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OD(트라이포드) - 글 : RhythmNation(mordenmania)
글 수 33
#49
"에니시엔."
"응?"
"그......지고의 음률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다른 일행들은 식사를 마치고 곤히 잠들어있다. 깨어있는 사람은 불침번인 나와 불침번도 아닌데 모포를 감고 바위에 기대어있는 에니시엔뿐이었다.
에니시엔은 비스듬히 누워있던 몸을 조금 일으키더니 가방에서 조그마한 항해용 비스켓을 꺼냈다. 높은 온도로 두 번이나 바싹 구워 물이나 포도주에 적시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는 빵이다. 수통도 꺼내든 그녀는 수통의 코르크를 따며 말문을 열었다.
"그건 말이야....뭐랄까, 마법이나 신법은 너도 알지?"
"쓸 줄은 모르지만 알긴 알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거야.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기 위해 마법식을 사용하듯, 초자연적인 힘이 깃든 노래는 음률을 매개체로 삼는 거지."
"......저, 무슨 말이죠? 그런 음악이 있기는 한가요?"
"응. 마법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런 음악은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는 것 정도? 나도 배워본 적은 없으니까 잘은 몰라.
흐응, 지고의 음률도 나와 루소가 편의상 붙여준 명칭이고, 진짜 이름은 그런 음악을 구현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들이나 알겠지."
에니시엔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나도 동시에 우울해졌다.
에니시엔의 기분에도 먹구름이 낀 것 같아 난 미안한 나머지 화제를 돌렸다. 내가 기분을 망친 셈이니까.
"에니시엔은 여행을 많이 했잖아요. 그 여행담을 좀 들려줄 수 없나요?"
"왜?"
"그냥......재미있을 것 같고 저에게도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아서......"
에니시엔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경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뭐랄까, 사이렌의 목소리가 저렇다고 하면 믿겠는걸.
"아하하......곤란한데?"
"네? 왜요?"
에니시엔은 곤란하다는 듯 살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 올해 264세야. 그런데 그 중 3분의 1에 해당되는 생애 동안 여행만 하며 살았단 말이야. 그런데 그 동안 겪은 모험담을 어떻게 다 이야기하니? 간략하게 이야기해봐야 하등 재미가 없을 테고."
"그, 그러네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뽑아내서 하나씩 이야기해준다면 모를까."
"그게 낫겠군요."
에니시엔은 이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삶이란 게 원래 한 편의 이야기야. 우리가 재미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삶에서 짜집기한 단편 같은 존재들이고. 위인들의 삶은 그냥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뿐이지."
잠시 '삶'으로 화제를 돌리는 방식으로 운을 뗀 에니시엔은 그 밝은 미소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에니시엔이 에이겐 섬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 시절 에니시엔은 동료 없이 혼자 여행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에니시엔의 나이는 백 살하고도 일흔 여덟 살을 맞이한 시기였다.
에니시엔이 에이겐 섬에 도착하게 된 요인은 간단했다. 타고 있던 배가 난파당했기 때문이었다. '난파'라는 말에 얼굴이 하얘진 건 에니시엔이 아니라 나였다.
"나, 난파당했다고요?"
"응. 뭐, 그리 곤란한 일은 아니었어. 그냥 폭풍 때문에 배가 뒤집혔고, 난 폭풍 속에서 헤엄치는 조난자 꼴이 되었지. 그리고 멋지게 에이겐 섬의 모래사장에 안착했고."
가볍게 말하는 에니시엔의 목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에이겐 섬은 무인도가 아니라 원주민들이 사는 섬이었지. 난 식량은 고사하고 당장 입을 옷도 없고 글렌의 메이스나 간신히 들고 온 처지라 식량부터 얻기 위해 섬을 전전했어. 그 와중에 에이겐 섬의 원주민들을 만나게 된 거지.
원주민들은 안 좋은 대면을 예상한 내 상상을 멋있게 때려부숴주었지. 흐응, 난 바다에서 온 손님 처지가 되어 이 사람들의 마을에 동행하게 되었어. 나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 사람들에게 무례한 짓을 삼가했지."
에이겐 섬의 원주민 마을에 가게 된 에니시엔은 원주민 족장과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모두 그녀에게 친절했고 특히 원주민 남자들이 그녀에게 무척이나 친절했다.
