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흔의 전장 (목숨이 붙어있고 생활환경이 보장되는 한 연재는 계속됩니다.) - 08년 10월 27일 공군입대 합니다.
글 수 79
순간 통신사관 한 명이 준장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내용은 그렇게 길진 않은 듯 그는 곧바로 자리로 갔다. 페드릭은 다시 입을 열었다.
"관성한계하중은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긴 합니다. 대신 우리측 함대는 전투가 불가능해집니다. 지금 221함대의 상황도 괜찮다고 여기는 분들은 계시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그렇다고 여기 구조된 승무원들을 두고 갔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죠. 저는 221 함대를 이 전투에서 빼내고 싶습니다. 전투능력을 반 이상 상실한 함선을 무모하게 희생시키긴 싫습니다.
"…나도 그러고는 싶네. 자네 말대로 힘을 바란다면 그건 우릴 위해 죽어달란 소리 밖에 안될 테니 말이야... 우리가 오기 전까지는 잘 견뎌 주었네. 나는 자네 의견엔 찬성하네. 하지만 자네는 최상급 장교도 아닌데 어떻게 그들을 빼낼 건가?"
윤천일 준장이 페드릭의 말을 듣다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물어본다. 이 소년은 특수대 소령이었다. 물론 나이에 비해 계급이 상당하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점이었다. 게다가 기본적인 전술이나 전략들도 거의 완벽히 숙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높으신 분들의 도움을 받아 침 좀 씹고 껌 좀 뱉다가 얼렁뚱땅 장교가 된건 아닌 게 분명했다. 페드릭은 자신의 질문에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법이 있긴 하지만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한동안의 망설임 끝에 페드릭은 조심스레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트리오네의 함교에서는 짧은 갈색머리의 중년 남자가 종이 쪼가리를 든 채 손을 떨고 있었다. 그 남자는 '말도 안 돼'라는 말을 내뱉으며 수차례 반복해서 전문을 읽었다. 그는 렉스트롱 대령이었다. 렉스트롱 대령은 지금 함대 피해복구반을 지휘하던 도중 때마침 통신사관이 가져온 전문을 보고는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에게 온 전문은 최고 사령부에서 1급 긴급 채널로 직접 전해진 전문이었다. 전문의 맨 위에는 최고군사명령 이행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최고군사명령이행서는 황제의 신변이 위험하거나 모성의 침공 같은 종족적으로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져 있을 때 외부 항성계에 나가있는 모든 전투함대를 불러들이는 귀환명령서였다. 이것은 모성에서만 발신되는 메시지이며 사용된 경우는 노토르 인이 멸망당한 사건 이후로는 사용된 적이 없었다.
이 전문은 세비어인의 모성에 있는 아주 거대한 발신기를 통해 편도적인 목적으로 한순간에 은하계 전체로 보내어진다. 답신은 불가능하며 1회 발신에 들어가는 동력은 수 백척의 함선이 단체로 초공간 항행을 하는 것보다 수 백배 이상 소모되었다.
"……!"
렉스트롱 대령은 통신사관이 다가와 뭔가를 또 건내주자 그것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전문은 도저히 믿기 힘든 내용들뿐이었다.
아공간 센서에서 대규모의 리플렉터 함대 접근 중.
일부 항성계에서는 이미 방위군과 격전중인 곳 다수.
자세한 적함대의 규모는 정확히 추려낼 수 없음.
전문의 내용을 간추리면 이러했다. 리플렉터가 대체 언제 빠져나갔다는 얘기인 건가... 카르나드가 초공간 도약 기술을 리플렉터에게 넘겨줬다 해도 여기서 세리니언 태양계까지는 6세대에 근접한 초공간 항행으로도 반년을 쉬지 않고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시간적으로 상당히 계산이 어긋났다. 렉스트롱 대령은 통신사관을 쳐다보며 오른손의 전문을 치켜들었다.
"라이언!"
"써!"
그는 렉스트롱 대령의 말에 잔뜩 긴장하며 대답했다. 렉스트롱 대령이 자신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대령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저 전문은 자신이 건낸 것이었다. 이태까지 단 한번도 이례 없었던 일. 대령은 아마 이 전문이 속임수가 아닌가 하고 물어볼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라이언은 달리 할말이 없었다. 자신도 이것을 처음 봤을 때는 눈이 닳도록 봤으니까... 예상대로 그는 전문의 진실 여부에 대해 물었다.
라이언은 다시 한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렉스트롱 대령은 몹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가이아인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배의 상태가 부정적이더라도 도움이 될 수는 있다. 물론 자신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칫 잘못 결정을 했다간 이 함대에 속한 모든 승무원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221 함대에 등록된 승무원 수는 약 34만 명. 분명 본능은 이게 누군가의 장난이라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 한편에서는 이것에 무조건 따르라고 말하고 있었다. 변화의 폭이 아주 큰 결정은 재정신인 이상 쉽게 할 수가 없다. 윌리언 제독이라면 무슨 결정을 내렸을까...
윌리언 제독은 인컴브릿지드가 자탄에 휩쓸린 이후 볼 수 없었다. 렉스트롱 대령은 아주 신중히 결정하려 했다. 이게 누군가의 장난이던 아니던 간에 여기서 떠난다는 것 자체가 전혀 내키지가 않았다. 일단 모성귀환을 위해 초공간에 진입하게 되면 도중에 멈추기는 힘들었다. 이것이 초공간 항행의 가장 나쁜 단점이었다. 어느 하나 맘에 드는 게 없었다. 결정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전문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이곳에 남아 가이아인들을 도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저들에게 맡기고 모성으로 귀환해야 할 것인가?
몇 년이 걸리는 코스이다. 하지만...
"명령에는 어쩔 수 없는건가..."
렉스트롱 대령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항해장에게 도착좌표를 계산하도록 명령했다. 결국은 귀환을 택한 것이다. 가이아 함선으로부터 구조된 승무원들을 다시 이곳으로 전송시키도록 한다. 몇 분 후 도착좌표의 계산이 끝나자 221함대의 남은 함선들은 서서히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렉스트롱 대령은 가이아 함대의 최고지휘관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는 약간의 마찰을 예상했다. 스크린에서 최초로 그의 얼굴이 나왔을 때 그는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렉스트롱 대령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뜻밖에도 그는 너무나 쉽게 동의해주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렉스트롱 대령은 뭔가 이상하다 여겨 윤천일 준장에게 물으려 했지만 무전은 이미 끊어진 뒤였다. 손해제어사관이 보고한다.
레이더 통제실에서 폭발 발생
승무원 사상자수 경상 4명, 중상 1명
제 4 수리반 수습 들어감
"커허..."
뜻밖의 상황에 렉스트롱 대령은 혀를 찼다. 이 대체 뭐하자는 상황인가? 최고 사령부의 갑작스런 전문에 엄청난 마찰을 예상했던 황인 장군과의 일이 너무나 쉽게 풀렸다.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사고까지... 우연이라 하기엔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했다. 함대장의 비중이란 실로 어마어마했다. 실종(아마 전사했을 것이다)된 윌리언 제독이 존경스러워진다. 평소에도 이와 맘먹는 수준의 결정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하다니... 렉스트롱 대령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통신사관에게 말했다.
"위상배열레이더로 변환시키고 제 2 전투채널로 전 함대에게... 세리니언 항성계로 초공간 항행준비하라고 해. 모성에 귀환한다."
