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그녀의 계획은 지극히 놀라운 것이었다.

'도기'라는 말을 듣고 즉흥적으로 착상해낸 그녀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장인들을 동원하여 이틀 안에 인간과 비슷한 신체 구조를 가진 진흙인형들을 수십 구 빚어내기로 한 것이다. 일단 진흙인형을 만들면 에니시엔이 강령술을 이용해 진흙인형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녀의 명령을 듣게 한 다음 이 흙인형들을 바탕으로 언데드 소굴이 되어버린 묘지를 분쇄하는 것이다. 진흙인형들은 수도 많을 뿐만 아니라 몸이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어(에니시엔은 도기공들에게 굽는 과정은 생략해달라고 부탁했다.) 일반적인 무기에 큰 타격을 받을 리가 없었다.


"진흙인형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라......영혼을 불어넣는다는 건가요?"

"아니. 내가 진흙인형에 불어넣을 건 자아와 의지가 없는 가짜 생명이지. 꼭두각시라고나 할까. 진짜 영혼을 가진 생명을 불어넣는 건 신만이 가능한 일이야. 그렇다고 내 유령 친구들에게 진흙인형 안으로 들어가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고.

사실 생명이 있다고 말하기도 힘든 게 내 명령을 따라 움직일 뿐이니까 어찌보면 생명도 없고 영혼도 없는 인형일 뿐이지. 움직이기는 하겠지만."


이네스가 다시 한 마디 끼웠다.


"흐응......잘 성공할 수 있을까요? 상대방은 강신술사니까 망령들을 이용해 우리 인형들을 빼앗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난 강신술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상식 수준으로는 알고 있다. 이네스가 우려하는 건 빙의일 테지.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우리가 강신술사의 언데드 꼭두각시들을 뺏으려고 들었으니 우리가 인형들을 호락호락 뺏기지는 않겠지.


"흐응,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영매끼리는 서로에게 갖게 되는 특별한 느낌이 있는데 그 느낌을 통해 상대방의 영매로서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어. 그런데 나에 비하면 영매로서의 능력이 약하더라고."

"그......석궁을 든 사람 말인가요?"

"정답."


....그랬군.

일행들의 말로 비추어보아 그 사람은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언데드들을 불러내어 인간을 공격하고, 심지어 같은 사람인 나에게 석궁까지 쏘았을까?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네스는 에니시엔과 '진흙인형'의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노라는 엘의 과장섞인 모험담을 미소를 지으며 눈을 사르르 감은 채 듣고 있었다. 이 정도면 폭풍전야답게 큰 일을 앞둔 고요함 그대로지만....나는? 그 마음씨 착한 족장 로간의 아내되시는 분의 솜씨를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그 분은 내가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깨끗이 무시하신 것 같다.

이네스와 에니시엔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아마 둘 다 지식이 많고 말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이겠지. 엘의 장황하고 저속한 이야기와는 다르다.

에니시엔이 '진흙인형'을 생각하게 한 계기는 결정적으로는 도기와 도기의 재료였지만, 근본적인 영감은 마법사들이 만들어내는 '골렘'이라는 것들이었다. 마법사들은 마력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인 골렘들을 사용하여 전사들보다 부족한 육체적 능력을 벌충하는 반면, 에니시엔은 진흙인형에 영혼이 없는 생명을 부여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언데드 집단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기발한 발상이다.

그런데 그 '영혼이 없는 생명'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에니시엔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생명과 영혼은 별개야. 즉 생명이 깃든 몸에서만 인간은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언데드들이지. 마력으로 움직이는 언데드 인형과 강신술로 움직이는 언데드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난 강신술사라 봐도 무방하고, 언데드를 일으킨 주범이자 우리의 적은 마법사에 가깝지.

반면 생명 역시 영혼을 요구해. 생명이 깃든 몸에 영혼이 깃드는 게 원래 정상이지. 그리고 영혼이 몸 속에서 빠져나갔는데 생명이 그대로인 매우 드문 경우가 있는데, 사실 생명과 영혼이 같은 곳에 깃드는 건 신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지만 생명이나 영혼 중 하나만 불어넣는 건 능력만 된다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야."

"능력만 된다면이라......역시 이해하기 힘들군요."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넌 전사잖아? 강령술과 신학을 둘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어."


흐응, 그런가? 하여간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물어봐야겠다.

전투망치 부족의 장인들은 지금쯤 열심히 일하고 있을 터였다. 로간은 이틀만에 에니시엔이 주문한 삼십 구를 채울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다. 오늘 기준으로 이틀이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물론 에니시엔이 그 인형들에 손수 생명을 불어넣어야하기 때문에 하루는 더 걸릴 것이다. 그 동안 남부 마을이 멀쩡했으면 좋겠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에니시엔은 아직 다 낫지 못한 내가 휴식을 취해야한다며 일행들을 데리고 나와버렸다. 그런데......어째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게 있는데....그게 뭐지?


"저......에니시엔!"

"응?"

"그, 그......"


으윽, 할 말이 뭐더라?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머리를 탁 치더니 말했다.


"아아, 환자를 혼자 병실에 방치하면 독방에 죄수를 가둔 거나 다를 게 없지. 흐응, 내가 옆에 있어줄게. 괜찮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62







지면 너머로 사라져가는 태양의 작별인사가 창 안으로 쏟아들어져왔다.

