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OD(트라이포드) - 글 : RhythmNation(mordenmania)
글 수 33
#47
"낯간지럽네. 쳇."
난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보니 에니시엔도 존경해도 될 법한 사람이다. 그녀의 성격은 여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참 매력적이었다. 위기를 접하고서도 의연함을 잃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의 기분마저 헤아려 추스려주는 저 마음가짐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신 속에는 '종족'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듯했다. 나는 호프로부터 수원 정화 임무를 받은 사람이고, 설사 임무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같은 인간으로서 이 참상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네스와 노라, 엘도 우정이나 딸에 대한 염려 같은 동기가 있으니 나를 돕는 거겠지. 으음, 이네스나 노라처럼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면 그런 동기가 없더라도 이 참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만약 이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수원을 정화해야한다면 난 절대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이 참상을 동정하고 내 목숨을 보존하는 한에서 도우려하고 하는 게 한계겠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목숨이 아까운 겁 많은 인간이다. 나 혼자서 수원을 정화하려고 한다는 건 자살 행위하고 다를 게 없어 보이니까.
그러나 에니시엔은 다르다. 그녀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목숨이 걸린, 그것도 다른 종족의 불상사를 위해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녀가 우리의 도착을 안 건 우리가 그녀 앞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였다.
게다가 이 일은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다. 하긴, 지옥에까지 다녀온 그녀가 보기에는 다소 가벼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일은 산뜻한 태도로 도울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녀도 고스트와이즈라는 종족의 일원이니 인간과 고스트와이즈의 생명 중 하나를 택하라면 고스트와이즈를 택하겠지. 하지만 그 태도는 애당초 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구하되 둘 다 목숨이 위험한 일이라면 나라면 달아나버릴걸.
그러고보니 '브랙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문득 생각났다.
"에니시엔."
"왜?"
"당신은 브랙스라는 사람과 함께 지옥에 들어갔다고 했잖아요."
"응."
"왜 그와 같이 들어갔나요?"
에니시엔은 매우 당연한 질문을 받은 사람이 흔히 하는 얼굴, 즉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친구니까. 설마 내가 친구를 지옥에 들이밀고 나 혼자 도망칠 여자로 본 거니?"
"아아, 절대 아니죠. 하지만 목숨이 걸린 일인데......"
"브랙스 혼자 들어갔다가는 죽을 게 틀림없었지. 그는 대단한 강령술사지만 그 혼자서만 갔다면 둘 중 하나였을걸. 포탈이 닫혀서 지옥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죽거나."
"......"
"그래서 내가 따라간 거야. 난 앞가림도 못하는 좀비 친구를 버려두고 갈 여자는 아니거든. 물론......헛된 일이었지. 나와 그는 포탈을 차단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는 중상을 입었고, 포탈에서 나와 같이 나온 이후 내 무릎에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어."
'좀비 친구'라......나 같으면 저럴 수 있을까? 나 같으면 그런 작자 따위는 알 바 아니라며 도망칠지도 모르지.
"이제 내가 묻자. 넌 날 버려두고 도망갈 수 있겠어?"
솔직해지자, 솔직해지자......그녀 앞에서 거짓된 모습을 보이고 그녀의 신뢰를 얻진 말자.
"전 에니시엔 같은 강한 사람이 아니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후훗, 잘 생각했어. 그래야 너 대신 죽을 사람의 희생이 헛되지 않는 거야."
난 저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자신은 누군가를 대신해 죽더라도 누군가가 자신 대신 죽지는 않기를 바라는 저 마음. 과연 인간이 가질 수나 있는 걸까?
그녀는 인간이 아니니 가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난......
"미안해요."
"괜찮아. 네가 날 버리지 않고 같이 남겠다고 말했더라도 난 비슷한 대답을 했을 거야. 어느 쪽이나 날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내 수고를 헛되이 한다며 화를 냈을지도?"
에니시엔은 생긋 웃으며 마저 말했다.