이 말 한번 말하기 위해 몇 분을 망설였다. 자신이 진정 잘한 결정인지는 몇 년후 알 수 있을 것이다. 통신사관인 라이언 네이스트 중위는 또한번 '알겠습니다." 라는 말만을 한 채 명령에 따랐다. 트리오네의 주 레이더에 비하면 상당히 성능이 뒤쳐졌지만 근접한 거리에 있는 상태에서는 전체 통신을 하는데는 특별히 큰 지장은 없었다. 일부가 대령의 명령에 반박했지만 전문의 내용을 본 후에는 곧바로 잠잠해졌다. 그들도 이 전문의 내용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을 테니까...
라이언과 다른 직책을 가진 장교 한 명이 일어나 렉스트롱 대령에게 다가간다. 초공간 항행에 앞서 최종점검을 하는 것이겠지. 일단은 거리가 엄청나기에 각도가 0.1초만 빗나가도 목적지에서 100광년 이상 떨어진 곳에 진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검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그리고 잠시 후 비상경고등이 울림과 동시에 대령이 마이크를 쥔다. 카운트다운 10초 대기...
…10.
함선은 어느새 모성간의 좌표를 계산하고 자세 변환 추력기의 도움을 받으며 서서히 선회하기 시작했다.
…9.
함교 밖 저 멀리에서 리플렉터 전함의 잔해가 스피카의 가시광선을 반사해 번쩍였다. 거리는 비교적 가까운 100km 정도. 가이아 함선에 의해 아주 무참히 박살난 함선일 것이다.
…8.
트리오네의 모든 무기통제시스템이 다운된다. 하지만 곧 복구될 것이다. 초공간 항행을 위해 함선의 엔진이 동력을 일방적으로 빼내가는 결과이다. 2.8 엑사 노르튼 급의 동력기라도 초공간 항행시의 동력을 감당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7.
에너지가 충전되는 소리가 함 전체로 들리기 시작한다. 비상 전력이 간신히 트리오네 전체에 조명을 빛춰주고 있었다. 함교 전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른다.
…6.
생명유지장치에 경고문이 뜬다. 하지만 이내 경고는 사라졌다. 장거리의 초공간 항행이다. 모성에서 떠난지도 8년. 실로 엄청난 시간이다. 다시 귀환한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은 없다.
…5.
함교 밖에서 청녹색 섬광하나가 잠시 번쩍였다가 사라진다. 무슨 배인지는 몰라도 최초로 저 배가 초공간에 진입했다는 것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4 !
뒤이어 2척, 아니 3척의 함선이 청녹색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 초공간 항행에 필요한 시스템들을 다시 재점검한다. 생명유지 장치나 관성제어장치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상진동이 함 전체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아직은 미약하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
…3 !!
점검은 막바지에 들어가고 함선의 이상진동이 아까보다 더 심해진다. 기관장이 급히 보고하길, 전투로 인해 입은 손상 때문에 엔진 일부 구획에서 노이즈가 발생한다고 한다. 동력효율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초공간 항행에 무리는 없다고 했다. 사실은 동력효율에 문제가 생긴것 자체가 무리다.
…2 !!!
불길한 예감은 없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이건 뭐지 중력이 슬슬 앞으로 쏠리자 어깨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인생에 딱 3번뿐이었던 초공간 항행의 경험. 이제 한번 더 추가다. 함교의 현창 밖 바로 앞에서 통상 공간이 갈라지며 새로운 뭔가가 새어 들어오는 듯 하다.
…1. !!!!
초공간이 마치 폭발하듯 순식간에 지름이 수십 배 이상이 늘어난다. 그리고 그 직후 아광속 엔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푸른빛을 무섭게 내뿜으며 최대 추력으로 가속하자 트리오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청녹색의 몽롱한 빛을 내뿜는 초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이어 221 함대의 다른 함선들도 섬광과 함께 사라져갔다. 이 곳에 다시 올 가능성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그렇게 221함대는 스피카 성계에서 사라졌다.
레이더 스크린에서 221함대가 초공간에 진입하자 녹색점이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것을 페드릭은 씁쓸하게 지켜보았다.
"괜찮겠나…?"
윤천일 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페드릭은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아무생각 없이 레이더 스크린을 주시했다. 더 이상 이 곳에 세비어인은 자신을 빼곤 존재하지 않았다. 인컴브릿지드의 구조된 승무원들이 다시 221 함대로 전송될 때 자신은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221 함대에서 그나마 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턴 메토프 중위뿐이었다. 만날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남았다. 아무런 부담 없이...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 옆에 있는 사람들은 외모는 똑같았지만 이들은 자신의 기준에서는 엄연한 외계인이었다. 홀로 남겨졌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막상 저지르고 나니 생각이 너무 짧았다. 꽤 오랫동안 후회할 기분도 들고 말이다.
221 함대에 보낸 전문은 자신이 예전에 장난삼아 생각해본 것 중 하나였다. 긴급 채널에서만 쓰이는 파장 주파수는 모성의 최고 사령부에서만 쓰이는 1급 기밀이었다. 함대 지휘부도 이것을 몰랐으며 수신되더라도 함선의 극히 암호화된 체계에 의해 주파수를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생도 때 오르콘 급 전함의 레이더 컴퓨터에서 아주 우연히 알아낼 수 있었다. 보통 함대간 통신 주파수의 경우엔 3이나 4단으로 분리된 정보를 주고받지만 이것은 24개의 파장 주파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식 같은 것도 기존의 파장 주파수보다 수백 배는 복잡했으며 답도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모의실험에서 한번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오르콘의 항법 컴퓨터의 전산체계가 영구적으로 맛이 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페드릭은 몰랐지만 트리오네의 레이더도 이와 같은 원인으로 폭발했다. 생각해보니 신기하게도 가이아 함선은 잘 버텨 주었다. 이게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 때 레이더 담당 사관이 외친다.
"방위 162.5' - 172.1' 거리 10600! 초공간에서 다수의 진입 물체 탐지했습니다. 아군입니다."
윤천일 준장은 때맞춰 주력 전투함대가 도착한다고 여겼다. 14번 함대의 중무장된 주력 전투함들이 말이다. 기함인 B5급 전함인 유로파부터 시작해서 6척의 전함과 2척의 항모, 그리고 백 수십 척의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말이다. 14번 콘포넨트 전투함대의 규모는 160척을 넘어갔다.
"IFF(피-아 식별장치) 확인 중입니다. 3초 후 진입합니다. 개체수 확인 중입니다."
레이더 담당 사관의 말이 끝날 무렵 인천함 남동 쪽 1만 km 공간에서 푸른색의 공간이 폭발하듯 순식간에 퍼지며 대다수의 함선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페드릭은 레이더 스크린에 나타난 푸른 점들을 보며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윤천일 준장이 말했던 함대의 규모와는 달랐다. 좀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레이더 스크린에선 어느새 함선들을 한 점으로 묶어버리고 정보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 때 레이더 담당 사관이 뭐라 외친다.
잠시 후...
페드릭은 상황이 점점 급하게 돌아가자 의도하지 않게 윤천일 준장을 보조하게 되버렸다. 졸지에 선임참모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공식적인 것도 아니며 진짜로 참모가 된건 아니었다. 본래 윤천일 준장을 보조하던 전술참모에게 상당히 미안한 감정이 일어난다. 콘포넨트 전투함대의 제독인 에드워드 시리어즈 대장이 초공간 항행 중에 갑자기 사망해 제럴드 헤리스라는 사람이 위임받았다고 한다. 둘이서 얘기하는 것을 보니 꽤나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제럴드 제독은 전 에드워드 제독이 연방정부로부터 센타우리 항성계에서 놀고 있던 전투함들을 더 끌고 왔다고 했다. 그 덕에 좀 늦었다고 말이다. 제럴드 제독이 끌고 온 함선은 윤천일 준장이 말한 규모의 2배 이상 많았다. 레이더 스크린에 나타나는 숫자는 정확히 352척. 1개 함대가 이 정도의 규모였다면 엄청난 수준이었다. 페드릭은 어림잡아 4 ~ 5 개 이상의 함대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 짐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병력 수가 많았다. 이 정도라면 전의 상황보다는 훨씬 더 긍정적인 상황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ㅡ행성의 극궤도에서 리플렉터들을 차근차근 제압할 것이라고 하네. 수가 좀 많긴 하지만 괜찮겠나?"
