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죽음의 땅이 된 회색 폐허더미의 밤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 폐허의 한 가운데 무너진 건물의 콘크리트 조각따위를 이용해 제법 은밀하게 은폐된 전차방공호에는 한대의 T-444A3 전차가 조용히 정지해 있었다. 반스의 13호 전차였다. 현재는 대기 기간이라, 불침번 차레를 맡은 반스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전부 곯아 떨어져 있었다.

캄캄해서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 전차의 비좁은 포탑해치를 열고 나온 반스는,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은은히 비치는 달빛에다 가져다 댔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진이었다. 너무 자주 접었다 폈대 해서인지 사진의 한 가운데 부분의 색이 모두 지워져 있었지만 그 사진의 주인공은 여자였다. 그것도 제법 미인인. 반스는 사진의 여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푸욱 내 쉬었다.

"루네아.... 잘 있는거지..?"

그러나, 그의 회상조차 방해하려는지, 갑자기 전방에서 커다란 포성이 울리며 근방에 있던 전차 방공호 하나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단잠에 빠져있던 전차승무원들은 황급히 일어났고. 반스 역시 급하게 사진을 품속으로 밀어넣고 전차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포수인 새드가 신경질적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고 통신망으로 들리는 톰의 목소리도 잔뜩 긴장된 목소리였다.

"썅!! 또 자주포 공격이야!!!"

새드의 고함소리가 좁은 포탑 내부를 저렁쩌렁 울렸다.

-전속 회피!! 모두 조심!!

통신망으로 들리는 톰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전차는 한차레 요동치며 전차 방공호를 바져나왔다. 그 순간 그들의 전차가 있던 자리에 반군 T-137A 자주포의 170mm 자주포탄 하나가 떨어졌다. 전차가 그 여파에 크게 흔들렸지만 계속해서 뒤로 후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차 말고도 다른 전차들도 천천히 후퇴중이었다. 그 순간 후퇴하던 T-444A2 전차 하나가 자주포탄을 직격으로 얻어맞고 포탑 전체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나가며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 둘을 허공에 띄워 놓았다. 그 광경을 보며 반스가 욕지거리를 뱉았다.

"개 썅놈의 자주포!! 새드!! 포탄 장전해!! 토미!! 전차 멈춰!!"

갑작스러운 명령에 새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톰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전차를 멈추었다. 전차가 덜컹하며 멈추자 새드는 생각에 빠졌다. 여기선 적 자주포에 닿을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아... 설마..? 새드가 반스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차장님.. 설마..?"

"그래 그거야!! 시작한다!!"

그 말과 함께, 포탑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자주 고폭탄 일발장전!!"

"장전!!"

"발사각도 39도! 방위 6시 33분! 풍속 동남쪽으로 1.33m/s!!"

"조준 완료!!"

"쏴!!!"

포각이 무려 45도까지 올라가는, '몸빵 자주포'라는 해괴한 별명으로도 불리는 T-444 계열 전차의 특징인 '자주포 모드'가 발동된 것이다. 물론 이상태로 포탄을 제대로 적중시키기 위해서는 전차를 정지시켜야만 했다. 게다가 전차 자체가 자주포가 아닌까닭에, 자주포 모드로 발포를 위해선 소형 로켓추진기가 내장된 '자주 고폭탄'이라는 포탄을 써야만 했지만, 140mm 자주포로 변신한 T-444계열 전차의 화력은 무시할게 못되었다. 반스의 전차가 가장먼저 큰 굉음과 함께 자주 고폭탄을 날려보내었다. 잠시 허공에 뜬 자주 고폭탄의 후미쪽에서 산화케블라닉 가스가 뿜어져 나오면서 이미 추력을 상실해 가는 포탄의 추진력을 다시 뒷받침해 주었다. 그 덕택에 무려 30여Km를 날아간 고폭탄은, 황급히 포대를 접고 후퇴하려던 반군의 T-137A 자주포 한대를 완전히 박살내버리며 긴 여정을 끝마쳤다.

반스의 전차를 시작으로, 후퇴하던 다른 T-444A2와 T-444A3 전차들이 자주포 모드로 사격을 개시했다. 적재 포탄의 부족으로 전차당 단 두발씩의 포격밖에는 하지 못했지만, 곳곳에 숨어있던 50여대의 전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140mm 자주포탄(?)은 결코 무시할만한 화력이 아니었다. 12대의 자주포로 이루어진 반군의 자주포 중대 하나가 박살나는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자주포 중대가 공격당하는 틈을 이용해, 먼 거리에서 전차의 사거리의 부재로 접근이 불가능해서 대치중이던 반군의 전차 140여기가 한꺼번에 내달리며 포탄을 쏴 대기 시작했다. 주력 전차의 주포 구경이 120mm인 까닭에 사거리가 루세니아군에 비해 짧았던 반군의 T-430전차들은 루세니아군을 향해 돌진하다 몇대는 곡사사격을 끝마치고 근접전투에 들어간 루세니아군 전차의 140mm 고속 활강포탄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불꽃을 뿜으며 멈추어 섰다. 그러나, 반군 자주포를 잡는다고 허비되었던 시간때문에, 대다수의 반군 전차들은 자신들의 사거리 내에 루세니아군의 전차를 잡을수 있었다. 전열에서 질주하던 반군 전차 십여대가 동시에 포탑에서 불꽃을 내뿜었다. 잠시 조용했던 도시가 다시금 폭음에 휩싸였다. 수에서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루세니아군 전차들이 황급히 후퇴를 시작했다.