"특히 이네스가 나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면 난 정말 화를 냈을 거야. 내 친구 노라가 그녀를 보호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으니까. 어찌 보면 벤 너도 그녀의 소중한 친구니까 벤이 남겠다고 말한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 네 선택이 이네스를 힘들게 할 테고 나 역시 양심의 가책을 받을 테니."
말만 저렇게 명쾌하게 하는 걸 아닐 것이다. 브랙스라는 사람, 아니 좀비는 보나마나 죽음을 각오하고 혼자 남으려고 했겠지. 다른 사람도 에니시엔을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말하는 대로 선택을 내렸겠지. 브랙스를 위해서, 친구들을 위해서, 세계의 중심을 위해서.
그러고보니 그녀는 노라와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닌 것 같다. 나이 차가 상당한데......노라는 60대고 에니시엔은 260세가 넘었으니. 그러고도 친구라니 희안하다.
"그러고보니 노라와 에니시엔은 친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에니시엔이 나이가 훨씬 더 많지 않나요?"
"숙녀의 나이를 주워들었구나?"
에니시엔이 눈을 흘기며 책을 집어들자 나도 그에 맞서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의 귀는 열려 있으니까요."
"흐응, 그랬지.
들었다시피 나와 노라의 나이차는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어마어마하지. 고스트와이즈 기준에서 본다고 해도 어린 이모와 조카 정도의 나이차이기도 하고, 좋게 봐야 큰언니와 막내 차이지. 노라 어머니와 나는 서로 언니 동생하는 사이인데 우리 둘 나이차가 50세 정도밖에 안 나. 장녀와 차녀 정도는 아니지만 맏딸과 셋째 딸 정도의 나이차밖에 안 돼."
"흐응, 그런데 어쩌다가 노라와 에니시엔의 사이가 언니와 여동생처럼 됐나요?"
에니시엔은 싱긋 웃으며 수통을 열더니 물을 몇 모금 마신 다음에야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냥 내가 노라를 많이 귀여워해주었거든. 노라의 조부모님께서도 날 많이 예뻐해주셨고. 나와 노라는 같은 침실을 쓰는 사인데 뭐."
"흐음......이야기가 나온 김에 에니시엔의 과거사도 좀 말해주세요."
"그래."
그때, 뒤에서 무언가 들썩이는 소리가 났다. 난 황급히 검을 집어들었지만 에니시엔이 날 제지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엘과 노라였다. 에니시엔은 눈도 좋은 모양이다.
#48
노라 덕분에 즐거워진 식사를 끝마치고(어떻게 알았는지 이네스도 식사가 준비되자마자 일어났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에니시엔 앞에 다들 옹기종기 모였다. 그녀는 이네스가 일어난 걸 보고 더욱 만족해했다.
"이야기는 청중과 화자의 비율이 들어맞을 때가 가장 재미있는 법이지."
에니시엔의 말이었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이지만 이네스는 키득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청중이 청중으로서 합격이라면 더더욱 재미있고."
"화자가 훌륭해야한다는 것도 조건이지. 뭐, 화자가 훌륭하긴 하구나."
잠시 우리가 웃느라 주위가 시끄러워진 사이 에니시엔이 기습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흐응, 참 색다른 방식으로 청중을 조용하게 하는군.
에니시엔도 단순히 나하고만 이야기하다가 청중이 늘어나니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그래도 무엇이든 산뜻하게 시작하는 그녀답게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도입부조차 없었다.
"난 고스트와이즈에 있는 가문인 세넨데즈 가에서 264년 전에 태어났어. 노라 어머니보다 53세는 더 어리고 노라보다는 나이가 많지......."
에니시엔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노라 어머니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노라의 어머니는 그녀를 마치 동생 정도로 생각해서 그녀를 많이 귀여워해주었고(사실 상상하기 힘들다.) 노라의 어머니와 좋은 가정 덕분에 그녀는 순탄한 성장기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성장기 도중 그녀는 우연한 사건 때문에 그녀가 강력한 영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접촉한 유령은 엘렌이라는 유령인데 엘렌은 음악에 심취한 그녀로 하여금 영매로서 프로핏, 즉 예언자들 중 하나가 되어 영매의 능력을 발휘하게끔 설득했다.
