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OD(트라이포드) - 글 : RhythmNation(mordenmania)
글 수 33
#36
우리 중에서 가장 늦게 일어난 탓에 뒤늦게 식사 대열에 합류한 엘은 기어코 늦잠 버릇을 고치고 말겠다며 투덜거렸다. 으음, 그럴 만도 하다.
"야외에서 급조한 음식이라 종류도 부족하고 맛도 자신이 없네요. 좀 더 많은 식재료가 있다면 좋을 텐데..."
노라는 여행 중이라 싱싱한 재료를 구하지 못했다며 무척이나 아쉬워했지만 정작 요리를 맛보는 입장인 우리들로서는 배부른 소리였다. 처음 접한 음식들이 많았음에도 그녀의 음식들은 내 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난 나다운 방식으로 노라에게 감상을 피력했다.
"다시는 신전에 못 돌아갈 거 같은데요."
"왜요?"
순진한 노라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본 나는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노라 때문에 신전 막사에서 먹던 음식들의 가치를 의심하게 됐거든요."
그 말을 들은 노라는 피식 웃었다.
노라가 만든 요리 중 '페이조아다콤플레타'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요리가 있었다. 베이컨이나 소시지 같은 건조 육류를 약간 첨가한 콩과 쌀로 된 요리인데 정말 특이한 요리라 이것저것 잡지식을 접한 나로서도 생소한 음식이었다. 생소하면 어떠랴. 맛있으면 그만이지. 특히 엘은 이런 음식이 취향인지 마치 고향 내지 천국에 와 있는 게 아니냐는 듯한 눈빛을 내비쳤다.
아쉬운 게 있다면 노라는 나와 엘의 식성을 잘 파악하지 못했는지 음식을 별로 안 준비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녀가 차린 음식 그릇에 치열하고도 전격적인 공격을 가하자 음식물 부스러기를 제외하면 아무런 생존자도 남지 않게 되었다. 특히 엘은 게걸스러운 식사 매너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일행들의 식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들이 빈 음식 그릇에 아쉬운 눈길을 주자 노라는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흐음, 저렇게 허둥댈 필요까지야 있나.
"저, 저, 더 만들까요?"
"아니에요. 오늘 일정도 바쁘니 슬슬 출발하죠."
"네......"
노라의 목소리는 금세 가라앉았다. 순진한 걸까 아니면 대인 관계에 겁이 많은 걸까?
하여간 난 위로한 마음이 생겨서 그녀에게 한 마디 건넸다.
"점심 식사도 부탁해요. 헤헷."
내 말을 들은 노라는 빙긋 웃었다.
우리는 내 재촉에 따라 재빨리 짐을 꾸렸다.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마을의 운명이 우리의 가슴을 죄어들었다. 제길, 식사 시간때만 해도 얼마나 편안했는데...음식이 맛있어서 걱정을 잊었던 것뿐인가?
다들 숙련된 여행자라 그런지 짐을 꾸리는 건 빨랐다. 모두들 짐을 다 싸자 내가 말했다.
"대로도 상대적으로 위험해졌다고는 하지만 숲이 안전해진 건 아닌 만큼......"
"대열 말이니?"
이네스의 말이 내 말허리를 자르며 들어왔지만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네스가 말했다.
"내 엄마가 앞에 서고 나와 네가 뒤에 서고 엘이 맨 뒤에 서면 어떨까?"
"엘이 장거리 무기를 지닌데다가 후위로서의 역할을 감안한 것이군요."
그때, 엘이 끼어들었다.
"아냐. 덩쿨 같은 방해물을 헤치고 지나가기에는 팔치온이 제격인데 노라 님이 가진 무기들을 보니 대부분 경장비에 불과하더라. 그리고 내가 길라잡이 역할을 맡고 있었으니 계속 내가 안내하는 게 낫지 않을까?"
"흐음......그런가? 엄마, 활 쓸 줄 알아요?"
노라는 자신의 딸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엘에게 활과 화살을 청했다. 엘이 활과 화살을 건네주자 그녀는 번개 같은 속도로 활을 쏘았다.
탱!