"그곳에서는 축일 때가 참 즐거웠어. 섬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엄청 미개한 사람도 아니었고 요즘 대륙 사람들처럼 근사한 집을 짓고 살았지. 다만 뭐랄까....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문명에 온 듯한 느낌? 그런 이국 정취가 참 좋았어."
"헤에......제가 보기에는 에니시엔도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 같은걸요."
에니시엔은 생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곳에서 축제라도 여는 날은 참 재미있었지. 흐응......내가 그런 곳에서 춤추는 모습을 생각해봤니?"
아무래도 생각하기 힘들다. 에니시엔이 춤을 춘다라......눈이 참 즐겁겠지. 저 유연하고 관능적인 몸매로 춤을 춘다면 참 매혹적일 것 같다. 흐응, 관능적이라고 해야할까?
그래도 본 적이 없으니 영 상상하기 힘들다.
에니시엔은 마치 아름다운 환상을 보는 듯한 눈, 그러니까 힘이 탁 풀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헤에......얼마나 좋았는데. 사람들도 날 참 사랑해주었고. 얼마 안 되는 황금 같은 한때였어."
에니시엔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에니시엔은 그곳에서 3년 정도 머물렀다. 그곳 사람들은 에니시엔을 참 좋아했고 그녀에게 마음을 주는 남자들도 많았기에 마음만 먹으면 정착하는 건 물론이고 결혼할 수도 있었다. 고향에 깊은 애착을 가진 에니시엔조차 망설일 정도로 이 사람들은 그녀를 후대했다.
그 섬은 그리 크지 않은 섬이었고,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다. 경작지도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 사냥과 농경을 병행해가며 굶주림과 싸워야했고,
그 와중에 에니시엔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섬의 전설에 의하면 에이겐 섬의 해변에는 한 거인이 잠들어있는데, 일설에는 바다에 폭풍을 일으키는 자라고 했다. 에니시엔이 환대를 받은 이유도 이 섬의 전설에 의하면 이 섬 이름과 똑같은 에이겐이라는 거인이 해변에 잠든 이후로 찾아온 첫 외지인이라는 이유가 주된 원인이었다. 그녀에게 섬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비범한 사람일 거라는 기대와 수백 년만에 처음 보는 외지인이라는 반가움이 겹치는 것도 당연했다.
이 섬 사람들은 그 '에이겐'이라는 거인을 무척 두려워하여 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해일이 일어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에이겐의 분노라며 두려워할 지경이었다. 물론 마을은 섬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대규모 해일이 아닌 이상 마을을 침수시킬 수는 없었지만 대규모 해일이 일어나면 큰일이니까 해일이 일어날 때마다 두 손 맞잡고 바다만 바라봐야하는 게 이 섬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에니시엔은 위험보다는 흥미가 생겨서 그 거인을 만나러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족장의 말은 이러했다.
'갈 방법을 알고는 있지만 그곳에 가서 돌아온 사람들은 거인을 만나기는커녕 보지도 못했다고 하더군.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으니 가지 말게나. 아가씨처럼 아름다운 처녀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난 마을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네. 까마득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간신히 온 외지인이 우리 섬에서 죽는다면 족장인 내가 어떤 추궁을 받겠는가.
그 거인이 잠든 이상 돌아갈 수도 없을 거라네. 아가씨, 우리 섬이 아가씨의 고향만큼 좋은 곳은 아닐 테지만 고향은 기억 속에 남겨두고 여기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 가정을 꾸미고 살아요. 우리 마을의 남자들이 고향 남자들만은 못하겠지만 다들 아가씨에게 잘해줄 거요.'
에니시엔은 고향에 당장 돌아갈 생각은 아직 없다고 말한 후 족장에게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족장은 끝끝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족장의 딸에게 접근했다.
족장의 딸은 에니시엔의 예상대로 무의식 중에 에이겐에게로 가는 법을 털어놓았다. 놀랍게도 에이겐에게 가는 법은 섬 깊숙한 곳에 있는 제단에 가는 것이었다. 다만 일부 고서적에는 그 제단에서 자신의 목을 찔러야 에이겐을 만날 수 있다고 써 있었다.
마을 남자들 중 여럿이 이미 그런 용기있는 시도를 했다고 했다. 다만 그들 중 상당수가 제단 앞에 놓인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일부 사람들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들은 에이겐을 만나지 못했고 이상한 풍경만 보고 돌아왔다고 전해주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에니시엔은 일단 그 고서적을 훑어보고, 그 직후 바로 족장을 찾아가 에이겐을 만나러 가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족장은 당연히 말렸지만 그녀의 말은 단호했다.