사실 예언자들의 직종은 제각각이었다. 무언가 매우 특출나는 분야가 있는 전문가들이 흔히 예언자로 선출되는 것이다. '예언자'라는 단어의 뜻과는 달리.
좌우겐 에니시엔은 엘렌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덕분에 예언자들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고 그 열정은 지금까지 이어져오면서 그녀로 하여금 예능 인생을 지금까지 영위하게 하고 있다.
그녀는 강한 영매였고, 유령들과의 접촉에 능했다. 그 덕에 그녀는 기도라던가 의식 같은 자리에 자주 불려나갔고 그런 곳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120세가 되던 해에 정식 예언자로 승격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성인이 된 그녀는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그녀는 애당초 자신의 노래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했고, 언제나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소 힘들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쌓아올리고 훌륭한 악사들과 가수, 바드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했다.
그 와중에 글렌이라는 인간 남자를 만났다. 그녀가 맨 처음 같이 여행을 떠난 상대는 그 남자였다. 에니시엔에게 반한(그녀의 말로는 글렌이 나중에 자신에게 프로포즈했다고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고 했다.) 글렌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고스트와이즈들의 고향을 떠나 여행을 하자고 종용했고, 그녀는 이번에도 받아들였다. 음악가로서, 가수로서 해보지 못한 꿈이 있었다.
그와 그녀의 여행은 생각만큼 순탄치는 않았다. 글렌은 서글서글한 성격의 좋은 남자였고, 에니시엔은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와 그녀는 수많은 고생을 하며 세계의 중심을 여행했다. 여행이라기보다는 방황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합했다. 좌우간 여행의 결과로 에니시엔은 많은 지식과 예능인들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이 여행은 3년만에 파국을 맞이했다. 여행 중 글렌이 죽은 것이다. 글렌은 메이스를 쓰는 전사였는데 에니시엔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인 그를 기억하기 위해 아직도 그의 메이스를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그 후 몇 년은 에니시엔에게 힘든 시기였다. 그녀는 글렌의 죽음으로 인해 많이 상심했고, 영매로서의 능력을 활용하여 글렌과 자주 접촉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대지를 방황하며 무녀 노릇을 하거나 발전된 도시 국가를 전전하며 공연을 했다고 했다.
고스트와이즈에게는 짧은 그 시련의 시간 동안 그녀는 많은 것을 얻었다. 마음의 상처를 회복한 그녀는 음악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여행을 다시금 준비하고, 시작했다. 그 여행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었다. 음악도 들어갔고 무엇이든 체험해보자는 욕구와 인간 사회에 대한 이해 등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을 망라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고스트와이즈들의 고향에는 어쩌다가 돌아갈 뿐이었다. 고스트와이즈들은 그런 그녀에게 '바다 철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글렌이 죽은 지 4년 후로부터 그녀가 190세가 되는 기간 사이가 그녀가 여행한 시간이었다. 가히 80여년간 세계를 전전한 셈이다. 그 동안 인간이나 고스트와이즈,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여행하기도 했고 혼자 대지를 방황하기도 했었다.
여행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즐겁기는 했지만 온갖 고초가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설원에서 웬디고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기도 했고 살인 사건 용의자라는 누명을 써서 며칠간 고생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 기나긴 여행과 글렌과 함께한 시간은 그녀를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려주었다.
