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흔의 전장 (목숨이 붙어있고 생활환경이 보장되는 한 연재는 계속됩니다.) - 08년 10월 27일 공군입대 합니다.
글 수 79
"리플렉터가 나타났으면 나타난거지 '나타난 것 같다'는 대체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입니다. 6개월 전에 <아드미럴 리처드>호가 당할 때 까지는 그 이유조차 몰랐습니다. 그냥 당한거죠. 처음에는 몰랐는데 1달 후에 리플렉터 전함으로 추정되는 함선이 우리측 함대와 교전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규모는요?"
"B 6 급으로 추정되는 전함 2척입니다."
페드릭은 어니스트 대령의 말에 약간은 놀랐다. 자신이 아는 한 리플렉터는 절대로 소수로 몰려다니지 않는다. 일단 오면 개떼다. 레이더 스크린 한쪽 구역을 시뻘건 점으로 도배를 하면서 정면으로 와주는 착한 것들.
2척 정도야 뭐...
"나포했겠군요?"
당연한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여 묻는 페드릭. 1개 함대 규모면 아무리 적어도 10척 이상의 전투함이 포함된다. 고작 2척이라면 함대의 집단 폭행에 완전히 박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니스트 대령의 말은 달랐다.
"아닙니다. 간신히 저지만 했습니다. 격전이었죠. 그 전투 덕분에 함대 군함의 대부분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고 일부는 아직도 보수공사 중입니다. 대 리플렉터 무기가 전혀 안통한다더군요."
"헐..."
"도움이 필요합니다. 상부로부터 받은 파일에 의하면 당신은 리플렉터를 멸망시키는데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언급되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500년 간 있었던 모든 역사를 직접 본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죠. 비록 세비어인이지만 연방정부에서는 당신이 이곳에 남아준 것을……"
어니스트 대령은 잠시 말을 멈추고 페드릭의 눈을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일반인이 봤다면 피곤에 찌든 기운을 느꼈겠지만 그는 달랐다. 대령은 거수경례를 하며 말했다.
"감사하게 여깁니다. 페드릭 포터 대령님!"
어니스트 대령의 말에 페드릭은 잠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세비어인의 특성상 그에게는 시간개념이 이들과는 틀렸기 때문에 500년이라는 세월이 그저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 500년이면 세비어인에게도 장난이 아닌 수준의 세월이었다. 공전주기로만 따져도 43주기. 페드릭은 손을 내리지 않는 어니스트 대령을 본 순간 아차 하며 맞경례를 해주었다. 그런 도중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어니스트 대령님. 저는 소령입니다."
어니스트 대령이 마지막에 우렁찬 목소리로 강조하던 글자가 신경 쓰였다. 자신은 이리시스 제국의 소령이었다. 절대로 대령이라 불릴 수가 없었다.
"흠... 제가 이 말 안했습니까?"
"뭘요?"
"2895년 9월 24일 기억나십니까?"
2895년? 내가 천재냐? 몇 백년 전 일을 정확히 기억하게?
순간적으로 이 말이 입을 통해 튀어나올 뻔했다. 다행히도 페드릭은 그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당연히... 기억이 날 리가 없죠."
"……."
페드릭은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 마치 당연히 기억을 했어야 한다는 저 표정은 뭔가? 세비어인이나 가이아인이나 기억력 구린 것은 차이가 없었다. 괜히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 부르는 게 아니란 말이다. 시간개념이 좀 틀리긴 하지만 수명이나 염력을 제외하면 가이아인들보다 나은 것도 없었다. 눈앞의 이 인간은 마치 자신이 엄청나게 위대한 인간인줄 착각하는 것 같았다. 페드릭이 지구에 와서 한 짓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연방정부로부터 공짜로 지급된 별장에서 밥먹다가 무장강도를 숟가락으로 제압한 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 당시 대통령이라 불리던 아저씨에게 비공식적으로 명예훈장을….
"앗! 혹시 금딱지 받은 날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친다. 9월 24일. 정말 한참 옛날 일이지만 아주 어렴풋이 기억은 났다. 그 때는 분명 대통령한테 손바닥만한 금딱지를 받은 날이었다. 대통령이 뭐라 중얼거리며 말했지만 당연히 기억날 리 없다. 어니스트 대령은 금딱지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끝내 뜻을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날이 맞을 겁니다. 당신은 그 때 명예훈장을 받기 전에 약관에 동의한다고 서명했습니다."
"음?"
순간적으로 두꺼운 종이 겉표지에 필기구로 아무렇게 후려갈기는 영상이 떠올랐다. 설마 그거였나...? 어니스트 대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옆에 계신 사일러라는 인간은 초인적인 능력으로 계속 부동자세 유지중.
"거기에는 연방법에 따라 동의하는 한에서 현존하는 모든 사회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고 연방정부의 국적을 가지지 않는 자에 한하며 이게 적용되는 즉시 연방국의 국적을 가질 수 있다고 되 있습니다. 600개 이상의 조항중 하나일 뿐이지만 다른 것도 모두 비슷비슷합니다. 당신은 그 날 이후로 2개 국적을 소유하고 있으며 적어도 연방정부에서는 이리시스 제국법을 적용시켜 당신이 윤 장군님을 보좌하는 동안 복무기간으로 적용돼서 자동으로 진급되었던 겁니다."