"크어억!"
화살이 너무 빨라서 처음에는 화살을 던진 줄 알았다. 하지만 난 저 솜씨를 감상할 계제가 아니다. 화살을 쏜 이후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노라를 제외한 세 사람은 비명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끔찍하게 생긴 생물 하나가 이미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눈은 하나만 달리고 끈적이는 점액이 묻은 어두운 녹색 피부에 축 늘어진 두 손과 두 발......
"우욱!"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왔다. 그 놈은 화살이 너무 빨라 눈을 감지 못한 듯 눈에서 피를 흘린 채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잔뜩 일그러진 큼직한 안구를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대, 대체 저게 뭔가요, 엘?"
찬물 세례를 맞은 듯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 대신 이네스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저런 생물은 보기 힘든 건데......마스타바 크라울러잖아? 우음......"
"그, 그게 뭔데요?"
"고대 시대때 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으로 활용된 곳들 중에는 늪이 되버린 곳도 꽤나 있는데, 늪에서 많이 보이는 놈이라 저런 은유적 명칭이 붙은 거야. 저 눈에는 강력한 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상대하기 참 힘든데......"
그녀는 말을 멈추고 가슴을 조금 두드렸다. 그녀도 속이 울렁거리는 듯 안색이 좋지 않았다.
뒤에서 노라가 말했다.
"마스타바 크라울러의 눈에 박힌 화살좀 뽑고 오세요. 당분간 화살을 얻기는 힘드니 한 발이라도 아껴야..."
내가 얼른 대답했다.
"이 역겨운 녀석의 눈에서 뽑은 화살을 어떻게 써요!"
#37
결국 이런 식의 결정이 내려졌다.
숲이나 늪지, 정글에서는 엘이 앞장서기로 했다. 노라는 팔치온마저 다룰 줄 알아서 우리를 기겁하게 했지만 이런 곳에서는 뒤에서 나타나는 적이 더 위협적이라고 엘이 강조한데다가 노라가 보여준 궁술이 워낙 감명깊은 나머지 그녀가 중간에 선 나와 이네스, 그리고 앞에 선 엘을 후방에서 보호하는 형태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지형이 바뀌면 엘과 노라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노라는 시력도 굉장히 좋고 귀도 밝아서 누군가를 발견하는 데에는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코가 굉장히 민감한 엘이 이런 울창한 숲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라의 주 무기인 지팡이는 길이가 2m에 달하는 것이라 팔치온보다는 행동에 제약이......생길 줄 알았지만 저렇게 지팡이를 무기로서 잘 활용하는 걸 보니 그 생각은 취소해야겠다. 하지만 어쨌든간에 노라의 궁술도 있고 해서 그녀가 뒤에 서는 게 났겠다.
노라를 만나고서 이틀 정도 지난 날, 해가 질 무렵에 우리는 좋은 소식 두 개와 나쁜 소식 하나를 접할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은, 마을 근처에 도착하여 오늘 밤 내로 마을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예상과는 달리 마을은 몇 번의 전투를 치른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겉보기에는 멀쩡했다. 나쁜 소식은......
벌써 밤이다. 제기랄.
노라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숲을 건너오느라 예상(대로와의 비교가 아니라 숲을 경유할 경우 선착장에서 마을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 말이다.)이 다소 어긋났을 거라며 오늘은 일단 마을 안에 들어가 대략적인 상황을 살피고 쉬자고 했다. 오늘따라 배낭이 왜 이리 무거울까.
"무거워요, 벤?"
노라의 말이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고 자신의 짐을 짊어진 채 시종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까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갑옷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그녀의 몸을 지켜주는 건 그녀가 좋아하는 하얀 코트(무릎팍을 전부 가릴 정도인만큼 꽤나 크다. 좀 치렁치렁한 옷 같기도 하고.)와 안에 입은 셔츠와 바지뿐이다. 저렇게 입어서야 칼이라도 한 대 맞았다가는 몸이 성하지 못하겠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누군가에게 맞을 만한 실력이 아니다. 심지어 어제 만난 새스쿼치[Sasquach. 전승에 따르면 북미 산맥에서 서식한다고 알려진 영장류를 모토로 한 괴물. 괴력을 가지고 있다.]를 가볍게 제압하는 그녀의 솜씨는 전사라면 누구나 반할 만한 솜씨였다.
