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위험하지 않을까요?"


노라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의 내용은 그리 평온하지 않았다.


"위험할 거에요. 살아남지 못할 수도."


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가겠단 건가요? 난 그 임무가 자세히 어떤 건지도 모르고 어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위험할 거라는 건 짐작이 가요. 당신 같은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면 보나마나 오지게 위험할 일일 거에요.

그런데 그 위험한 일을 왜 한다는 건가요? 전 이네스의 친구에 불과해서 이런 일에 끼어들 계제는 아닙니다만 이네스는 어떡하고요?"


마지막 한 마디는 비난을 겸한 말이었다. 노라는 눈을 사르르 감으며 말했다.


"제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어요. 죽을 게 분명한 길과 죽을 가능성이 높지만 살아나면 많은 보물을 만질 수 있는 길. 그 보물의 이름은 행복한 모녀 가정이에요.

지난 20여년은 무덤 속 관에서 보내던 시간 같았어요. 네, 살아있지만 죽은 것만도 못한 삶이었어요.

벤. 당신이라면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하겠나요? 아니면 한 줄기 가망이라도 있는 삶을 택하겠나요?"

"그 말은......노라의 삶은 이네스라는 존재가 있어야만 이루어진단 말인가요?"

"네. 이네스와 함께할 수 없는 노라의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이네스와 함께 있을 수 없다면 그건 눈을 뜨고 있어도 지상을 배회하는 시신과 다를 바가 없어요.

전 이네스에게 큰 죄를 지었어요. 이네스에게 미움받는 엄마로 남느니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이네스를 위해 노력하다가 세상을 등지게 되면 이네스도 절 알아줄 거라고 믿어요."


......노라의 그리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난 이네스에게 노라의 일생을 간략하게나마 들었고, 나 역시 아버지를 둔 아들로서, 어머니가 없는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의 생명을 경시하는 저 태도다. 그리고 자신쯤은 없어도 다들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은 저 태도가 너무 이질적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없어도 아파할 사람은 없을 거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저 태도.

난 고개를 홰홰 저으며 말했다.


"노라.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이네스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는지 아세요? 이네스가 당신없는 세상에서 아파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하지만......전 이네스가 곁에 없으면 살 수 없어요. 그리고 제가 죽어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저런 화법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자신의 생명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저 태도.


"노라, 노라의 말은 모순이에요. 이네스가 없으면 살 수 없다면서 노라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순간 노라의 눈썹이 홱 올라갔다. 그걸 본 나는 절로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살을 에는 듯한 목소리, 오랫동안 묵은 한과 눈물이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들......몰라요. 아무것도 몰라!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많은 후회와 애증이 쌓였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는지......아무도 모르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아요!

차라리 죽었으면, 이렇게 아프지 않고 죽었으면 차라리 좋겠어요. 이네스? 이젠 이네스가 날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골방에서 눈물짓는 것밖에 모르는 여자를 누가 사랑해줄지 이제는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난 이제 누구의 마음을 헤아릴 능력도 없어요. 난 버려졌어요....아무도 날 돌아보지 않고, 내 아픔을 보며 딱하고만 했지 누구도 날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어요! 내 모든 삶을 잃고 하나밖에 안 남은 젖먹이 아이를 나에게 돌려줄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온 기회를 놓치라고요? 난 잃어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난 이네스의 마음까지 굽어볼 여력마저 없어요. 난 누군가를 보살필 여자도 못 돼요. 난 가진 게 없단 말이에요!

죽으면 어때요? 영영 못 만날 이네스와 만나기 위해 노력하다가 죽는 건데 어때요? 이제 와서 날 말리는 사람들은 내가 피눈물을 흘릴 때 무얼 하고 있었던 거에요? 계속 내가 죽은 시신처럼 잊혀지고 쓰러져있길 바래요? 그렇다면 정말로 그렇게 해주겠어요! 대신 그 누구도 날 말리지 말란 말이에요! 난 잃어버릴 게 하나도 없고, 가진 게 없으니 무엇이라도 가지려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날 말리기 전에 당장 굶어죽을 거 같은 거지 앞에 빵을 놓고 가다가 미끄러질 테니까 먹지 말라고 말해보란 말이에요!

차라리, 차라리 죽기라도 한다면 이 모든 걸 잊고 잠들 수 있을 텐데......내 딸도, 추억 속에만 남은 어머니를 회상하기만 하면 될 텐데......어흐흑!"


