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엑! 파악!
  호루스 특수부대의 기량은 정말 엄청났다. 최초로 전투 정보실에 도달한 병력을 제압한지 불과 1분도 안되어 이쪽에 도달할 줄은 제아무리 산전수전을 모두 겪었던 그라고 해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나마 장애물이 많아 살상용 에너지탄으로부터 몸을 숨길 곳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그래봤자 자신은 혼자일 뿐이었다. 가히 경이로운 연계로 전투정보실로 난입하는 보병 하나하나마다 제압을 해가며 그는 꾸준하게 역습을 준비했다. 그도 정신력의 한계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는 최대한의, 남아있는 모든 힘을 끌어내며 쓰러져 뻗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냈다. 주위에 있는 물건들 중에 무기라고 할 만한 것들은 불행히도 존재하지 않았다. 권총이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좋았으련만….
  장기전은 자신에게 아주 불리했다. 시간이 지나봐야 호루스 함대들은 가이아인들을 도발하며 힘을 최대한 빼놓고 있어 구조를 바라는 건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팍!
  “크윽!”
  순간. 바로 옆에 있던 계기패널이 적탄에 맞아 폭발을 일으키며 파편이 그의 얼굴을 스치며 튀어나갔다. 반쯤은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피한 것이었다. 뒤이어 그 기세를 틈타 몇 명이 더 난입한다. 더 이상은 시간 여유가 없었다. 역시 쪽수로 밀어붙여서 안 될 것은 없다. 그는 순식간에 거세지는 총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 했으나 바로 앞에서 탄환이 튀기는 바람에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생각이 짧았다.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인가. 적 특수부대의 대형은 점점 포위 형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투정보실 벽면을 따라 자세를 낮추며 접근하고 있었고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위협적으로 보였다.
  저 숫자를 돌파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물론 현실적으로 본다면 당연히 없다. 타고난 운은 아니더라도 왜 이럴 때에는 최소한의 운도 없는 걸까. 하지만 바로 그 때 예상치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쿠구궁!
  함선 전체에 퍼지는 잔잔한 충격. 처음에는 가이아 함대가 영양가 없는 반격을 다시 재개한 줄 알았다. 장기전인 이상 그들은 아마 근처에 있는 위성기지의 방어시설에 의존하고 있다가 기회만 보이면 바로 반격을 가했다. 아마 지금이 그 때인 것 같았다. 한참 진행하고 있던 특수병력들은 이 충격들로 인해 잠시 동요하는 것 같았다.
  ‘지원군일까.’
  가이아인의 기술로는 호루스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내심 그렇게 기대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정말로 이변이 발생했다.
  슈우웅!
  자신에게 총격을 가하던 모든 특수 병력들의 몸에서 시퍼런 섬광이 번쩍인 것이었다. 시퍼런 섬광.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언제 총격이라도 있었냐는 듯 지극히 조용했고 자신이 제압한 호루스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전송빔. 확신컨대 연방함선의 소행이었다. 대체 어떤 대담한 사나이가 이런 짓을 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델은 혀를 차며 서둘러 운 좋게 찾아온 기회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AI인 이디이아를 통해 함선의 통제력을 최대한 되찾을 수 있도록 시도한다.
7세대형 전함인 <발키리>가 가진 특성상 최소 구동을 위해서는 이디이아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위의, 보다 고급의 것들을 해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분야에 대해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 승무원들을 필요로 했다. 거의 모든 시스템이 완전 자동화된 함선들도 간혹 가다 건조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군함들은 건조비용이 대체적으로 아주 엄청난데다가 자체수리능력이 지원됨에도 불구하고 신뢰도가 낮은 편이어서 군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찾는 것이었다. 위성기지의 도크에 정박해있던 이 함선에 처음으로 탑승할 때 도크에서 쉬고 있던 승무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적어도 백 명 이상은 살아남았을 것이다. 제아무리 일격에 이 함선의 전투능력을 분쇄해버렸다고 해도 모든 승무원들의 목숨을 사라지게 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디이아. 함내에 있는 개별 생체 신호가 잡히나?”
  - 지금 상황에서는 센서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이 작동을 멈추기 직전의 상황으로 추정해볼 때 호루스의 초고속 질량탄 20여 개 이상이 매초 18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함선의 상갑판에 충돌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인해 함내에 탑재되어있는 거의 모든 시스템이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각 센서별 오차범위는 3미터 이상으로 일개 단위의 체열을 탐지하는데 까진 2시간 이상이 지나야 가능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
  “아니야. 수고했어.”