190세가 된 그녀는 오래 쌓이다못해 굳어진 여독을 풀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실 내 생각에는 애정이 많은 그녀로서 그만 친지들을 보고 싶어서 돌아간 게 아닌가 싶지만. 좌우간 그곳에서 그녀는 '후광의 예언자' 칭호를 얻었다. 그녀의 여행은 인간 세계에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베풀었고 그것 때문에 그녀가 그 자리에 올라선 것 같다고 말하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190세부터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그녀를 환대하는 동족들 사이에서 눌러살며 온갖 즐거움을 만끽했다. 노라가 태어난 것도 그 시기였다. 에니시엔은 노라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갓난아기 시절 노라를 매번 안고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에니시엔이 애까지 낳았냐고 사람들이 수군거린 적까지 있다고 하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에니시엔은 노라와 함께 한 시간이 행복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둘은 얼마나 절친했는지 에니시엔은 노라의 집에서 살다시피했고 심지어 옷가지까지 싸들고 와서 노라의 집에서 몇 달간 머물기까지 했었다. 뿐만 아니라 침대까지 같이 쓰는 사이였다. 에니시엔은 노라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노라도 점점 성장하며 고스트와이즈 명문가 자제다운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런 노라에게 '불상사'가 덮치자 에니시엔은 그녀의 보호자처럼 행동했다. 노라의 부모님과 함께 노라를 위해 그녀의 아픔을 돌봐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은 것이다. 다만 노라의 부모님과는 조금 다르게 에니시엔은 전적으로 노라의 의견을 존중했다.
에니시엔은 노라의 정신적 충격을 치료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 충격은 자신의 힘으로도 역부족이었다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노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난 내가 힘들 때 언니가 옆에 있어줘서 좋았어."
그러다가 약 3년 전, 고스트와이즈의 고향을 찾아온 한 인간 여행자 집단을 만났다. 그들이 바로 엘 일행이었던 것이다. 일행들 중 유령에 씌인 사람을 위해 유령에 익숙한 그녀가 치료를 위한 '무녀'로 선정되었다.
에니시엔은 능숙하게 유령에 씌인 환자를 치료했고 환자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환자는 엘의 일행 중 한 명이었던 루소라는 여자였다.
에니시엔이 루소를 치료하는 과정을 보고 감탄한 엘 일행은 에니시엔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에니시엔은 노라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마음이 없었다. 에니시엔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건 전적으로 루소의 역할이 컸었다. 루소는 에니시엔에게 음악을 배우고 싶다며 그녀에게 접근했고, 에니시엔은 그 말에 솔깃하여 루소에게 음악을 가르치다가 루소와 친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두 여성이 새 우정을 싹터가는 사이 루소가 흘리듯 말한 노라의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지고의 음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에니시엔은 결국 이들을 따라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 생각에는 사실 에니시엔이 정이 많아서 루소에게 마음을 준 것도 이유 중 하나가 될 것 같지만.
에니시엔은 루소를 비롯한 엘 일행과 본격적인 모험을 치르게 되었다. 에니시엔은 짐짓 겸손하게 말하려고 한 모양이지만 말을 들어보니 에니시엔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엘 일행과 에니시엔의 여행은 가히 서사시로 쓸 만한 큰 이야기거리라 에니시엔이 모험담을 늘어놓는 사이 이미 해가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그러나 이 여행의 끝도 산뜻하지는 못했다. 모험의 끝자락에서 에니시엔과 그녀의 동료들은 지옥의 문을 닫는 일까지 맡게 되었고 결국 에니시엔과 브랙스의 노력으로 인해 성공했으나 브랙스 역시 죽고 말았다.
엘의 말로는 브랙스가 죽고 에니시엔이 실종되자 일행들은 모험의 목적을 상실하고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버렸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분쇄된 건 아니지만 에니시엔과 브랙스가 없으니 그 후의 모험이 힘들 건 틀림없었고, 무엇보다 그 모험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들은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에니시엔은 그 후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고 공연과 다른 소일거리를 주로 하게 되었다. 물론 그 '지고의 음률'에 대한 꿈도 잃지 않았기에 고향에 돌아가지는 않았다. 일행들을 다시 모아볼까 생각도 하면서.
에니시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드디어 끝났다. 한 사람의 인생은 왕국의 역사만큼 길다더니 간추려 말해도 이 정도로 힘드네."
