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여관 주인은 메넨데즈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에니시엔이 방을 바꾸고 다른 일행들이 쓸 방도 배정해달라고 하자 조금 난처해했지만 에니시엔은 그에게 여관비를 두둑하게 줌으로써 그를 조용하게 만들어버렸다.

난 좀 미안한 마음에 그녀에게 말했다.


"저......에니시엔, 그럴 필요까지야......"

"됐어. 친구 사이에 돈이 무슨 대수니."


서글서글한 성격의 에니시엔도 참 마음에 들었다.

에니시엔은 남녀 따로 방을 쓰자며 에니시엔과 노라, 그리고 이네스 이렇게 셋이서 3인실을 쓰고 나와 엘이 2인실을 쓰자고 제안했다. 모두들 그 의견에는 적극 찬성이라 만장일치로 방 두 개를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에니시엔과 노라, 이네스가 묵는 3인실은 2층에 있는 소형 로비에 딸려있고 나와 엘이 묵는 방은 여자들이 쓰는 방을 마주보는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에니시엔과 노라, 이네스는 아직도 1층에 있는 목욕탕에서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왜 지하에 목욕탕을 안 만드는지 궁금해서 탈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에니시엔에게 묻자 그녀는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물을 데우려면 뭐가 필요하지?"


......그렇지. 지하에서 물을 데우겠답시고 나무를 태웠다가는 매캐한 연기가 지하를 몽땅 메울 게 아닌가. 물론 환기 시설을 잘 해두면 되지 않냐고 묻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물을 저장하려면 저수 설비가 필요하고 물을 대량으로 데우려면 역시 큰 시설이 필요할걸?

그런 방대한 시설은 지하에 배치하는 게 이상적인데 지하 2층까지 파고 내려가기에는 돈 문제도 크지. 제대로 된 목욕탕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데.

그리고 1층에 목욕탕이 있는 게 나쁘지는 않아. 지하에서는 화재 같은 사고가 생긴다면 탈출은 고사하고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것만 해도 큰 문제거든."


......그렇지. 지하에서 불이 난다면 기겁하는 게 당연하다. 건축학은 잘 모르지만 환기 설비도 돈을 꽤나 먹겠지. 그을음도 청소해야하는데다가.....아이구.

그때, 엘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세 여자가 나란히 들어왔다.

난 이네스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좀 늦었군요, 이네스."

"헤헷, 응. 에니시엔 이모하고......"

"이네스!"


에니시엔이 목소리를 높이자 이네스는 헤헤거리며 웃더니 노라의 눈치를 살피고서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에니시엔 언니하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했지. 아아, 오랜만에 씻으니까 몸이 개운해."


난 실실 웃으며 세 여자를 훑어보았다.

노라의 젖은 단발 머리는 너무 인상적이었다. 가운을 입고 발그레한 낯빛에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는 평소처럼 순결하고 귀여운 모습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빛내고 있었다.

이네스의 옷차림은 파격적이었다. 굉장히 긴 수건을 온몸에 두르고 어깨에 닿은 끄트머리를 방만하게 묶어둔 게 전부였다. 앙가슴이 다 비칠 정도로 방만한 차림새였다. 그런데 어째 수건을 확 내려버리고 싶은걸?

에니시엔도 굉장했다. 그녀도 긴 수건을 두르고 있었는데 오늘 홀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더욱 부각되는 몸매가 눈에 잘 들어왔다. 역시나 당장이라도 수건을 젖히고......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지?

이네스와 노라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함부로 앉았다가 옷이나 수건이 날리면 곤란하니까. 반면 에니시엔은 방만한 태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서......

아앗.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이네스가 아니라 다른 여자가 나에게 윙크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별 수 없었다. 남자들이라면 다들 이해하겠지.

갑자기 에니시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까르르....베니, 내가 그렇게도 볼 게 많니? 그렇다고 눈 둥글게 뜨고 입까지 헤벌레 벌릴 필요는 없잖아. 하튼 요즘 애들은 이상해."


으윽, 제대로 걸렸군. 게다가 애라니? ....으음, 생각해보니 에니시엔이 보기에 난 갓난아기하고 다를 게 없겠군. 그나저나 에니시엔은 취향이 의심스러워.