"그거 좀 억지 같은데요...?"
페드릭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을 듣자니 연방법에 한해서는 대령이란 뜻이고 제국법으로는 여전하단 거였는데...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건 억지다. 이미 동족이 오리라는 미련은 버렸으니 상관은 없지만 만약 온다면 난감하겠군. 순간 거실에서 살짝 요상한 음악과 함께 빛이 세어 나왔다. 스파이더맨이 시작한 것이었다. 어느새 광고가 다 끝나버린건가! 그의 머릿속이 온통 드라마에 대한 것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연방정부에 한해서입니다. 이중국적을 가졌을 뿐이지 연방법에 한해서는 엄연한 대령입니다. 의원들과도 좀만… 어?!"
쿵!
페드릭이 갑자기 머리를 빼고 문을 닫아버렸다. 대령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했다. 하지만 곧 곳곳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다시 열렸다. 초췌한 모습의 페드릭이 한마디한다.
"죄송."
"……."
순식간에 2시간의 시간이 증발했다.
어니스트 대령과 사일러 대위는 페드릭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차마 반박을 하지 못한 채 드라마를 같이 봐주고 말았다. 여기 오기 전에 봤던 파일과는 완전 딴판인 페드릭의 모습은 그 둘로 하여금 엄청난 허구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부풀린 것, 아니면 누군가 소설질을 해 논게 확실하다. 예를 들면.
별장을 습격한 6명의 무장강도를 흉기(?)로 제압.
이라던가 아니면...
반정부군의 아지트를 단신으로 초토화.
이런 것 말이다. 자신의 옆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저 청년이 파일에 언급된 내용에 해당되는 게 확실한 것일까 말이다. 옆 좌석에 앉아있는 페드릭은 입에 뭘 가득 담고는 우물거리며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리플렉터가 등장했다는 것에는 별 감흥이 없는 것 같은 태도. 어니스트 대령은 그를 보며 '감수성이 전혀 없는 청년'이라 단정지었다. 상부는 대체 이런 인간한테 뭘 원하고 있는 건가. X-701 프로젝트와 이 인간이 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 거냐고...
목적지는 알티미리스 항성계다. 일단 자신이 탄 항공기가 달궤도에 공전중인 게이트를 통과해서 초광속도약을 하면 몇 분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초공간도약 항행법에 비해 상당히 빠르긴 했지만 이것은 안타깝게도 편도적으로 밖에 쓰질 못했다. 아마 거기서 이곳으로 오려면 20일 정도는 걸릴 것이다. 지구에서 알티미리스까지 거리는 대충 5500광년. 사실 펠 타리우스 항성계와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다. X-701이라 불리는 물건은 그 항성계의 제 3행성에 있었다. 가이아 연방 역사상 최고의 돈지랄. 701은 주로 그렇게 불린다. 도착 예정시간은 30분 뒤다. 조금만 참자.
페드릭은 순간 어니스트 대령이 자신을 심상치 않게 쳐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히 말을 걸어본다.
"무슨 불만이라도?"
"……."
[같은 시각. 알티미리스 III 행성 세이 프린시스 시 80km 북쪽]
쉬이이이~ 쒜에에엑!!
울창한 숲 속에서 갑자기 엄청난 금속음이 들리더니 푸른색 빛이 일직선으로 하늘 높이 뿜어져 나갔다.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몇 초가 지나자 한 낮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아주 강한 광도의 빛이 발했다. 행성방어체계가 정상작동중이라는 뜻이었다. 이 중에는 유인 작동중인 무기는 없었고 모두 자동이었다. 사격통제시설에만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을 뿐...
행성 표면 곳곳에서는 푸른색의 빛들이 뿌려졌고 간혹 가다 폭발이 일어나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방어체계는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행성방어체계가 모두 가동 중이라는 의미는 외부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모든 능동적인 유닛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이 곳 알티미리스는 펠 타리우스 항성계에서 26광년 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었다.
적들의 정체는 리플렉터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적함의 선형이나 규모는 완벽하게 리플렉터 전함과 일치했지만 대 리플렉터 무기가 전혀 안통했을뿐더러 기존의 리플렉터 특유의 반사능력도 발견되지 않았다. 덕분에 상당히 비관적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간혹가다 주위 항성계에서 주둔중인 함대가 지원을 오긴 했지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함선들이 알티미리스 항성계에 진입하자마자 전투불능 상태가 되버렸다. 그나마 살아남은 함선들도 결과는 마찬가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기분이 뭣같을 것이다. 지켜보는 인간들도 난감했으니까 말이다. 레이더 스크린에서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져가는 초록색 점들은 수십 개를 넘어갔다.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없다. 사실 그들이 무사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아니...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이런 말이 떠오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악마의 똥가루.
어디선가 괴기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쓔우우웅!!
"젠장!"
하늘에서 붉은 섬광 하나가 길게 이어지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던 이온캐논에 작렬했다. 핵무기가 아니길 망정이었지 자칫 잘못했다간 자신까지도 폭발에 휘말릴 뻔했다. 나무 너머로 보이는 이온캐논은 더 이상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지금 이 근처에는 자신을 제외하면 인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일행이라 여겼던 인간들은 몇 일 전에 뿔뿔이 흩어졌다. 폭격이 너무 거세다. 저것 중 하나만 이 근처로 떨어진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물과 운이었다.