그런데 갑자기 노라가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으윽, 그러고보니 지금껏 대답까지 안 하고 있었군.
"괘, 괜찮아요."
내 대답을 들은 노라는 내 건강이 심히 염려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 맑은 눈빛을 보는 나로서는......
"조, 조금 춥긴 해요."
"이거 걸쳐요. 그리고 짐은 저 줘요."
난 이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살풋 웃을 뿐이었다. 으음, 어째 나를 비웃는 듯한 눈빛이잖아?
그래도 무겁고 추운 건 별 수가 없었다. 저녁도 못 먹고 강행군을 하다보니 오지게 춥고 짐도 무거웠다.
결국 난 노라에게 짐을 건네주었다. 내 짐을 받아든 그녀는 잠시 발치에 내 짐을 내려놓더니 그녀의 코트를 벗어다가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잠시 내가 떨어뜨릴까봐 주저하는 것을 본 노라는 의아해하더니 이내 자기 머리를 한 대 치고서는 내 팔까지 코트 소매 안에 넣어주었다. 그녀가 나에게 옷을 입혀주기 위해 내 뒤에 와서 몸을 맞대고 옷을 입혀줄 때는 기분이 참 묘했다.
노라가 나에게 몸을 바싹 대고 내 뒤에서 옷을 입혀주는 건 이네스와 엘에게는 참 색다른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이네스의 악동 같은 미소가 내 눈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하긴, 입혀주는 것도 영 뉘앙스가 이상한데다가 이렇게 입혀주면 뒤에서 껴안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잖아.
"자, 다 됐어요."
엘은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경비병에게로 달려가 출입 수속을 밟기 시작했고, 이네스는 배시시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흐응, 낯뜨겁긴 해도 어째 또 해보고픈 경험이다.
엘과 대화를 나누던 경비병은 갑자기 날 부르더니 내 소속을 물었다. 난 실라 교단 소속 하퍼라고 내 신분을 밝히며 신분증 및 몇 장의 서류를 제출했다.
서류를 확인하던 경비병은 잠시 인상을 쓰며 서류들과 신분증을 읽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이 밝아진 그는 나와 우리들을 마을 안으로 통과시켰다. 흐흠, 사실 하퍼들은 신분을 숨기는 게 일상적이지만 이번 임무는 '구원' 성격이 강한 임무인데다가 언데드 공격을 받은 마을인만큼 경계심이 강화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 인상을 쓴 이유는 저 서류를 알아보기 힘들어서겠지.
데이마 섬에 자리잡은 유일한 마을인 포트 엘렌은 굉장한 크기를 가진 마을이라 도시라고 불러줘도 무방할 정도였다. 마을도 생각보다는 그리 흉흉한 것 같진 않았다. 수원이 오염된 마을같지는 않았다.
이네스가 말했다.
"이 마을에 누가 있는 걸까? 깨끗한 물을 잠시나마 쓰게 해줄 수 있는......"
"물어보면 알지."
이네스에게 대답을 던진 엘은 지나가는 경비병을 불렀다. 경비병은 장창과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였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근무 중 죄송합니다만 저희들은 오염된 수원 조사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인데 왜......"
생기가 돌던 경비병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엘은 질문을 삼켰다. 잠시 후 경비병이 대답했다.
"'우윳빛 크리스탈' 여관에 가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저도 이번 수원 오염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마을 주민들의 음용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정화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오염된 물을 정화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실례지만 그 여관의 위치와 그 분의 성함은......"
"이름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개 홀에 계신데다가 워낙 눈에 띄는 분이라 금세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여관은 마을 남부에 위치한 유일한 마을 광장에서 서쪽으로 약 12야드[약 10.97m]정도 가시면 흰 라벤더가 그려진 간판이 있는 건물이 보이실 텐데 그곳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엘은 경비병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와 이네스, 노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여행 때문에 지치기도 했지만 수원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법한 사람이 여관에 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우리 중에서 가장 늦게 일어난 탓에 뒤늦게 식사 대열에 합류한 엘은 기어코 늦잠 버릇을 고치고 말겠다며 투덜거렸다. 으음, 그럴 만도 하다.