노라는 말을 맺히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정리되지 않은, 두서없는 그녀의 울부짖음 같은 외침이 내 마음의 한 구석을 크게 강타했다. 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흐윽, 미안해요. 꺽, 난 그 정도밖에 안, 흑! 되는 여자고, 너무 아, 파서 자기 자신 말고는 꺽, 아무것도 못 보는, 흐윽! 장님 같은, 훌쩍, 여자에요......흐흑...."


노라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난 내 마음의 한 구석이 아려오는 걸 느꼈다. 나라면 이해할 수 있을까. 조용한 삶을 살다가 원하지 않던 아기를 얻고 인생의 많은 부분을 잃었지만 그 아기 덕분에 행복한 삶을 얻은 여자.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고 그 짧은 행복도 잃은 채 잊혀진 몸으로 살던 여자......

그런 그녀를 비난하려고 한 난 참 나쁜 놈 같다. 제기랄. 만약 그녀가 내 엄마였다면 내가 화조차 낼 수 있었을까?

어머니들도 인간이고, 아이가 있는 여자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대상은 남편과 아이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남편을 사랑할 수 없는 여자라면 성격이 좋다는 전제 하에서는 자신의 아이에게 맹목적인 집착을 가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녀는 성숙하지 못한 아직 어린 여성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아기를 빼앗기다시피 떠나보낼 수 없게 된 이후부터 얼마나 아파했을까......


"훌쩍. 네, 전...크흑! 아무에게도 도, 훌쩍, 아, 아, 미안해요. 흐흑! 이네스, 이네스도, 훌쩍, 더 좋은, 흑! 엄마를 만났으면, 훌쩍, 더 행복하게 살 텐데......너무, 으흑! 미안해요. 이네스, 에게......차라리 내가, 훌쩍, 죽으면 이네스도 이네스를, 으흑! 내버린 엄마를 용서할, 으흑! 거 같아서....이네스를 위해 노력하다 죽으, 크흑! 면 나도 용서받을 거 같...흑흑......"

"노라......"


난 잠시 노라를 껴안고 몇 번 토닥여주었다. 너무 운 나머지 노라가 꺽꺽댔지만 시간이 지나자 좀 가라앉았다. 그래도 목소리에 듬뿍 어린 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네스가 불쌍해요......차라리, 차라리 저처럼 못된, 엄마 만나지 말고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이네스와 절 위해 노력하다가 죽으면 이네스도 절, 용서해줄까요?"

"아니에요. 이네스에게 당신은 중요해요."

"흐윽....이네스....그러면 성공해서 같이 살게 되면 이네스가 좋아하겠죠?"

"물론이에요. 하지만 이네스는 노라가 험한 일을 하고 싶어하진 않을 거 같아요."

"미안해요......벤......"


이건 왠 뜬금없는 소리야? 나에게 미안하다니?


"무슨 말인가요?"

"너무....제가 너무 무례했죠...."


휴우. 무슨 이야기인가 했다.

난 노라가 안심하도록 그녀를 보듬어주며 말했다.


"무례는 무슨. 참견한 제가 더 미안하네요."

"고마워요. 벤......"


난 한참 노라를 품에 껴안고 있었다.

참 오늘 괴이한 경험을 많이 하네. 에니시엔이 던지는 추파를 받은 게 몇 시간 전인데 이제는 노라를 안게 되다니. 흐응. 이게 무슨 조화야. 혹시 불침번을 서다가 자고 있는 건가?

내가 노라를 껴안고 있던 채로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제서야 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아요?"

"네....많이 좋아졌어요. 저....질문이 있는데...."


무슨 질문일까. 노라의 심기를 해치지 않아야하니 잘 대답해야 할 텐데.

내심 긴장했지만 긴장도 숨길 겸 친절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말해봐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성심껏 대답해줄게요."

"벤은 여동생이 있나요?"

"네? 아, 아뇨. 노라는요?"


잔뜩 긴장한 와중에 날아온 뜻밖의 질문이라 저런 어리버리하고 무성의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노라가 나에게 대답했다.


"전 외동딸이에요. 전 오빠도 없고 동생도 없고 언니도 없어요. 그래서 에니시엔 언니를 친언니처럼 생각했어요."

"흐응, 그래요? 그러면 왜 저에게 그런 질문을......"

"벤이 마치 동생을 돌보는 것처럼 저를 잘 보듬어주어서 궁금했어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저, 저 노라......"


노라는 그 사이 내 품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이제 벤은 푹 쉬어요. 불침번은 제가 설게요. 그리고 오늘 고마웠어요. 벤은 오빠처럼......"


난 긴급히 말허리를 잘라야했다.


"아, 아, 알았어요! 어, 얼른 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