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지환은 변호사에게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몰찬 대답 뿐이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여론이 너무 안 좋습니다. 내일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죠. 더 이상 언론을 자극하면 곤란합니다."
몰인정하기도 하지. 지환은 뒤돌아서 나가는 변호사를 향해 중지를 흔들었다. 개같은 새끼. 네놈이 신경쓰는 건 여론이 아니라 네 이름자 석자를 알리는 일이렸다. 변호사는 바삐 사라져 버리고 지환은 아무도 없는 혼자 독방에 남겨졌다. 차가운 독방의 냉기가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가 저지른 범죄는 특별관리대상범죄라 불리는... 흉악 극렬 범죄, 즉 국가에서 정한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범죄 몇가지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우연찮은 일이었다. 그가 원래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얄궃은 운명때문에 그는 여기에 잡혀와 있었다. 원래 계획은 적당히 빈 집에 들어가 돈이랑 귀금속을 훔쳐온 뒤 대충 헐값에 팔아 치우고 환전해서 동남아 오지에라도 쳐박힐 셈이었다. 마침 부유층이 모여 사는 부자동네에 적당한 집을 하나 골라봐 둔 것이 있었다. 쉽사리 담장을 넘고 창문을 따고 들어간 것 까지는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일이 꼬이려는지 집에는 집주인 일가가 돌아와 있었고, 가장이란 늙은 남자는 지환이 휘두르는 칼을 보고도 미친듯 달려 들어 몸으로 칼을 받아 내었다. 순전히 위협만 할 셈이었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던 남자는 아들을 향해 손짓했고 지환이 뭐라 하기도 전에 아들은 어디서 가져온 건지 휘발유를 들이부었다. 완전히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악을 쓰며 여기 저기 뿌려대는지라 지환도 덩달아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나는데 방 밖으로 도망치기가 무섭게 뒷쪽에선 불이 확 일었다. 불길이 뒤쫒아오는 듯 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휘발유 냄새만으로도 통구이가 되는데는 충분했을 것이다. 미친듯이 도망친 끝에 지방 여관방에 틀어박혀 계속해서 TV만을 끼고 살았다. 밖에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다음날 뉴스를 보니 일가족이 자살방화로 추정되는 화재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재수가 없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석연찮은 일이었다. 아니 스스로 칼을 향해 달려드는 늙은이에 직접 불을 질러 죽은 가족들이라고?
다행히 사건은 그렇게 묻히는가 했는데 문제는 엉뚱한 데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수상한 남자가 담벼락을 타고 넘어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 바로 직후 집에선 불길이 솟아올랐다고, 방화 살해범을 목격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수사는 원점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가족 중 몇명이 불에 타 죽기 전에 이미 살해당했다는 내용이 방송을 탔다. 폐에 검댕이가 없었다나. 지환은 재수 옴붙었다고 생각했다. 여관방에서 숨어 컵라면과 짜장면으로 연명한지 일주일, 마침내 목격자의 몽타주가 화면을 탔다. 그런데 정말이지 지환과 하나도 닮지 않은 모습이 아닌가. 그걸 보고 지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다른 목격자들이 등장하면서 몽타주는 점점 바뀌어갔다. 점점 자신의 얼굴을 닮아가는 몽타주, 그리고 여관 주인의 수상한 눈초리를 견디다 못한 지환은 밀린 방값을 내고 여관을 나왔다.
도망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결국 경찰에 잡혔고, 결정적 제보를 한 음식점 주인은 포상을 받았다. 경찰은 노인을 상처낸 범행흉기도 찾아내었고 지환은 노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야 이 새끼 이거 아주 아주 악질이에요.."
"그 어린애까지 죽이다니. 대체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네."
"개새끼가 별건가. 이런 새끼가 개새끼지. 어휴.. 법만 없었으면 너같은 건 그냥...."
"밥이 아깝다. 어휴. 진짜 저런 놈은 기냥 조져야 하는데."
지나가던 경찰들이 한마디씩 뱉었지만 지환은 조금 억울했다.
"어휴.. 저 아니라니까요."
"그럼 누군데!? 공범이 있어? 너 말고 누가 죽였는데? 뭐라고 이야기 하든 좋지만 이거 다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된다?"
"그게 아니라... 어휴! 답답해 죽겠네."
"니 칼로 찔렀어 안찔렀어?"
"그게, 제가 찌른건 아니고 위협만 하려고 했는데 노인네가 절 덮쳤다니까요."
