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역사 포럼
밀리터리, 군사 과학, 그리고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게시판.
역사 속의, 또는 현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들과 관련한 뉴스 이외에 국내 정치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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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531
활의 경제적학적 접근이란 거창한 제목을 달고 쓴 글을 있었는데 다시 보니 유목민족이 왜 궁술에 강했는가?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글이었습니다.
스스로 비명을 올리며,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을려고보니 도서관에 한 하루종일 꼭 박혀 있어야 겠습니다.
잠시 여기서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1. 활은 총이 나오기 이전에 유일무일한 소모성 전술 병기다. (따라서 화살 소모를 감당하기 위해 과거 무기 생산에 보기드문 대량생산이 필요하다. )
2. 궁수의 양성기간과 질적 우위를 점할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도 대규모 양성이 힘들다.
3. 고대에 활로 유명했던 국가나 단체들은 군사적 목적으로 궁수를 양성했다기보다는, 다른 이유 다른 목적으로 궁수를 양성하게된 경우가 더 많다. (이건 조금 문제가 있곘죠)
4.우리의 국궁과 같은 활은 제조가 까다롭고 유지보수도 까다롭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만큼 경제적 파급효과도 상당하다. 이런 활을 대량 제조할려면 엄청난 양의 재료 확보가 필수적이지만, 과연 조선조내에 의욕적으로 대량생산을 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5. 생산성이나 경제 규모면에서 유리한 농경민족보다 유목민족이 활을 잘사용하고 더많이 무장한 계기는 뭘까?
이런 주제로 다음주쯤에 글을 올릴까 합니다. 이렇게 여기저기 퍼뜨려나야 이름 팔리는한이 있었도 글을 쓰곘죠. 요즘 너무 자극이 없는 직장 생활중이라 삽질이라도 할려고 그럽니다.
스스로 비명을 올리며,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을려고보니 도서관에 한 하루종일 꼭 박혀 있어야 겠습니다.
잠시 여기서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1. 활은 총이 나오기 이전에 유일무일한 소모성 전술 병기다. (따라서 화살 소모를 감당하기 위해 과거 무기 생산에 보기드문 대량생산이 필요하다. )
2. 궁수의 양성기간과 질적 우위를 점할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도 대규모 양성이 힘들다.
3. 고대에 활로 유명했던 국가나 단체들은 군사적 목적으로 궁수를 양성했다기보다는, 다른 이유 다른 목적으로 궁수를 양성하게된 경우가 더 많다. (이건 조금 문제가 있곘죠)
4.우리의 국궁과 같은 활은 제조가 까다롭고 유지보수도 까다롭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만큼 경제적 파급효과도 상당하다. 이런 활을 대량 제조할려면 엄청난 양의 재료 확보가 필수적이지만, 과연 조선조내에 의욕적으로 대량생산을 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5. 생산성이나 경제 규모면에서 유리한 농경민족보다 유목민족이 활을 잘사용하고 더많이 무장한 계기는 뭘까?
이런 주제로 다음주쯤에 글을 올릴까 합니다. 이렇게 여기저기 퍼뜨려나야 이름 팔리는한이 있었도 글을 쓰곘죠. 요즘 너무 자극이 없는 직장 생활중이라 삽질이라도 할려고 그럽니다.
1. 활이 유일무일한 소모성 병기는 아닙니다. 투척무기는 다 소모성인걸요. 투창, 슬링, 바람총 등등
2. 궁수의 양성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건 사실이지만 국력과는 상관없습니다. 활 연습에 돈이 많이 드는 것
도 아니고 영국의 요맨을 보나 조선을 보나 유목민계를 보나 국가 경제력과의 관여는 찾아볼 수 없습니
다.
3. 활이라는 물건이 본디 수렵을 위해 탄생한 물건이긴 합니다만 군사목적 이외에 국가에서 궁수를 대규
모로 장려할 필요가 있을런지..;;
4. 제조가 까다랍고 유지보수가 힘든건 복합궁뿐이지요. 활 자체가 유지보수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긴 하
지만. 그리고 경제적 파급효과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조선의 작태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에..;; 복합궁
의 재료를 생각하면 무역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쇄국하고 활 만든 조선을 보면 꼭 경제적 효과가 나란
법도..;; 보통 활 하나 만들기 위해 필요한 물소뿔이 한마리분이였나? 확실히 돈들긴 돈듭니다만..
5. 결론은 하나, 애초에 활이 생겨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렵이지요. 사냥으로 먹고 살기에 맨날
활 쏠 필요가 있던 유목민족, 농사 져먹기에 사냥할일이 없어 심심풀이로 활을 쏘던 농경민족. 누가 잘
쏘는지는 볼 것도 없지요.
2. 궁수의 양성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건 사실이지만 국력과는 상관없습니다. 활 연습에 돈이 많이 드는 것
도 아니고 영국의 요맨을 보나 조선을 보나 유목민계를 보나 국가 경제력과의 관여는 찾아볼 수 없습니
다.
3. 활이라는 물건이 본디 수렵을 위해 탄생한 물건이긴 합니다만 군사목적 이외에 국가에서 궁수를 대규
모로 장려할 필요가 있을런지..;;
4. 제조가 까다랍고 유지보수가 힘든건 복합궁뿐이지요. 활 자체가 유지보수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긴 하
지만. 그리고 경제적 파급효과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조선의 작태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에..;; 복합궁
의 재료를 생각하면 무역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쇄국하고 활 만든 조선을 보면 꼭 경제적 효과가 나란
법도..;; 보통 활 하나 만들기 위해 필요한 물소뿔이 한마리분이였나? 확실히 돈들긴 돈듭니다만..
5. 결론은 하나, 애초에 활이 생겨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렵이지요. 사냥으로 먹고 살기에 맨날
활 쏠 필요가 있던 유목민족, 농사 져먹기에 사냥할일이 없어 심심풀이로 활을 쏘던 농경민족. 누가 잘
쏘는지는 볼 것도 없지요.