"낯간지럽네. 쳇."
난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보니 에니시엔도 존경해도 될 법한 사람이다. 그녀의 성격은 여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참 매력적이었다. 위기를 접하고서도 의연함을 잃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의 기분마저 헤아려 추스려주는 저 마음가짐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신 속에는 '종족'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듯했다. 나는 호프로부터 수원 정화 임무를 받은 사람이고, 설사 임무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같은 인간으로서 이 참상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네스와 노라, 엘도 우정이나 딸에 대한 염려 같은 동기가 있으니 나를 돕는 거겠지. 으음, 이네스나 노라처럼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면 그런 동기가 없더라도 이 참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만약 이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수원을 정화해야한다면 난 절대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이 참상을 동정하고 내 목숨을 보존하는 한에서 도우려하고 하는 게 한계겠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목숨이 아까운 겁 많은 인간이다. 나 혼자서 수원을 정화하려고 한다는 건 자살 행위하고 다를 게 없어 보이니까.
그러나 에니시엔은 다르다. 그녀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목숨이 걸린, 그것도 다른 종족의 불상사를 위해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녀가 우리의 도착을 안 건 우리가 그녀 앞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였다.
게다가 이 일은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다. 하긴, 지옥에까지 다녀온 그녀가 보기에는 다소 가벼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일은 산뜻한 태도로 도울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녀도 고스트와이즈라는 종족의 일원이니 인간과 고스트와이즈의 생명 중 하나를 택하라면 고스트와이즈를 택하겠지. 하지만 그 태도는 애당초 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구하되 둘 다 목숨이 위험한 일이라면 나라면 달아나버릴걸.
그러고보니 '브랙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문득 생각났다.
"에니시엔."
"왜?"
"당신은 브랙스라는 사람과 함께 지옥에 들어갔다고 했잖아요."
"응."
"왜 그와 같이 들어갔나요?"
에니시엔은 매우 당연한 질문을 받은 사람이 흔히 하는 얼굴, 즉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친구니까. 설마 내가 친구를 지옥에 들이밀고 나 혼자 도망칠 여자로 본 거니?"
"아아, 절대 아니죠. 하지만 목숨이 걸린 일인데......"
"브랙스 혼자 들어갔다가는 죽을 게 틀림없었지. 그는 대단한 강령술사지만 그 혼자서만 갔다면 둘 중 하나였을걸. 포탈이 닫혀서 지옥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죽거나."
"......"
"그래서 내가 따라간 거야. 난 앞가림도 못하는 좀비 친구를 버려두고 갈 여자는 아니거든. 물론......헛된 일이었지. 나와 그는 포탈을 차단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는 중상을 입었고, 포탈에서 나와 같이 나온 이후 내 무릎에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어."
'좀비 친구'라......나 같으면 저럴 수 있을까? 나 같으면 그런 작자 따위는 알 바 아니라며 도망칠지도 모르지.
"이제 내가 묻자. 넌 날 버려두고 도망갈 수 있겠어?"
솔직해지자, 솔직해지자......그녀 앞에서 거짓된 모습을 보이고 그녀의 신뢰를 얻진 말자.
"전 에니시엔 같은 강한 사람이 아니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후훗, 잘 생각했어. 그래야 너 대신 죽을 사람의 희생이 헛되지 않는 거야."
난 저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자신은 누군가를 대신해 죽더라도 누군가가 자신 대신 죽지는 않기를 바라는 저 마음. 과연 인간이 가질 수나 있는 걸까?
그녀는 인간이 아니니 가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난......
"미안해요."
"괜찮아. 네가 날 버리지 않고 같이 남겠다고 말했더라도 난 비슷한 대답을 했을 거야. 어느 쪽이나 날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내 수고를 헛되이 한다며 화를 냈을지도?"
에니시엔은 생긋 웃으며 마저 말했다.