"꼭 강도 새끼들이 그렇게 이야기 하더라. 불까지 지른게 얼마나 죄질이 나쁜지 알어?"
"넌 이제 좆된거야. 이번에 흉악범죄 처벌이 아주 악질적으로 바뀌었는데 너 시범케이스로 들어갈거랜다. 어쩌냐."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문을 주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는 사정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를 찾아온 국선 변호사가 보여준 신문은 아주 가관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민심을 얻어보겠다는 정치인들이 일치단결하여 내놓은 법안이라는 게, 대단히 악질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얼마전부터 시범적으로 시행되던 배심원제도를 수정, 50인의 시민을 배심원으로 하고, 그 배심원들이 몇%나 찬동하는가를 따져 범죄자를 처벌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 높을수록 처벌받는 강도는 더욱 강해지는 것이었다. 지환은 몇년전에 사형제도가 폐지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분명 억울하긴 하지만 최대로 형량을 살아도 무기징역이 고작일테니까. 죽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자신의 억울함이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변호사의 이야기는 달랐다.
"박지환씨,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98%의 범죄가 무기징역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분명 오해입니다. 무기징역은 80% 이하일때 구형되는 겁니다. 그 이상의 경우는 범죄자의 인권이 박탈됩니다."
"네? 인권박탈이요?"
"그렇습니다. 이번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때문에 이 법은 매우 강력한 형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행법에서 인정되는 모든 형벌은 인권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만, 82% 부터는 인권이 박탈됩니다. 100% 에서는 사형도 선고 가능합니다."
"사형제는 폐지되었잖아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인권이 박탈된다면 사형도 선고 가능하죠. 일단 재판 결과에 따라 배심원들이 결정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형량이 구형됩니다. 무기징역이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불만 안 질렀어도 해당이 안 되었을텐데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90%가 넘는 형벌보다는 사형이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태형이나 사지 절단은 아주 고통스럽고 잔인하거든요."
"제가 불 지른 게 아니라니까요!"
"진정하세요. 증거가 없으면 누가 했든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무고하다고 주장해도 배심원들에겐 그건 파렴치한 행동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은 주장을 번복하는 겁니다. 그건 절대로 안되죠. 거짓말이란 인상을 심어주니까요. 절대로 주장을 번복해선 안 됩니다. 저는 그 가족에 대해 조사를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어떤 정황증거가 나오더라도 지환씨가 거기 들어가 칼을 휘두른 뒤 일가족이 불에 타 죽은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변호사의 말은 가차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이 아니에요! 저는 들어가서 칼을 들이대며 꼼짝마! 라고 말했을 뿐인데 노인이 제게 몸을 던졌고 아들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니까요."
"하지만 초등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건 제가 죽인게 아니에요! 말했잖아요!"
"부검 결과 폐안에는 검뎅이 없었어요. 다시 말해 화재 이전에 사망했다는 이야기...."
"그럼 그 식구들이 죽인 거겠죠! 난 안 죽였다니까요!"
"정말입니까?"
"변호사라면서 피고를 안 믿나요? 그러면서 어떻게 변호를 하죠?"
"아니. 그 말이 사실일 가능성에 대해 물은 겁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한번 조사해 보죠."
지환은 그저 머리를 감싸 쥘 뿐이었다. 인권박탈이라.... 지환은 기억을 더듬었다. 가족들은 뭔가 큰 목소리로 다투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휘발유를 집안에 준비했다는 건 뭔가 하려고 한 일이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의혹에도 불구하고 창살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이틀이 지난 뒤 변호사가 찾아왔다.
"지환씨, 제가 조사해 보니 그 집에는 거대한 채무가 있었군요. 가족간의 불화도 사실이고요. 문제는 이게 정황증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방화를 부인하는 것이 인정된다면 80% 미만으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인정받지 못하면 갑종악질 범죄로 판단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죄값을 치르는 건 치르는거지만 저지르지 않은 일로 잘못을 구하는 건 저도 억울합니다."
"그럼 제가 증거를 더 모아보겠습니다만 너무 기대는 마시길. 명확한 사실증거가 없다면 소용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지환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태형? 사지절단? 그런 거라면 차라리 죽는게 나았다. 하지만 일말의 희망도 버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불을 지르지 않은 사실을 밝힐 수만 있다면 가능성도 남아 있었다.
재판의 날이 다가왔다.