델은 이디이아의 말을 듣고는 곧바로 전투정보실을 빠져나갔다. 우선은 생존자를 찾아야하니까. 가장 먼저 갈 곳은 <발키리>의 최하단 갑판에 위치한 항공갑판을 찾는 일이었다. 그 곳이라면 충격량이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적었을 것이다.

  이젠 죽어버린 거나 다름없는 <발키리>에서 델이 생존자들을 찾고 있는 동안 가이아 연방함대는 태양계의 남은 모든 함대를 이끌고 호루스 함대에게 마지막 역습을 가하고 있었다. 태양계 우주군 전력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천왕성 함대가 궤멸당한 이상 승률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호루스 함대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물론 명령만 내려진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초공간 도약을 통해 인근 항성계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었다.
  전투 직전 UGUAF(United Gaia Universe Air Force) 최고 함대 사령부가 토성에 집결한 모든 군함에 지시한 내용은 이러했다.
  < 현재 히페리온에 있는 적함대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지하라. 제군들의 손에 500억의 무고한 생명들의 생사가 걸려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도록. >
  이 명령이 내려진 이상 후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지구와 달, 화성과 금성에 살고 있는 500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것은 상식적으로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천왕성 전투 때 일어난 폭발의 섬광들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안 천문학자들도 있을 것이고, 갑작스런 우주군의 대규모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눈치 챈 시민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일이 커졌을지도 몰랐다. 국민들은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으리라. 저 외계인들도 이런 일쯤은 이미 예상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날 일들도 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미 통신망에 속한 항성계의 모든 전투함대가 태양계로 날아오고 있다. 운이 좋다면 북극성 전투함대도 올 수 있을 것이다. 가이아 연방 우주군 주력함대 중 하나인 북극성 함대가 말이다.
  레이더 스크린에서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아군 함선을 보며 맥 도날드 대령은 공뢰 발사를 명령했다. 실전에서 공뢰를 쏘는 경험이 처음이었지만 그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적들은 <글라디우스>를 전혀 공격하지 않았다. 가이아 연방군의 순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은폐격벽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분 전에 아무런 신호도 없이 히페리온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선형 미상의 전함은 <글라디우스>와 같은 은폐력에도 불구하고 적함대의 포화를 뒤집어쓰며 무력하게 힘을 잃었다.
그의 시선에서는 그 현상이 굉장히 희한하게 느껴졌다. 선형 미상의 함선과 적함대 간에 일어난 전투는 극히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군 함대에서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그 함선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 뜻은 자신이 타고 있는 이 함선보다 저 전함의 은폐능력이 몇 세대 앞서 간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짧은 시간동안 그 전함이 격파한 호루스 함선의 숫자는 지난 시간동안 2천여 척의 전함들이 목숨을 걸어가면서도 한 척도 격파하지 못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많았다. 3백척이 넘어가던 적 전함이 지금은 128척 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현대전에 있어서 동일 중량의 5세대 전함과 6세대 전함의 전력비율은 극단적인 예를 들게 된다면 40 대 1이라고 한다. 지금 태양계에 모습을 드러낸 저 호루스라는 외계 종족의 함선이 몇 세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단지 기술력만으로 단 한척의 손실 없이 궤멸시켜놓을 정도라면 적어도 6세대 형은 아닐 것이다. <글라디우스>같은 경우 양산형으로 건조된 7세대형 구축함이다. 제아무리 양산형이라지만 건조비용은 거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성능은 그에 상응하는 수준에 달하긴 했다. 가시광선의 영역조차 정복한 완벽한 상태의 은폐성을 자랑하는 은폐격벽이 외벽 전체에 내장되어 있었고, 게다가 레이더 시스템과 무장 능력도 6세대 전함보다 한 단계 위의 것을 탑재했다. 아마 <글라디우스> 급의 함선들로 이루어진 함대였다면 적어도 적함대에게 많은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저 전함이 한척만 더 있었더라면….
  호루스 함대의 집중 포화를 당한 저 전함은 움직임을 멈춘 이후로 아무런 신호도 내뿜지 않고 있었다. 레이더 스크린에서는 간략하게 X700이라는 숫자와 국적미상 함선이라는 뜻의 짙은 노란 색 점을 나타낼 뿐이었다.
  ‘극비 문서의 설계 계획에도 없었던 전함인데….’
  연방정부의 특급 기밀에 해당하는 자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자신도 모두 알지 못했다. 그만큼 뒷돈이 오가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연방의원들이라면 뭔가 더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옛날에 알타이르 항성계에서 발견된 미확인 함선과 관련이 있을 지도….
