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그렇군요."

"네."


으음. 거울이 있다면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오늘은 내가 불침번이다. 노라에게는 푹 자두라고 말은 했지만 그녀는 잘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고 오히려 내 말동무를 해주고 있었다.

방금 전 그녀가 나에게 말하길 자신은 언제까지나 우리 일행과 함께 다닐 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고스트와이즈 정부로부터 위험한 임무를 받고 그 임무를 이행하는 중인데 데이마 섬은 노라의 임무와 약간이나마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수원 조사 임무를 떠맡은 우리와 함께 다닐 여력이 생긴 것이라는 게 노라의 말이었다. 즉 언젠가는 헤어져야한다는 게 그녀의 말이었다.

노라는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전 이네스의 옆에서 떨어지고 싶지도 않고......이네스도 절 떠나지 못하게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임무는 벤의 임무보다도 더욱 위험한 임무이기 때문에 이네스와 벤, 그리고 핫산 씨를 그런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할 수 없어요. 제가 그런 위험한 임무를 하고 있다는 걸 이네스가 안다면 분명히 절 말릴 거고 말릴 수 없다면 제가 혼자 다니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에요."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분명히 그럴 거에요."


노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와 노라는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나 혼자 불침번을 서는 건 워낙 외로운 일이라 노라를 말동무삼아 이네스와 함께 여행하던 시절을 들려주었다. 이네스와의 첫 만남부터 자이언트를 만났을 때 이네스가 발휘한 기지, 그리고 놀을 소탕한 일과 지금까지 오면서 거친 일들......특히 이네스가 자기 어머니에 대해 말한 일들은 대서 특필하여 노라에게 잘 설명해주었다.

노라는 다른 것보다 나와 이네스와의 모험 같잖은 모험담에 많은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사실 내 이야기는 그녀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는지 그녀는 질문 한 마디도 던지지 않고 꾸준히 청중의 역할을 지켜나갔다.

노라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이야기는 자신에 대한 짤막하면서도 자세한 소개와 요즘 하는 일 정도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네스는 당신을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았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이네스는 어머니를 사랑해주는 착한 딸이라고 생각해요."


'사랑한다'와 '사랑해준다'의 어감이 이토록 다를 때가 없던 것 같다.

잠시 이야기가 잠잠해지자 그녀는 자신의 딸을 한 차례 굽어보고는 말했다.


"벤......"

"예?"

"벤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긴장해야겠는걸? 미녀 앞에서 밉보이기는 싫으니까. 윽, 또 무슨 생각을.

하여간 노라의 질문인 만큼 성심껏 대답할 생각에 질문하라고 대답해버렸다. 내 대답을 들은 노라는 호르르 한숨을 쉬고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초면에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죄송하지만......"


으윽, 싸울 때와는 달리 노라는 너무 수줍어해서 시원시원하지 못하다. 헹, 이런 면에서는 이네스가 더 나은데. 모녀지간에도 큰 차이가 있구나.

잡념에 한눈을 파는 사이 노라가 기습적으로 말했다.


"이네스가 아직도...절 좋아하던가요."

"네."


내 대답에는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다고 장담한다. 만약 거짓이 섞였다면 그건 이네스의 잘못이겠지. 난 그녀에게서 얻어들은 진실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린 것뿐이잖아.

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저......초면에 이런 질문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괜찮아요. 저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나요."


으음. 남의 집안일은 참견하지 않는 게 당연한 거지만 이네스는 나하고도 친한 만큼 이네스의 집안도 나에게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뭐랄까, 동화 속 주인공이 금단의 상자를 여는 듯한 기분이다.

다행히 상자의 주인이 나에게 선선히 열어도 좋다고 한 것 같다. 노라의 말에 용기를 얻은 질문을 던졌다.


"이네스와 어떤 문제가 있는 건가요?"

"후우..."


노라는 다시 한숨을 쉬더니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는 사람이 애가 탈 정도로 구슬프고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이네스가 제 이야기를 해줬을 거라 믿어요. 네, 솔직히 말할게요. 벤은 이네스의 좋은 친구잖아요.

전 이네스의 어머니지만 이네스를 데리고 키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지금도 이네스에게 엄마가 해줘야 할 일들을 못해줘서 너무나도 미안해요.

이네스는 이제 인간 사회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아름답게 자랐지만 그건 제 공이 아니에요. 이네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서..."


노라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난 재빨리 내가 할 말을 찾아내었다.


"미안해요. 제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괜찮아요...언젠가는 다들 알게 될 일이니..."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저렇게 낙심하는 모습을 보니 애처롭다. 난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만 자요. 벌써부터 많은 이야기를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야겠어요......"


난 노라에게 모포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이네스 옆에 가더니 모포를 덮고 몸을 눕혔다. 그녀가 눕는 걸 본 나는 모닥불에서 고개를 돌렸다. 빛에 너무 익숙해지면 어두운 곳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없단 말이야.

몸을 돌리며 난 노라에게 한 마디 던졌다.


"잘 자요. 내일도 힘든 여정이 기다리니."

"네. 당신도."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 귀여운 아가씨는 내가 불침번이라는 사실을 까먹었나?


"난 불침번이잖아요."

"참, 그렇지. 저...벤?"

"말해요."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대화하는 것도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등 뒤에서 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워 있어서 그런지 아까하고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고마워요. 벤. 당신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어요."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다가 노라가 난처해할지도 몰라서 말을 삼켜버렸다. 참, 아직도 저렇게 순진한 사람이 있다니.

사람은 아니지. 사실 인간에게 저런 순수한 심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도 감성적인 측면에서 믿을 수만 있다면 전혀 거리낌없이 대하는 저 태도. 하지만 저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언제까지나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닌 게 안쓰러웠다.