1. 활 말고 주력으로 쓸만한(최소한 성벽 위를 노릴수 있을 만큼 날라가고 왠만한 갑주을 뚫을수 있는) 원거리 투척 무기는 별로 안보이죠? 활 말고 다른 무기는 주력무기로 올라서기엔 꽤나 부담스럽지요. 그래서 활 외엔 특정종족이나 지역에 특화적으론 쓰여도 널리 퍼지질 못한거구요.
2. 궁수양성에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것은 기본.
활제작은 농기구같은 실생활에 필요한 기술과 상관없고 사용되는 재료도 상당히 고가품 이라서 비용이 장난 아니게 듭니다. 사실 창이나 칼같은건 농기구만들던 대장간에서 좀 뚝딱 거리면 만들수 있지만 활은 전문 장인이 필요합니다.
영국이나 일본은 엄청나게 비싼 활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국내산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활 사이즈를 크게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죠. 특히 일본은 혼합궁이지만 동물성 재료를 쓰지 않아서 위력을 많이 잃었습니다. 하지만 가격을 대폭 떨어트리는데 성공해 비교적 대량 활용이 가능했죠. 조선은 특히 흑각궁 재료인 물소뿔을 전량 수입했기 때문에 엄청난 고가품이었고 국산화를 위해 국산 황소뿔을 쓴 황각궁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만 황소는 조선의 기반산업인 농업의 근간인데 마구잡을수 없죠. 유목민은 기본적으로 혼합궁 재료인 동물성 재료 획득이 쉽기 때문에 농업 국가에 비해 조금 쉽게 얻는다 뿐이지 무척 고가품이 었습니다.
조총같은게 활보다 짧은 사거리로 우위를 보일수있던건 좋은 생산성과 짧은 훈련기간 덕이죠. 그래도 조총이 엄청나게 비쌋던걸(집 한채값) 생각하면 활은 장난이 아니죠.
3. 궁수 획득에시간이 많이걸리지만 적 궁수가 아니라면 반격을 허용하지않고 살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방어적인 전략을 수립한 국가는 대단히 장려했습니다. 만약 전쟁이 임박해서 궁수를 양성한다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꼴이 되기 때문이죠. 정기적인 훈련을 한다고할때 활 솜씨는 나이와 비례합니다.
영국은 땅을 가진 사람 모두다 법적으로 활을 소유하고 매주 훈련을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이는 땅을 가진 사람이 징병시 병력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죠. 조선은 유교에서 선비가 쓸만한 무기로 활을 장려하고 있었고 방어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기에 활을 장려했고 사냥등을 통해 훈련을 쌓도록 했죠.
4. 모든 활은 제조가 힘듭니다. 나무 구부려 시위얹는다고 활되는게 아니라서... 활에도 만들기 위한 기반지식이 많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전문 장인이 필요하지요. 경제적 파급효과는 전문 장인이 만들기 때문에 별로 없습니다. 수입품 문제가 있을 뿐이죠. 대게 농업국가라면 동물성 재료는 수입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으니까.
5. 유목민족은 대게 드넓은 들판에서 활동하고(칼들고 달려가서 찌를 까요?) 기르는 가축을 지켜야 합니다. 혼합궁에 필요한 재료인 동물성 재료를 얻기 쉽고 활을 거의 항상 가지고 다니며 틈날때마다 사용하게 됍니다. (당연 항상 가지고 다닐려면 전쟁터에서 가지고 다닐 활보단 작으면서도 좋은 성능이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얻기쉬운 동물성 재료를 써서 혼합궁으로 발전하게되는 거구요. 전쟁터용은 성능 좀 나빠도 숫자로 커버가 되지만-싸게 대량을 갖추는게 전쟁터선 더 좋습니다.- 유목민족은 가축을 지킬땐 동료는 몇 안되지만 늑대 무리 같은 다수를 상대해야 할일이 많지요.) 다만 거의 자체생산이다 보니 성능이 들쑥날쑥하고 기술전수도 쉽지 않죠.
사냥용으로 활을 쓰는건 분명합니다만, 농경민족의 사냥꾼이나 사냥을 위해 활을 갖추고 사냥하며 연습하게 되지만 유목민족은 한자루의 활과 한자루의 칼이 생활의 필수품입니다. 당연히 잘 쓸수 밖에요.
2. 궁수양성에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것은 기본.
활제작은 농기구같은 실생활에 필요한 기술과 상관없고 사용되는 재료도 상당히 고가품 이라서 비용이 장난 아니게 듭니다. 사실 창이나 칼같은건 농기구만들던 대장간에서 좀 뚝딱 거리면 만들수 있지만 활은 전문 장인이 필요합니다.
영국이나 일본은 엄청나게 비싼 활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국내산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활 사이즈를 크게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죠. 특히 일본은 혼합궁이지만 동물성 재료를 쓰지 않아서 위력을 많이 잃었습니다. 하지만 가격을 대폭 떨어트리는데 성공해 비교적 대량 활용이 가능했죠. 조선은 특히 흑각궁 재료인 물소뿔을 전량 수입했기 때문에 엄청난 고가품이었고 국산화를 위해 국산 황소뿔을 쓴 황각궁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만 황소는 조선의 기반산업인 농업의 근간인데 마구잡을수 없죠. 유목민은 기본적으로 혼합궁 재료인 동물성 재료 획득이 쉽기 때문에 농업 국가에 비해 조금 쉽게 얻는다 뿐이지 무척 고가품이 었습니다.
조총같은게 활보다 짧은 사거리로 우위를 보일수있던건 좋은 생산성과 짧은 훈련기간 덕이죠. 그래도 조총이 엄청나게 비쌋던걸(집 한채값) 생각하면 활은 장난이 아니죠.
3. 궁수 획득에시간이 많이걸리지만 적 궁수가 아니라면 반격을 허용하지않고 살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방어적인 전략을 수립한 국가는 대단히 장려했습니다. 만약 전쟁이 임박해서 궁수를 양성한다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꼴이 되기 때문이죠. 정기적인 훈련을 한다고할때 활 솜씨는 나이와 비례합니다.
영국은 땅을 가진 사람 모두다 법적으로 활을 소유하고 매주 훈련을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이는 땅을 가진 사람이 징병시 병력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죠. 조선은 유교에서 선비가 쓸만한 무기로 활을 장려하고 있었고 방어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기에 활을 장려했고 사냥등을 통해 훈련을 쌓도록 했죠.