윤천일 준장이 어느새 이 주위를 평면으로 요약시킨 지도를 건내주며 말했다. 앞의 말은 딴 생각을 하느라 자세히 듣지는 못했다. 다시 물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일찍이 포기한다. 행성의 극궤도에서 치는 것은 자신의 계획이었다. 그 제독이란 자에게도 어느정도 솔깃하게 들린 건 분명했다. 페드릭은 윤천일 준장의 질문에 레이더 스크린에 지도를 깔아놓고 옆에 굴러다니던 필기구를 집어 쓰기 시작했다.
"극궤도에서 친다면 그놈들이 미리 예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리플렉터 전함들은 엄청난 수만큼이나 그에 비례하는 낭비병력을 만들 것입니다. 수만척 중에 함대와 직접 전투가 가능한 숫자는 10%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근접전일수록 유리합니다. 쓸데없이 큰 덩치 덕분에 여차하면 지들끼리 공격하게 만들기도 쉬울 겁니다."
페드릭은 오른손에 쥐어진 펜으로 지도에 뭔가 그리기 시작했다. 투명 아크릴 판을 연상시키는 얇은 지도는 펜이 닿는 면적마다 일부 정보들이 수정되었다. 2차원 지도는 레이더 컴퓨터에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다운로드하고 있었다. 성의있게 뭔가를 새기던 페드릭이 작업을 모두 끝내자 윤천일 준장도 잘 보일 수 있도록 지도를 건네었다.
지도에서는 각 번호들과 그 밑에는 모두 시간대가 적혀있었다. 본격적인 공격계획이었다. 윤천일 준장은 지도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딱히 반박할 만한 요소는 없었다. 페드릭은 각 공격시간과 종류, 적 함대의 반응범위와 대응방법에 대해서도 미리 예상해 적어져 있었다.
'완벽해…'
지도를 보면서 유일하게 표현이 가능한 대사였다. 어떻게 이토록 치밀하게 계산해둘 수가 있는 건지 말이다. 세비어 인이나 가이아인이 쓰는 언어는 일체 없었다. 그런데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설명에서도 독학으로만 익힌 듯한 끔찍한 실력의 그림들이 무차별하게 휘갈겨져 있었다.
대충은 이렇게...
사각형은 아군배, 평행사변형은 적함, 원은 행성...
행동은 화살표로 일관...
자세한 것은 숫자 참조...
윤천일 준장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것을 그대로 복사해서 기함에 전송시키라고 명령했다. 일반 가정집으로 비교하자면 팩스질이다. 원본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복사본이야 언제든 손상되어도 상관은 없었으니까ㅡ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저 소년은 단순한 땅개라고 여기기엔 능력이 너무 아까웠다. 어쩌다 그렇게 배치가 된 건지 말이다. 시뮬레이터를 울릴 수준의 전략들이 저 머리에서 나온다니...
페드릭이 적어놓은 지도의 복사본이 순식간에 전송되었다. 윤천일 준장은 마음 한편에서 우러러 나오는 쓸데없는 욕심을 억눌렀다. 제럴드 제독이라고 해도 이걸 본다면 생각을 바꿀 것이다. 도형(?)과 숫자만으로 모든 것을 납득시킬 수준의 능력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몇 분의 시간이 자나자 윤천일 준장의 예상은 맞아 들어갔다. 계획 중 몇 개가 수정되었고 350척의 함선들이 각각 대형을 잡기 시작했다.
반경 6만 km에 걸쳐 항행중인 수백척의 함선들이 내뿜는 위용은 실로 엄청났다. 물론 리플렉터 전함의 숫자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페드릭은 새발의 피에 해당되는 함대로 새를 잡으려는 계획을 만들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도 이런 일은 무수히 많으니까 여기에도 해당되지 않으란 법은 없었다.
그 때ㅡ
레이더 스크린에서 뭔가가 삐쭉거리며 빠른 속도로 이 함대에서 멀어져 갔다.
"유로파에서 디코이를 발사했습니다. 현재 속도 500에서 3차 가속 중입니다! 1분 후에 최대속도에 도달합니다!"
레이더 담당 사관이 말했다. 윤천일 준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인가ㅡ."
작전이 정말 성공할지는 미지수였다. 페드릭이 만든 계획은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뭐ㅡ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디코이가 최고속도에 도달하자 가속을 멈추며 곧 엄청난 강도의 전파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코이가 작동하는 동시에 함대 중 일부 수십척의 함선이 순차적으로 초공간에 진입했다. 1군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뒤로 비슷한 규모의 함대가 또 한번 도약한다. 도착좌표는 리플렉터 행성의 적도축 고궤도이다. 레이더 스크린에서 한 무리가 그대로 점멸해버렸다가 몇 초 후 다른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일종의 양동작전이다. 간단하기도 하지만 리플렉터의 사고력에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윤천일 준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명령하기 시작했다.
"행성 남극 저궤도에 도착점 설정하고 바로 도약한다. 전투편대 모두 이륙 대기시키고 초공간에서 벗어나자마자 전함들을 상대해준다. 이상!"
행성의 저궤도에서 곳곳에서 섬광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1, 2, 3군 함대가 각각 적도와 북극의 중간 정도 되는 궤도에 초공간도약을 마치자 말자 수많은 포탄과 미사일을 퍼부었다. 처음 일격에 행성 근처에서 수백개의 핵폭발이 일어나고 대기중이던 리플렉터 전함 몇 백척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센타우리에서 운용중인 함선들이라 최전방에서 운용중인 함선들에 비해 낡긴 했지만 군함은 엄연히 군함이었다. 각 함선들은 거의 대부분 대 리플렉터 탄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포탄을 퍼붓던 함선들이 일제히 가속하며 산개하기 시작했다. 리플렉터 전함의 반격을 예상하며...
리플렉터 전함이 일제히 반격을 하기 시작한다. 수 만기의 리플렉터 미사일들이 레이더 스크린에 포착되자 함선의 자동요격체계가 탄환을 토해낸다. 거의 대부분의 미사일들이 함선들에 도달하기 전 요격된다.
가이아 함선은 세비어 인들과는 달리 ODWS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CIWS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ODWS는 전방위무기방어체계의 약자로 현존하는 CIWS보다 요격률이 훨씬 높으며 사정거리 또한 매우 길었다. ODWS는 포 자체가 인공위성처럼 공전하며 관성제어장치가 자체적으로 내장된 자유성이 높은 방어시스템이었다. 탄환 구경은 12mm ~ 155mm 까지 다양하며 유효 사거리가 CIWS의 3배 이상을 자랑했다. 최대 전장 160m 크기의 순시선 하나가 리플렉터 전함을 스치듯이 지나가며 함대함 미사일들을 퍼부었다. 각 미사일들은 대리플렉터 탄두는 아니었지만 30kt 급의 핵폭탄이 탑재되있었다. 명중률은 필요 없다. 미사일과 리플렉터 전함의 거리는 400m. 5초 후 미사일은 전함의 방탄막에 저지 당해 엄청난 섬광과 함께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대기권 내에서 일어나는 버섯구름은 없었다. 하지만 12발의 핵미사일들은 리플렉터 전함의 방탄막을 거의 완전하게 소멸시켜 버렸다. 마무리는 페트롤 쉽보다 큰 함선들이 맡을 것이다.