#35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새벽 이슬 맞고 밤을 새는 건 역시 고역이다. 말동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나야 신전에서는 밤을 새며 실력을 갈고 닦은 적이 많으니 밤을 새는 것 자체는 힘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수련할 때는 대개 혼자서 하니까 평소 같으면 말동무가 없어도 심심하지 않겠지만...지금은 다르다. 오지게 춥고 심심하기까지 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내 눈에 지평선에서부터 얼굴을 내비치는 태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피부를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으윽, 밤을 새면 피부에 안 좋지.

첫 눈이 내릴 시기라 오지게 추웠다. 아무래도 이미 꺼진 모닥불을 피워둬야 일행들이 따뜻한 아침을 시작할 수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부싯돌을 꺼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기겁했다.


"흐읍!"

"꺄아!"


십년 감수했다. 등 뒤에는 이미 노라가 내 등 뒤에 놓인 짐 속에서 부싯돌을 찾고 있었다. 사실 노라를 보고 놀란 나도 참 이상하지만 정말 이상한 건 어떻게 불침번조차 못 느낄 정도로 조용히 일어나서 내 뒤통수까지 다가올 수 있었냐는 것이다.

반면 노라는 내가 소리를 질러서 놀란 모양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쪼그려 앉은 채 불을 지피던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난 노라를 일으켜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아......놀랐잖아요."

"왜 놀라요?"


답답하긴.


"불침번을 서고 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누가 내 등 뒤에 있다면 어떻게 안 놀라겠어요? 만약 내 등 뒤로 온 게 노라가 아니라 몬스터였다면......"

"아아, 이해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몰래 일어나서......"


난 뒤늦게야 내가 내뱉은 말의 뉘앙스가 험악한 걸 눈치채고 말을 삼켰지만 노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참 귀엽네.


"몰래 일어난 건 아니에요. 원래 이렇게 조용하게 일어나는 걸요."

"음, 그래요? 부싯돌 이리 줘요. 다들 일어나기 전에 식사를 지어둬야하니."

"평소에도 벤이 식사를 만들었나요?"

"아뇨. 이네스와 번갈아가면서 했는데 오늘은 제가 불침번이라......"

"그럼 제가 할게요."


피곤했던 참인데 잘 됐네. 난 노라가 불을 피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부싯돌 두 개를 잡고 끙끙대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순식간에 불을 지폈다. 으음, 여행의 베테랑들은 이런 면에서도 남다르네.


"벤? 왜 그래요?"


으윽,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네. 내가 말을 어물거리는 사이 그녀가 수통을 가리키며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건넸다.


"세수하세요. 이네스나 엘이 일어난다면 식사한 후에야 세수할 수 있을걸요?"

"아, 네. 노라는 세수했나요?"

"전 이미 씻었어요."


...정말 대단하다. 노라가 불침번을 선다면 놀 같은 멍청한 놈들은 불침번이 없는 줄 알고 달려들겠는걸?

노라는 뭐가 즐거운지 싱글거리며 짐꾸러미 속에서 식료품들과 요리 도구들을 꺼냈다. 으음, 그런데 요리하다가 저 눈처럼 하얀 옷에 음식물이라도 튄다면 곤란하겠는데?

나도 요리는 좀 할 줄 알지만 내 실력으로는 어디까지나 음식물을 입에 쑤셔넣기 위해 적당히 혀를 달래는 수준의 맛밖에 내지 못한다. 그래도 거짓말 좀 보태서 '돼지 먹이만도 못한' 군용 식량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지만(나도 하퍼라 건조 식품을 비롯한 수많은 군용 식량을 '접해봐야만' 했다. 그 때의 기분은 말로 다 못할 것이다. 우욱.) 이네스의 솜씨에 길들여진 우리 세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녀는 휘파람까지 불며 꺼낸 식재료들을 조리하기 시작했다. 으음, 내가 하는 것과 좀 비슷하다. 밀가루 넣는 것도 그렇고, 버터도......그런데 저건 뭐지?

좌우간 나와 요리하는 방법이 틀리다고는 해도 그녀가 요리하는 내내 나는 피골이 상접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배고파 미치겠다. 아악! 그렇게 맛있는 냄새를 풍기지만 말고 좀 먹자고요. 이 정도 됐으면 먹을 때도 됐는데.


"아함...잘 잤다. 무슨 냄새야? 벤, 너 요리해?"


뒤를 돌아보니 내 옷가지를 베개삼아 자던 이네스가 일어나 있었다. 참 잠버릇 고약한 아가씨네. 아마 저 향긋한 냄새에 자극을 받은 모양이지.

그 사이 나는 이상한 빵을 바삭하게 굽고 있던 노라의 솜씨에 반해 있었다. 그래서 이네스에게 던져준 대답은 매우 심드렁했다.


"아뇨."

"그럼 설마 엘이?"

"......세수좀 하고 와요. 눈곱이 얼마나 달렸으면 앞도 못 봐?"


난 이네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고 이네스는 한참 후에야 깔끔해진 얼굴을 내 어깨 너머로 들이밀었다.


"어, 엄마?"


노라는 이네스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노라는 일단 나와 이네스에게 그 이상한 빵을 쥐어주었다. 우리 둘은 조심스럽게 그 빵을 씹어보았다.

우리는 빵을 씹고서 감상평을 내지도 않고 마저 다 먹어버리는 건 노라에 대한 실례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문을 열었다.


"다, 달착지근하다..."

"아냐, 고소해."

"달대도요."

"고소하다니까."


결국 나와 이네스는 빵을 다 먹고서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빵을 다 먹었을 때는 이미 노라가 요리를 끝내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