에니시엔은 낯가림을 하지 않는 성격인지 이내 내 뒤에 오더니 날 데리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내 어깨를 주무르며 두드려주다가 갑자기 귓불에 입을 대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소곤거려서 간지럽게 만든다던가 내 어깨 너머에 머리를 내밀고 자기 머리카락을 이용해 장난을 치는 등...우아악, 간지러워!


"우우웃! 간지러워요!"

"헤에에, 베니 오빠 잘 생겼네?"


......정말 이상해.

에니시엔이 한참 날 가지고 놀리고 있을 때 노라가 날 구원했다.


"언니? 그 수원 말인데요?"

"아아, 수원? 응, 오염됐어. 나도 처음 온 날 그 물을 마시고 끙끙 앓는 바람에 고생좀 했지. 사실 지금 마을에서 사용하는 생활용수를 정화해주고 있는 것도 나야."


에니시엔은 내 어깨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제길, 오산이었군.


"수원이 오염됐다라......원인이 뭔지 아세요?"

"조사해보니까 악령술사가 한 짓 같더라. 방향을 짚어보니 수원지인 칼루가 호수 근처의 수로에서 일어나는 일 같던데. 거기 묘지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


좋은 정보군. 그러니까 그곳에서 물을 오염시키고 있을 놈팽이를 잡아다가 족치면 된다? 인위적인 오염이라면 자연적 내지 초자연적인 오염보다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지?


"유령들이 나에게 알려줬지. 흥흥, 제 아무리 날고 뛰는 강령술사라도 후광의 예언자[Prophetess of Halo. 남성형의 경우에는 Prophet of Halo.]가 온 것까지는 모를걸?"


후광의 예언자라...그게 뭐지? 아까도 들어본 말이지만 지금까지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내 머리속에 아예 없는 말인 걸로 보아 배우지도 않은 모양이다. 노라와 이네스, 엘은 다 알고 있는 눈치라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데......그런데 일단 빠져나가고 보자. 일단 저 손부터 치우......윽!


"흐응, 어딜 가, 오빠."

"아악! 내가 왜 당신 오빠에요!"


에니시엔이 뒤에서 날 껴안아버리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제기랄, 숨좀 작게 쉬어라. 흥분되서 미치겠다고.

그녀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웃기 시작했다. 내가 울상을 짓는 순간 엘이 나를 구원했다.


"식사나 하러 가자. 배고파 죽겠다."







#41







격렬한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에니시엔에게 하고픈 '사무적인' 질문이 좀 많긴 했지만 첫날부터 머리 싸잡고 대책을 마련할 필요는 없겠지.

드르렁!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굉음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엘이 코고는 소리가 악몽처럼 들려왔다. 으윽, 저게 아까 그 굉음이었군. 너무 코를 골면 안 좋다는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나는 엘에게로 다가갔다. 옆으로 눕혀주면 좀 나아지겠지.

하지만 엘이 덩치가 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축 늘어져 인사불성이 된 장정을 옮기는 건 힘든 일이다. 몇 번을 노력한 끝에 간신히 엘을 옆으로 눕혀줄 수 있었다. 그래도 옆으로 눕혀주니 코를 골기는 해도 소리가 좀 잦아든 게 확실히 느껴졌다.

갑자기 목이 말랐다. 나는 목도 축일 겸 방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시간에 마실 게 있을 법한 곳은 홀뿐이겠지.

방문을 열자 가장 먼저 들려온 건 귀에 익은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난 재빨리 복도를 뒤덮고 있는 어둠 속으로 숨었다.

홀에는 아직도 양초가 타오르고 있어서 홀은 환했다. 그곳에 에니시엔과 노라가 앉아 있었다. 두 여자는 마치 친한 누이처럼 서로 붙어 있었다.

내 귀에 먼저 들려온 건 에니시엔의 목소리였다.


"너도 많이 변했구나."

"응..."

"네가 끼고 돌던 꼬마 아가씨도 숙녀가 되었고."


노라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볼에 손을 댄 에니시엔은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흐음, 정말 많이 친한가보네.

노라가 주저하며 말문을 여는 게 보였다.


"저......언니는 그 동안 뭐했어?"

"나? 나야 늘 무위도식이지. 그 동안 대륙을......"

"나 보고 싶지 않았어?"

"으이그, 철부지!"