거의 4일 동안이나 쉬지 않고 이동했다. 오랜만에 기지에서 휴가때문에 나왔는데 하루만에 박살이 나버렸다. 식문제야 20인분 수준의 전투식량을 들고 와서 걱정 없었지만 그 전투식량의 중량 때문에 상태가 암울했다. 졸린 건 둘째. 일단은 걷고 또 걷는다. 뭔가에 의해 추적 당한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심리적으로 불안해져서 좋은 건 절대 없다.
딴 생각을 하자! 딴 생각을!
양손으로 들고 있는 25Kg짜리 대함라이플과 등뒤에 매달려 등에 끌려 다니는 20Kg의 전투식량이 심히 거치적거렸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현재 자신에겐 전투복도 없었다. 진행속도가 느린 것도 다 이때문이었다. 80킬로미터 거리면 아무리 숲 속이었더라도 2~3일 정도면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적지는 알티미리스 III 행성에서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행장이었다. 그 곳이라면 아직까지는 무사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단지 머릿속으로 '어디쯤이다!'라고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정적.
내심 심심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 소리와 자신이 만들고 있는 여러 추잡스러운 소리뿐이었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수다나 실컷 해보고 싶었다. 지금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일행을 떠나게 만든 것은 모두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자신이 지금 필요이상으로 많이 가지고 다니는 전투식량은 폭격에 의해 파괴된 PX에서 가져온 한달만 먹어도 몇 달간 입맛을 붸리게 된다는 궁극의 음식인 요구르트 스낵이었다. 지상 최악의 조합이라 불리며 입맛을 잃은 환자에게 즉빵이라 여겨져 오지만 반대의 경우엔 되려 반영구적입맛소멸을 초래한다. 그걸 맛있다고 가져왔으니...
희한하게도 이 스낵은 자신의 입맛엔 딱이었다. 절대 바삭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씹는 순간 입 속으로…
"암탉!"
순간 어디선가 남자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짐작컨대 1시 방향이다. 그녀는 순식간에 엎드리고는 능숙한 솜씨로 라이플을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조준했다. 암탉은 자신의 콜사인이었다. 그녀는 아직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코프의 체열감지계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무 뒤에 숨어있는 것 같다. 몇 초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흐르자 총구가 향한 곳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여왔다.
"레아 누님?"
낯익은 목소리였다. 하지만ㅡ.
그녀는 소리가 들려온 나무의 중앙을 정확히 조준하고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적으로 어깨가 탈골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총구에서 3미터는 거뜬히 넘을법한 수준의 발사염이 뿜어져 나갔다. 40밀리미터 구경의 탄환은 정확히 나무 한 가운데에 박혔다.
아니...
박힌 개념이 아니었다. 총탄인지 포탄인지 구분조차 애매한 이 탄환은 명중한 대상 나무를 거의 박살내버리고 수 킬로미터를 더 날아갔다.
'쩌저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탄환이 통과한 자리 윗부분을 기준으로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쓰러져 버리는 것을 미동하나 하지 않고 엎드려 지켜보았다.
방금 그 목소리.
스코프의 체열감지계에서 알아차린 게 다행이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암탉이란 콜사인은 이 행성에서 불려서는 안될 말이었다. 이 곳에서 알고 있는 인간들은 자신을 민간인으로 알고 있었다. 소리는 분명 들렸다. 하지만 귀로 들린 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정신감응?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탄환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만약 있었더라도 하체만 남아있었겠지...
주위에서 풍겨오는 기운은 아까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리플렉터는 절대 아니다. 만약 리플렉터라면 요란한 소리를 만들며 며칠 전에 자신을 덮쳤을 것이다. 거의 도착해서 이게 뭔꼴인가?!
어이없는 현실을 원망하려던 그녀는 순간 전방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기가 일렁인다.
더욱 그지 같은 것이라면 하나가 아니다. 언뜻 육안으로 보면 예닐곱개 정도? 스코프의 체열감지계에서는 전혀 잡히지 않는다. '그것'들은 뭔가를 찾고 있었는지 계속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자신을 찾는거겟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발자국 소리와 함께 풀들이 기괴하게 눌렸다. 그녀는 방아쇠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적어도 아군일 리는 없을 것이다.
저벅. 저벅.
'그것'들은 그녀가 위치한 곳을 향해 다가왔다. 거리는 대충 어림잡아 30미터 정도. 방아쇠만 당기면 우선 한 마리는 해결된다.
한 마리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GASR-3000의 장전속도는 아무리 짧아봐야 6초 정도였다. 중량은 앞서 말한대로 25Kg이며 탄환하나 무게만 1Kg이었다. 이동에 매우 지장이 있었지만 위력 하나만은 끝내줬다. 지금 방아쇠를 당기면 40mm 구경의 탄환이 대상 타겟을 산산조각 낼 것이고 운이 좋다면 한동안 저것들의 이동을 주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총의 위력이 과도할 정도로 강했다. 최대 유효사거리만 해도 대기권에서만 10킬로미터가 넘어갔다. 발사 순간 총구 앞으로 뿜어지는 발화염만 해도 3미터는 거뜬히 넘어갔다. 이 총은 사람잡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수상함 잡으라고 만든 총이었다. 신들린 총. 같은 제조사가 만든 대함라이플도 많긴 했지만 이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들고 다니기엔 이 모델이 가장 가벼운 편에 속했으니까.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들과의 거리로만 봐도 쏘는 순간 자신의 위치가 바로 들통나게 된다. 일단은 관두고 그냥 지나가길 바래보자.