'간 사람들이 모두 죽은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 좁은 섬에서 좁은 밭과 얼마 안 되는 야생 동물을 사냥하며 굶주리는 여러분들에게 절 잘 돌봐주신 대가로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하고 싶어요.
별 소득없이 돌아온다면 여러분들과 더불어 살아보도록 할게요. 헤헷.'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난 에니시엔은 정해진 수순대로 제단에서 자신의 목을 찔렀고, 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더니 이내 시야가 어두워져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흐응, 어느새 시야가 밝아지더니 폭풍의 거인이 잠든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어. 꽃이 만발한 정원이었지. 꽃을 꺾어가고 싶을 정도더라."
에니시엔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운이 좋았다. 그녀는 폭풍의 거인 에이겐을 만날 수 있었고, 곤히 잠든 에이겐을 깨웠다.
에이겐은 난데없는 침입자인 에니시엔에게 많이 당황한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에이겐을 죽이려고 온 걸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발랄한 여인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여간 에니시엔은 에이겐에게 밉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에니시엔도 에이겐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이나 풍문으로나마 들었기 때문에 에이겐에게 덤빌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풍문이 진위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으니, 납득이 가는 행동이었다.
에니시엔은 에이겐을 설득하기 위해 일단 우연히 찾아오게 된 손님으로 가정했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그녀지만 에이겐을 해치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난 그에게 이렇게 말했어. 난 우연히 이 섬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당신이 내가 탄 배를 가라앉혔다고 말이야. 그런 일이 있어서 이 섬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자신들이 경외하여 섬의 이름에마저 당신의 이름을 붙인 에이겐 섬 사람들이 당신을 만나보라고 권했다고. 그런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당신은 내가 아는 무섭고 흉측한 거인과는 거리가 멀고 섬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괜찮은 거인 같다고 했지.
그리고 그 거인에게 말했어. 나나 다른 사람처럼 당신을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서라도 바닷길을 열어주면 어떻겠냐고 말했지."
....정말 말 잘한다. 바드 기질이 있어서 그런가?
"협상은 성공했고, 그 협상 덕에 바닷길이 열렸어. 다만 난 날 맘에 들어한 에이겐 때문에 일주일 정도 그곳에서 그와 같이 지냈어. 그런 다음 난 무사히 돌아갔는데 섬 사람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매우 애석해하고 있더라. 쳇,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죽었다니."
"....정말 정많은 사람들이네요."
"협상이 성공하여 바닷길이 열렸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이 사람들은 그리 기뻐하는 기색은 아니었어. 그리고 나도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어. 그래, 나와 그 사람들 사이에 깊은 애정이 생긴 거지."
그렇게 말하는 에니시엔의 눈은 마치 별자리를 바라보며 애인의 얼굴을 그려보는 별밤지기의 눈 같았다. 지금 그녀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달콤씁쓸한 회상을 하고 있겠지.
"으응, 하지만 난 섬에서 즉각 나가진 않았어. 그 후로도 한 4년을 더 살았지. 헤에....떠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아쉬워하던지....잊지 못할 거야. 다시 오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못 가봤지 뭐야. 어디 있는지 항해 지도까지 그려둔 주제에."
"그 시절, 그립나요?"
"응. 한번쯤 또 경험해보고픈 추억이야."
옛 기억을 되짚는 에니시엔의 눈은 깊다. 저 호수처럼.
그러고보니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이런 질문을 해도 될까?
"에니시엔."
"응?"
"당신 아주 멋있는 여자잖아요. 에니시엔을 좋아하는 남자는 없었나요?"
"흐응, 많았어. 에이겐 섬에서도 있었고 몇몇 남자들이 나에게 마음을 주기도 했는데, 흐응....남자가 좋다고 여자도 마음을 준다면 여자들은 모두 바보게?"
"헤에, 당신도 많은 남자를 사귄 모양이네요. 편력담이 굉장하겠는걸요."
"뭐야?"
에니시엔은 눈을 부라렸지만 역시나 장난. 나도 장난에 걸맞게 대응했다. 즉 뻔뻔한 미소다.