  “대령님, 소속불명 전함에서 전송빔 반응입니다! 발신지 미상! 주위 함대에서는 이 현상을 아직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갑작스런 보고에 그는 호루스 전함이 한 짓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뒤이어 사관이 추가로 상황을 보고하자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고쳐야만 했다.
  “아…. 방금 발신지 확인이 됐는데, 아무래도 다른 전함이 도약해온 것 같습니다. 거리 3천. 초공간 장 해제 시 나오는 방사능은 감지되지 않았지만 극도로 미약한 수준의 인공중력장이 감지되었습니다. 아마 이 함선에서 밖에는 탐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저 전함이 남긴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일 지도 몰랐다. 이 추측은 현실적으로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초공간 항행 중 갑자기 평상공간으로 진입할 때 남는 특유의 방사능은 2~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없어지기 마련이었고, 미약한 중력장이 감지되는 것도 그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면 이것 역시 자연스레 납득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맥 도날드 대령은 이 현상이 단순히 저 전함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가 개입하고 있다.’라고….

  <같은 시간. CVX-701 콜로수스 C26E41섹터 심문실.>
  검은색의 칙칙한 내벽 곳곳에서 물씬 풍겨져 나오는 윤활유 냄새. 아마도 누군가가 제정신으로 있기엔 상당히 지장이 생길 수준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새를 연상시키는 생명체와 인간 하나가 서로 마주보며 서있었다.
  페드릭은 고개를 치켜들며 호루스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별 감흥은 없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불쾌감이 그의 정신 속을 콕콕 찔러댔다. 자신을 아시오페 아론이라 칭한 저 호루스인은 뭐가 그리 대단한 건지 눈빛 하나만큼은 안위가 걱정될 만큼 힘이 심하게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뭐라고?”
  페드릭은 옆머리를 긁적이며 재차 물었다. 이미 그에게서 신뢰할 수 없는 여러 정보들을 얻었다. 하지만 페드릭의 궁금증은 멈출 줄 몰랐다. 묻고 듣는 형식의 단순한 패턴이 벌써 3일이 지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호루스인은 수면부족을 비롯한 여러 과로증상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시오페 아론은 누가 봐도 간신히 눈을 뜨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꽤 부정적이다. 원래 ‘슬리멘트’가 보통 생명체의 뇌 속에 침투하게 되면 효과 지속 시간만 10시간을 초과한다.”
  “아…! 그러니까! 10시간 초과하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거 꺼내는 법을 알려 달라고! 누가 반복 설명 듣고 싶다고 했냐? 아까도 말했지만 난 지금 꺼내는 법을 알려 달라고 하고 있잖아!”
  아시오페의 짧은 답변에 페드릭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내었다. 어째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허리춤에 있는 총이라도 빼들고 쏠 태세였다. 하지만 답답해하는 건 반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까부터 나도 지겹게 설명했지만…. 슬리멘트가 비활성화 되게 되면 어떤 과정을 통하든 알아서 몸 밖으로 배출된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의식이 깨어나질 않는데?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을 맛보고 싶은 거야? 사실대로 말 안할래?”
  “…….”
  격렬한 호루스어 회화에 전투정보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칼은 페드릭의 새로운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가 생포한 호루스인의 키는 일반적인 성인 남자보다 무려 1미터나 가까이 큰 2.5미터였는데 정작 그런 존재를 생포한 장본인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기선을 제압하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나발거리는 말소리에 칼은 무전기로 페드릭을 호출했다. 그러자 잠시 후 페드릭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스피커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던 잡소리가 사라졌다. 칼은 일순간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이제 그만 본직에 충실해주면 안될까. 지금 그쪽에서 수습불가 수준의 불만들이 들어오고 있어. 심문은 다른 장교에게 맡기고 이쪽으로 와주게. 정 걸어오기 귀찮으면 전송해줄 수도 있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페드릭이 위치한 심문실은 전투정보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 거리였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쯤이야 채널만 돌리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이다. 칼이 페드릭을 부르는 이유는 더도 말고 그가 이 함선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페드릭은 이 항공모함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고 말았다. 특히 항공반 쪽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여 우현 항공갑판 요원들이나 조종사들 간에 유행하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분은 지켜보고 계신다.’