"야외에서 급조한 음식이라 종류도 부족하고 맛도 자신이 없네요. 좀 더 많은 식재료가 있다면 좋을 텐데..."
노라는 여행 중이라 싱싱한 재료를 구하지 못했다며 무척이나 아쉬워했지만 정작 요리를 맛보는 입장인 우리들로서는 배부른 소리였다. 처음 접한 음식들이 많았음에도 그녀의 음식들은 내 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난 나다운 방식으로 노라에게 감상을 피력했다.
"다시는 신전에 못 돌아갈 거 같은데요."
"왜요?"
순진한 노라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본 나는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노라 때문에 신전 막사에서 먹던 음식들의 가치를 의심하게 됐거든요."
그 말을 들은 노라는 피식 웃었다.
노라가 만든 요리 중 '페이조아다콤플레타'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요리가 있었다. 베이컨이나 소시지 같은 건조 육류를 약간 첨가한 콩과 쌀로 된 요리인데 정말 특이한 요리라 이것저것 잡지식을 접한 나로서도 생소한 음식이었다. 생소하면 어떠랴. 맛있으면 그만이지. 특히 엘은 이런 음식이 취향인지 마치 고향 내지 천국에 와 있는 게 아니냐는 듯한 눈빛을 내비쳤다.
아쉬운 게 있다면 노라는 나와 엘의 식성을 잘 파악하지 못했는지 음식을 별로 안 준비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녀가 차린 음식 그릇에 치열하고도 전격적인 공격을 가하자 음식물 부스러기를 제외하면 아무런 생존자도 남지 않게 되었다. 특히 엘은 게걸스러운 식사 매너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일행들의 식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들이 빈 음식 그릇에 아쉬운 눈길을 주자 노라는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흐음, 저렇게 허둥댈 필요까지야 있나.
"저, 저, 더 만들까요?"
"아니에요. 오늘 일정도 바쁘니 슬슬 출발하죠."
"네......"
노라의 목소리는 금세 가라앉았다. 순진한 걸까 아니면 대인 관계에 겁이 많은 걸까?
하여간 난 위로한 마음이 생겨서 그녀에게 한 마디 건넸다.
"점심 식사도 부탁해요. 헤헷."
내 말을 들은 노라는 빙긋 웃었다.
우리는 내 재촉에 따라 재빨리 짐을 꾸렸다.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마을의 운명이 우리의 가슴을 죄어들었다. 제길, 식사 시간때만 해도 얼마나 편안했는데...음식이 맛있어서 걱정을 잊었던 것뿐인가?
다들 숙련된 여행자라 그런지 짐을 꾸리는 건 빨랐다. 모두들 짐을 다 싸자 내가 말했다.
"대로도 상대적으로 위험해졌다고는 하지만 숲이 안전해진 건 아닌 만큼......"
"대열 말이니?"
이네스의 말이 내 말허리를 자르며 들어왔지만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네스가 말했다.
"내 엄마가 앞에 서고 나와 네가 뒤에 서고 엘이 맨 뒤에 서면 어떨까?"
"엘이 장거리 무기를 지닌데다가 후위로서의 역할을 감안한 것이군요."
그때, 엘이 끼어들었다.
"아냐. 덩쿨 같은 방해물을 헤치고 지나가기에는 팔치온이 제격인데 노라 님이 가진 무기들을 보니 대부분 경장비에 불과하더라. 그리고 내가 길라잡이 역할을 맡고 있었으니 계속 내가 안내하는 게 낫지 않을까?"
"흐음......그런가? 엄마, 활 쓸 줄 알아요?"
노라는 자신의 딸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엘에게 활과 화살을 청했다. 엘이 활과 화살을 건네주자 그녀는 번개 같은 속도로 활을 쏘았다.
탱!
"크어억!"