"특히 이네스가 나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면 난 정말 화를 냈을 거야. 내 친구 노라가 그녀를 보호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으니까. 어찌 보면 벤 너도 그녀의 소중한 친구니까 벤이 남겠다고 말한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 네 선택이 이네스를 힘들게 할 테고 나 역시 양심의 가책을 받을 테니."
말만 저렇게 명쾌하게 하는 걸 아닐 것이다. 브랙스라는 사람, 아니 좀비는 보나마나 죽음을 각오하고 혼자 남으려고 했겠지. 다른 사람도 에니시엔을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말하는 대로 선택을 내렸겠지. 브랙스를 위해서, 친구들을 위해서, 세계의 중심을 위해서.
그러고보니 그녀는 노라와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닌 것 같다. 나이 차가 상당한데......노라는 60대고 에니시엔은 260세가 넘었으니. 그러고도 친구라니 희안하다.
"그러고보니 노라와 에니시엔은 친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에니시엔이 나이가 훨씬 더 많지 않나요?"
"숙녀의 나이를 주워들었구나?"
에니시엔이 눈을 흘기며 책을 집어들자 나도 그에 맞서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의 귀는 열려 있으니까요."
"흐응, 그랬지.
들었다시피 나와 노라의 나이차는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어마어마하지. 고스트와이즈 기준에서 본다고 해도 어린 이모와 조카 정도의 나이차이기도 하고, 좋게 봐야 큰언니와 막내 차이지. 노라 어머니와 나는 서로 언니 동생하는 사이인데 우리 둘 나이차가 50세 정도밖에 안 나. 장녀와 차녀 정도는 아니지만 맏딸과 셋째 딸 정도의 나이차밖에 안 돼."
"흐응, 그런데 어쩌다가 노라와 에니시엔의 사이가 언니와 여동생처럼 됐나요?"
에니시엔은 싱긋 웃으며 수통을 열더니 물을 몇 모금 마신 다음에야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냥 내가 노라를 많이 귀여워해주었거든. 노라의 조부모님께서도 날 많이 예뻐해주셨고. 나와 노라는 같은 침실을 쓰는 사인데 뭐."
"흐음......이야기가 나온 김에 에니시엔의 과거사도 좀 말해주세요."
"그래."
그때, 뒤에서 무언가 들썩이는 소리가 났다. 난 황급히 검을 집어들었지만 에니시엔이 날 제지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엘과 노라였다. 에니시엔은 눈도 좋은 모양이다.
#48
노라 덕분에 즐거워진 식사를 끝마치고(어떻게 알았는지 이네스도 식사가 준비되자마자 일어났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에니시엔 앞에 다들 옹기종기 모였다. 그녀는 이네스가 일어난 걸 보고 더욱 만족해했다.
"이야기는 청중과 화자의 비율이 들어맞을 때가 가장 재미있는 법이지."
에니시엔의 말이었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이지만 이네스는 키득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청중이 청중으로서 합격이라면 더더욱 재미있고."
"화자가 훌륭해야한다는 것도 조건이지. 뭐, 화자가 훌륭하긴 하구나."
잠시 우리가 웃느라 주위가 시끄러워진 사이 에니시엔이 기습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흐응, 참 색다른 방식으로 청중을 조용하게 하는군.
에니시엔도 단순히 나하고만 이야기하다가 청중이 늘어나니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그래도 무엇이든 산뜻하게 시작하는 그녀답게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도입부조차 없었다.
"난 고스트와이즈에 있는 가문인 세넨데즈 가에서 264년 전에 태어났어. 노라 어머니보다 53세는 더 어리고 노라보다는 나이가 많지......."
에니시엔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노라 어머니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노라의 어머니는 그녀를 마치 동생 정도로 생각해서 그녀를 많이 귀여워해주었고(사실 상상하기 힘들다.) 노라의 어머니와 좋은 가정 덕분에 그녀는 순탄한 성장기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성장기 도중 그녀는 우연한 사건 때문에 그녀가 강력한 영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접촉한 유령은 엘렌이라는 유령인데 엘렌은 음악에 심취한 그녀로 하여금 영매로서 프로핏, 즉 예언자들 중 하나가 되어 영매의 능력을 발휘하게끔 설득했다.