"그럴 거 같은데요. 에니시엔은 성격도 발랄하고 아름답기까지하니 남자들이 다 좋아할 거 같은데......"
"호오, 너도 나에게 관심있니?"
"에엑? 천만에요!"
"흐응, 솔직해지는 게 어때?"
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솔직히 마음에 안 드는 여자는 아닌데 아무리 솔직하게 대답을 한다고 해도......
에니시엔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헤헷, 됐어. 네 얼굴이 대답해줬어."
에니시엔은 그 말만 던져두고 모포를 뒤집어썼다. 난 아쉬운 심정을 느끼며 말했다.
"자게요?"
"응. 넌 불침번이니 못 자지? 밤 공기가 추울 거야. 깔깔."
"....쳇. 잘 자요."
"흐응, 너도 안전하고 편안한 불침번."
에니시엔은 야속하게도 그 말만 남기고 모포를 뒤집어썼다. 쳇, 나쁜 여자 같으니.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공허해졌다.
#50
난 잠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에니시엔과 노라와 이네스, 이 세 여자들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자고 있었다. 흐응, 외양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비슷하니 잘 어울린다. 뭐랄까...세 자매들의 잠자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 싸늘하고 쓸쓸한 곳에서 똘똘 뭉쳐서 수면을 취하는 여자들을 보니 부럽기 짝이 없었다. 같이 자는 게 부럽냐고? 난 남자하고는 안 잔다. 그렇다고 저 여자들이 나하고 자줄 리야 없지. 난 말동무가 없어서 심심할 뿐이다.
노라와 이네스는 모녀지간 아니랄까봐 서로를 부서질 것처럼 껴안고 자고 있었다. 에니시엔은 노라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고. 누가 보면 동성애라고 오해할지도 모르겠군.
엘은 나무뿌리에 기대어 마치 죽은 것처럼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많이 피곤할 것이다. 일단 그 힘겨운 산행때 앞서갔고 야영하기 위해 벌목도 해왔으니 지칠 만도 하지. 물론 노라는 그리 지친 거 같진 않지만 아무래도 노라가 엘보다는 강단이 있는 모양이다.
이네스는 자기보다 키가 훨씬 더 큰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다. 정말 편안할 거 같다. 으응......나에게는 저런 시절이 참 짧았지. 아버지는 날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한 만큼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해주진 않았다.
그때였다.
"우음......"
"노라?"
노라가 몸을 조금씩 비척거리더니 눈을 떴다. 그러더니 자신을 열렬히 껴안고 있던 에니시엔과 이네스의 팔을 풀기 시작했다.
두 여자가 노라를 꼭 껴안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한참 후에야 빠져나왔다. 그러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난 싱긋 웃으며 그녀가 지금 필요할 법한 것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부스스한 머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방금 전 일어났으니 목이 많이 마를 거에요. 많이 마셔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물을 마셨다.
방금 전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모습은 귀여웠다. 마치 웅크린 흰 토끼 같다. 그것도 겨울잠을 자는 토끼......아, 물론 난 겨울잠을 자는 토끼를 본 적은 없다. 흐응, 하여간 토끼보다 더 귀엽다.
자다가 답답해서 풀어놓았는지 풀린 단추 때문에 열린 옷깃 사이로 앙가슴이 보였다. 난 매우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눈길이 쏠렸다. 으으윽, 지독한 악습관이지만 차마 버릴 수 없는 습관이다.
"어머, 어딜 봐요, 벤?"
으윽. 노라는 이제야 질겁을 하며 단추를 여몄다. 저 아가씨는 이제야 자기가 옷깃도 제대로 안 여민 걸 깨달은 모양이다. 흐응, 생각해보니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지. 도무지 믿기 힘들지만.
난 민망한 나머지 화제를 바꾸었다.
"이네스는 노라를 무척 좋아하는 거 같던데요."
"네? 아....네...."
노라는 당황해하며 내 말에 대답했다. 그 사이 노라는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화제를 바꿀려고 한 질문이었는데 막상 내뱉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퀭했다. 에니시엔과 노라의 대화를 엿듣던 중 알게 된, 그녀의 목숨을 건 그녀의 '임무'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노라가 죽으면 과연 이네스는 뭐라고 할까.
"노라."
"네?"
"아직도 그 '임무'에 대한 결심은 변함이 없나요?"