화살이 너무 빨라서 처음에는 화살을 던진 줄 알았다. 하지만 난 저 솜씨를 감상할 계제가 아니다. 화살을 쏜 이후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노라를 제외한 세 사람은 비명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끔찍하게 생긴 생물 하나가 이미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눈은 하나만 달리고 끈적이는 점액이 묻은 어두운 녹색 피부에 축 늘어진 두 손과 두 발......
"우욱!"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왔다. 그 놈은 화살이 너무 빨라 눈을 감지 못한 듯 눈에서 피를 흘린 채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잔뜩 일그러진 큼직한 안구를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대, 대체 저게 뭔가요, 엘?"
찬물 세례를 맞은 듯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 대신 이네스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저런 생물은 보기 힘든 건데......마스타바 크라울러잖아? 우음......"
"그, 그게 뭔데요?"
"고대 시대때 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으로 활용된 곳들 중에는 늪이 되버린 곳도 꽤나 있는데, 늪에서 많이 보이는 놈이라 저런 은유적 명칭이 붙은 거야. 저 눈에는 강력한 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상대하기 참 힘든데......"
그녀는 말을 멈추고 가슴을 조금 두드렸다. 그녀도 속이 울렁거리는 듯 안색이 좋지 않았다.
뒤에서 노라가 말했다.
"마스타바 크라울러의 눈에 박힌 화살좀 뽑고 오세요. 당분간 화살을 얻기는 힘드니 한 발이라도 아껴야..."
내가 얼른 대답했다.
"이 역겨운 녀석의 눈에서 뽑은 화살을 어떻게 써요!"
#37
결국 이런 식의 결정이 내려졌다.
숲이나 늪지, 정글에서는 엘이 앞장서기로 했다. 노라는 팔치온마저 다룰 줄 알아서 우리를 기겁하게 했지만 이런 곳에서는 뒤에서 나타나는 적이 더 위협적이라고 엘이 강조한데다가 노라가 보여준 궁술이 워낙 감명깊은 나머지 그녀가 중간에 선 나와 이네스, 그리고 앞에 선 엘을 후방에서 보호하는 형태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지형이 바뀌면 엘과 노라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노라는 시력도 굉장히 좋고 귀도 밝아서 누군가를 발견하는 데에는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코가 굉장히 민감한 엘이 이런 울창한 숲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라의 주 무기인 지팡이는 길이가 2m에 달하는 것이라 팔치온보다는 행동에 제약이......생길 줄 알았지만 저렇게 지팡이를 무기로서 잘 활용하는 걸 보니 그 생각은 취소해야겠다. 하지만 어쨌든간에 노라의 궁술도 있고 해서 그녀가 뒤에 서는 게 났겠다.
노라를 만나고서 이틀 정도 지난 날, 해가 질 무렵에 우리는 좋은 소식 두 개와 나쁜 소식 하나를 접할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은, 마을 근처에 도착하여 오늘 밤 내로 마을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예상과는 달리 마을은 몇 번의 전투를 치른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겉보기에는 멀쩡했다. 나쁜 소식은......
벌써 밤이다. 제기랄.
노라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숲을 건너오느라 예상(대로와의 비교가 아니라 숲을 경유할 경우 선착장에서 마을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 말이다.)이 다소 어긋났을 거라며 오늘은 일단 마을 안에 들어가 대략적인 상황을 살피고 쉬자고 했다. 오늘따라 배낭이 왜 이리 무거울까.
"무거워요, 벤?"
노라의 말이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고 자신의 짐을 짊어진 채 시종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까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갑옷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그녀의 몸을 지켜주는 건 그녀가 좋아하는 하얀 코트(무릎팍을 전부 가릴 정도인만큼 꽤나 크다. 좀 치렁치렁한 옷 같기도 하고.)와 안에 입은 셔츠와 바지뿐이다. 저렇게 입어서야 칼이라도 한 대 맞았다가는 몸이 성하지 못하겠지만 지금 보니 그녀는 누군가에게 맞을 만한 실력이 아니다. 심지어 어제 만난 새스쿼치[Sasquach. 전승에 따르면 북미 산맥에서 서식한다고 알려진 영장류를 모토로 한 괴물. 괴력을 가지고 있다.]를 가볍게 제압하는 그녀의 솜씨는 전사라면 누구나 반할 만한 솜씨였다.