노라가 말허리를 자르고 바로 묻자 에니시엔은 그녀의 볼을 잡아당겼다. 노라가 눈을 찌푸리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이 철부지야, 앞으로 뭐하고 살 생각인데 아직도 애처럼 살아?"

"우웅......사실 나는...."


갑자기 말을 끊은 노라는 에니시엔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에니시엔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아, 아....그러니까, 네, 네가 아스모테가 남긴 서적을 찾아오기로 했단 말이야?"

"응."

"왜 그런 위험한 일을...."

"그걸 찾아오면 고스트와이즈의 예언자들[Prophet.]과 사제들[Cleric, Vesta.]이 내 처지를 굽어봐주기로 했거든."

"굽어봐준다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으응....나하고 이네스가 같이 살 수 있도록 노력해주겠대."

"....하지마."


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에니시엔이 말을 이었다.


"달성할 수도 없는 일에 네 목숨을 걸지마. 아스모테가 남긴 서적, 억겁의 세월 동안 수많은 고스트와이즈들이 찾으려고 노력했던 게스타이[Gestae]를 네가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아?"

"할 수 있어. 아니, 할 거야."


노라의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가망없는 임무지만 난 실패한 이들의 전례를 보며 열심히 공부했고, 어느 정도 게스타이에 대해 알아낸 것도 있어. 그리고....난 이네스가 내 품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그때까지 이네스가 날 기다려줄지 자신이 없어...그래서 말인데..."


말끝을 흐리는 노라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체 게스타이가 뭘까? 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노라 아타나시오스 같은 전사조차 찾아올 수 없을 거라고 에니시엔이 딱 잘라 말하는 걸까?

내 궁금증은 노라의 말 때문에 묻혀버렸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 대신 이네스를 맡아줘."

"노라."


에니시엔은 노라의 손을 잡으며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의 손을 잡은 에니시엔의 손은 그녀의 손바닥에 떨어져 있던 눈물을 지워버렸다.


"그러지 마. 네가 그런다고 이네스가 좋아할 거 같아?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바보 같은 이야기는 하지마. 죽어도 된다는 미치광이 광신자처럼 굴지마.

아무리 네가 죽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네 죽음은 큰 슬픔이란다. 이네스가 널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는지 잘 알겠지? 오늘에서야 다시 만난 나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어. 안 그러면 그 애가 내 품에 달려들 리가 없었겠지."

"......"

"바보처럼 울지마. 자, 봐. 지금 이네스가 얼마나 활달하고 아름답게 자라났니? 하지만 네가 죽는다면 이네스는 눈물을 벗삼아 살게 될 거야. 네가 죽는 건 네가 이네스와 헤어진 뒤 그토록 시달렸던 슬픔을 이네스에게 전가하는 것밖에 안 돼. 죽는다는 이야기는 하지마."

"하지만......난 이미 서약했어. 반드시 게스타이를 구해오겠다고."


에니시엔에게 안긴 채 울먹이는 노라에게 에니시엔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하고 같이 가자. 너 같은 철부지를 그런 진흙탕 속에 던져놓자니......"


잠시 머뭇거리던 에니시엔이 말문을 이었다.


"애 버려두고 도망치는 아줌마가 된 기분이란 말이야."

"푸흡!"


노라가 간신히 웃음을 터뜨리자 에니시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체, 키스도 못해봤는데 이게 뭔 꼴이람. 연애도 못해보고 이렇게 삭아버린 것도 섭섭한데 이제 와서 철부지 아가씨 샤프롱 노릇이나 해줘야한다니."


말을 마친 에니시엔은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구경거리는 다 끝났으니 이리로 나와, 이 악당아!"


난 당황한 나머지 억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사례가 들어버렸다. 두 여인의 중요한 사생활과 그 게스타이인지 뭔지도 엿들어버렸는데 에니시엔이 날 불렀으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켁, 켁켁!"


노라는 켁켁거리는 날 보며 별로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았고, 에니시엔은 탐욕스러운 눈빛을 번득이며 나에게 말했다.


"빨리 안 와? 사례가 들었다면 얼른 누님 앞에 오는 게 좋을 텐데? 꼭 안아줄 테니!"


그녀의 말은 내 목 건강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얼른 촛불 앞에 네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널 침대로 끌고갈 거야, 빨리 와, 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