저벅. 저벅. 저벅. 척!
'그것'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눈을 찌푸렸다. 움직일 때조차도 주위 공간이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으로 대충 짐작했는데 움직임까지 없으니까 아예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거리는 아직 넉넉했다. 지금 자신은 주위에 잡스럽게 나있는 잡초들과 완전히 동화된 상태였다. 그런데ㅡ.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바보 같은...)
스코프에만 시야를 너무 의지한 너머지 바로 앞에 엄청난 골칫거리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까 한방 갈겼을 때 발사염이 잡초를 죄다 태워버렸던 것이다. 사소한 문제라기도 애매했다. 여태까지 저것들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진다.
아?! 아닌가?
오감이 경고한다.
펑!
뒤쪽에서 폭발소리가 들리는 것과 자신의 몸이 위험을 인지하고 그에 반응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아슬아슬 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몸 어딘가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일단 덕분에 몸은 완전히 노출된 상황. 갓건을 들고 냅다 달린다. 빈 공간에서 갑자기 에너지 무기가 발사되더니 그녀 주위로 있는 나무에 맞아 폭발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손톱 만한 파편하나가 그녀의 왼 팔에 박혔다. 찢겨진 피부 사이로 피가 나오고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엄습해온다. 박혀버린 파편을 빠른 시간 안에 제거해야만 하겠지만 뒤에서 쉴새없이 날아오는 에너지 탄들을 보면 그런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한방만 맞아도 몸 상태는 충분히 부정적인 상태가 될 것이다. 응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갓건은 서서 쏠 수 있는 '가벼운' 총이 결코 아니었다. 25Kg은 남자가 들기도 상당히 버거운 중량이다. 누가 들고 다니던 이건 엎드려서 쏘는 게 정석이었다.
펑! 퍽! 퍼벅! 퍽!
양 방향으로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달리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4일 밤샘보행에서 이제는 덤으로 조깅까지 하고 있다. 아직 재정신이란게 신기했다. 열나게 달리고 또 달린다.
그렇게 약 500미터를 쉬지 않고 뛰었을까...
적들도 더 이상 쫓아오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착각일 뿐.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다. 키가 1미터는 간신히 넘을 법한 풀들이 무수히 나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그것들을 따돌린 것 같았다.
하지만ㅡ.
덥석!
뭔가가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잡았다. 저항하려 다른 손으로 대충 짐작가는 공간에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이쪽도 마찬가지.
"뭐… 뭐야! 이거 안놔?!"
당황해 소리치지만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애초에 잡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붙잡힌 팔을 어떻게든 빼내려 했지만 발악을 하면 할수록 팔이 조여왔다. 멀리서 보면 마치 인형극으로 착각할 지도 몰랐다. 이더선가 짐승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바로 앞에서.
대체 이것들의 정체가... 아니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 때 수풀이 바스락거리더니 기괴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레 니아존."
처음 듣는 언어였다. 억양도 아주 독특했고 음성도 아주 기괴했다. 수풀 속에서 나온 뭔가가 뭐라 말하자 그녀는 양팔을 잡고 있는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 앞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레 니아 슈발레포."
저도 모르게 고개가 들렸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인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 존제가 모습을 드러냄으로 나타난 거대한 크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공간에서 전체적으로 푸른 스파크가 일더니 한번씩 통과한 자리에서 부분적으로 모습이 보이게 된 것이었다. 폭발하듯 전신에서 스파크가 격렬하게 일어났지만 접촉한 양팔에서 통증은 없었다. 정체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대표적인 이미지가 마치 새를 연상케 한다는 것. 키는 2미터를 훌쩍 넘겼으며 머리를 제외하고는 검은색의 갑옷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아까 그 소리도 이들이 한 짓일지도 몰랐다.
아까와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멀리서 이상한 엔진음이 들려온다. 이들이 부른건가...?
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니 맞나보다.
결국은 잡혀가는 건가. 그것도 산채로?
주위에 있던 놈들중 하나가 자신에게 뭔가를 들이댔다. 딱봐도 아까 그 화려한 색의 에너지덩어리를 발사시킨 무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산채로 데리고 갈 생각이 없어졌나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기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섬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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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올렸는데 또 이상한 상태가 되버렸습니다 ㄱ-...
(사실 필체를 좀 바까봤습니다만 괜찮은지...;;)
편당 분량도 이젠 10kb를 넘겨버리네요 ㅠ 잘라서 올릴까도 생각했지만 영 아니어서...
아! 그리고 소설 최초로 여자를 등장시켰어요 >_<!!
첨부터 시달리는게 불쌍하긴 하지만 ;ㅅ ;
그리고 비중 조낸 큰 X-701과 대함라이플을 등장시킨 겁니닷 -ㅂ-
음훼훼훼....!!!
