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치구이 공작소(ROOKI1의 WORKSHOP) - 작가 : rook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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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는 민준이 빌려준 더풀코트를 입고서 길을 나섰다. 민준이 몸집이-곰 네 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작은 편이라서 세나에게도 그럭저럭 크기가 맞았다.
어차피 오늘은 주말이니 좀 편하게 있어도 괜찮다. 특히 어제 빙마의 습격을 받은 경우에는 더더욱 휴식이 필요한 법. 세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겨울 햇살을 받으며 길을 걸었다.
상황은 이제 깃털처럼 가볍지만 마음은 납덩어리만큼 무겁다. 어제 재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다.
어제는 무엇을 했나요? 생애 첫 고백을 했어요.
어떻게 했나요? 좋아하는 애를 스토킹하다가 얼음 괴물의 습격을 당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애가 기사님처럼 뿅 나와서 구해줬답니다. 그 뒤에 목숨을 구해준 그 애 뺨을 때리고 고래고래 소리지른 뒤 고백을 했어요.
심하다. 이런 건 말로 설명해도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못 알아들어 먹겠다.
세나도 일단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고백에 대해서도 정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맑고 투명한 여름햇살이 내리 쬐는 가운데 잎이 무성한 떡갈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서 속삭이듯이 말해주는 것이었지 괴물이라던 지 진흙탕에 처박힌다던 지 하는 옵션은 들어있지도 않았고 넣을 생각도 없다.
세나는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뭐야 이게.
과연 이대로 재함이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생애 첫 고백이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그냥 학원가지 말까?
아침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있었으니 너구리 얼굴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생각할수록 더 가관이다. 이제 재함이 얼굴 보면 그대로 타 들어가서 잿더미가 돼버릴 것 같다.
"이세나, 집에 가는 거야?"
그리고 타이밍 좋게도 재함이 나타났다. 세나는 좁은 인도 한 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마주친다. 당황한 세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재함이는 흰색 후드티(웅진제지)를 입은 채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어제 일 때문에 할말이 있어."
어제의 어둠을 떠올리게 하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움찔한 세나는 재함이 무슨 말을 할지는 몰랐지만 그리 좋은 말은 아닐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재함은 베일처럼 창백한 햇살을 등지고 어둡게 입을 열었다. 재함이 후드를 뒤집어써서 그런지 두 눈이 두드러져 보인다.
세나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 때문에 손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진다.
"네가 습격 받았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마. 누구에게도, 언제까지나, 절대로 말하면 안돼. 나는 쫓기고 있어."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세나의 뾰족한 눈매가 동그랗게 변했다. 재함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고, 똑똑 부러지는 듯한 액센트는 면도날처럼 예리했다.
"나는 예전부터 많은 마를 죽였어.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에게 추적당하고 있지. 마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생각만 하는 녀석들이지만 뭐든지 별종은 있는 법이야. 나는 몇 달 전에 한 쌍의 마중에 하나를 죽였어. 그리고 짝의 원수를 갚으려고 다른 하나가 나를 쫓는 거야."
세나는 재함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제 재함의 모습은 두렵고 실적이고, 꿈결같았다. 그리고 세나가 직접 눈으로 본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런 주제에 싸움이 두려워서 숨어 다닌다고?
"맞서 싸우면 되는 거 아냐? 너는 강하잖아!"
재함이 쿡쿡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울 갈대처럼 힘이 없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웃음이다. 세나는 어제처럼 스멀스멀 이상한 기운이 밀려들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어제의 것이 얼어 부스러질 듯한 한기라면 오늘은 달무리처럼 슬픈 기운이다.
"싸운다면 내가 이길 거야. 하지만 나는 녀석을 상대할 자신이 없어. 내게는 그 녀석한테 치러야 할 죄값이 있는 거니까."
세나가 화내듯이 재함에게 소리쳤다. 마에게 죄값을 치르다니, 세나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사람을 죽이는 괴물 하나를 죽였다고 왜 네가 죄값을 치르는 건데?"
재함은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듯 눈을 치켜 떴다.
"아까도 말했지만 모든 것에는 별종이 있는 거야. 아무리 마라고 해도 착하게 살아가고 싶어하는 마도 있어. 나는 단지 마라는 이유로 죽였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었지. 그들은 마였지만, 마라고 죽어야 하는 건 아냐."
재함이 티에 달린 후드를 벗었다. 검은 눈동자가 밤이 내린 것처럼 반짝인다.
"난 살인자야. 그것도 죄를 피해 숨어 다니는 비겁한 살인자."
'숨어 다닌다고?"
세나는 어제 자기가 본 것을 떠올렸다. 결을 거두고 있던 재함의 모습. 결은 보통 무언가를 가두거나 숨기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어제의 것 같이 꽤 큰 결은 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세나는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불꽃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제 네가 나를 구해주러 왔을 때 네가 거둔 결도 싸움을 숨기려고 쳐두었던 거야? 그 마에게 숨기 위해서?"
재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는 나를 쫓고 있어. 누군가 마를 잡았다면 국가는 그것을 기록하게 되니까, 만일 내가 마를 사냥하다가 들켰다면 녀석이 나를 잡으러 달려올 거야. 학원에 다닌 것도 숨기 위해서야. 학원처럼 다양한 유술을 엄청나게 쓰는 곳이라면 아무리 예민한 추적자도 찾아내기 힘드니까. 때가 되면 나도 죄값을 치를 테지만 지금은 아냐. 할 일이 있으니까."
세나도 심각한 얼굴로 재함을 바라보았다. 재함의 이야기는 밝고 명랑한 양지에서 살아왔던 세나에게는 어두운 동굴의 창백한 생물들처럼 낯선 이야기였다.
"지금은 할 일이 있다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재함이 하늘을 흘끗 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하는 일이야. 너는 알지 못해도 돼."
"그리고 어제 네가 쓰러지기 전에 했던 말 있잖아."
생각에 잠겨있던 세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재함이 다시 후드를 뒤집어 쓰고 세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제 쓰러지기 전에 했던 말이라면...... 그거?!'
기절해버릴 기분이다. 기껏 최선을 다해서 잊어버렸는데.
"내일 학원에서 만나자. 저녁 사줄게."
재함은 그 말을 끝으로 웃으며 세나를 지나쳐갔다. 세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그대로 목만 돌아가서 재함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재함이 기쁘게 웃어주었다...... 처음으로. 기뻐해야 할까? 세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데고 생각해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재함이 걸어가는 길은 너무도 어두워서 세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삼치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