그런데 갑자기 노라가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으윽, 그러고보니 지금껏 대답까지 안 하고 있었군.
"괘, 괜찮아요."
내 대답을 들은 노라는 내 건강이 심히 염려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 맑은 눈빛을 보는 나로서는......
"조, 조금 춥긴 해요."
"이거 걸쳐요. 그리고 짐은 저 줘요."
난 이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살풋 웃을 뿐이었다. 으음, 어째 나를 비웃는 듯한 눈빛이잖아?
그래도 무겁고 추운 건 별 수가 없었다. 저녁도 못 먹고 강행군을 하다보니 오지게 춥고 짐도 무거웠다.
결국 난 노라에게 짐을 건네주었다. 내 짐을 받아든 그녀는 잠시 발치에 내 짐을 내려놓더니 그녀의 코트를 벗어다가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잠시 내가 떨어뜨릴까봐 주저하는 것을 본 노라는 의아해하더니 이내 자기 머리를 한 대 치고서는 내 팔까지 코트 소매 안에 넣어주었다. 그녀가 나에게 옷을 입혀주기 위해 내 뒤에 와서 몸을 맞대고 옷을 입혀줄 때는 기분이 참 묘했다.
노라가 나에게 몸을 바싹 대고 내 뒤에서 옷을 입혀주는 건 이네스와 엘에게는 참 색다른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이네스의 악동 같은 미소가 내 눈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하긴, 입혀주는 것도 영 뉘앙스가 이상한데다가 이렇게 입혀주면 뒤에서 껴안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잖아.
"자, 다 됐어요."
엘은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경비병에게로 달려가 출입 수속을 밟기 시작했고, 이네스는 배시시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흐응, 낯뜨겁긴 해도 어째 또 해보고픈 경험이다.
엘과 대화를 나누던 경비병은 갑자기 날 부르더니 내 소속을 물었다. 난 실라 교단 소속 하퍼라고 내 신분을 밝히며 신분증 및 몇 장의 서류를 제출했다.
서류를 확인하던 경비병은 잠시 인상을 쓰며 서류들과 신분증을 읽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이 밝아진 그는 나와 우리들을 마을 안으로 통과시켰다. 흐흠, 사실 하퍼들은 신분을 숨기는 게 일상적이지만 이번 임무는 '구원' 성격이 강한 임무인데다가 언데드 공격을 받은 마을인만큼 경계심이 강화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 인상을 쓴 이유는 저 서류를 알아보기 힘들어서겠지.
데이마 섬에 자리잡은 유일한 마을인 포트 엘렌은 굉장한 크기를 가진 마을이라 도시라고 불러줘도 무방할 정도였다. 마을도 생각보다는 그리 흉흉한 것 같진 않았다. 수원이 오염된 마을같지는 않았다.
이네스가 말했다.
"이 마을에 누가 있는 걸까? 깨끗한 물을 잠시나마 쓰게 해줄 수 있는......"
"물어보면 알지."
이네스에게 대답을 던진 엘은 지나가는 경비병을 불렀다. 경비병은 장창과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였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근무 중 죄송합니다만 저희들은 오염된 수원 조사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인데 왜......"
생기가 돌던 경비병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엘은 질문을 삼켰다. 잠시 후 경비병이 대답했다.
"'우윳빛 크리스탈' 여관에 가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저도 이번 수원 오염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마을 주민들의 음용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를 정화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오염된 물을 정화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실례지만 그 여관의 위치와 그 분의 성함은......"
"이름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개 홀에 계신데다가 워낙 눈에 띄는 분이라 금세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여관은 마을 남부에 위치한 유일한 마을 광장에서 서쪽으로 약 12야드[약 10.97m]정도 가시면 흰 라벤더가 그려진 간판이 있는 건물이 보이실 텐데 그곳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엘은 경비병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와 이네스, 노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여행 때문에 지치기도 했지만 수원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법한 사람이 여관에 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