질문하는 내 목소리는 아직까지는 가벼웠지만 대답한 노라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네."
"에니시엔."
"응?"
"그......지고의 음률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다른 일행들은 식사를 마치고 곤히 잠들어있다. 깨어있는 사람은 불침번인 나와 불침번도 아닌데 모포를 감고 바위에 기대어있는 에니시엔뿐이었다.
에니시엔은 비스듬히 누워있던 몸을 조금 일으키더니 가방에서 조그마한 항해용 비스켓을 꺼냈다. 높은 온도로 두 번이나 바싹 구워 물이나 포도주에 적시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는 빵이다. 수통도 꺼내든 그녀는 수통의 코르크를 따며 말문을 열었다.
"그건 말이야....뭐랄까, 마법이나 신법은 너도 알지?"
"쓸 줄은 모르지만 알긴 알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거야.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기 위해 마법식을 사용하듯, 초자연적인 힘이 깃든 노래는 음률을 매개체로 삼는 거지."
"......저, 무슨 말이죠? 그런 음악이 있기는 한가요?"
"응. 마법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런 음악은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는 것 정도? 나도 배워본 적은 없으니까 잘은 몰라.
흐응, 지고의 음률도 나와 루소가 편의상 붙여준 명칭이고, 진짜 이름은 그런 음악을 구현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들이나 알겠지."
에니시엔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나도 동시에 우울해졌다.
에니시엔의 기분에도 먹구름이 낀 것 같아 난 미안한 나머지 화제를 돌렸다. 내가 기분을 망친 셈이니까.
"에니시엔은 여행을 많이 했잖아요. 그 여행담을 좀 들려줄 수 없나요?"
"왜?"
"그냥......재미있을 것 같고 저에게도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아서......"
에니시엔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경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뭐랄까, 사이렌의 목소리가 저렇다고 하면 믿겠는걸.
"아하하......곤란한데?"
"네? 왜요?"
에니시엔은 곤란하다는 듯 살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 올해 264세야. 그런데 그 중 3분의 1에 해당되는 생애 동안 여행만 하며 살았단 말이야. 그런데 그 동안 겪은 모험담을 어떻게 다 이야기하니? 간략하게 이야기해봐야 하등 재미가 없을 테고."
"그, 그러네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뽑아내서 하나씩 이야기해준다면 모를까."
"그게 낫겠군요."
에니시엔은 이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삶이란 게 원래 한 편의 이야기야. 우리가 재미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삶에서 짜집기한 단편 같은 존재들이고. 위인들의 삶은 그냥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뿐이지."
잠시 '삶'으로 화제를 돌리는 방식으로 운을 뗀 에니시엔은 그 밝은 미소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에니시엔이 에이겐 섬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 시절 에니시엔은 동료 없이 혼자 여행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에니시엔의 나이는 백 살하고도 일흔 여덟 살을 맞이한 시기였다.
에니시엔이 에이겐 섬에 도착하게 된 요인은 간단했다. 타고 있던 배가 난파당했기 때문이었다. '난파'라는 말에 얼굴이 하얘진 건 에니시엔이 아니라 나였다.
"나, 난파당했다고요?"
"응. 뭐, 그리 곤란한 일은 아니었어. 그냥 폭풍 때문에 배가 뒤집혔고, 난 폭풍 속에서 헤엄치는 조난자 꼴이 되었지. 그리고 멋지게 에이겐 섬의 모래사장에 안착했고."
가볍게 말하는 에니시엔의 목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에이겐 섬은 무인도가 아니라 원주민들이 사는 섬이었지. 난 식량은 고사하고 당장 입을 옷도 없고 글렌의 메이스나 간신히 들고 온 처지라 식량부터 얻기 위해 섬을 전전했어. 그 와중에 에이겐 섬의 원주민들을 만나게 된 거지.
원주민들은 안 좋은 대면을 예상한 내 상상을 멋있게 때려부숴주었지. 흐응, 난 바다에서 온 손님 처지가 되어 이 사람들의 마을에 동행하게 되었어. 나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 사람들에게 무례한 짓을 삼가했지."
에이겐 섬의 원주민 마을에 가게 된 에니시엔은 원주민 족장과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모두 그녀에게 친절했고 특히 원주민 남자들이 그녀에게 무척이나 친절했다.
