국사람과 일본 사람은 어떻게 된건데? 왜 나왔어?”
“그건 엑스트라. 조연이라는 거죠. 조크는 그냥 조크로 받아들여요. 철수님의 허트에 유모어의 꽃이 피는 날은 언제일까요.”
“네가 말하는 건 꽃이 아니라 곰팡이 포자야! 영원히 피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런데 노가디아. 대체 왜 이런 설계를 한 것이지? 그 알파룸엔 대체 무엇이 있길래 이토록 철통 같은 보안으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도록 한 것이냐!”
“그건.. 소녀의 비밀이라는 거죠.”
“뭣이?”
“그러니까 소녀에겐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 거랍니다. 호호홋.”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고 해서 타키온 항행중에 접근이 불가능한 외벽에 입구를 만드는 게 말이나 되는 거냐. 이 정신나간 기계지능 같으니.”
“인.공.지.능. 이랍니다.”
“기계지능.”
“초천재라 해도 자기 맘대로 안 되는 일 앞에선 초딩이나 다를 바 없이 유치하군요. 훗.”
“감히 나를 비웃는 거냐? 내가 경험한 좌절의 깊이를 어떤 인간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허나 나에게 본디 길이란, 뚫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발을 디디는 곳이야말로 바로 길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초천재라 불리는 이유기도 하지. 여기! 바로 이곳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다!”
“하수구.. 인가요? 그러고 보니 거긴….”
“흥. 나중에 울면서 애원해도 인정 봐주지 않을 테다.” 석철수는 후레쉬와 휴대용 산소 마스크를 준비했다. 간신히 몸이 지나갈 정도의 공간인지라 우주복도 맞질 않았다. 어떻게든 알파룸에 진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념에 석철수는 빤쓰바람으로 함내 액체 순환계 시스템의 내부로 진입해 들어갔다.
“액체순환계 내에서는 홀로그램을 켤 수 없으니 음성으로 만족하세요.”
“안 나오는게 도와주는 거야.” 마스크를 쓰고 통로를 따라 엎드린 자세로 한발한발 접근하던 석철수는 팔다리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젠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알파룸에 진입해서 변신버튼을 눌러 알파룸을 개방한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었다. 이대로 이상한 인공지능의 어설픈 농담을 듣고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 질것만 같았다.
“아! 좋은 농담이 생각났어요.”
“듣고 싶지 않아. 그만 해.” 석철수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거절했다.
“그러니까 토끼가.. 언덕 위에 올라갔는데. 그만 미끄러진 거에요.”
“듣고 싶지 않아! 함장 권한 발동!”
“아. 그래요. 함.장.님. 그럼 토끼가 ‘토끼’다가 그만 똥 밟고 미끄러진 거란 건 이야기 하면 안되겠네요.”
“알파룸. 알파룸….” 석철수는 악몽 같은 상황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 널다란 함선 속에 단 둘이 있는데, 그 둘이라는게 자신과 반쯤 얼빠진 농담을 하는 인공지능이라니! 고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고치지 못한다면 반드시 플러그라도 뽑을 셈이었다. 함선 운용은 어떻게든 천재적인 두뇌로 해결해볼 생각이었다. 아니 이대로 우주의 미아가 되더라도 저 농담을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철수는 계속 기어서 전진했다. 100여 미터나 되는 거리를 물이 찰랑거리는 미끈미끈하고 좁다란 통로 안을 기어서 가야만 했다. 순환 시스템에 살고 있는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시큼한 냄새는 산소마스크 덕에 나지 않았지만 찐득한 액체의 느낌은 그의 온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크으.. 얼마나 온건지 모르겠군. 이제 슬슬 다 된 것 같은데....”
“우와. 철수님 벌써 목표지점까지….”
“음? 그래?” 철수는 번쩍 기운이 났다. 이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한 통로를 벗어날 수 있다니 기쁘기 그지 없었다.
“1/5 지점을 통과하셨습니다!! 앞으로 분발해주세요.”