행성의 적도궤도에 고루 퍼진 전함들의 대형이 백 수십척의 가이아 함선으로 인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풍경은 대충 이랬다. 극궤도는 조용하지만 적도 쪽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핵폭발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다. 전투는 시간이 지나더라도 끝날 기미를 안보였다.
"3초 후 극궤도에 진입합니다! 3... 2... 1!"
콰광!!
리플렉터 행성의 극궤도 상공 150km에서 청색 섬광과 함께 인천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약은 순식간이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웠던지라 몇 분이 아닌 몇 초밖에 시간이 걸리질 않은 것이다. 윤천일 준장은 곧바로 인천함의 방어막 출력을 최대로 하고 전투기 편대들을 출격시키기 시작했다. 인천함의 함재기 적재용적은 800척이 훨씬 넘어갔다. 레이더 스크린이 주위를 스캔하며 정보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페드릭의 예상대로 극궤도에는 리플렉터 전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촤아악!!
뒤이어 콘포넨트 전투함대의 주력 전투함들이 뒤이어 초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수는 60척. 나머지는 이미 적도층에서 전투중이었다. 인천함과 초대형 항공모함인 니미츠에서 F/A-42c 스토머 전투기들이 분당 260기가 이륙하였다. 전투기들은 서서히 밀집대형을 맞추기 시작하며 최대출력으로 가속하며 적도쪽으로 지원을 가기 시작했다. 주력 전투함들이 이곳에 도약을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리플렉터 전함들을 처리하는 목적으로 여기 온 것은 아니었다. 센타우리 함대가 적도에서 싸우고 있는 이유는 리플렉터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이게 안먹힌다면 적어도 대규모 도약을 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아픈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딱히 표현할 것 없이 이판사판이었으니 말이다.
때마침 수십척의 순양함과 전함들이 일제히 어딘가를 향해 조준하기 시작했다. 함포 구경은 600 ~ 1800mm 까지 다양했다. 윤천일 준장도 포술장에게 명령하기 시작했다. 인천함에는 딱히 주포라 할만한 무장은 없었지만 미사일이나 함대공 레일건의 숫자가 그것을 커버했다. 초대형 항공모함인 니미츠와는 달리 인천함의 무장은 그나마 강력한 편이었다. 니미츠같은 경우에는 함재기 적재용적이 인천함의 4배였다.
"함선의 모든 비포와 미슬들을 행성에 조준한다! 남아있는 모든 무기를 퍼부어!"
"알겠습니다! 전체 비포 활성화! 미슬 발사!"
포술장의 명령에 따라 잠시 후 곳곳에서 환한 발사화염이 인천함을 밝히기 시작했다. 타겟은 리플렉터의 행성이었다. 처음 1초에만 수백만개의 20mm 탄환들이 발사되었다. 이것으로는 분명 타격이 없을 것이다. 표면만 단순히 건드려줄 뿐이겠지만. 윤천일 준장은 그렇게 예상했다.
예상대로 레일건 탄환들은 작은 폭발들을 일으키며 행성 표면에 작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는게 아니었다. 잠시 후 주력 전투함들의 조준이 완료하자 각 함포의 포구에서 엄청난 폭발과 함께 지름 1m 이상의 포탄이 표면으로 나아갔다. 콘포넨트 전투함대 2번함인 일리어드에서 발사된 82인치 포탄 8발이 표면에 충돌, 순식간에 지각층을 뚫고 수백km를 들어간 후 폭발했다. 순간 행성 표면이 울렁인다. 그 후로 수백개의 대구경 함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페드릭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선 행성 표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리플렉터를 해킹하면서 얻은 정보 중 하나가 리플렉터 모성의 역할 중 하나였다. 이 행성은 사실 리플렉터의 모성은 아니었다. 호루스가 만든 공장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곳은 딱 2곳 뿐이라고 리플렉터는 말하고 있었다. 이거 하나 박살내면 이 행성이 만든 모든 리플렉터 블록이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지금 가이아인들은 아직 알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당분간 걱정할 필요 또한 없을 것이다.
뒤늦게 리플렉터가 가이아인들의 목적을 눈치채고 극궤도로 접근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주력 전투함들은 이미 리플렉터 행성 안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몇 분동안 쉬지않고 함포사격을 한 결과는 엄청났다. 겉은 멀쩡했지만 리플렉터 행성의 내부는 이미 방사능으로 오염됬으며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거대한 공간들을 만들어 놨다. 포탄의 폭발력이 내핵까지 손상시키진 않았지만 이미 감당 불가능한 수준의 공간들때문에 중력에 의해 자체적으로 붕괴될 것이다.
전투는 26분만에 종료되었다. 리플렉터 함선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춘 시간은 적도쪽에서 1개 판이 붕괴했을 때와 일치했다.
함대 전체에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400년간 계속 이어져왔던 전쟁이 드디어 종전되었으니 말이다. 페드릭은 모성으로 귀환할까도 이곳에 남아야만 했다. 동족이 모두 떠나버렸다. 그리고 세리니언 항성계까지 갈 수 있는 초공간도약 엔진을 갖춘 함선이 없었다. 최하 10년동안은 동족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지구로 가는 내내 생각했다. 이 후 생활은 어떻게 될까...
윤천일 준장의 말로는 편하게 사는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다. 영웅으로 추대될 것이라고. 스피카에서 지구까지는 8일 정도가 걸렸다. 1주일이 약간 넘게 걸리는 시간이었다. 페드릭은 지구에 도착했을때나 인천함에 있을때나 아주 후한 대접을 받았다. 지구에 도착했을 때는 대통령이라는 인간한테 명예훈장이라는 요상한 금딱지도 받았다.
향후 5년 동안은 준장의 말대로 정말 후한 대접을 받았고 가이아 군에선 거의 영웅 취급을 해주었다. 리플렉터를 멸망시킬 수 있게 했다는 것...
하지만 6년 후에 윤천일 준장이 숨을 거두었다. 가이아인들 말로는 상당히 장수했다고 했다. 윤천일 준장은 4년 후 우주군 참모총장에 오른 후 퇴역했으며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페드릭은 깨달았다. 이들은 자신과는 다른 종족이었다. 세리니언 항성계의 모성의 공전주기는 이 행성 기준으로 11.6년이었다. 자신에게 10년의 세월은 이들의 수명에 해당되었다. 단순히 수명이 길다는 이유가 이것때문이었던 것인가. 10년이 지나자 동족이 다시 올거라는 기대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무슨 이유일까...
세월이 흐르고 페드릭은 가이아인에게서 점점 잊혀져갔다.
세비어 인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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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허~~
연재 1년 반만에 드디어 프롤로그가 끝났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주입해서 쓰려고 했는데 영 안되는군요 ㅠ
분량도 여타 쓰던 평균 용량의 3배를 돌파... 하앍하앍...;;
중간고사 앞두고 너무 성급하게 끝낸 것 같기도 하네요 ㅠ
특히 전투씬 같은 경우엔 어제 다 썼습니다;;
약간의 억지성도 삽입했구요 ㄱ-;;
약간 미숙한게 발견된다면 지적해주세요.
수정들어가겠습니다!