암튼 다들 화이팅입니닷 +ㅁ+ 다음주에 뵈효~
"말 그대로입니다. 6개월 전에 <아드미럴 리처드>호가 당할 때 까지는 그 이유조차 몰랐습니다. 그냥 당한거죠. 처음에는 몰랐는데 1달 후에 리플렉터 전함으로 추정되는 함선이 우리측 함대와 교전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규모는요?"
"B 6 급으로 추정되는 전함 2척입니다."
페드릭은 어니스트 대령의 말에 약간은 놀랐다. 자신이 아는 한 리플렉터는 절대로 소수로 몰려다니지 않는다. 일단 오면 개떼다. 레이더 스크린 한쪽 구역을 시뻘건 점으로 도배를 하면서 정면으로 와주는 착한 것들.
2척 정도야 뭐...
"나포했겠군요?"
당연한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여 묻는 페드릭. 1개 함대 규모면 아무리 적어도 10척 이상의 전투함이 포함된다. 고작 2척이라면 함대의 집단 폭행에 완전히 박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니스트 대령의 말은 달랐다.
"아닙니다. 간신히 저지만 했습니다. 격전이었죠. 그 전투 덕분에 함대 군함의 대부분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고 일부는 아직도 보수공사 중입니다. 대 리플렉터 무기가 전혀 안통한다더군요."
"헐..."
"도움이 필요합니다. 상부로부터 받은 파일에 의하면 당신은 리플렉터를 멸망시키는데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언급되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500년 간 있었던 모든 역사를 직접 본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죠. 비록 세비어인이지만 연방정부에서는 당신이 이곳에 남아준 것을……"
어니스트 대령은 잠시 말을 멈추고 페드릭의 눈을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일반인이 봤다면 피곤에 찌든 기운을 느꼈겠지만 그는 달랐다. 대령은 거수경례를 하며 말했다.
"감사하게 여깁니다. 페드릭 포터 대령님!"
어니스트 대령의 말에 페드릭은 잠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세비어인의 특성상 그에게는 시간개념이 이들과는 틀렸기 때문에 500년이라는 세월이 그저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 500년이면 세비어인에게도 장난이 아닌 수준의 세월이었다. 공전주기로만 따져도 43주기. 페드릭은 손을 내리지 않는 어니스트 대령을 본 순간 아차 하며 맞경례를 해주었다. 그런 도중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어니스트 대령님. 저는 소령입니다."
어니스트 대령이 마지막에 우렁찬 목소리로 강조하던 글자가 신경 쓰였다. 자신은 이리시스 제국의 소령이었다. 절대로 대령이라 불릴 수가 없었다.
"흠... 제가 이 말 안했습니까?"
"뭘요?"
"2895년 9월 24일 기억나십니까?"
2895년? 내가 천재냐? 몇 백년 전 일을 정확히 기억하게?
순간적으로 이 말이 입을 통해 튀어나올 뻔했다. 다행히도 페드릭은 그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당연히... 기억이 날 리가 없죠."
"……."
페드릭은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 마치 당연히 기억을 했어야 한다는 저 표정은 뭔가? 세비어인이나 가이아인이나 기억력 구린 것은 차이가 없었다. 괜히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 부르는 게 아니란 말이다. 시간개념이 좀 틀리긴 하지만 수명이나 염력을 제외하면 가이아인들보다 나은 것도 없었다. 눈앞의 이 인간은 마치 자신이 엄청나게 위대한 인간인줄 착각하는 것 같았다. 페드릭이 지구에 와서 한 짓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연방정부로부터 공짜로 지급된 별장에서 밥먹다가 무장강도를 숟가락으로 제압한 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 당시 대통령이라 불리던 아저씨에게 비공식적으로 명예훈장을….
"앗! 혹시 금딱지 받은 날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친다. 9월 24일. 정말 한참 옛날 일이지만 아주 어렴풋이 기억은 났다. 그 때는 분명 대통령한테 손바닥만한 금딱지를 받은 날이었다. 대통령이 뭐라 중얼거리며 말했지만 당연히 기억날 리 없다. 어니스트 대령은 금딱지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끝내 뜻을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날이 맞을 겁니다. 당신은 그 때 명예훈장을 받기 전에 약관에 동의한다고 서명했습니다."
"음?"
순간적으로 두꺼운 종이 겉표지에 필기구로 아무렇게 후려갈기는 영상이 떠올랐다. 설마 그거였나...? 어니스트 대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옆에 계신 사일러라는 인간은 초인적인 능력으로 계속 부동자세 유지중.
"거기에는 연방법에 따라 동의하는 한에서 현존하는 모든 사회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고 연방정부의 국적을 가지지 않는 자에 한하며 이게 적용되는 즉시 연방국의 국적을 가질 수 있다고 되 있습니다. 600개 이상의 조항중 하나일 뿐이지만 다른 것도 모두 비슷비슷합니다. 당신은 그 날 이후로 2개 국적을 소유하고 있으며 적어도 연방정부에서는 이리시스 제국법을 적용시켜 당신이 윤 장군님을 보좌하는 동안 복무기간으로 적용돼서 자동으로 진급되었던 겁니다."
"그거 좀 억지 같은데요...?"