4. 모든 활은 제조가 힘듭니다. 나무 구부려 시위얹는다고 활되는게 아니라서... 활에도 만들기 위한 기반지식이 많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전문 장인이 필요하지요. 경제적 파급효과는 전문 장인이 만들기 때문에 별로 없습니다. 수입품 문제가 있을 뿐이죠. 대게 농업국가라면 동물성 재료는 수입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으니까.
5. 유목민족은 대게 드넓은 들판에서 활동하고(칼들고 달려가서 찌를 까요?) 기르는 가축을 지켜야 합니다. 혼합궁에 필요한 재료인 동물성 재료를 얻기 쉽고 활을 거의 항상 가지고 다니며 틈날때마다 사용하게 됍니다. (당연 항상 가지고 다닐려면 전쟁터에서 가지고 다닐 활보단 작으면서도 좋은 성능이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얻기쉬운 동물성 재료를 써서 혼합궁으로 발전하게되는 거구요. 전쟁터용은 성능 좀 나빠도 숫자로 커버가 되지만-싸게 대량을 갖추는게 전쟁터선 더 좋습니다.- 유목민족은 가축을 지킬땐 동료는 몇 안되지만 늑대 무리 같은 다수를 상대해야 할일이 많지요.) 다만 거의 자체생산이다 보니 성능이 들쑥날쑥하고 기술전수도 쉽지 않죠.
사냥용으로 활을 쓰는건 분명합니다만, 농경민족의 사냥꾼이나 사냥을 위해 활을 갖추고 사냥하며 연습하게 되지만 유목민족은 한자루의 활과 한자루의 칼이 생활의 필수품입니다. 당연히 잘 쓸수 밖에요.
일본과 영국이 복합궁이 아닌 장궁을 주로 사용하는건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후의영향이 더큽니다. 일본과 영국은 기후가 습하고 비가많이 오는 관계로 여러 재료를 혼합한 복합궁을 사용할경우 습기에 침해되어서 활의 성능이 떨어지게 되죠. 더군다나 만들기가 복합궁이 단일재료로 만든 활보다 어렵고 가격도 많이 들어가는까닭에 재성능 발휘못하는 비싼활을 만들 이유가 없었던거죠.
유목민족이 복합궁을 사용하는것도 이같은 이유가 큽니다. 말위에서 사용할 이유때문에 작게 만들기도 했지만. 초원의 건조한 기후가 복합궁의 성능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복합궁을 사용하는 나라들을 보면 대부분 건조한 기후의 나라들입니다. 반면에 다른나라들은 성능이 떨어지는 작은 활을 사용하던가 일본이나 영국처럼 장궁으로 나갔죠. 우리나라의 경우 좀 특이한경우지만 습기가 활의성능에 영행을 끼친다는건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반대할때 내세운 이유중에 하나가 장마철이라 활의 습기를 먹어서 제성능을 발휘못한다는 대목이 있었죠.
천고마비라는 말이 멋진말이 아니라 알고보면 무서운뜻이라는걸 생각해보면. 가을에 날씨가 건조해지고 그럼 활이 더 멀리나가죠. 여름동안에 여물을 먹인 말이 살이 찌니까 북쪽에서 반갑지 않은 손님이 온다는 뜻이죠.
유목민족이 복합궁을 사용하는것도 이같은 이유가 큽니다. 말위에서 사용할 이유때문에 작게 만들기도 했지만. 초원의 건조한 기후가 복합궁의 성능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복합궁을 사용하는 나라들을 보면 대부분 건조한 기후의 나라들입니다. 반면에 다른나라들은 성능이 떨어지는 작은 활을 사용하던가 일본이나 영국처럼 장궁으로 나갔죠. 우리나라의 경우 좀 특이한경우지만 습기가 활의성능에 영행을 끼친다는건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반대할때 내세운 이유중에 하나가 장마철이라 활의 습기를 먹어서 제성능을 발휘못한다는 대목이 있었죠.
천고마비라는 말이 멋진말이 아니라 알고보면 무서운뜻이라는걸 생각해보면. 가을에 날씨가 건조해지고 그럼 활이 더 멀리나가죠. 여름동안에 여물을 먹인 말이 살이 찌니까 북쪽에서 반갑지 않은 손님이 온다는 뜻이죠.
일본활도 복합궁입니다. 다만 동물성 재료를 안쓸 뿐이죠. 서로다른종류 나무을 결이 다르게 붙여서 만듭니다. 습기정도까진 불을 피워말려서 해결할수 있습니다. 비가와버리면 안되는거죠. 활을 주력으로하는 부대는 전장 도착하면불부터 피워야합니다.
우리나라 궁의 종류에 대해 적겠습니다.
흑각궁 - 각궁입니다. 위에서 많이 설명하셨으니 패스.;
후궁 - 활 안쪽만 물소뿔을 붙인 궁입니다. 각궁과 위력은 크게 차이가 없었답니다.
향각궁 - 우리나라의 황소뿔로 만듭니다. 상각궁, 우각궁, 상용궁이라고도 불렸답니다.
각궁보다 값이 싼 만큼 위력도 떨어졌다더군요.
녹각궁 - 사슴뿔로 만든 활로 여름에 각궁 대신 사용했답니다.
교자궁 - 나무만으로 만든 합성궁입니다. 여러 다른 나무들을 합성한 것입니다. 역시 여름에 각궁 대신
사용했답니다.
죽궁 - 대나무 단일궁입니다.
목궁 - 나무 단일궁입니다.
철궁 - 쇠로 만든 활로 실전용은 아니었답니다. 벤치프레스용 이었을지도;
예궁 - 예식용 활입니다.
육량궁 - 무과 시험용으로 육량전이란 화살을 일정거리 이상 날리는 시험에 사용되었답니다.
육량전이 꽤 무거웠답니다.
아래는 활 보유 수량으로 다음 토탈워 까페의 초딩 사냥꾼님 글을 옮겨온 것 입니다.
(이른 바 불펌이지요. 문제가 되시면 삭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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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영 군기(193쪽)
- 흑각별장궁(黑角別長弓) 740장, 흑각장궁(黑角長弓) 142장, 후궁(侯弓) 30장, 육량궁(六兩弓) 5장, 교자궁(校子弓) 760장.