어쨋든 제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화부터는 드. 디. 어. 본편 시작합니다! 음허허 ㄱ-
소제목은 아마 콜로서스로 확정될듯 하네요. 흠흠 ㄱ-;;
그럼 다음주 쯤에 뵈효~
"관성한계하중은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긴 합니다. 대신 우리측 함대는 전투가 불가능해집니다. 지금 221함대의 상황도 괜찮다고 여기는 분들은 계시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그렇다고 여기 구조된 승무원들을 두고 갔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죠. 저는 221 함대를 이 전투에서 빼내고 싶습니다. 전투능력을 반 이상 상실한 함선을 무모하게 희생시키긴 싫습니다.
"…나도 그러고는 싶네. 자네 말대로 힘을 바란다면 그건 우릴 위해 죽어달란 소리 밖에 안될 테니 말이야... 우리가 오기 전까지는 잘 견뎌 주었네. 나는 자네 의견엔 찬성하네. 하지만 자네는 최상급 장교도 아닌데 어떻게 그들을 빼낼 건가?"
윤천일 준장이 페드릭의 말을 듣다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물어본다. 이 소년은 특수대 소령이었다. 물론 나이에 비해 계급이 상당하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점이었다. 게다가 기본적인 전술이나 전략들도 거의 완벽히 숙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높으신 분들의 도움을 받아 침 좀 씹고 껌 좀 뱉다가 얼렁뚱땅 장교가 된건 아닌 게 분명했다. 페드릭은 자신의 질문에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법이 있긴 하지만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한동안의 망설임 끝에 페드릭은 조심스레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트리오네의 함교에서는 짧은 갈색머리의 중년 남자가 종이 쪼가리를 든 채 손을 떨고 있었다. 그 남자는 '말도 안 돼'라는 말을 내뱉으며 수차례 반복해서 전문을 읽었다. 그는 렉스트롱 대령이었다. 렉스트롱 대령은 지금 함대 피해복구반을 지휘하던 도중 때마침 통신사관이 가져온 전문을 보고는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에게 온 전문은 최고 사령부에서 1급 긴급 채널로 직접 전해진 전문이었다. 전문의 맨 위에는 최고군사명령 이행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최고군사명령이행서는 황제의 신변이 위험하거나 모성의 침공 같은 종족적으로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져 있을 때 외부 항성계에 나가있는 모든 전투함대를 불러들이는 귀환명령서였다. 이것은 모성에서만 발신되는 메시지이며 사용된 경우는 노토르 인이 멸망당한 사건 이후로는 사용된 적이 없었다.
이 전문은 세비어인의 모성에 있는 아주 거대한 발신기를 통해 편도적인 목적으로 한순간에 은하계 전체로 보내어진다. 답신은 불가능하며 1회 발신에 들어가는 동력은 수 백척의 함선이 단체로 초공간 항행을 하는 것보다 수 백배 이상 소모되었다.
"……!"
렉스트롱 대령은 통신사관이 다가와 뭔가를 또 건내주자 그것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전문은 도저히 믿기 힘든 내용들뿐이었다.
아공간 센서에서 대규모의 리플렉터 함대 접근 중.
일부 항성계에서는 이미 방위군과 격전중인 곳 다수.
자세한 적함대의 규모는 정확히 추려낼 수 없음.
전문의 내용을 간추리면 이러했다. 리플렉터가 대체 언제 빠져나갔다는 얘기인 건가... 카르나드가 초공간 도약 기술을 리플렉터에게 넘겨줬다 해도 여기서 세리니언 태양계까지는 6세대에 근접한 초공간 항행으로도 반년을 쉬지 않고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시간적으로 상당히 계산이 어긋났다. 렉스트롱 대령은 통신사관을 쳐다보며 오른손의 전문을 치켜들었다.
"라이언!"
"써!"
그는 렉스트롱 대령의 말에 잔뜩 긴장하며 대답했다. 렉스트롱 대령이 자신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대령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저 전문은 자신이 건낸 것이었다. 이태까지 단 한번도 이례 없었던 일. 대령은 아마 이 전문이 속임수가 아닌가 하고 물어볼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라이언은 달리 할말이 없었다. 자신도 이것을 처음 봤을 때는 눈이 닳도록 봤으니까... 예상대로 그는 전문의 진실 여부에 대해 물었다.
라이언은 다시 한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렉스트롱 대령은 몹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가이아인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배의 상태가 부정적이더라도 도움이 될 수는 있다. 물론 자신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칫 잘못 결정을 했다간 이 함대에 속한 모든 승무원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221 함대에 등록된 승무원 수는 약 34만 명. 분명 본능은 이게 누군가의 장난이라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 한편에서는 이것에 무조건 따르라고 말하고 있었다. 변화의 폭이 아주 큰 결정은 재정신인 이상 쉽게 할 수가 없다. 윌리언 제독이라면 무슨 결정을 내렸을까...
윌리언 제독은 인컴브릿지드가 자탄에 휩쓸린 이후 볼 수 없었다. 렉스트롱 대령은 아주 신중히 결정하려 했다. 이게 누군가의 장난이던 아니던 간에 여기서 떠난다는 것 자체가 전혀 내키지가 않았다. 일단 모성귀환을 위해 초공간에 진입하게 되면 도중에 멈추기는 힘들었다. 이것이 초공간 항행의 가장 나쁜 단점이었다. 어느 하나 맘에 드는 게 없었다. 결정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전문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이곳에 남아 가이아인들을 도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저들에게 맡기고 모성으로 귀환해야 할 것인가?
몇 년이 걸리는 코스이다. 하지만...
"명령에는 어쩔 수 없는건가..."
렉스트롱 대령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항해장에게 도착좌표를 계산하도록 명령했다. 결국은 귀환을 택한 것이다. 가이아 함선으로부터 구조된 승무원들을 다시 이곳으로 전송시키도록 한다. 몇 분 후 도착좌표의 계산이 끝나자 221함대의 남은 함선들은 서서히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렉스트롱 대령은 가이아 함대의 최고지휘관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는 약간의 마찰을 예상했다. 스크린에서 최초로 그의 얼굴이 나왔을 때 그는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렉스트롱 대령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뜻밖에도 그는 너무나 쉽게 동의해주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렉스트롱 대령은 뭔가 이상하다 여겨 윤천일 준장에게 물으려 했지만 무전은 이미 끊어진 뒤였다. 손해제어사관이 보고한다.
레이더 통제실에서 폭발 발생
승무원 사상자수 경상 4명, 중상 1명
제 4 수리반 수습 들어감
"커허..."
뜻밖의 상황에 렉스트롱 대령은 혀를 찼다. 이 대체 뭐하자는 상황인가? 최고 사령부의 갑작스런 전문에 엄청난 마찰을 예상했던 황인 장군과의 일이 너무나 쉽게 풀렸다.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사고까지... 우연이라 하기엔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했다. 함대장의 비중이란 실로 어마어마했다. 실종(아마 전사했을 것이다)된 윌리언 제독이 존경스러워진다. 평소에도 이와 맘먹는 수준의 결정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하다니... 렉스트롱 대령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통신사관에게 말했다.
"위상배열레이더로 변환시키고 제 2 전투채널로 전 함대에게... 세리니언 항성계로 초공간 항행준비하라고 해. 모성에 귀환한다."
이 말 한번 말하기 위해 몇 분을 망설였다. 자신이 진정 잘한 결정인지는 몇 년후 알 수 있을 것이다. 통신사관인 라이언 네이스트 중위는 또한번 '알겠습니다." 라는 말만을 한 채 명령에 따랐다. 트리오네의 주 레이더에 비하면 상당히 성능이 뒤쳐졌지만 근접한 거리에 있는 상태에서는 전체 통신을 하는데는 특별히 큰 지장은 없었다. 일부가 대령의 명령에 반박했지만 전문의 내용을 본 후에는 곧바로 잠잠해졌다. 그들도 이 전문의 내용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을 테니까...