페드릭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을 듣자니 연방법에 한해서는 대령이란 뜻이고 제국법으로는 여전하단 거였는데...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건 억지다. 이미 동족이 오리라는 미련은 버렸으니 상관은 없지만 만약 온다면 난감하겠군. 순간 거실에서 살짝 요상한 음악과 함께 빛이 세어 나왔다. 스파이더맨이 시작한 것이었다. 어느새 광고가 다 끝나버린건가! 그의 머릿속이 온통 드라마에 대한 것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연방정부에 한해서입니다. 이중국적을 가졌을 뿐이지 연방법에 한해서는 엄연한 대령입니다. 의원들과도 좀만… 어?!"
쿵!
페드릭이 갑자기 머리를 빼고 문을 닫아버렸다. 대령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했다. 하지만 곧 곳곳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다시 열렸다. 초췌한 모습의 페드릭이 한마디한다.
"죄송."
"……."
순식간에 2시간의 시간이 증발했다.
어니스트 대령과 사일러 대위는 페드릭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차마 반박을 하지 못한 채 드라마를 같이 봐주고 말았다. 여기 오기 전에 봤던 파일과는 완전 딴판인 페드릭의 모습은 그 둘로 하여금 엄청난 허구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부풀린 것, 아니면 누군가 소설질을 해 논게 확실하다. 예를 들면.
별장을 습격한 6명의 무장강도를 흉기(?)로 제압.
이라던가 아니면...
반정부군의 아지트를 단신으로 초토화.
이런 것 말이다. 자신의 옆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저 청년이 파일에 언급된 내용에 해당되는 게 확실한 것일까 말이다. 옆 좌석에 앉아있는 페드릭은 입에 뭘 가득 담고는 우물거리며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리플렉터가 등장했다는 것에는 별 감흥이 없는 것 같은 태도. 어니스트 대령은 그를 보며 '감수성이 전혀 없는 청년'이라 단정지었다. 상부는 대체 이런 인간한테 뭘 원하고 있는 건가. X-701 프로젝트와 이 인간이 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 거냐고...
목적지는 알티미리스 항성계다. 일단 자신이 탄 항공기가 달궤도에 공전중인 게이트를 통과해서 초광속도약을 하면 몇 분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초공간도약 항행법에 비해 상당히 빠르긴 했지만 이것은 안타깝게도 편도적으로 밖에 쓰질 못했다. 아마 거기서 이곳으로 오려면 20일 정도는 걸릴 것이다. 지구에서 알티미리스까지 거리는 대충 5500광년. 사실 펠 타리우스 항성계와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다. X-701이라 불리는 물건은 그 항성계의 제 3행성에 있었다. 가이아 연방 역사상 최고의 돈지랄. 701은 주로 그렇게 불린다. 도착 예정시간은 30분 뒤다. 조금만 참자.
페드릭은 순간 어니스트 대령이 자신을 심상치 않게 쳐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히 말을 걸어본다.
"무슨 불만이라도?"
"……."
[같은 시각. 알티미리스 III 행성 세이 프린시스 시 80km 북쪽]
쉬이이이~ 쒜에에엑!!
울창한 숲 속에서 갑자기 엄청난 금속음이 들리더니 푸른색 빛이 일직선으로 하늘 높이 뿜어져 나갔다.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몇 초가 지나자 한 낮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아주 강한 광도의 빛이 발했다. 행성방어체계가 정상작동중이라는 뜻이었다. 이 중에는 유인 작동중인 무기는 없었고 모두 자동이었다. 사격통제시설에만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을 뿐...
행성 표면 곳곳에서는 푸른색의 빛들이 뿌려졌고 간혹 가다 폭발이 일어나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방어체계는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행성방어체계가 모두 가동 중이라는 의미는 외부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모든 능동적인 유닛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이 곳 알티미리스는 펠 타리우스 항성계에서 26광년 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었다.
적들의 정체는 리플렉터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적함의 선형이나 규모는 완벽하게 리플렉터 전함과 일치했지만 대 리플렉터 무기가 전혀 안통했을뿐더러 기존의 리플렉터 특유의 반사능력도 발견되지 않았다. 덕분에 상당히 비관적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간혹가다 주위 항성계에서 주둔중인 함대가 지원을 오긴 했지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함선들이 알티미리스 항성계에 진입하자마자 전투불능 상태가 되버렸다. 그나마 살아남은 함선들도 결과는 마찬가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기분이 뭣같을 것이다. 지켜보는 인간들도 난감했으니까 말이다. 레이더 스크린에서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져가는 초록색 점들은 수십 개를 넘어갔다.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없다. 사실 그들이 무사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아니...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이런 말이 떠오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악마의 똥가루.
어디선가 괴기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쓔우우웅!!
"젠장!"
하늘에서 붉은 섬광 하나가 길게 이어지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던 이온캐논에 작렬했다. 핵무기가 아니길 망정이었지 자칫 잘못했다간 자신까지도 폭발에 휘말릴 뻔했다. 나무 너머로 보이는 이온캐논은 더 이상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지금 이 근처에는 자신을 제외하면 인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일행이라 여겼던 인간들은 몇 일 전에 뿔뿔이 흩어졌다. 폭격이 너무 거세다. 저것 중 하나만 이 근처로 떨어진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물과 운이었다.
거의 4일 동안이나 쉬지 않고 이동했다. 오랜만에 기지에서 휴가때문에 나왔는데 하루만에 박살이 나버렸다. 식문제야 20인분 수준의 전투식량을 들고 와서 걱정 없었지만 그 전투식량의 중량 때문에 상태가 암울했다. 졸린 건 둘째. 일단은 걷고 또 걷는다. 뭔가에 의해 추적 당한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심리적으로 불안해져서 좋은 건 절대 없다.