"그곳에서는 축일 때가 참 즐거웠어. 섬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엄청 미개한 사람도 아니었고 요즘 대륙 사람들처럼 근사한 집을 짓고 살았지. 다만 뭐랄까....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문명에 온 듯한 느낌? 그런 이국 정취가 참 좋았어."
"헤에......제가 보기에는 에니시엔도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 같은걸요."
에니시엔은 생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곳에서 축제라도 여는 날은 참 재미있었지. 흐응......내가 그런 곳에서 춤추는 모습을 생각해봤니?"
아무래도 생각하기 힘들다. 에니시엔이 춤을 춘다라......눈이 참 즐겁겠지. 저 유연하고 관능적인 몸매로 춤을 춘다면 참 매혹적일 것 같다. 흐응, 관능적이라고 해야할까?
그래도 본 적이 없으니 영 상상하기 힘들다.
에니시엔은 마치 아름다운 환상을 보는 듯한 눈, 그러니까 힘이 탁 풀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헤에......얼마나 좋았는데. 사람들도 날 참 사랑해주었고. 얼마 안 되는 황금 같은 한때였어."
에니시엔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에니시엔은 그곳에서 3년 정도 머물렀다. 그곳 사람들은 에니시엔을 참 좋아했고 그녀에게 마음을 주는 남자들도 많았기에 마음만 먹으면 정착하는 건 물론이고 결혼할 수도 있었다. 고향에 깊은 애착을 가진 에니시엔조차 망설일 정도로 이 사람들은 그녀를 후대했다.
그 섬은 그리 크지 않은 섬이었고,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다. 경작지도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 사냥과 농경을 병행해가며 굶주림과 싸워야했고,
그 와중에 에니시엔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섬의 전설에 의하면 에이겐 섬의 해변에는 한 거인이 잠들어있는데, 일설에는 바다에 폭풍을 일으키는 자라고 했다. 에니시엔이 환대를 받은 이유도 이 섬의 전설에 의하면 이 섬 이름과 똑같은 에이겐이라는 거인이 해변에 잠든 이후로 찾아온 첫 외지인이라는 이유가 주된 원인이었다. 그녀에게 섬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비범한 사람일 거라는 기대와 수백 년만에 처음 보는 외지인이라는 반가움이 겹치는 것도 당연했다.
이 섬 사람들은 그 '에이겐'이라는 거인을 무척 두려워하여 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해일이 일어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에이겐의 분노라며 두려워할 지경이었다. 물론 마을은 섬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대규모 해일이 아닌 이상 마을을 침수시킬 수는 없었지만 대규모 해일이 일어나면 큰일이니까 해일이 일어날 때마다 두 손 맞잡고 바다만 바라봐야하는 게 이 섬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에니시엔은 위험보다는 흥미가 생겨서 그 거인을 만나러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족장의 말은 이러했다.
'갈 방법을 알고는 있지만 그곳에 가서 돌아온 사람들은 거인을 만나기는커녕 보지도 못했다고 하더군.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으니 가지 말게나. 아가씨처럼 아름다운 처녀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난 마을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네. 까마득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간신히 온 외지인이 우리 섬에서 죽는다면 족장인 내가 어떤 추궁을 받겠는가.
그 거인이 잠든 이상 돌아갈 수도 없을 거라네. 아가씨, 우리 섬이 아가씨의 고향만큼 좋은 곳은 아닐 테지만 고향은 기억 속에 남겨두고 여기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 가정을 꾸미고 살아요. 우리 마을의 남자들이 고향 남자들만은 못하겠지만 다들 아가씨에게 잘해줄 거요.'
에니시엔은 고향에 당장 돌아갈 생각은 아직 없다고 말한 후 족장에게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족장은 끝끝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족장의 딸에게 접근했다.
족장의 딸은 에니시엔의 예상대로 무의식 중에 에이겐에게로 가는 법을 털어놓았다. 놀랍게도 에이겐에게 가는 법은 섬 깊숙한 곳에 있는 제단에 가는 것이었다. 다만 일부 고서적에는 그 제단에서 자신의 목을 찔러야 에이겐을 만날 수 있다고 써 있었다.
마을 남자들 중 여럿이 이미 그런 용기있는 시도를 했다고 했다. 다만 그들 중 상당수가 제단 앞에 놓인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일부 사람들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들은 에이겐을 만나지 못했고 이상한 풍경만 보고 돌아왔다고 전해주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에니시엔은 일단 그 고서적을 훑어보고, 그 직후 바로 족장을 찾아가 에이겐을 만나러 가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족장은 당연히 말렸지만 그녀의 말은 단호했다.