  호루스와의 전투 이후 <콜로수스>가 초공간에 들어서면서 페드릭은 급박한 전투로 인해 그동안 미루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하나 둘씩 해결해 나가며 차분하게 체제를 잡아 나아갔다. 장교로서 지니는 리더십과 뭔가 질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그의 불량적인 외모와 비윤리적인 태도로 인해 지휘계통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으나 날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페드릭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뭔가를 느끼고는 어느새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인간에게선 절대 느껴지지 않는 것을 자신의 부하들도 느꼈을 것이라. 저 외모에서 풍겨져 나오는 전율할만한 연륜을 말이다. 그가 살아온 세월은 인간의 상식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가 간접적으로나마 역사를 접했다면 그는 그 당시에 그곳에 직접 있었다. 이미 많은 수의 커다란 사건 속에 ‘페드릭 포터’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칼은 자신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는 페드릭의 모습이 웃겼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다행히도 그는 칼의 행동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흠…. 항공반 인간들한테 시킬만한 건 아까 다 해놨는데…. 갸들 엄살 피우는 아니야?-
  페드릭은 아무 이상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그에게 따졌다. 칼은 페드릭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자네가 말하는 그 아까는 어떤 기준을 토대로 한 의미인가?”
  -에?-
  “…48시간 전이 자네한테는 ‘아까’라는 단어를 뜻하나? 빨리 와! 대체 무슨 말을 해뒀길래 대당 8억 크릴짜리 미스틱을 20기나 해체하게 한거야!? 이거 나중에 책임지는 건 난거 모르냐?”
  8억 크릴이면 거의 5세대 형 프리깃함 한척을 건조할 수 있는 돈이다. 이 상상력을 뭉게 버리는 가격 덕분에 그는 도저히 웃어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칼이 페드릭과 무의미한 말싸움을 할 동안에도 우현항공갑판 한쪽에서는 최신예 전폭기인 미스틱 한기가 정신없이 해체되어 구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거의 2시간에 한기 꼴로 8억 크릴짜리 초고가 전폭기의 가치가 증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페드릭의 태도는 강력하다 싶을 정도로 뻔뻔했다.
  -에이…. 괜찮아. 뭘 그런거 가지고 그러냐. 어차피 태양계에 도착하면 함선 피해복구 대책 때문에 이런 종이비행기까지 신경 쓸 틈은 없을 거라고.-
  “…조…종이비행기라고?”
  순간적으로 뒷골의 혈압이 높아지자 그의 시야기 어두워졌다. 넉넉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페드릭에게 자신이 아는 미스틱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그러한 그의 의지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보고하는 항해장교로 인해 뒤로 미뤄야만 했다. 보고 내용은 둘째 치고 그의 표정이 엄청났다.
  “어어…. 칼 대령님!?”
  “왜!”
  “하… 항로가…!”
  “항로가 뭐!”
  “바… 방금 델타 포인트를 지나쳤습니다! 2시간 내로 천왕성 궤도에 도달합니다!”
  “뭐!? 지금 장난치는 거냐? 아직 태양계에 도달하려면 5일이 넘게 남았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칼은 그를 닦달했다. 만약 저 장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딘가를 기점으로 1500광년이란 이름의 어마어마한 거리를 깡그리 무시한 셈이 되었다. 칼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 정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이것을….”
  칼에게 차트를 건네며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분명한건…. 절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말이 되게끔 설명할 수 있는 거라면 초공간도약기의 출력에 문제가 생겨서 함선 내부의 시간대가 멈췄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미 그 5일의 시간을 지나왔다는 건가? 시간 확인해봐!”
  “소용없습니다. 시간공백현상은 함선 전체를 비롯해 주위까지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시계들도 마찬가지구요.”
  “젠장.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호루스라는 것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시작한 것이나 지금 이 설명 불가능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들도….
  이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게 누군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정말 공감이 되었다. 그는 깊이 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25분 안으로 전투가 시작된다. 함선 전체에 1급 전투태세 발령하고, 모든 부서 전투 준비하도록! 특히 초공간에서 벗어나기 전에 이그라스로 적함대 위치 정확히 알아내! 그리고 아무나 가서 페드릭 끌고 와!”
  잠시 후 함선 전체에는 전투경보등과 함께 ‘삐익’하는 소리가 2초를 주기로 퍼져나갔다. 갑작스러운 전투 준비에 당황해하는 승무원들. 스크린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칼은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6일 동안의 초공간 항행 중에 함선의 상태를 간신히 정상적으로 해놓는데 성공은 했지만 또 이런다. 대처해야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
실로 오랜만에 하나 올립니다. 겨우겨우 막힌건 뚫어야만 한다는 집념으로 썼는데 이건 뭐... 다음화는 아무래도 쌈질을 올릴것 같군요. (지구를 살리는게 아니었어...)
그럼 전...;;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