“놀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모양이지. 기다려라 노가디아. 내가 간다. 너에게서 그 곰팡내나는 유머부터 교정해 주마.” 철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찐득거리는 액체를 헤치며 나아가는 것은 암담하기만 했다. 액체 순환 시스템은 점액질이 되었다가 점도가 낮아지다가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에 섞이거나 하면서 엎드리다시피 기어나가는 철수의 얼굴 바로 아래까지 차 올랐다가 빠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파이프 속을 기어가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었다. 그때 노가디아가 시시껄렁한 농담을 했고 철수는 잠깐 미소를 짓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노가디아의 유머에 길들여지는 자기자신이라니! 광증이 전염되는 거라 생각하자 찬 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확 들었다.
“잠깐…동안이라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면 내가 미친 거겠지.” 철수는 이성을 붙잡기 위해 암산으로 원주율을 계산하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노가디아가 뭔가 시시껄렁한 유머를 구사했지만 철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노빈슨 교수가 그에게 해준 이야기였다. 노빈슨교수는 초천재라고 자부하던 철수에게 최초로, 그리고 최후로 좌절감을 가르쳐 준 이였다. 그렇기에 석철수가 인정하는 몇 안되는 인간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자네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나. 종이도 펜도 없어. 그런데 원주율을 계산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나. 그걸 알아야만 벗어날 수 있다면?’ 물론 석철수는 그 자리에서 112자리까지의 원주율을 암송하여 상대를 침묵시켰지만 그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충고는 지금 매우 그에게 도움이 되는 충고였다.
“이봐요! 함장님!!”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노가디아가 소리높여 철수를 외쳐 부르고 있었다.
“음? 무슨 일인가 노가디아.” 내면의 세계에 잠겨있느라 잠시 정신줄을 놓고 있던 철수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원주율을 계산하는 것은 그가 흐트러진 감정을 추스리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지나쳤어요.”
“응?”
“알파룸 지나갔다고요. 갑자기 그렇게 빨리 기어가다니. 켄타로스 토착 바퀴벌레와 하수구 종단시합을 해도 뒤쳐질 거라 믿기 힘든 정도의 속력이군요. 대체 뭘 한거죠? 약이라도 먹은 건가요?”
“너 같은 기계지능은 알 수 없을 거다. 그건 인간의 힘이라고나 할까.” 철수는 조금 쑥쓰러워하며 얼버무렸다.
“자. 그럼 후진하세요.” 통로는 너무 좁았기에 엉금엉금기어서 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뒤로 기어가다 보니 윗쪽에 조그만 해치가 하나 있었다. 노가디아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찾기 힘들 정도의 것이었다. 조심스레 해치를 개방하고 하수도를 빠져나온 철수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다. 마스크를 벗자 온몸에서 풍기는 시큼하고 퀴퀴한 냄새가 좁은 복도 안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으.. 노가디아, 어디 씻을만한 곳은 없을까. 냄새가 너무 고약한데.”
“저를 따라 오세요.” 노가디아가 모습을 드러내며 철수를 안내했다. 그를 데리고 간 곳은 복도 옆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샤워시설을 본 철수는 벽에 있는 스위치를 작동시켜 물을 틀었다. 따스한 물이 너무나 기분 좋았다. 온 몸에 달라붙은 오물들을 씻워버리며 철수는 젖은 옷을 벗어 한쪽에 던져 두었다. 세탁 시스템에 넣어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먼저 알파룸에서 변신작업을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저 냄새나는 옷을 들고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누드로 길을 나서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일단 알파룸에서 변신을 하고 나면 문제없이 해결될 것이었다.
“휴… 샤워 시설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냄새가 정말 고약하군. 자, 이제 알파룸으로 들어가야겠어. 안내해 주겠나?”
“함장님, 아니 석철수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안 될까요.”
“안해. 아니. 못해. 날더러 저 끈적끈적하고 악취나는 통로로 다시 기어가란 말이냐!”
“하지만 켄타로스 바퀴벌레 정도의 속력이라면 금방 도착할 수 있으신데….”
“거절한다. 노가디아. 이젠 알파룸의 문을 열 뿐이야.”
“열면 안 되는데….”