-3시방향 3.3Km에 하나!! 4시방향 3.2Km에 하나!! 도합 둘!

대공임무를 맡을때를 제외하고는 전차의 레이더 관제병 역할을 하는 대공관제병 딘의 목소리를 들으며 반스가 소리쳤다.

"놈들이 사거리내에 우리를 두기 전에 가까이 다가오는놈부터 자율로 박살내!!"

"알겠습니다!! 자율사격합니다!! 명령 접수시각 21시 22분!!"

반스는 계속해서 쉬지 않고 명령했다.

"토미!! 네녀석은 전차 방향 돌려서 후진해! 포탑만 뒤로 돌리면 돼잖아!"

그의 말에 예와같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하고 있다구요!!

그들의 전차는 그 순간 근거리에서 사격하던 적 전차의 포탄에 후방장갑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전차 자체는 심하게 흔들렸지만 고속 기동전시 적에게 후방을 내주며 싸워야 하는 상황까지 대비해서 만들어진 루세니아 전차들의 특성상 전면장갑 바로 다음으로 두꺼운 후방장갑은 유효사를 약간 벗어난 반군 T-430 전차의 포탄을 가볍게 튕겨 내었다. 두터운 금속판을 커다란 망치로 때린듯한 공명음이 아무래도 시끄러운 전차 내부를 더 시끄럽게 했다. 그러나 포탄이 장갑판을 두드리는것보다 몇배는 공포스러운 소리가 전장에 울려퍼졌다. 모든것을 압도할만큼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발생한 굵다못해 두터워보이는 거대한 불기둥, 그 폭발에 휘말린 T-444A2 전차 두대가 허공에 붕 뜨면서 사방으로 부속품을 흩뿌렸다. 후퇴하면서도 산발적으로 저항하던 전차들은 반군전차의 뒤에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에 입을 다물수 없었다.

T-664였다. 그것도 무려 세대나.

반군의 표식을 거대한 포탑에 커다랗게 새겨놓은 초 거대전차는 거대한 200mm 주포를 회전시켰다. 다시금 포탑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며 루세니아군 전차 한대가 파괴당했다. 갑자긴 나타난 반군의 FAT에 완전히 전의를 잃은 전차들이 사격을 완전히 포기하고 후퇴를 개시했다.

흔히 T-664시리즈로 알려진 FAT라는 거대 전차는 애초엔 반군측이 보유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뒤늦게나마 얼마전 페라이드 평원 대 전차전에서 적이 FAT를 보유했다는 사실을 알았었다. 루세니아측에서 WPO에 T-664J 전차를 인계중에 반군의 기습으로 한대가 40일동안 탈취당한적이 있었는데 반군은 그때 탈취한 T-664J 전차는 루세니아 특수부대에 의해 도로 빼앗겼지만 기술을 훔쳐가 자신들이 직접 T-664 전차를 건조하기 시작했고 바로 얼마전에 최초로 전선에 투입했다가 집중사격에 파괴된적이 한번 있었다. 그러나 반군은 끈덕지게 T-664 전차를 전선에 투입했고, 2m에 달하는 두터운 장갑을 뚫을수 없는 루세니아군 전차들에게 있어선 이 T-664전차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런 말아먹을!!!! 또 저자식이야!! 제기랄!!"

포수 새드의 욕설을 들으며 반스는 황급히 통신기의 채널을 사단통신으로 맞추고는 통신을 듣기 시작했다. 이미 지휘부에선 후퇴명령을 내렸다.

"토미!! 제 3 전차 사단 본부로 후퇴한다!! 그곳에 배치된 T-664A2가 저 괴물을 맡는다!!"

-알겠습니다!! 전속 질주입니다! 꽉 잡으세요!!!

그들의 전차는 최고속력으로 난장판이 된 전장을 빠져 나갔다. 후퇴하는 루세니아군 전차들 뒤로 수가 줄었지만 아직도 100대는 가볍게 넘기는 반군 전차들과 뒤쪽에 위치한 세대의 거대한 T-664 전차는 끝도없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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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츠 Ver. 2.0 작업중....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