- 장전 80부, 편전 70부, 통아 118개(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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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도감 군기(236쪽) - 활 10,558장
- 흑각군궁(黑角軍弓) 4,549장, 흑각후궁 401장, 교자궁 4,382장, 향각궁(鄕角弓) 125장, 별조착칠궁(別造着漆弓) 32장, 죽궁 667장, 회목궁(檜木弓) 100장, 마채궁(麻采弓)
- 수노궁(水弩弓) 120장, 노전 300부 42개
- 장전 5,256부 14개, 편전 5,600부, 통아 403개, 체전(體箭) 684부 7개, 자괄장전 20부, 자괄편전 21부, 별괄장전 41부, 무우장전 60부, 무우편전 3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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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위영 군기(283쪽) - 활 6,781장
- 흑각장궁 989장, 흑각군궁 347장, 흑각육냥궁 15장, 흑각평궁(黑角平弓) 104장, 흑각후궁 490장, 칠교자궁(漆校子弓) 170장, 교자장궁 696장, 교자궁 2,682장, 죽교자장궁 1,201장, 회목궁 87장
- 노흑각대궁 15장, 노교자대궁 216장, 수노궁 499장, 궁노 239좌
- 장전 4,313부 10개, 편전 4,040부 25개, 통아 1,293개, 별괄장전 2부, 수노전 793부 5개
-----------------------------------------
▶ 어영청 군기(313쪽) - 활 11,924장
- 후궁 1,990장, 장궁 1,934장, 부장궁(不粧弓) 7장, 목전궁 11장, 피교자궁(皮校子弓) 67장, 회목궁(茴木弓) 35장, 교자궁 2장, 대궁 3장, 향각평궁 12장, 황각평궁 1장, 죽교자궁 2,525 장, 죽궁 257장, 칠교자궁 350장, 교자궁 4,551장
- 궁노목궁 163장, 궁노각궁 4장, 노등자궁 2장, 흑각노궁 12장
- 육량전 53개, 장전 6,775부 27개, 편전 4,106부 2개, 통아 2,547개, 자괄장전 20부, 궁노전 1,205부, 궁노기 119좌, 수노전 2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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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융청 군기(357쪽) - 활 1,091장
- 흑각궁 552장, 장궁 105장, 향각궁 5장,
- 흑각궁노궁 2장, 교자궁노궁 52장
- 장전 862부 28개, 편전 425부 25개, 궁노전 480부 8개, 장전촉 2,022개, 편전촉 210개, 통아 263개, 궁노기 6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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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5년
군기(軍器)를 강화부(江華府)의 별고(別庫)에 저장하고 나서 유수(留守)에게 하유하기를,
“내고(內庫)에 저장했던 군물(軍物)과 기용(器用)을 특별히 본부(本府)에
비치하게 한 것은 이를 설시(設施)토록 한 법의(法意)를 우러러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열조(列朝)에서 이미 행하여 왔으므로 하나의 통상적인 일이 되어 왔는데, 간간이
경용(京用)이 호대(浩大)하여지고 또 각고(各庫)가 화재(火災)를 겪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숫자가 천백 분의 일 정도뿐만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매양 구례(舊例)를
우러러 계술(繼述)하려는 뜻이 있어 제반 용도를 힘써 줄이는 쪽을 따랐는데, 이는
용도를 절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조(先朝)의 뜻을 계술하기 위한 것이었다.
등극한 이후 경기(經紀)한 물종(物種)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또 작년 여름
시민당(時敏堂)의 화재가 있을 때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저축에
유의하여 왔는데, 근래에 이르러 비로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고(內庫)에 있던 흑각 장궁(黑角長弓) 4백 50장(張), 흑각 후궁(黑角帿弓) 50장,
흑각 상방궁(黑角尙方弓) 3백 50장, 특별히 제조한 흑각궁(黑角弓) 5백 장,
방물 각궁(方物角弓) 1백 장, 죽궁(竹弓) 50장, 회목궁(檜木弓) 50장,
교자궁(交子弓) 4백 50장, 육량 강궁(六兩强弓) 1장, 합하여 궁자(弓子) 2천 1장,
적마전(狄磨箭) 1백 부(部), 별괄 장전(別?長箭) 1천 7백 부,
자괄 장전(自?長箭) 1천 5백 부, 자괄 편전(自?片箭) 2천 부, 합하여 전(箭) 5천 3백 부,
통아(筒兒) 2천 개(箇), 방물 통개(方物筒箇) 5백 60부, 흑서피(黑黍皮)에
은입사(銀入絲)한 통개 40부, 합하여 통개(筒箇) 6백 부, 고장 환도(故裝環刀) 1백 병(柄),
청제 환도(淸製環刀) 1백 병, 장검(長劒) 15병, 단검(短劒) 10병,
합하여 도검(刀劒) 2백 25병, 조총(鳥銃) 3백 병, 당파창(쩫?槍) 10병,
편곤(鞭棍) 20병, 삼향죽(三鄕竹) 3백 부(浮), 김해죽(金海竹) 1백 부,
흥양죽(興陽竹) 5백 부, 상전죽(常箭竹) 1천 1백 38부, 합하여 전죽(箭竹) 2천 38부,
2장(張)을 덧붙인 유둔(油芚) 20번(番), 6장(張)을 덧붙인 유둔 10번,
합하여 유둔(油芚) 30번, 안롱(鞍籠) 2부(部), 백면지 우자봉(白綿紙宇字封) 2백 권(卷),
저주지 주자봉(楮注紙宙字封) 1백 권, 상지(常紙) 4백 권,
백지 천자봉(白紙天字封) 50권, 대후지 현자봉(大厚紙玄字封) 20권,
합하여 지(紙) 7백 70권, 단오선(端午扇) 1천 병(柄), 단목(丹木) 1만 근(斤),
백반(白礬) 2천 근, 백랍(白蠟) 1백 근, 방물연(方物硯) 50면(面),
인도(引刀) 1백 병(柄), 전자(剪子) 1백 파(把), 목환자(木?子) 1만 개(箇) 등을
신축년 별치조(別置條)로 이름하여 특별히 차정(差定)한 별군직(別軍職)
신응주(申應周)가 표신(標信)을 받들고 겸하여 물건(物件)을 영수해 내려가니,
경은 숫자를 대조하여 영수하고, 별군직과 입회하여 별고(別庫)에 저장한 다음
그 형지(形止)를 장문(狀聞)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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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 5년
....본부에는 각궁(角弓)과 목궁(木弓)이 모두 5백 17장(張), 장전(長箭) 4천 5백 30부(部), 편전(片箭) 7천 3백 77부, 조총(鳥銃) 6백 74자루, 연환(鉛丸) 87만 2천 4백 개, 진천뢰(震天雷) 1백 40좌(坐), 대완구(大碗口) 및 대포(大砲)와 중포(中砲)가 모두 65좌, 소완구(小퍁口) 30좌, 호준포(虎砲) 37좌, 화약(火藥) 2만 6천 8백 92근(斤), 석류황(石硫黃) 7천 5백 72근, 염초(焰硝) 7천 1백 16근, 철갑(鐵甲) 52벌이었다.