딴 생각을 하자! 딴 생각을!
양손으로 들고 있는 25Kg짜리 대함라이플과 등뒤에 매달려 등에 끌려 다니는 20Kg의 전투식량이 심히 거치적거렸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현재 자신에겐 전투복도 없었다. 진행속도가 느린 것도 다 이때문이었다. 80킬로미터 거리면 아무리 숲 속이었더라도 2~3일 정도면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적지는 알티미리스 III 행성에서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행장이었다. 그 곳이라면 아직까지는 무사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단지 머릿속으로 '어디쯤이다!'라고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정적.
내심 심심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 소리와 자신이 만들고 있는 여러 추잡스러운 소리뿐이었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수다나 실컷 해보고 싶었다. 지금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일행을 떠나게 만든 것은 모두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자신이 지금 필요이상으로 많이 가지고 다니는 전투식량은 폭격에 의해 파괴된 PX에서 가져온 한달만 먹어도 몇 달간 입맛을 붸리게 된다는 궁극의 음식인 요구르트 스낵이었다. 지상 최악의 조합이라 불리며 입맛을 잃은 환자에게 즉빵이라 여겨져 오지만 반대의 경우엔 되려 반영구적입맛소멸을 초래한다. 그걸 맛있다고 가져왔으니...
희한하게도 이 스낵은 자신의 입맛엔 딱이었다. 절대 바삭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씹는 순간 입 속으로…
"암탉!"
순간 어디선가 남자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짐작컨대 1시 방향이다. 그녀는 순식간에 엎드리고는 능숙한 솜씨로 라이플을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조준했다. 암탉은 자신의 콜사인이었다. 그녀는 아직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코프의 체열감지계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무 뒤에 숨어있는 것 같다. 몇 초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흐르자 총구가 향한 곳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여왔다.
"레아 누님?"
낯익은 목소리였다. 하지만ㅡ.
그녀는 소리가 들려온 나무의 중앙을 정확히 조준하고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적으로 어깨가 탈골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총구에서 3미터는 거뜬히 넘을법한 수준의 발사염이 뿜어져 나갔다. 40밀리미터 구경의 탄환은 정확히 나무 한 가운데에 박혔다.
아니...
박힌 개념이 아니었다. 총탄인지 포탄인지 구분조차 애매한 이 탄환은 명중한 대상 나무를 거의 박살내버리고 수 킬로미터를 더 날아갔다.
'쩌저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탄환이 통과한 자리 윗부분을 기준으로 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쓰러져 버리는 것을 미동하나 하지 않고 엎드려 지켜보았다.
방금 그 목소리.
스코프의 체열감지계에서 알아차린 게 다행이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암탉이란 콜사인은 이 행성에서 불려서는 안될 말이었다. 이 곳에서 알고 있는 인간들은 자신을 민간인으로 알고 있었다. 소리는 분명 들렸다. 하지만 귀로 들린 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정신감응?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탄환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만약 있었더라도 하체만 남아있었겠지...
주위에서 풍겨오는 기운은 아까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리플렉터는 절대 아니다. 만약 리플렉터라면 요란한 소리를 만들며 며칠 전에 자신을 덮쳤을 것이다. 거의 도착해서 이게 뭔꼴인가?!
어이없는 현실을 원망하려던 그녀는 순간 전방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기가 일렁인다.
더욱 그지 같은 것이라면 하나가 아니다. 언뜻 육안으로 보면 예닐곱개 정도? 스코프의 체열감지계에서는 전혀 잡히지 않는다. '그것'들은 뭔가를 찾고 있었는지 계속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자신을 찾는거겟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발자국 소리와 함께 풀들이 기괴하게 눌렸다. 그녀는 방아쇠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적어도 아군일 리는 없을 것이다.
저벅. 저벅.
'그것'들은 그녀가 위치한 곳을 향해 다가왔다. 거리는 대충 어림잡아 30미터 정도. 방아쇠만 당기면 우선 한 마리는 해결된다.
한 마리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GASR-3000의 장전속도는 아무리 짧아봐야 6초 정도였다. 중량은 앞서 말한대로 25Kg이며 탄환하나 무게만 1Kg이었다. 이동에 매우 지장이 있었지만 위력 하나만은 끝내줬다. 지금 방아쇠를 당기면 40mm 구경의 탄환이 대상 타겟을 산산조각 낼 것이고 운이 좋다면 한동안 저것들의 이동을 주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총의 위력이 과도할 정도로 강했다. 최대 유효사거리만 해도 대기권에서만 10킬로미터가 넘어갔다. 발사 순간 총구 앞으로 뿜어지는 발화염만 해도 3미터는 거뜬히 넘어갔다. 이 총은 사람잡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수상함 잡으라고 만든 총이었다. 신들린 총. 같은 제조사가 만든 대함라이플도 많긴 했지만 이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들고 다니기엔 이 모델이 가장 가벼운 편에 속했으니까.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들과의 거리로만 봐도 쏘는 순간 자신의 위치가 바로 들통나게 된다. 일단은 관두고 그냥 지나가길 바래보자.