사실 예언자들의 직종은 제각각이었다. 무언가 매우 특출나는 분야가 있는 전문가들이 흔히 예언자로 선출되는 것이다. '예언자'라는 단어의 뜻과는 달리.
좌우겐 에니시엔은 엘렌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덕분에 예언자들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고 그 열정은 지금까지 이어져오면서 그녀로 하여금 예능 인생을 지금까지 영위하게 하고 있다.
그녀는 강한 영매였고, 유령들과의 접촉에 능했다. 그 덕에 그녀는 기도라던가 의식 같은 자리에 자주 불려나갔고 그런 곳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120세가 되던 해에 정식 예언자로 승격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성인이 된 그녀는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그녀는 애당초 자신의 노래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했고, 언제나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소 힘들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쌓아올리고 훌륭한 악사들과 가수, 바드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했다.
그 와중에 글렌이라는 인간 남자를 만났다. 그녀가 맨 처음 같이 여행을 떠난 상대는 그 남자였다. 에니시엔에게 반한(그녀의 말로는 글렌이 나중에 자신에게 프로포즈했다고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고 했다.) 글렌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고스트와이즈들의 고향을 떠나 여행을 하자고 종용했고, 그녀는 이번에도 받아들였다. 음악가로서, 가수로서 해보지 못한 꿈이 있었다.
그와 그녀의 여행은 생각만큼 순탄치는 않았다. 글렌은 서글서글한 성격의 좋은 남자였고, 에니시엔은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와 그녀는 수많은 고생을 하며 세계의 중심을 여행했다. 여행이라기보다는 방황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합했다. 좌우간 여행의 결과로 에니시엔은 많은 지식과 예능인들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이 여행은 3년만에 파국을 맞이했다. 여행 중 글렌이 죽은 것이다. 글렌은 메이스를 쓰는 전사였는데 에니시엔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인 그를 기억하기 위해 아직도 그의 메이스를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그 후 몇 년은 에니시엔에게 힘든 시기였다. 그녀는 글렌의 죽음으로 인해 많이 상심했고, 영매로서의 능력을 활용하여 글렌과 자주 접촉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대지를 방황하며 무녀 노릇을 하거나 발전된 도시 국가를 전전하며 공연을 했다고 했다.
고스트와이즈에게는 짧은 그 시련의 시간 동안 그녀는 많은 것을 얻었다. 마음의 상처를 회복한 그녀는 음악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여행을 다시금 준비하고, 시작했다. 그 여행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었다. 음악도 들어갔고 무엇이든 체험해보자는 욕구와 인간 사회에 대한 이해 등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을 망라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고스트와이즈들의 고향에는 어쩌다가 돌아갈 뿐이었다. 고스트와이즈들은 그런 그녀에게 '바다 철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글렌이 죽은 지 4년 후로부터 그녀가 190세가 되는 기간 사이가 그녀가 여행한 시간이었다. 가히 80여년간 세계를 전전한 셈이다. 그 동안 인간이나 고스트와이즈,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여행하기도 했고 혼자 대지를 방황하기도 했었다.
여행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즐겁기는 했지만 온갖 고초가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설원에서 웬디고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기도 했고 살인 사건 용의자라는 누명을 써서 며칠간 고생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 기나긴 여행과 글렌과 함께한 시간은 그녀를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려주었다.