라이언과 다른 직책을 가진 장교 한 명이 일어나 렉스트롱 대령에게 다가간다. 초공간 항행에 앞서 최종점검을 하는 것이겠지. 일단은 거리가 엄청나기에 각도가 0.1초만 빗나가도 목적지에서 100광년 이상 떨어진 곳에 진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검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그리고 잠시 후 비상경고등이 울림과 동시에 대령이 마이크를 쥔다. 카운트다운 10초 대기...
…10.
함선은 어느새 모성간의 좌표를 계산하고 자세 변환 추력기의 도움을 받으며 서서히 선회하기 시작했다.
…9.
함교 밖 저 멀리에서 리플렉터 전함의 잔해가 스피카의 가시광선을 반사해 번쩍였다. 거리는 비교적 가까운 100km 정도. 가이아 함선에 의해 아주 무참히 박살난 함선일 것이다.
…8.
트리오네의 모든 무기통제시스템이 다운된다. 하지만 곧 복구될 것이다. 초공간 항행을 위해 함선의 엔진이 동력을 일방적으로 빼내가는 결과이다. 2.8 엑사 노르튼 급의 동력기라도 초공간 항행시의 동력을 감당하기엔 무리가 많았다.
…7.
에너지가 충전되는 소리가 함 전체로 들리기 시작한다. 비상 전력이 간신히 트리오네 전체에 조명을 빛춰주고 있었다. 함교 전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른다.
…6.
생명유지장치에 경고문이 뜬다. 하지만 이내 경고는 사라졌다. 장거리의 초공간 항행이다. 모성에서 떠난지도 8년. 실로 엄청난 시간이다. 다시 귀환한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은 없다.
…5.
함교 밖에서 청녹색 섬광하나가 잠시 번쩍였다가 사라진다. 무슨 배인지는 몰라도 최초로 저 배가 초공간에 진입했다는 것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4 !
뒤이어 2척, 아니 3척의 함선이 청녹색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 초공간 항행에 필요한 시스템들을 다시 재점검한다. 생명유지 장치나 관성제어장치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상진동이 함 전체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아직은 미약하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
…3 !!
점검은 막바지에 들어가고 함선의 이상진동이 아까보다 더 심해진다. 기관장이 급히 보고하길, 전투로 인해 입은 손상 때문에 엔진 일부 구획에서 노이즈가 발생한다고 한다. 동력효율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초공간 항행에 무리는 없다고 했다. 사실은 동력효율에 문제가 생긴것 자체가 무리다.
…2 !!!
불길한 예감은 없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이건 뭐지 중력이 슬슬 앞으로 쏠리자 어깨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인생에 딱 3번뿐이었던 초공간 항행의 경험. 이제 한번 더 추가다. 함교의 현창 밖 바로 앞에서 통상 공간이 갈라지며 새로운 뭔가가 새어 들어오는 듯 하다.
…1. !!!!
초공간이 마치 폭발하듯 순식간에 지름이 수십 배 이상이 늘어난다. 그리고 그 직후 아광속 엔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푸른빛을 무섭게 내뿜으며 최대 추력으로 가속하자 트리오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청녹색의 몽롱한 빛을 내뿜는 초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이어 221 함대의 다른 함선들도 섬광과 함께 사라져갔다. 이 곳에 다시 올 가능성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그렇게 221함대는 스피카 성계에서 사라졌다.
레이더 스크린에서 221함대가 초공간에 진입하자 녹색점이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것을 페드릭은 씁쓸하게 지켜보았다.
"괜찮겠나…?"
윤천일 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페드릭은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아무생각 없이 레이더 스크린을 주시했다. 더 이상 이 곳에 세비어인은 자신을 빼곤 존재하지 않았다. 인컴브릿지드의 구조된 승무원들이 다시 221 함대로 전송될 때 자신은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221 함대에서 그나마 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턴 메토프 중위뿐이었다. 만날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남았다. 아무런 부담 없이...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 옆에 있는 사람들은 외모는 똑같았지만 이들은 자신의 기준에서는 엄연한 외계인이었다. 홀로 남겨졌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막상 저지르고 나니 생각이 너무 짧았다. 꽤 오랫동안 후회할 기분도 들고 말이다.
221 함대에 보낸 전문은 자신이 예전에 장난삼아 생각해본 것 중 하나였다. 긴급 채널에서만 쓰이는 파장 주파수는 모성의 최고 사령부에서만 쓰이는 1급 기밀이었다. 함대 지휘부도 이것을 몰랐으며 수신되더라도 함선의 극히 암호화된 체계에 의해 주파수를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생도 때 오르콘 급 전함의 레이더 컴퓨터에서 아주 우연히 알아낼 수 있었다. 보통 함대간 통신 주파수의 경우엔 3이나 4단으로 분리된 정보를 주고받지만 이것은 24개의 파장 주파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식 같은 것도 기존의 파장 주파수보다 수백 배는 복잡했으며 답도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모의실험에서 한번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오르콘의 항법 컴퓨터의 전산체계가 영구적으로 맛이 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페드릭은 몰랐지만 트리오네의 레이더도 이와 같은 원인으로 폭발했다. 생각해보니 신기하게도 가이아 함선은 잘 버텨 주었다. 이게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 때 레이더 담당 사관이 외친다.
"방위 162.5' - 172.1' 거리 10600! 초공간에서 다수의 진입 물체 탐지했습니다. 아군입니다."
윤천일 준장은 때맞춰 주력 전투함대가 도착한다고 여겼다. 14번 함대의 중무장된 주력 전투함들이 말이다. 기함인 B5급 전함인 유로파부터 시작해서 6척의 전함과 2척의 항모, 그리고 백 수십 척의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말이다. 14번 콘포넨트 전투함대의 규모는 160척을 넘어갔다.
"IFF(피-아 식별장치) 확인 중입니다. 3초 후 진입합니다. 개체수 확인 중입니다."
레이더 담당 사관의 말이 끝날 무렵 인천함 남동 쪽 1만 km 공간에서 푸른색의 공간이 폭발하듯 순식간에 퍼지며 대다수의 함선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페드릭은 레이더 스크린에 나타난 푸른 점들을 보며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윤천일 준장이 말했던 함대의 규모와는 달랐다. 좀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레이더 스크린에선 어느새 함선들을 한 점으로 묶어버리고 정보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 때 레이더 담당 사관이 뭐라 외친다.
잠시 후...
페드릭은 상황이 점점 급하게 돌아가자 의도하지 않게 윤천일 준장을 보조하게 되버렸다. 졸지에 선임참모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공식적인 것도 아니며 진짜로 참모가 된건 아니었다. 본래 윤천일 준장을 보조하던 전술참모에게 상당히 미안한 감정이 일어난다. 콘포넨트 전투함대의 제독인 에드워드 시리어즈 대장이 초공간 항행 중에 갑자기 사망해 제럴드 헤리스라는 사람이 위임받았다고 한다. 둘이서 얘기하는 것을 보니 꽤나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제럴드 제독은 전 에드워드 제독이 연방정부로부터 센타우리 항성계에서 놀고 있던 전투함들을 더 끌고 왔다고 했다. 그 덕에 좀 늦었다고 말이다. 제럴드 제독이 끌고 온 함선은 윤천일 준장이 말한 규모의 2배 이상 많았다. 레이더 스크린에 나타나는 숫자는 정확히 352척. 1개 함대가 이 정도의 규모였다면 엄청난 수준이었다. 페드릭은 어림잡아 4 ~ 5 개 이상의 함대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 짐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병력 수가 많았다. 이 정도라면 전의 상황보다는 훨씬 더 긍정적인 상황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ㅡ행성의 극궤도에서 리플렉터들을 차근차근 제압할 것이라고 하네. 수가 좀 많긴 하지만 괜찮겠나?"