노을빛의 등진 에니시엔의 모습은 마치 마법이 걸린 것 같았다. 뭐랄까......


"아름다워요."


이 한 마디면 모든 설명이 끝나겠지. 그런데 내가 저 말을 왜 했을까?

에니시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아아, 그냥 당신이 아름답다고요."


에니시엔은 살풋 미소지을 뿐이었다.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인지 난 연신 하품을 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뜬 내 모습을 본 에니시엔이 말했다.


"걱정하지마. 네가 잔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치를까봐 그래?"

"참, 당신도......"


에니시엔은 살풋 미소지을 뿐이었다.


"맞다, 에니시엔."

"응?"

"엘은 에니시엔을 공연장에서 맨 처음 만났다고 했는데 에니시엔은 엘 일행과 만난 건 루소를 치료해주는 그 때였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된 거에요?"

"아아, 엘 일행이 루소를 데려왔을 때에는 엘은 도착하지 않았었어. 따라서 엘 말이 맞아. 엘 일행은 의사로서 나와 만난 것이지만 엘은 관객으로서 만난 셈이지."

"그렇군요."


에니시엔은 손톱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지나가는 어조로 한 마디 꺼냈다.


"가끔은 외로워."

"무슨 뜻인가요?"

"별 뜻 아니야. 참....난 외롭게 자랐어."

"부모님은요?"


에니시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했다.


"이야기하지 않았었지만......그래, 솔직히 말할게. 만난지 얼마 안 되는 너에게 내 집안 내력까지 이야기하는 건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어. 미안해."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쉽사리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겠죠."


에니시엔은 살풋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나도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에니시엔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내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어머니도 시기는 다르지만 역시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어. 그 후로 난 늘 혼자였어. 응, 혼자."

"너무 외로워하지 말아요."

"지금은 외롭지 않아.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까......하지만....나도 내 가족을 가졌으면....아니다. 너에게 할 이야기는 못 되는구나. 미안해."


......평소에는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에니시엔이 왜 저러지?

이것저것 캐묻는 건 나 역시 싫어하는 일이지만 한번 묻고 넘어갸아겠다.


"말해봐요. 내가 잘 들어줄 테니."

"후우....네가 물었으니까 나도 솔직하게 털어놓을게. 나도 이젠 내 가족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큼지막한 집에 나 혼자만 외롭게 있는 건 너무 싫어....난 외로움을 많이 타서 여행을 떠났던 거야."


에니시엔이 우울해하는 모습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어째 보고 싶지 않았다. 화제를 한번 돌려보는 수밖에.


"그러고보니 그....글렌이었던가? 그 분과 여행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좀 해주실래요?"

"응."


에니시엔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무슨 이상한 소리를 내뱉더니 금세 말문을 열었다. 마치 목이 메이는 듯한 저 목소리.....아니, 착각일 거야.


"나하고 글렌의 만남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을 거야. 으응, 글렌이 나에게 프로포즈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지?"

"네."


에니시엔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나에게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친구지?"

"물론이에요. 당신과 내가 친구가 되기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친구에요. 나는 바라고 있고요."

"다행이구나. 으응, 솔직히 말해서 글렌의 프로포즈를 안 받아들인 건 지금도 후회하고 있어."


....아?

글렌이 어떤 남자인지는 모르지만 에니시엔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꽤 멋진 남자일 게 분명하다. 에니시엔 같은 여자가 일단 보석처럼 드문 존재니까 그녀가 마음을 주는 상대도 특별한 사람인 게 자연스럽다.

에니시엔이 계속 말을 이었다.


"글렌은 확실히 멋지고 좋은 남자였어. 나도 그가 싫지만은 않았고 내가 그의 구애를 거절한 이후에도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니까 그가 싫어진 것도 아니야.

응, 그냥 거절했을 뿐이야. 그 당시에는 그냥 글렌에게 미안했을 뿐이었고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 않은 내가 참 대견했어. 흥, 우습지....그 좋은 남자를 못 알아보고.

결국 그는 내 품 속에서 죽어갔어. 그는 그 순간까지도 날 사랑했는데 난 단순히 겁이 나서 그의 마음을 거절했으니까....너무 미안해."

"그렇게 망설이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평소의 당신답지 않아요. 당신도 그를 좋아했단 말인가요?"

"처음에는 몰랐어. 그냥 친구 사이의 우정인 줄 알았는데....우정만이 아니라 남녀간의 사랑도 게재했던 사이였던 거 같아. 그때 깨닫지 못하고 뒤늦게 후회한 내가 바보였지. 그런 면에서 보면 내가 영매인 게 참 다행이야. 죽은 그와 아직도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내가 말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당신에게 프로포즈를 했었나요?"

"그답게 진솔하고 시원시원한 방식이었어. 그는 감성적인 남자라서....참 매력적이면서도 군더더기를 몽땅 베어낸 훌륭한 프로포즈였지. 그런데 난 단순한 경각심 같은 게 들어서 그의 구애를 거절해버렸어. 그로서도 용기를 냈을 텐데....나도 시원시원하고 단도직입적인 거 좋아하면서....쳇."

"너무 그러실 필요없어요."

"안타까워서 그래. 난 글렌 생각이 나서 남자들을 별로 접하지 않았어. 외로워도 글렌 생각이 나서 남자들과 연애할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에니시엔은 입술을 잠시 오므리며 무언가를 망설이는듯 한참 주저하다가 말했다.


"나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