190세가 된 그녀는 오래 쌓이다못해 굳어진 여독을 풀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실 내 생각에는 애정이 많은 그녀로서 그만 친지들을 보고 싶어서 돌아간 게 아닌가 싶지만. 좌우간 그곳에서 그녀는 '후광의 예언자' 칭호를 얻었다. 그녀의 여행은 인간 세계에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베풀었고 그것 때문에 그녀가 그 자리에 올라선 것 같다고 말하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190세부터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그녀를 환대하는 동족들 사이에서 눌러살며 온갖 즐거움을 만끽했다. 노라가 태어난 것도 그 시기였다. 에니시엔은 노라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갓난아기 시절 노라를 매번 안고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에니시엔이 애까지 낳았냐고 사람들이 수군거린 적까지 있다고 하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에니시엔은 노라와 함께 한 시간이 행복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둘은 얼마나 절친했는지 에니시엔은 노라의 집에서 살다시피했고 심지어 옷가지까지 싸들고 와서 노라의 집에서 몇 달간 머물기까지 했었다. 뿐만 아니라 침대까지 같이 쓰는 사이였다. 에니시엔은 노라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노라도 점점 성장하며 고스트와이즈 명문가 자제다운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런 노라에게 '불상사'가 덮치자 에니시엔은 그녀의 보호자처럼 행동했다. 노라의 부모님과 함께 노라를 위해 그녀의 아픔을 돌봐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은 것이다. 다만 노라의 부모님과는 조금 다르게 에니시엔은 전적으로 노라의 의견을 존중했다.
에니시엔은 노라의 정신적 충격을 치료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 충격은 자신의 힘으로도 역부족이었다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노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난 내가 힘들 때 언니가 옆에 있어줘서 좋았어."
그러다가 약 3년 전, 고스트와이즈의 고향을 찾아온 한 인간 여행자 집단을 만났다. 그들이 바로 엘 일행이었던 것이다. 일행들 중 유령에 씌인 사람을 위해 유령에 익숙한 그녀가 치료를 위한 '무녀'로 선정되었다.
에니시엔은 능숙하게 유령에 씌인 환자를 치료했고 환자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환자는 엘의 일행 중 한 명이었던 루소라는 여자였다.
에니시엔이 루소를 치료하는 과정을 보고 감탄한 엘 일행은 에니시엔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에니시엔은 노라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마음이 없었다. 에니시엔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건 전적으로 루소의 역할이 컸었다. 루소는 에니시엔에게 음악을 배우고 싶다며 그녀에게 접근했고, 에니시엔은 그 말에 솔깃하여 루소에게 음악을 가르치다가 루소와 친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두 여성이 새 우정을 싹터가는 사이 루소가 흘리듯 말한 노라의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지고의 음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에니시엔은 결국 이들을 따라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 생각에는 사실 에니시엔이 정이 많아서 루소에게 마음을 준 것도 이유 중 하나가 될 것 같지만.
에니시엔은 루소를 비롯한 엘 일행과 본격적인 모험을 치르게 되었다. 에니시엔은 짐짓 겸손하게 말하려고 한 모양이지만 말을 들어보니 에니시엔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엘 일행과 에니시엔의 여행은 가히 서사시로 쓸 만한 큰 이야기거리라 에니시엔이 모험담을 늘어놓는 사이 이미 해가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그러나 이 여행의 끝도 산뜻하지는 못했다. 모험의 끝자락에서 에니시엔과 그녀의 동료들은 지옥의 문을 닫는 일까지 맡게 되었고 결국 에니시엔과 브랙스의 노력으로 인해 성공했으나 브랙스 역시 죽고 말았다.
엘의 말로는 브랙스가 죽고 에니시엔이 실종되자 일행들은 모험의 목적을 상실하고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버렸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분쇄된 건 아니지만 에니시엔과 브랙스가 없으니 그 후의 모험이 힘들 건 틀림없었고, 무엇보다 그 모험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들은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에니시엔은 그 후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고 공연과 다른 소일거리를 주로 하게 되었다. 물론 그 '지고의 음률'에 대한 꿈도 잃지 않았기에 고향에 돌아가지는 않았다. 일행들을 다시 모아볼까 생각도 하면서.
에니시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드디어 끝났다. 한 사람의 인생은 왕국의 역사만큼 길다더니 간추려 말해도 이 정도로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