“함장 권한 발동! 문을 열어라!” 철수는 벌거벗은 채로 강력하게 의사를 표현했고 움찔하던 노가디아는 마지못해 알파룸으로 향하는 문을 잠그고 있는 록을 해제했다. 녹색불이 들어오자 철수는 그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 뒤엔 엄청난 크기의 돔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백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구체였다. 물론 일부는 우주선의 골격 사이로 뻗어 있어 구체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지만 그것이 전해주는 거대함을 상쇄하지는 못했다. 그 거대함 앞에 누드로 선 철수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혼자만 탑승하고 있으니 벌거벗고 춤을 춘다해도 뭐라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노가디아의 질나쁜 농담을 들어야 하겠지만.
“크… 크구나.”
“후훗. 그렇죠. 이 정도 사이즈의 알파룸이 저의 메타트론 입자로 채워져 있는 거랍니다. 그것의 자유로운 운동이 저의 사고의 폭을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저는 다른 여타의 인공지능들과는 달리 사상의 지평을 더 넓게 연장하여 인간과 비슷한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인식추론범위 밖으로….”
“원래 크다고 좋은 게 아니야. 인류 최초의 계산기도 거대했다지.”
“아아 그런 것에 비교하시다니 소녀 슬퍼요.”
“소녀 좋아하네.” 철수는 안을 둘러보며 이야기 했다. 벌거벗고 걷고 있자니 노가디아의 홀로그램과 함께 걷는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지구링이나 지구에서였다면 벌거벗고 여자랑 걷는 건 아무래도 정상 취급받기 힘들었겠지?”
“지금도 정상취급 받기는 힘들거에요.” 노가디아가 한숨을 쉬듯 철수의 몸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어딜 보는 거얏!!!! 보지 맛!” 철수가 놀라 손으로 몸을 가렸지만 노가디아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이런 소극적 태도래서야 알파룸에 과연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무.. 무슨 소리야. 태도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는 충분히 적극적이야!” 철수와 노가디아는 어느새 알파룸으로 들어서는 금색 문 앞에 섰다.
“바로 그것은 여기의 열쇠가 바로 그 부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부터는 바로 그 부위를 넣어야 열립니다.” 노가디아가 손으로 철수가 손으로 가린 그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상황에 철수는 덜컥 놀라 말했다.
“이런 야만적인 설계라니. 도저히 인정할 수 없군! 노가디아. 대체 누가 널 이렇게까지 만든거냐! 변신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방이라든가. 하수구를 기어서 들어가게 만들다니. 거시기를 넣어야 열리는 문이라니! 대체!!!”
“그게 호링이라니까요.” 노가디아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좋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 어디다 넣으면 되는 거지?” 철수는 얼굴이 붉어져서 말했다.
“저기 보이는 구멍입니다.”
“크… 크잖아!” 어른 주먹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커다란 구멍을 보고 철수가 조금 위축되었다.
“당연히 커야죠. 저 것은 평균적 성인 남성의 사이즈에 맞추어 제작된 겁니다.”
“어디가 평균이야!!! 좋아. 뒤돌아 서! 센서 끄고! 넣을테니까 보면 안돼!”
“왜 그런 호들갑을….”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함장 권한 발동!”
철수가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치자 노가디아는 마지 못해 뒤로 돌아섰다. 철수는 그제야 못미더운 듯 천천히 그쪽을 돌아보며 서서히 그것을 쥐고 구멍 안에 밀어 넣었다.
“안되는데.”
“그래요? 인식이 안 되나. 바닥에 좀 더 밀착시켜 보세요.”
“으.. 끄응. 그래도 안돼.”
“좀 더 깊이 넣어 보시던가요. 홈에 딱 맞을텐데요.”
“제길.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 봐! 노가디아 안되잖아. 이 이상 깊이 어떻게 넣으란 말이야!” 다음순간 돌아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노가디아의 말이었다.
“저, 함장님, 제가 아까 가리킨 것은 손이었는데요.”
“노…. 노가디아!!!!! 메모리에서 삭제해!!!! 심층의식이든 기저의식이든 몽땅 다 지워!!!! 방금 일은 영원히 잊어라!!!”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
음, 뭐랄까.
인류 최고의 역작이랄까, 다음편 못읽으면 성불을 못하겠다던가,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할 사명을 띄고 태어난 것 같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