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크로스오버란 이런 거죠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 플래시, 그린 랜턴, 슈퍼걸…. 아마 다들 한 번씩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들은 미국 만화잡지 회사 DC 코믹스가 만들어낸 만화 속 슈퍼 히어로들입니다. <슈퍼맨>은 외계에서 메트로폴리스로 슈퍼맨이 떨어지는 내용이고, <배트맨>은 고담시에서 배트맨이 범죄를 소탕하는 이야기이며, <플래시>는 센트럴 시티에서 번개를 맞아 빨리 달릴 수 있게 된 밸리 알렌이라는 남자가 주인공이죠.

그런데 만화를 재미있게 본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슈퍼맨의 힘과 배트맨의 기술이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 슈퍼맨이 플래시와 경주를 하면 누가 더 빠를까? 슈퍼맨이 원더우먼과 연애를 하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사족인데, 아마 부부 싸움으로 도시 하나가 날아갈 것 같습니다) 이걸 실현시킨 만화가 바로 <저스티스 리그>입니다. 만화에 나오는 슈퍼맨, 배트맨, 플래시, 원더우먼, 그린 랜턴, 맨헌터, 아쿠아맨 등이 모여서 결성한 초인 부대죠. 한 마디로 엄청난 크로스 오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만들 때 생기는 고충은 이겁니다. 과연 저 인물들을 어떻게 버무려야 맛깔스럽게 살아날까 하는 것이죠. 슈퍼맨, 배트맨, 플래시는 저마다 개성이 팍팍 튑니다. 슈퍼맨은 외계에서 온 불멸자이고, 배트맨은 세계 재벌로서 첨단 기술로 밤거리를 휘어잡습니다.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번개인간 플래시는 신진대사가 활발해 엄청나게 먹어대며 나이도 빨리 드는 편이죠. 도대체 이런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으니 얼마나 골치가 아플까요. 하나만 다뤄도 만화 수 십 권은 쓸 수 있을 텐데, 여러 명이 모였으니 그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저스티스 리그>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슈퍼맨이나 배트맨의 팬도 있습니다. 슈퍼맨이 너무 세다고 배트맨을 기죽일 수도 없고, 배트맨이 어둡다고 해서 플래시가 소외되서도 안 되죠. 외계인이 나온다고 만화가 SF로 흘러가면 그리스 신화가 사라지게 되고 그러면 원더우먼도 배경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모두에게 개성을 부여하고 어중간하게 끝내지 않기 위해 시나리오 작가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이 연애를 하는데, 막강한 슈퍼맨 때문에 배트맨이 허무하게 나가 떨어지면 배트맨 팬들이 이 만화를 보겠습니까.

하지만 <저스티스 리그>는 이런 고민을 날려버리고, 그야말로 짬뽕 세계관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성격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슈퍼맨이 강한 것도, 플래시가 빠른 것도, 배트맨이 기술이 뛰어난 것도 전혀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개성이 합쳐져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합니다. 배트맨은 가끔 크립토나이트로 슈퍼맨을 제압하지만, 힘을 쓰는데 슈퍼맨을 따라가진 못합니다. 플래시는 별다른 밑천이 없어 약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빠르기에 슈퍼맨을 앞질러 집어 던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든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AvP>가 이런 점을 본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에일리언과 프레데터는 둘 다 강합니다. 그래서 크로스 오버를 할 때면 대부분 그렇듯 둘의 싸움은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죠. 이건 짬뽕 영화가 가야 할 진정한 길이 아닙니다. <저스티스 리그>의 플래시는 엄청나게 빠른 덕에 슈퍼맨을 곯리기도 합니다. 짬뽕 영화라면 이런 맛이 있어야죠. <AvP>의 프레데터와 에일리언을 보세요. 어깨포 한두 방 쏘거나 서너 마리가 몰려들어 끝납니다. 이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프레데터가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에일리언 패거리를 디스크로 한꺼번에 갈라놓는 겁니다. 둘이 맞붙었으니 유치하더라도 그만큼 개성이 불꽃 튀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어차피 짬뽕인 이상 <AvP>는 유치하다는 평판을 감수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유치함 안에서 얼마나 잘 맞물리는가 중요합니다. <저스티스 리그>에서 배트맨은 항상 어둠 속을 다니기 때문에 빛에서 활동하는 슈퍼맨을 존경하는 눈치입니다. 불멸인 슈퍼맨은 플래시가 나이를 너무 빨리 먹기에 금방 죽지나 않을까 걱정합니다. 이렇게 물고 물리는 맛이 <저스티스 리그>의 재미입니다. 서로 죽이려고만 달려드는, 하지만 결국 어설프게 싸우고 마는 <AvP>에는 이런 재미가 빠졌습니다.

<AvP 2>가 나오면 에일리언과 프레데터가 서로의 특징을 제대로 물고 늘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