윤천일 준장이 어느새 이 주위를 평면으로 요약시킨 지도를 건내주며 말했다. 앞의 말은 딴 생각을 하느라 자세히 듣지는 못했다. 다시 물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일찍이 포기한다. 행성의 극궤도에서 치는 것은 자신의 계획이었다. 그 제독이란 자에게도 어느정도 솔깃하게 들린 건 분명했다. 페드릭은 윤천일 준장의 질문에 레이더 스크린에 지도를 깔아놓고 옆에 굴러다니던 필기구를 집어 쓰기 시작했다.
"극궤도에서 친다면 그놈들이 미리 예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리플렉터 전함들은 엄청난 수만큼이나 그에 비례하는 낭비병력을 만들 것입니다. 수만척 중에 함대와 직접 전투가 가능한 숫자는 10%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근접전일수록 유리합니다. 쓸데없이 큰 덩치 덕분에 여차하면 지들끼리 공격하게 만들기도 쉬울 겁니다."
페드릭은 오른손에 쥐어진 펜으로 지도에 뭔가 그리기 시작했다. 투명 아크릴 판을 연상시키는 얇은 지도는 펜이 닿는 면적마다 일부 정보들이 수정되었다. 2차원 지도는 레이더 컴퓨터에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다운로드하고 있었다. 성의있게 뭔가를 새기던 페드릭이 작업을 모두 끝내자 윤천일 준장도 잘 보일 수 있도록 지도를 건네었다.
지도에서는 각 번호들과 그 밑에는 모두 시간대가 적혀있었다. 본격적인 공격계획이었다. 윤천일 준장은 지도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딱히 반박할 만한 요소는 없었다. 페드릭은 각 공격시간과 종류, 적 함대의 반응범위와 대응방법에 대해서도 미리 예상해 적어져 있었다.
'완벽해…'
지도를 보면서 유일하게 표현이 가능한 대사였다. 어떻게 이토록 치밀하게 계산해둘 수가 있는 건지 말이다. 세비어 인이나 가이아인이 쓰는 언어는 일체 없었다. 그런데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설명에서도 독학으로만 익힌 듯한 끔찍한 실력의 그림들이 무차별하게 휘갈겨져 있었다.
대충은 이렇게...
사각형은 아군배, 평행사변형은 적함, 원은 행성...
행동은 화살표로 일관...
자세한 것은 숫자 참조...
윤천일 준장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것을 그대로 복사해서 기함에 전송시키라고 명령했다. 일반 가정집으로 비교하자면 팩스질이다. 원본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복사본이야 언제든 손상되어도 상관은 없었으니까ㅡ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저 소년은 단순한 땅개라고 여기기엔 능력이 너무 아까웠다. 어쩌다 그렇게 배치가 된 건지 말이다. 시뮬레이터를 울릴 수준의 전략들이 저 머리에서 나온다니...
페드릭이 적어놓은 지도의 복사본이 순식간에 전송되었다. 윤천일 준장은 마음 한편에서 우러러 나오는 쓸데없는 욕심을 억눌렀다. 제럴드 제독이라고 해도 이걸 본다면 생각을 바꿀 것이다. 도형(?)과 숫자만으로 모든 것을 납득시킬 수준의 능력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몇 분의 시간이 자나자 윤천일 준장의 예상은 맞아 들어갔다. 계획 중 몇 개가 수정되었고 350척의 함선들이 각각 대형을 잡기 시작했다.
반경 6만 km에 걸쳐 항행중인 수백척의 함선들이 내뿜는 위용은 실로 엄청났다. 물론 리플렉터 전함의 숫자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페드릭은 새발의 피에 해당되는 함대로 새를 잡으려는 계획을 만들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도 이런 일은 무수히 많으니까 여기에도 해당되지 않으란 법은 없었다.
그 때ㅡ
레이더 스크린에서 뭔가가 삐쭉거리며 빠른 속도로 이 함대에서 멀어져 갔다.
"유로파에서 디코이를 발사했습니다. 현재 속도 500에서 3차 가속 중입니다! 1분 후에 최대속도에 도달합니다!"
레이더 담당 사관이 말했다. 윤천일 준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인가ㅡ."
작전이 정말 성공할지는 미지수였다. 페드릭이 만든 계획은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뭐ㅡ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디코이가 최고속도에 도달하자 가속을 멈추며 곧 엄청난 강도의 전파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코이가 작동하는 동시에 함대 중 일부 수십척의 함선이 순차적으로 초공간에 진입했다. 1군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뒤로 비슷한 규모의 함대가 또 한번 도약한다. 도착좌표는 리플렉터 행성의 적도축 고궤도이다. 레이더 스크린에서 한 무리가 그대로 점멸해버렸다가 몇 초 후 다른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일종의 양동작전이다. 간단하기도 하지만 리플렉터의 사고력에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윤천일 준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명령하기 시작했다.
"행성 남극 저궤도에 도착점 설정하고 바로 도약한다. 전투편대 모두 이륙 대기시키고 초공간에서 벗어나자마자 전함들을 상대해준다. 이상!"
행성의 저궤도에서 곳곳에서 섬광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1, 2, 3군 함대가 각각 적도와 북극의 중간 정도 되는 궤도에 초공간도약을 마치자 말자 수많은 포탄과 미사일을 퍼부었다. 처음 일격에 행성 근처에서 수백개의 핵폭발이 일어나고 대기중이던 리플렉터 전함 몇 백척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센타우리에서 운용중인 함선들이라 최전방에서 운용중인 함선들에 비해 낡긴 했지만 군함은 엄연히 군함이었다. 각 함선들은 거의 대부분 대 리플렉터 탄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포탄을 퍼붓던 함선들이 일제히 가속하며 산개하기 시작했다. 리플렉터 전함의 반격을 예상하며...
리플렉터 전함이 일제히 반격을 하기 시작한다. 수 만기의 리플렉터 미사일들이 레이더 스크린에 포착되자 함선의 자동요격체계가 탄환을 토해낸다. 거의 대부분의 미사일들이 함선들에 도달하기 전 요격된다.
가이아 함선은 세비어 인들과는 달리 ODWS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CIWS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ODWS는 전방위무기방어체계의 약자로 현존하는 CIWS보다 요격률이 훨씬 높으며 사정거리 또한 매우 길었다. ODWS는 포 자체가 인공위성처럼 공전하며 관성제어장치가 자체적으로 내장된 자유성이 높은 방어시스템이었다. 탄환 구경은 12mm ~ 155mm 까지 다양하며 유효 사거리가 CIWS의 3배 이상을 자랑했다. 최대 전장 160m 크기의 순시선 하나가 리플렉터 전함을 스치듯이 지나가며 함대함 미사일들을 퍼부었다. 각 미사일들은 대리플렉터 탄두는 아니었지만 30kt 급의 핵폭탄이 탑재되있었다. 명중률은 필요 없다. 미사일과 리플렉터 전함의 거리는 400m. 5초 후 미사일은 전함의 방탄막에 저지 당해 엄청난 섬광과 함께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대기권 내에서 일어나는 버섯구름은 없었다. 하지만 12발의 핵미사일들은 리플렉터 전함의 방탄막을 거의 완전하게 소멸시켜 버렸다. 마무리는 페트롤 쉽보다 큰 함선들이 맡을 것이다.