월곶(月串), 제물(濟物), 용진(龍津), 초지(草芝), 광성(廣城), 사각(史閣), 승천(昇天), 인화(寅火) 등의 각보에 나누어 둔 것은, 흑각궁(黑角弓) 1천 3백 50장, 교자궁(交子弓) 4백 50장, 목궁 1백 50장, 장전 2천 1백 부, 편전 9백 부, 대조총(大鳥銃) 5백 84자루, 소조총(小鳥銃) 2천 1백 50자루, 대포 1백 79좌, 진천뢰 63좌, 남만 대포(南蠻大砲) 12좌, 불랑기(佛狼機) 2백 44좌, 화약 1만 6천 2백 근, 군향미 11만 2천 3백 47석, 콩 2만 8천 2백 28석, 조(租) 5천 4백 56석이었다. 호조에서 이송한 은(銀) 1만 3천 냥, 면포 10만 8천 필이었다. 기타 주사(舟師)의 비용과 깃발이나 그릇 등의 물건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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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 23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고찰해 보건대, 순변사가 계청한 물목은 단지 활·화살·활줄과 왜환도(倭環刀)·화포(火砲)·화약 등의 물품뿐인데, 이 달 9일에 벌등포(伐等浦) 권관(權管) 전세용(全世用)이 부임할 때 전부를 맡아서 가지고 내려가도록 했습니다. 이 군기시의 초기(抄記)는 곧 그때 내려보낸 물목을 적은 것입니다.”
【군기시의 초기에, 대궐에 간직하고 있는 흑각궁(黑角弓) 3백 50장(張), 향각궁(鄕角弓) 3백 50장, 활줄 7백 개, 서보자전(西甫子箭) 5백 부, 적마편전(狄?片箭) 5백 부, 왜환도 3백 자루, 지신포(紙信砲) 10, 화약 1백 근, 통(筒)이 달린 중신기전(中神機箭) 5백 자루, 화전(火箭)이 달린 소발화(小發火) 1백, 대발화(大發火) 70, 중약선(中藥線) 70 사리, 파진군(破陣軍)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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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 1년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여름철 각궁(角弓)을 점화(點火)할 때, 시위(侍?)하거나 입직(入直)하는 군사는 모두 녹각궁(鹿角弓)을 차게 하는데, 만약 이 활을 갖추지 못하면, 마디가 길고 두터운 편죽(片竹)이나 또는 저리갈나무[沮里加乙木]로 각궁과 똑 같은 체제로 만들어서 줄을 매어서 차고 목궁(木弓)은 사용하지 말라고 이미 벌써 법(法)을 세웠는데, 이제 각도(各道)에서 번상(番上)하는 시위패(侍?牌)들이 소지한 교자궁(絞子弓)을 보니, 모두 연약하여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 이제부터 편죽(片竹)과 저리갈나무[沮里加乙木]를 제외하고, 여름철에는 모두 녹각궁과 오늬[찫]가 투텁고 두 끝이 견실한 각궁에 줄을 매고 칠(漆)을 바르게 하되, 그 중에서 내금위(內禁?)는 그 가세가 본래 충실하니, 어느 누가 녹각궁이 없겠습니까마는, 삼군 갑사(三軍甲士)·별시위(別侍?)·충순위(忠順?)·충의위(忠義?) 등은 녹각궁을 3년까지 기한하여 자비(自備)토록 할 것이요, 각도의 시위패와 영진속(營鎭屬)·익속(翼屬) 정군(正軍)은 6년까지 기한하고 자비토록 할 것이며, 그 자비가 불가능한 자는 위의 항목의 오늬[찫]가 두텁고 견실한 각궁을 차도록 허용하고, 선군(船軍) 안에 사관(射官)도 또한 정군의 예에 의하여 자비토록 하고, 그 자비가 불가능한 자는 우선 견고하고 질긴 목궁(木弓)을 사용하게 하되, 근(筋)을 베[布]로 싸고 칠(漆)을 바르며 현(絃)은 가죽을 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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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 6년
의정부(議政府)에 전지(傳旨)하기를,
“나라의 보배에 세 가지가 있으니, 말[馬]이고 소[牛]이고 흑각(黑角)이다. 말은 여럿을 태울 수 없고, 소는 도둑에게 줄 수 없고, 흑각(黑角)은 연습으로 쓸 수가 없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비록 내가 흑각궁(黑角弓)을 사용하여 다시는 사후(射侯)하지 않겠으니, 그것을 병조(兵曹)로 하여금 중외(中外)의 장사(將士)에게 효유(曉諭)하여 이 규칙을 본받게 하라. 취재(取才)인 경우에는 이러한 범위에 들지 않는다. 또 헌부(憲府)로 하여금 흑각대등 일체 활 이외의 물건들을 금하게 하고, 또 병조(兵曹)로 하여금 여럿을 태우는 수레[車子]를 힘써 사용하게 하라. 또 형조(刑曹)로 하여금 우마(牛馬)를 도둑질한 자는 초범(初犯)이라도 교형(絞刑)에 처하도록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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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 7년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지금 내궁방(內弓房)의 흑각궁(黑角弓) 1백 장(張)과 군기감(軍器監)의 편전(片箭) 1천 부(部)를 보내니, 이것은 다만 변경(邊境)의 경계(警戒)를 위한 것이며, 항상 계속하는 일이 아니다. 만약 군사들이 관에서 주는 것을 믿고 다시 스스로 갖추지 아니한다면 옳지 못하니, 삼가히 관(官)에 간직하게 하여 회계(會計)에 기록하여 시기에 임하여 나누어 주었다가 쓴 뒤에도 도로 바치게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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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 10년
병조 참판(兵曹參判) 여자신(呂自新)이 와서 아뢰기를,
“이제 활 1천여 장과 환도(環刀) 1백여 자루를 군사로 재주가 능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신이 양계(兩界)의 여러 진(鎭)에 간직한 활을 보건대, 모두 다 향각궁(鄕角弓)으로서 부러지기가 쉬우니, 만일 급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쓰겠습니까? 청컨대 이 활을 양계의 여러 진에 옮겨 놓았다가 불의의 변에 대비하게 하고, 군기시(軍器寺)의 향각궁으로써 군사에게 주면 또한 족히 감격하여 분발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그러나 이미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는데 다시 거둘 수 없으니, 군기시의 흑각궁(黑角弓)을 양계의 여러 진에 옮겨 두게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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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각궁 - 각궁입니다. 위에서 많이 설명하셨으니 패스.;
후궁 - 활 안쪽만 물소뿔을 붙인 궁입니다. 각궁과 위력은 크게 차이가 없었답니다.