저벅. 저벅. 저벅. 척!
'그것'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눈을 찌푸렸다. 움직일 때조차도 주위 공간이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으로 대충 짐작했는데 움직임까지 없으니까 아예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거리는 아직 넉넉했다. 지금 자신은 주위에 잡스럽게 나있는 잡초들과 완전히 동화된 상태였다. 그런데ㅡ.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바보 같은...)
스코프에만 시야를 너무 의지한 너머지 바로 앞에 엄청난 골칫거리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까 한방 갈겼을 때 발사염이 잡초를 죄다 태워버렸던 것이다. 사소한 문제라기도 애매했다. 여태까지 저것들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진다.
아?! 아닌가?
오감이 경고한다.
펑!
뒤쪽에서 폭발소리가 들리는 것과 자신의 몸이 위험을 인지하고 그에 반응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아슬아슬 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몸 어딘가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일단 덕분에 몸은 완전히 노출된 상황. 갓건을 들고 냅다 달린다. 빈 공간에서 갑자기 에너지 무기가 발사되더니 그녀 주위로 있는 나무에 맞아 폭발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손톱 만한 파편하나가 그녀의 왼 팔에 박혔다. 찢겨진 피부 사이로 피가 나오고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엄습해온다. 박혀버린 파편을 빠른 시간 안에 제거해야만 하겠지만 뒤에서 쉴새없이 날아오는 에너지 탄들을 보면 그런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한방만 맞아도 몸 상태는 충분히 부정적인 상태가 될 것이다. 응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갓건은 서서 쏠 수 있는 '가벼운' 총이 결코 아니었다. 25Kg은 남자가 들기도 상당히 버거운 중량이다. 누가 들고 다니던 이건 엎드려서 쏘는 게 정석이었다.
펑! 퍽! 퍼벅! 퍽!
양 방향으로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달리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4일 밤샘보행에서 이제는 덤으로 조깅까지 하고 있다. 아직 재정신이란게 신기했다. 열나게 달리고 또 달린다.
그렇게 약 500미터를 쉬지 않고 뛰었을까...
적들도 더 이상 쫓아오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착각일 뿐.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다. 키가 1미터는 간신히 넘을 법한 풀들이 무수히 나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그것들을 따돌린 것 같았다.
하지만ㅡ.
덥석!
뭔가가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잡았다. 저항하려 다른 손으로 대충 짐작가는 공간에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이쪽도 마찬가지.
"뭐… 뭐야! 이거 안놔?!"
당황해 소리치지만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애초에 잡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붙잡힌 팔을 어떻게든 빼내려 했지만 발악을 하면 할수록 팔이 조여왔다. 멀리서 보면 마치 인형극으로 착각할 지도 몰랐다. 이더선가 짐승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바로 앞에서.
대체 이것들의 정체가... 아니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 때 수풀이 바스락거리더니 기괴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레 니아존."
처음 듣는 언어였다. 억양도 아주 독특했고 음성도 아주 기괴했다. 수풀 속에서 나온 뭔가가 뭐라 말하자 그녀는 양팔을 잡고 있는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 앞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레 니아 슈발레포."
저도 모르게 고개가 들렸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인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 존제가 모습을 드러냄으로 나타난 거대한 크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공간에서 전체적으로 푸른 스파크가 일더니 한번씩 통과한 자리에서 부분적으로 모습이 보이게 된 것이었다. 폭발하듯 전신에서 스파크가 격렬하게 일어났지만 접촉한 양팔에서 통증은 없었다. 정체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대표적인 이미지가 마치 새를 연상케 한다는 것. 키는 2미터를 훌쩍 넘겼으며 머리를 제외하고는 검은색의 갑옷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아까 그 소리도 이들이 한 짓일지도 몰랐다.
아까와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멀리서 이상한 엔진음이 들려온다. 이들이 부른건가...?
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니 맞나보다.
결국은 잡혀가는 건가. 그것도 산채로?
주위에 있던 놈들중 하나가 자신에게 뭔가를 들이댔다. 딱봐도 아까 그 화려한 색의 에너지덩어리를 발사시킨 무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산채로 데리고 갈 생각이 없어졌나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기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섬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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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올렸는데 또 이상한 상태가 되버렸습니다 ㄱ-...
(사실 필체를 좀 바까봤습니다만 괜찮은지...;;)
편당 분량도 이젠 10kb를 넘겨버리네요 ㅠ 잘라서 올릴까도 생각했지만 영 아니어서...
아! 그리고 소설 최초로 여자를 등장시켰어요 >_<!!
첨부터 시달리는게 불쌍하긴 하지만 ;ㅅ ;
그리고 비중 조낸 큰 X-701과 대함라이플을 등장시킨 겁니닷 -ㅂ-
음훼훼훼....!!!
암튼 다들 화이팅입니닷 +ㅁ+ 다음주에 뵈효~
안녕하세요
왠지 눈에 익은 문체 같기도 하고요.
어쨌거나 이것 저것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긴 글을 한번에 올리기 보다는 적당한 분량으로 하루 하루 올려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길이가 너무 길면 한번에 읽기가 좀 부담스러울 때가 있으니까요.
화이팅 하세요.
대함 라이플. -_-;
궁금한게 하늘로 쏘는 건 바닥에 견착 시키고 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