검사는 사건 현장의 사진과 재구성된 사건개요를 갖고 박지환을 차근차근 몰아가고 있었다. 마치 사냥꾼이 미리 준비해둔 덫으로 사냥감을 몰듯, 그날 이전의 행적과 그가 저지른 사소한 전과를 더해 악랄하고 무자비한 범죄자로 그를 몰아가고 있었다. 반면 변호사는 천천히 방어하는 자세로 그가 사람을 죽일 정도로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논지만을 반복적으로 펼쳐가고 있었다. 적극적인 공격과 소극적인 방어. 지환은 바짝바짝 속이 타들어 갔다. 재판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당시 불을 끄러 갔던 소방관들이 증인으로 채택되어 현장의 방화사실을 증명했고, 검시소에서 노인은 칼에 찔려 죽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칼은 분명 지환이 수퍼마켓에서 구입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CCTV까지 확보해 둔 것이었다. 최후변론에 즈음하여 배심원들은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변호사가 앞으로 나섰다.
"피고가 저지른 죄는 확실합니다. 그는 분명 가택에 침입하여 힘없는 노인을 향해 흉기를 휘둘렀습니다. 그것이 그 노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상처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죄와는 별개로 그가 하지도 않은 잘못까지 뒤집어 쓸 수는 없습니다. 그가 받아야 할 것이 범의 심판이고 그것이 사법정의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그가 저지르지 않은,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휘발유를 마련했다고 하지만 근처의 수퍼에 들러 흉기를 살 정도로 멍청한 피고가 대체 그 기름을 어디서 구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근처의 어디에서도 휘발유를 구입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가 휘발유를 들고 이동하는 것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희생자들의 가족은 최근 심한 불화를 겪어왔습니다. 사업의 난조로 폭행과 분란이 일어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분신자살을 택한...."
"이의있습니다! 피고측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사실인양 호도하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본 내용은 재판에서 제외합니다."
"피고인들의 카드사용 내역입니다. 사건 당일에 주유소에서 결제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주유소의 구매내역이 사실이라 해도 분신자살로의 연관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인정합니다. 본 내용은 재판에서 제외합니다. 피고측은 좀 더 사실에 입각한 내용을 말하기 바랍니다."
그 뒤론 변호사가 지지부진한 이야기를 적당히 늘어놓다가 끝이 났다.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제 우리 할 일은 다 끝났어요. 저기 보이는 50인의 배심원이 결론을 내는 겁니다." 변호사가 그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판사는 판결문을 들고 나와 낭독하기 시작했다.
"반 인륜적 범죄이며, 인간으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그리하여....." 지리하고 교훈적인 판사의 판결문이 한참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심원의 점수가 발표되었다. "피고의 죄질을 평가한 배심원들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98%의 흉악범죄로 판단되었습니다. 따라서 신형법에 의거하여...."
"잠깐!!!! 나는 불을 지르지 않았어!"
"피고! 조용히 하시오!"
지환은 하늘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였다. 그 놈들은 지들이 죽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다. 불도 지르려고 준비하고 아이들까지 지 손으로 죽인 놈들이란 말이다.
"야 이 개새끼들아! 내가 안 죽였다니까!"
"피고를 조용히 시키세요!" 경비들이 달려와 지환을 찍어 눌렀다.
"차라리 곱게 죽여 줘!!" 더 이상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경비들이 입을 틀어 막았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사지절단형이 선고되었고 해당 시술은 피해자 가족과 절친하게 지내던 의사가 집도하기로 되었다.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취약이 투약되고 정신이 혼미해 지는데 멀리서 TV에 한 판사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왜 그런 흉악범에 사형이 언도되지 않은 겁니까?"
"한분의 배심원이 사형 반대론자셨더군요. 증거를 태워 없애려 한 점, 아이까지 살해한 점, 흉악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반성하지 않는 점등에도 불구하고 사형은 되돌릴 수 없다는 이유로 끝끝내 반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선고에 대해서 외국의 반응이 뜨겁다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시겠지만 이 형집행의 의미는 인간이 아닌 자들의 인권을 인정하는 부분에 관한 문제인지라 이미 지난회기에 통과된 수정헌법에 의거 인권은 가치있는 인간에게 유효하다는 헌법 조항 아래 합헌이라는 점이 인정되었습니다. 앞으로 강력범죄에 엄중 대처하겠다는....."
"강력범죄에 대한 공포가 ...... 정당 지지율은 매우 높아......."
"난 안 죽였단 말이야...."
지환의 의식이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다.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