향각궁 - 우리나라의 황소뿔로 만듭니다. 상각궁, 우각궁, 상용궁이라고도 불렸답니다.
각궁보다 값이 싼 만큼 위력도 떨어졌다더군요.
녹각궁 - 사슴뿔로 만든 활로 여름에 각궁 대신 사용했답니다.
교자궁 - 나무만으로 만든 합성궁입니다. 여러 다른 나무들을 합성한 것입니다. 역시 여름에 각궁 대신
사용했답니다.
죽궁 - 대나무 단일궁입니다.
목궁 - 나무 단일궁입니다.
철궁 - 쇠로 만든 활로 실전용은 아니었답니다. 벤치프레스용 이었을지도;
예궁 - 예식용 활입니다.
육량궁 - 무과 시험용으로 육량전이란 화살을 일정거리 이상 날리는 시험에 사용되었답니다.
육량전이 꽤 무거웠답니다.
아래는 활 보유 수량으로 다음 토탈워 까페의 초딩 사냥꾼님 글을 옮겨온 것 입니다.
(이른 바 불펌이지요. 문제가 되시면 삭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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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영 군기(193쪽)
- 흑각별장궁(黑角別長弓) 740장, 흑각장궁(黑角長弓) 142장, 후궁(侯弓) 30장, 육량궁(六兩弓) 5장, 교자궁(校子弓) 760장.
- 장전 80부, 편전 70부, 통아 118개(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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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도감 군기(236쪽) - 활 10,558장
- 흑각군궁(黑角軍弓) 4,549장, 흑각후궁 401장, 교자궁 4,382장, 향각궁(鄕角弓) 125장, 별조착칠궁(別造着漆弓) 32장, 죽궁 667장, 회목궁(檜木弓) 100장, 마채궁(麻采弓)
- 수노궁(水弩弓) 120장, 노전 300부 42개
- 장전 5,256부 14개, 편전 5,600부, 통아 403개, 체전(體箭) 684부 7개, 자괄장전 20부, 자괄편전 21부, 별괄장전 41부, 무우장전 60부, 무우편전 3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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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위영 군기(283쪽) - 활 6,781장
- 흑각장궁 989장, 흑각군궁 347장, 흑각육냥궁 15장, 흑각평궁(黑角平弓) 104장, 흑각후궁 490장, 칠교자궁(漆校子弓) 170장, 교자장궁 696장, 교자궁 2,682장, 죽교자장궁 1,201장, 회목궁 87장
- 노흑각대궁 15장, 노교자대궁 216장, 수노궁 499장, 궁노 239좌
- 장전 4,313부 10개, 편전 4,040부 25개, 통아 1,293개, 별괄장전 2부, 수노전 793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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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영청 군기(313쪽) - 활 11,924장
- 후궁 1,990장, 장궁 1,934장, 부장궁(不粧弓) 7장, 목전궁 11장, 피교자궁(皮校子弓) 67장, 회목궁(茴木弓) 35장, 교자궁 2장, 대궁 3장, 향각평궁 12장, 황각평궁 1장, 죽교자궁 2,525 장, 죽궁 257장, 칠교자궁 350장, 교자궁 4,551장
- 궁노목궁 163장, 궁노각궁 4장, 노등자궁 2장, 흑각노궁 12장
- 육량전 53개, 장전 6,775부 27개, 편전 4,106부 2개, 통아 2,547개, 자괄장전 20부, 궁노전 1,205부, 궁노기 119좌, 수노전 2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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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융청 군기(357쪽) - 활 1,091장
- 흑각궁 552장, 장궁 105장, 향각궁 5장,
- 흑각궁노궁 2장, 교자궁노궁 52장
- 장전 862부 28개, 편전 425부 25개, 궁노전 480부 8개, 장전촉 2,022개, 편전촉 210개, 통아 263개, 궁노기 6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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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5년
군기(軍器)를 강화부(江華府)의 별고(別庫)에 저장하고 나서 유수(留守)에게 하유하기를,
“내고(內庫)에 저장했던 군물(軍物)과 기용(器用)을 특별히 본부(本府)에
비치하게 한 것은 이를 설시(設施)토록 한 법의(法意)를 우러러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열조(列朝)에서 이미 행하여 왔으므로 하나의 통상적인 일이 되어 왔는데, 간간이
경용(京用)이 호대(浩大)하여지고 또 각고(各庫)가 화재(火災)를 겪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숫자가 천백 분의 일 정도뿐만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매양 구례(舊例)를
우러러 계술(繼述)하려는 뜻이 있어 제반 용도를 힘써 줄이는 쪽을 따랐는데, 이는
용도를 절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조(先朝)의 뜻을 계술하기 위한 것이었다.