'간 사람들이 모두 죽은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 좁은 섬에서 좁은 밭과 얼마 안 되는 야생 동물을 사냥하며 굶주리는 여러분들에게 절 잘 돌봐주신 대가로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하고 싶어요.
별 소득없이 돌아온다면 여러분들과 더불어 살아보도록 할게요. 헤헷.'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난 에니시엔은 정해진 수순대로 제단에서 자신의 목을 찔렀고, 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더니 이내 시야가 어두워져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흐응, 어느새 시야가 밝아지더니 폭풍의 거인이 잠든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어. 꽃이 만발한 정원이었지. 꽃을 꺾어가고 싶을 정도더라."
에니시엔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운이 좋았다. 그녀는 폭풍의 거인 에이겐을 만날 수 있었고, 곤히 잠든 에이겐을 깨웠다.
에이겐은 난데없는 침입자인 에니시엔에게 많이 당황한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에이겐을 죽이려고 온 걸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발랄한 여인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여간 에니시엔은 에이겐에게 밉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에니시엔도 에이겐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이나 풍문으로나마 들었기 때문에 에이겐에게 덤빌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풍문이 진위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으니, 납득이 가는 행동이었다.
에니시엔은 에이겐을 설득하기 위해 일단 우연히 찾아오게 된 손님으로 가정했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그녀지만 에이겐을 해치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난 그에게 이렇게 말했어. 난 우연히 이 섬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당신이 내가 탄 배를 가라앉혔다고 말이야. 그런 일이 있어서 이 섬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자신들이 경외하여 섬의 이름에마저 당신의 이름을 붙인 에이겐 섬 사람들이 당신을 만나보라고 권했다고. 그런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당신은 내가 아는 무섭고 흉측한 거인과는 거리가 멀고 섬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괜찮은 거인 같다고 했지.
그리고 그 거인에게 말했어. 나나 다른 사람처럼 당신을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서라도 바닷길을 열어주면 어떻겠냐고 말했지."
....정말 말 잘한다. 바드 기질이 있어서 그런가?
"협상은 성공했고, 그 협상 덕에 바닷길이 열렸어. 다만 난 날 맘에 들어한 에이겐 때문에 일주일 정도 그곳에서 그와 같이 지냈어. 그런 다음 난 무사히 돌아갔는데 섬 사람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매우 애석해하고 있더라. 쳇,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죽었다니."
"....정말 정많은 사람들이네요."
"협상이 성공하여 바닷길이 열렸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이 사람들은 그리 기뻐하는 기색은 아니었어. 그리고 나도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어. 그래, 나와 그 사람들 사이에 깊은 애정이 생긴 거지."
그렇게 말하는 에니시엔의 눈은 마치 별자리를 바라보며 애인의 얼굴을 그려보는 별밤지기의 눈 같았다. 지금 그녀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달콤씁쓸한 회상을 하고 있겠지.
"으응, 하지만 난 섬에서 즉각 나가진 않았어. 그 후로도 한 4년을 더 살았지. 헤에....떠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아쉬워하던지....잊지 못할 거야. 다시 오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못 가봤지 뭐야. 어디 있는지 항해 지도까지 그려둔 주제에."
"그 시절, 그립나요?"
"응. 한번쯤 또 경험해보고픈 추억이야."
옛 기억을 되짚는 에니시엔의 눈은 깊다. 저 호수처럼.
그러고보니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이런 질문을 해도 될까?
"에니시엔."
"응?"
"당신 아주 멋있는 여자잖아요. 에니시엔을 좋아하는 남자는 없었나요?"
"흐응, 많았어. 에이겐 섬에서도 있었고 몇몇 남자들이 나에게 마음을 주기도 했는데, 흐응....남자가 좋다고 여자도 마음을 준다면 여자들은 모두 바보게?"
"헤에, 당신도 많은 남자를 사귄 모양이네요. 편력담이 굉장하겠는걸요."
"뭐야?"
에니시엔은 눈을 부라렸지만 역시나 장난. 나도 장난에 걸맞게 대응했다. 즉 뻔뻔한 미소다.