행성의 적도궤도에 고루 퍼진 전함들의 대형이 백 수십척의 가이아 함선으로 인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풍경은 대충 이랬다. 극궤도는 조용하지만 적도 쪽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핵폭발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다. 전투는 시간이 지나더라도 끝날 기미를 안보였다.
"3초 후 극궤도에 진입합니다! 3... 2... 1!"
콰광!!
리플렉터 행성의 극궤도 상공 150km에서 청색 섬광과 함께 인천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약은 순식간이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웠던지라 몇 분이 아닌 몇 초밖에 시간이 걸리질 않은 것이다. 윤천일 준장은 곧바로 인천함의 방어막 출력을 최대로 하고 전투기 편대들을 출격시키기 시작했다. 인천함의 함재기 적재용적은 800척이 훨씬 넘어갔다. 레이더 스크린이 주위를 스캔하며 정보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페드릭의 예상대로 극궤도에는 리플렉터 전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촤아악!!
뒤이어 콘포넨트 전투함대의 주력 전투함들이 뒤이어 초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수는 60척. 나머지는 이미 적도층에서 전투중이었다. 인천함과 초대형 항공모함인 니미츠에서 F/A-42c 스토머 전투기들이 분당 260기가 이륙하였다. 전투기들은 서서히 밀집대형을 맞추기 시작하며 최대출력으로 가속하며 적도쪽으로 지원을 가기 시작했다. 주력 전투함들이 이곳에 도약을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리플렉터 전함들을 처리하는 목적으로 여기 온 것은 아니었다. 센타우리 함대가 적도에서 싸우고 있는 이유는 리플렉터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다. 혹시나 이게 안먹힌다면 적어도 대규모 도약을 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아픈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딱히 표현할 것 없이 이판사판이었으니 말이다.
때마침 수십척의 순양함과 전함들이 일제히 어딘가를 향해 조준하기 시작했다. 함포 구경은 600 ~ 1800mm 까지 다양했다. 윤천일 준장도 포술장에게 명령하기 시작했다. 인천함에는 딱히 주포라 할만한 무장은 없었지만 미사일이나 함대공 레일건의 숫자가 그것을 커버했다. 초대형 항공모함인 니미츠와는 달리 인천함의 무장은 그나마 강력한 편이었다. 니미츠같은 경우에는 함재기 적재용적이 인천함의 4배였다.
"함선의 모든 비포와 미슬들을 행성에 조준한다! 남아있는 모든 무기를 퍼부어!"
"알겠습니다! 전체 비포 활성화! 미슬 발사!"
포술장의 명령에 따라 잠시 후 곳곳에서 환한 발사화염이 인천함을 밝히기 시작했다. 타겟은 리플렉터의 행성이었다. 처음 1초에만 수백만개의 20mm 탄환들이 발사되었다. 이것으로는 분명 타격이 없을 것이다. 표면만 단순히 건드려줄 뿐이겠지만. 윤천일 준장은 그렇게 예상했다.
예상대로 레일건 탄환들은 작은 폭발들을 일으키며 행성 표면에 작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는게 아니었다. 잠시 후 주력 전투함들의 조준이 완료하자 각 함포의 포구에서 엄청난 폭발과 함께 지름 1m 이상의 포탄이 표면으로 나아갔다. 콘포넨트 전투함대 2번함인 일리어드에서 발사된 82인치 포탄 8발이 표면에 충돌, 순식간에 지각층을 뚫고 수백km를 들어간 후 폭발했다. 순간 행성 표면이 울렁인다. 그 후로 수백개의 대구경 함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페드릭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선 행성 표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리플렉터를 해킹하면서 얻은 정보 중 하나가 리플렉터 모성의 역할 중 하나였다. 이 행성은 사실 리플렉터의 모성은 아니었다. 호루스가 만든 공장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곳은 딱 2곳 뿐이라고 리플렉터는 말하고 있었다. 이거 하나 박살내면 이 행성이 만든 모든 리플렉터 블록이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지금 가이아인들은 아직 알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당분간 걱정할 필요 또한 없을 것이다.
뒤늦게 리플렉터가 가이아인들의 목적을 눈치채고 극궤도로 접근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주력 전투함들은 이미 리플렉터 행성 안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몇 분동안 쉬지않고 함포사격을 한 결과는 엄청났다. 겉은 멀쩡했지만 리플렉터 행성의 내부는 이미 방사능으로 오염됬으며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거대한 공간들을 만들어 놨다. 포탄의 폭발력이 내핵까지 손상시키진 않았지만 이미 감당 불가능한 수준의 공간들때문에 중력에 의해 자체적으로 붕괴될 것이다.
전투는 26분만에 종료되었다. 리플렉터 함선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춘 시간은 적도쪽에서 1개 판이 붕괴했을 때와 일치했다.
함대 전체에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400년간 계속 이어져왔던 전쟁이 드디어 종전되었으니 말이다. 페드릭은 모성으로 귀환할까도 이곳에 남아야만 했다. 동족이 모두 떠나버렸다. 그리고 세리니언 항성계까지 갈 수 있는 초공간도약 엔진을 갖춘 함선이 없었다. 최하 10년동안은 동족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지구로 가는 내내 생각했다. 이 후 생활은 어떻게 될까...
윤천일 준장의 말로는 편하게 사는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다. 영웅으로 추대될 것이라고. 스피카에서 지구까지는 8일 정도가 걸렸다. 1주일이 약간 넘게 걸리는 시간이었다. 페드릭은 지구에 도착했을때나 인천함에 있을때나 아주 후한 대접을 받았다. 지구에 도착했을 때는 대통령이라는 인간한테 명예훈장이라는 요상한 금딱지도 받았다.
향후 5년 동안은 준장의 말대로 정말 후한 대접을 받았고 가이아 군에선 거의 영웅 취급을 해주었다. 리플렉터를 멸망시킬 수 있게 했다는 것...
하지만 6년 후에 윤천일 준장이 숨을 거두었다. 가이아인들 말로는 상당히 장수했다고 했다. 윤천일 준장은 4년 후 우주군 참모총장에 오른 후 퇴역했으며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페드릭은 깨달았다. 이들은 자신과는 다른 종족이었다. 세리니언 항성계의 모성의 공전주기는 이 행성 기준으로 11.6년이었다. 자신에게 10년의 세월은 이들의 수명에 해당되었다. 단순히 수명이 길다는 이유가 이것때문이었던 것인가. 10년이 지나자 동족이 다시 올거라는 기대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무슨 이유일까...
세월이 흐르고 페드릭은 가이아인에게서 점점 잊혀져갔다.
세비어 인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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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허~~
연재 1년 반만에 드디어 프롤로그가 끝났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주입해서 쓰려고 했는데 영 안되는군요 ㅠ
분량도 여타 쓰던 평균 용량의 3배를 돌파... 하앍하앍...;;
중간고사 앞두고 너무 성급하게 끝낸 것 같기도 하네요 ㅠ
특히 전투씬 같은 경우엔 어제 다 썼습니다;;
약간의 억지성도 삽입했구요 ㄱ-;;
약간 미숙한게 발견된다면 지적해주세요.
수정들어가겠습니다!
어쨋든 제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화부터는 드. 디. 어. 본편 시작합니다! 음허허 ㄱ-
소제목은 아마 콜로서스로 확정될듯 하네요. 흠흠 ㄱ-;;
그럼 다음주 쯤에 뵈효~
안녕하세요
행성 하나 뽀개는 게 프롤로그라니 넘 강한 거 아닙니까. 흐흐흐.
여하튼 22편을 중간 마무리 지으시다니 축하드립니다.
본편에도 열렬히 스로틀에 불 당기시기 바랍니다.
프롤로그든 다른 이야기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82인치 포.-_-; 꽤 굵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