등극한 이후 경기(經紀)한 물종(物種)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또 작년 여름
시민당(時敏堂)의 화재가 있을 때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다시 저축에
유의하여 왔는데, 근래에 이르러 비로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고(內庫)에 있던 흑각 장궁(黑角長弓) 4백 50장(張), 흑각 후궁(黑角帿弓) 50장,
흑각 상방궁(黑角尙方弓) 3백 50장, 특별히 제조한 흑각궁(黑角弓) 5백 장,
방물 각궁(方物角弓) 1백 장, 죽궁(竹弓) 50장, 회목궁(檜木弓) 50장,
교자궁(交子弓) 4백 50장, 육량 강궁(六兩强弓) 1장, 합하여 궁자(弓子) 2천 1장,
적마전(狄磨箭) 1백 부(部), 별괄 장전(別?長箭) 1천 7백 부,
자괄 장전(自?長箭) 1천 5백 부, 자괄 편전(自?片箭) 2천 부, 합하여 전(箭) 5천 3백 부,
통아(筒兒) 2천 개(箇), 방물 통개(方物筒箇) 5백 60부, 흑서피(黑黍皮)에
은입사(銀入絲)한 통개 40부, 합하여 통개(筒箇) 6백 부, 고장 환도(故裝環刀) 1백 병(柄),
청제 환도(淸製環刀) 1백 병, 장검(長劒) 15병, 단검(短劒) 10병,
합하여 도검(刀劒) 2백 25병, 조총(鳥銃) 3백 병, 당파창(쩫?槍) 10병,
편곤(鞭棍) 20병, 삼향죽(三鄕竹) 3백 부(浮), 김해죽(金海竹) 1백 부,
흥양죽(興陽竹) 5백 부, 상전죽(常箭竹) 1천 1백 38부, 합하여 전죽(箭竹) 2천 38부,
2장(張)을 덧붙인 유둔(油芚) 20번(番), 6장(張)을 덧붙인 유둔 10번,
합하여 유둔(油芚) 30번, 안롱(鞍籠) 2부(部), 백면지 우자봉(白綿紙宇字封) 2백 권(卷),
저주지 주자봉(楮注紙宙字封) 1백 권, 상지(常紙) 4백 권,
백지 천자봉(白紙天字封) 50권, 대후지 현자봉(大厚紙玄字封) 20권,
합하여 지(紙) 7백 70권, 단오선(端午扇) 1천 병(柄), 단목(丹木) 1만 근(斤),
백반(白礬) 2천 근, 백랍(白蠟) 1백 근, 방물연(方物硯) 50면(面),
인도(引刀) 1백 병(柄), 전자(剪子) 1백 파(把), 목환자(木?子) 1만 개(箇) 등을
신축년 별치조(別置條)로 이름하여 특별히 차정(差定)한 별군직(別軍職)
신응주(申應周)가 표신(標信)을 받들고 겸하여 물건(物件)을 영수해 내려가니,
경은 숫자를 대조하여 영수하고, 별군직과 입회하여 별고(別庫)에 저장한 다음
그 형지(形止)를 장문(狀聞)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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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 5년
....본부에는 각궁(角弓)과 목궁(木弓)이 모두 5백 17장(張), 장전(長箭) 4천 5백 30부(部), 편전(片箭) 7천 3백 77부, 조총(鳥銃) 6백 74자루, 연환(鉛丸) 87만 2천 4백 개, 진천뢰(震天雷) 1백 40좌(坐), 대완구(大碗口) 및 대포(大砲)와 중포(中砲)가 모두 65좌, 소완구(小퍁口) 30좌, 호준포(虎砲) 37좌, 화약(火藥) 2만 6천 8백 92근(斤), 석류황(石硫黃) 7천 5백 72근, 염초(焰硝) 7천 1백 16근, 철갑(鐵甲) 52벌이었다.
월곶(月串), 제물(濟物), 용진(龍津), 초지(草芝), 광성(廣城), 사각(史閣), 승천(昇天), 인화(寅火) 등의 각보에 나누어 둔 것은, 흑각궁(黑角弓) 1천 3백 50장, 교자궁(交子弓) 4백 50장, 목궁 1백 50장, 장전 2천 1백 부, 편전 9백 부, 대조총(大鳥銃) 5백 84자루, 소조총(小鳥銃) 2천 1백 50자루, 대포 1백 79좌, 진천뢰 63좌, 남만 대포(南蠻大砲) 12좌, 불랑기(佛狼機) 2백 44좌, 화약 1만 6천 2백 근, 군향미 11만 2천 3백 47석, 콩 2만 8천 2백 28석, 조(租) 5천 4백 56석이었다. 호조에서 이송한 은(銀) 1만 3천 냥, 면포 10만 8천 필이었다. 기타 주사(舟師)의 비용과 깃발이나 그릇 등의 물건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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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 23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고찰해 보건대, 순변사가 계청한 물목은 단지 활·화살·활줄과 왜환도(倭環刀)·화포(火砲)·화약 등의 물품뿐인데, 이 달 9일에 벌등포(伐等浦) 권관(權管) 전세용(全世用)이 부임할 때 전부를 맡아서 가지고 내려가도록 했습니다. 이 군기시의 초기(抄記)는 곧 그때 내려보낸 물목을 적은 것입니다.”