"그럴 거 같은데요. 에니시엔은 성격도 발랄하고 아름답기까지하니 남자들이 다 좋아할 거 같은데......"
"호오, 너도 나에게 관심있니?"
"에엑? 천만에요!"
"흐응, 솔직해지는 게 어때?"
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솔직히 마음에 안 드는 여자는 아닌데 아무리 솔직하게 대답을 한다고 해도......
에니시엔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헤헷, 됐어. 네 얼굴이 대답해줬어."
에니시엔은 그 말만 던져두고 모포를 뒤집어썼다. 난 아쉬운 심정을 느끼며 말했다.
"자게요?"
"응. 넌 불침번이니 못 자지? 밤 공기가 추울 거야. 깔깔."
"....쳇. 잘 자요."
"흐응, 너도 안전하고 편안한 불침번."
에니시엔은 야속하게도 그 말만 남기고 모포를 뒤집어썼다. 쳇, 나쁜 여자 같으니.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공허해졌다.
#50
난 잠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에니시엔과 노라와 이네스, 이 세 여자들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자고 있었다. 흐응, 외양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비슷하니 잘 어울린다. 뭐랄까...세 자매들의 잠자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 싸늘하고 쓸쓸한 곳에서 똘똘 뭉쳐서 수면을 취하는 여자들을 보니 부럽기 짝이 없었다. 같이 자는 게 부럽냐고? 난 남자하고는 안 잔다. 그렇다고 저 여자들이 나하고 자줄 리야 없지. 난 말동무가 없어서 심심할 뿐이다.
노라와 이네스는 모녀지간 아니랄까봐 서로를 부서질 것처럼 껴안고 자고 있었다. 에니시엔은 노라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고. 누가 보면 동성애라고 오해할지도 모르겠군.
엘은 나무뿌리에 기대어 마치 죽은 것처럼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많이 피곤할 것이다. 일단 그 힘겨운 산행때 앞서갔고 야영하기 위해 벌목도 해왔으니 지칠 만도 하지. 물론 노라는 그리 지친 거 같진 않지만 아무래도 노라가 엘보다는 강단이 있는 모양이다.
이네스는 자기보다 키가 훨씬 더 큰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다. 정말 편안할 거 같다. 으응......나에게는 저런 시절이 참 짧았지. 아버지는 날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한 만큼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해주진 않았다.
그때였다.
"우음......"
"노라?"
노라가 몸을 조금씩 비척거리더니 눈을 떴다. 그러더니 자신을 열렬히 껴안고 있던 에니시엔과 이네스의 팔을 풀기 시작했다.
두 여자가 노라를 꼭 껴안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한참 후에야 빠져나왔다. 그러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난 싱긋 웃으며 그녀가 지금 필요할 법한 것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부스스한 머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방금 전 일어났으니 목이 많이 마를 거에요. 많이 마셔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물을 마셨다.
방금 전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모습은 귀여웠다. 마치 웅크린 흰 토끼 같다. 그것도 겨울잠을 자는 토끼......아, 물론 난 겨울잠을 자는 토끼를 본 적은 없다. 흐응, 하여간 토끼보다 더 귀엽다.
자다가 답답해서 풀어놓았는지 풀린 단추 때문에 열린 옷깃 사이로 앙가슴이 보였다. 난 매우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눈길이 쏠렸다. 으으윽, 지독한 악습관이지만 차마 버릴 수 없는 습관이다.
"어머, 어딜 봐요, 벤?"
으윽. 노라는 이제야 질겁을 하며 단추를 여몄다. 저 아가씨는 이제야 자기가 옷깃도 제대로 안 여민 걸 깨달은 모양이다. 흐응, 생각해보니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지. 도무지 믿기 힘들지만.
난 민망한 나머지 화제를 바꾸었다.
"이네스는 노라를 무척 좋아하는 거 같던데요."
"네? 아....네...."
노라는 당황해하며 내 말에 대답했다. 그 사이 노라는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화제를 바꿀려고 한 질문이었는데 막상 내뱉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퀭했다. 에니시엔과 노라의 대화를 엿듣던 중 알게 된, 그녀의 목숨을 건 그녀의 '임무'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노라가 죽으면 과연 이네스는 뭐라고 할까.
"노라."
"네?"
"아직도 그 '임무'에 대한 결심은 변함이 없나요?"
질문하는 내 목소리는 아직까지는 가벼웠지만 대답한 노라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