【군기시의 초기에, 대궐에 간직하고 있는 흑각궁(黑角弓) 3백 50장(張), 향각궁(鄕角弓) 3백 50장, 활줄 7백 개, 서보자전(西甫子箭) 5백 부, 적마편전(狄?片箭) 5백 부, 왜환도 3백 자루, 지신포(紙信砲) 10, 화약 1백 근, 통(筒)이 달린 중신기전(中神機箭) 5백 자루, 화전(火箭)이 달린 소발화(小發火) 1백, 대발화(大發火) 70, 중약선(中藥線) 70 사리, 파진군(破陣軍)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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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 1년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여름철 각궁(角弓)을 점화(點火)할 때, 시위(侍?)하거나 입직(入直)하는 군사는 모두 녹각궁(鹿角弓)을 차게 하는데, 만약 이 활을 갖추지 못하면, 마디가 길고 두터운 편죽(片竹)이나 또는 저리갈나무[沮里加乙木]로 각궁과 똑 같은 체제로 만들어서 줄을 매어서 차고 목궁(木弓)은 사용하지 말라고 이미 벌써 법(法)을 세웠는데, 이제 각도(各道)에서 번상(番上)하는 시위패(侍?牌)들이 소지한 교자궁(絞子弓)을 보니, 모두 연약하여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 이제부터 편죽(片竹)과 저리갈나무[沮里加乙木]를 제외하고, 여름철에는 모두 녹각궁과 오늬[찫]가 투텁고 두 끝이 견실한 각궁에 줄을 매고 칠(漆)을 바르게 하되, 그 중에서 내금위(內禁?)는 그 가세가 본래 충실하니, 어느 누가 녹각궁이 없겠습니까마는, 삼군 갑사(三軍甲士)·별시위(別侍?)·충순위(忠順?)·충의위(忠義?) 등은 녹각궁을 3년까지 기한하여 자비(自備)토록 할 것이요, 각도의 시위패와 영진속(營鎭屬)·익속(翼屬) 정군(正軍)은 6년까지 기한하고 자비토록 할 것이며, 그 자비가 불가능한 자는 위의 항목의 오늬[찫]가 두텁고 견실한 각궁을 차도록 허용하고, 선군(船軍) 안에 사관(射官)도 또한 정군의 예에 의하여 자비토록 하고, 그 자비가 불가능한 자는 우선 견고하고 질긴 목궁(木弓)을 사용하게 하되, 근(筋)을 베[布]로 싸고 칠(漆)을 바르며 현(絃)은 가죽을 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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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 6년
의정부(議政府)에 전지(傳旨)하기를,
“나라의 보배에 세 가지가 있으니, 말[馬]이고 소[牛]이고 흑각(黑角)이다. 말은 여럿을 태울 수 없고, 소는 도둑에게 줄 수 없고, 흑각(黑角)은 연습으로 쓸 수가 없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비록 내가 흑각궁(黑角弓)을 사용하여 다시는 사후(射侯)하지 않겠으니, 그것을 병조(兵曹)로 하여금 중외(中外)의 장사(將士)에게 효유(曉諭)하여 이 규칙을 본받게 하라. 취재(取才)인 경우에는 이러한 범위에 들지 않는다. 또 헌부(憲府)로 하여금 흑각대등 일체 활 이외의 물건들을 금하게 하고, 또 병조(兵曹)로 하여금 여럿을 태우는 수레[車子]를 힘써 사용하게 하라. 또 형조(刑曹)로 하여금 우마(牛馬)를 도둑질한 자는 초범(初犯)이라도 교형(絞刑)에 처하도록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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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 7년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지금 내궁방(內弓房)의 흑각궁(黑角弓) 1백 장(張)과 군기감(軍器監)의 편전(片箭) 1천 부(部)를 보내니, 이것은 다만 변경(邊境)의 경계(警戒)를 위한 것이며, 항상 계속하는 일이 아니다. 만약 군사들이 관에서 주는 것을 믿고 다시 스스로 갖추지 아니한다면 옳지 못하니, 삼가히 관(官)에 간직하게 하여 회계(會計)에 기록하여 시기에 임하여 나누어 주었다가 쓴 뒤에도 도로 바치게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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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 10년
병조 참판(兵曹參判) 여자신(呂自新)이 와서 아뢰기를,
“이제 활 1천여 장과 환도(環刀) 1백여 자루를 군사로 재주가 능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신이 양계(兩界)의 여러 진(鎭)에 간직한 활을 보건대, 모두 다 향각궁(鄕角弓)으로서 부러지기가 쉬우니, 만일 급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쓰겠습니까? 청컨대 이 활을 양계의 여러 진에 옮겨 놓았다가 불의의 변에 대비하게 하고, 군기시(軍器寺)의 향각궁으로써 군사에게 주면 또한 족히 감격하여 분발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그러나 이미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는데 다시 거둘 수 없으니, 군기시의 흑각궁(黑角弓)을 양계의 여러 진에 옮겨 두게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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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수렵용이기 때문인데 수렵용활은 가정의 필수품이기때문에 가정내에서 수공예로 생산되었으며 활자체가 망가질때까지 물려서 사용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계를 위해 필요한 물건이어서 가내수공업으로 제작된 수공예품이기때문에 비싼복합궁을 군대편성시 대규모로 보유가능했던겁니다.
그리고 궁수는 실제로 군사적목적을 위해 대규모로 집단훈련된적은 거의없습니다.
영국의 경우 국민들에게 양궁스포츠를 보급하여 유사시 그들을 징집하여 장궁수로 활용했고 조선의 경우 시험과목에 활을 추가시켜 활을 배우게 하는 정도였습니다.
궁수의 훈련 자체를 국가에서 보장한경우는 고대,중세에는 드물었다고 할수 있습니다.(근세에는 활이라는 물건 자체가 구식이 되므로 패스)
다만 크로스보우라는 물건이 등장하면서 궁수의 집단양성이 가능해졌지만 이것역시 국가가 훈련을 보장한다기보다는 아무나잡고 크로스보우를 쥐어주고 이거 쏴라하는 식이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만큼 크로스보우라는 직사무기 자체가 사용법이 간단하다는 잇점이 있었습니다.이 장점은 훗날의 총으로까지 이어집니다.그러고보면 개인용 직사화기 자체가 훈련이 용이하다는 공통점이 있군요.
화살의 경우는 유목민 개개인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사용합니다.(역시 오랜 수렵생활의 경험입니다)
때문에 독화살등등의 치명적인 화살을 수량의 부족함없이 사용가능했습니다.
게다가 유목민에게는 경제관념이 농경민족보다 희미했기 때문에"싸다"의 잇점과 "비싸다"의 단점등이 희박해서 그것이 오히려 집단적인 기마궁수의 운용을 가능케한 요인으로 봅니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데다가 자료조차 희박해서 틀린부분이 매우 많을수 있으니 그닥 믿지는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