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탑승하신 트랜스텔러(Transtellar) TC121기는 대기권 돌입을 마치고 5천 피트 상공에 도달했습니다. 현재 동체 온도가 50도 이하로 내려갔으므로 창문 덮개를 개방하겠습니다.]

나지막한 진동음을 내며 내열플라스틱제의 창문덮개가 세라믹 타일 너머로 올라갔다. 어둠이 짙게 깔린 들판이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이 그 황량함을 가리고 있었지만, 여객기의 외부 카메라를 위한 탐조등이 켜지면서 인적도 불빛도 산도 나무도, 아무 것도 없이 그저 황색의 피폐한, 드문드문 말라붙은 풀들만이 솟아나온 대지의 황량한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마치 그렇게 벌거벗은 땅이 보기 싫은 것처럼 탐조등은 회전하며 각도를 높였다.

이윽고 탐조등은 목표하던 바를 찾았다. 들판 너머 보이는 연황색 휘황찬란한 불빛들의 향연. 저 황야와 극단적인 대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백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인구 1천만의 초거대도시. 여객기는 막 그곳에 착륙하려 하고 있었고, 탐조등 불빛을 따라간 외부 카메라가 목표물을 포착하자 자동 착륙 장치가 가동되었다. 안내 시스템의 스위치가 켜지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착륙 예정 시간은 10분 후이며, 프라임 현재 시각 기준으로 오전 6시 15분입니다. 안전 벨트를 착용해 주십시오. 오늘도 저희 트랜스텔러 항공을 이용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좌석에서 벨트의 버클을 채운 킴리는 창문에서 눈을 떼고 왼손에 쥐고 있던 PDA로 시선을 가져갔다. 이미 소행성대 - 지구로부터 2.8AU 거리, 그러니까 화성과 목성 사이의 - 의 일레륨 채굴 기지에서 이틀 전에 출발할 때부터 계속 읽고 있었던 것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암기하다시피 한 편지 내용을 머릿속에서 되새기고 있었다.

[……외계인 재침공 가능성……엑스컴의 지휘를…….]

가우딘 프란츠, 메가 프라임 시의원의 친숙한 이름이 찍혀 있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부관을 호되게 질책하고 지워버렸을 만한 그런 공문이었다. 외계인이라니. 그것도 하필이면 2차 전쟁에서 40년 후, 1차 전쟁과 2차 전쟁 사이만큼의 간격을 두고, 더군다나 자신을 그 단체의 지휘관으로……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그런 것 말고도 많았다.

물론 실전 경험이 있는 사람을 사령관으로 뽑는다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지난 2차 전쟁을 끝으로 지구에서는 더 이상의 공식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급속한 인구 감소와 이주로 얼마 안 가 공식적인 국가가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지만. 약간의 국지전과, 메가 프라임에서 지금껏 치러오고 있는 '범죄와의 전쟁'(사실상 소규모 전쟁이라기에 부족함이 없는)을 제외하면 그 동안 유일하게 전투라 할만한 것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곳은 소행성대의 일레륨 채굴 콜로니와 외행성대였다.

1차 전쟁에서 발견된, 이 원자력을 대체할만한 고효율의 에너지원을 보다 비싼 가격에 많은 양을 팔아넘기려 애쓰고, 그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레륨 채굴 중단도 스스럼없이 외쳐대는 콜로니 과격파들과 에너젠(Energen)社의 사설 부대 - 하나의 군대에 가까운 - 와의 전투가 치열했었다. 굳이 비견하자면 지난 세기의 산유국과 서방 세계의 대립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단순히 그걸 우주로 넘긴 것과는 차원이 틀렸다. 그들은 일부 행성들과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엄청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량의 병기를 구입했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갑작스레 소행성대에 남겨진 그녀의 부대원과 가족이 다시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외계인의 재침공'이란 사항을 고려하여 잠정적인 임시 휴전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 1, 2차 전쟁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긴 인식은 그 정도로 깊었다. -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과격파들은 협정을 깰 수 있었으므로 어떻게 상황을 안정시켰어야만 했다.

골치 아픈 것이 한둘이 아니다. 다시 그녀는 눈을 들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들을 되새겨 보았다. 약간의 달 출신 치안부대와 경찰 병력으로 급조된 팀이다. 무장 상황은 형편없을 터이고, 훈련도 아무래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지금 저 도시의 상태는……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어떻게 해내야만 한다는 결심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세차게 박아 넣었다. 두 번이나 이겼다. 세 번째라고, 혹은 나라고 불가능할 이유가 있나?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벨트 착용을 권고했다. 잠금장치가 걸리자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곤 눈을 감았다. 창 밖으로 프라임 돔 위의 관제용 불빛이 붉게 깜박이기 시작하는 것이 얼핏 보였다가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우주선이 착륙하고 나서 입국 수속을 밟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둔 우주공항 근처의 호텔에 체크 인을 하고, 짐을 대충 방 안에 던져 넣은 킴은 호텔 로비 밖에 서 있던 호버택시를 하나 잡아탔다. 노란 바탕에 흑백의 체크무늬가 그려진 둥글둥글한, 프라임다운 복고풍 디자인의 트랜스텔러 택시였다. 운전기사는 시의회로 가자고 말하는 킴의 말을 건성으로 흘겨듣고는 자동항법장치의 스위치를 올려서 순항 고도로 호버택시를 상승시켰다.

그 모습이 조금 불만스러웠긴 했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택시 뒷좌석에는 PDA 슬롯이 있길래 PDA를 연결해서 대충 프라임 신문이나 훑어보고 있는데 문득 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한쪽 끝자락이 붉게 물들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킴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온통 불타고 있었다.

킴은 경악했다. 돔으로 둘러싸인 프라임의 한쪽 끝이 시뻘건 화염에 잠겨 있었다. 외계인 재침공? 대화재? 전쟁? 아님 도대체 뭐야? 킴은 굉장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한참 버벅거리다가 운전은 자동항법장치에 맡겨놓고 PDA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저, 기사님, 저기 창 밖에 뭡니까?”

기사는 무슨 소리 하냐는 듯 한참 킴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킴이 손가락으로 창 너머를 가리키며 설명을 늘어놓자 피식 웃었다. 그리곤 다시 PDA로 시선을 돌리면서 건성으로 말했다.

“아주머니, 해 뜨는 거 첨 보슈?”

그래서 킴은 더 당황했다. 지구에선 해가 저렇게 뜨던가……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딱히 지구에서 일출을 본 기억은 들지 않았다. 자전이 없는 소행성대의 군사 기지에서 태양은 그저 우주공간에 박혀 있는 조그마하고 좀 밝은 점에 불과했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화성에서조차도 저렇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 아무튼 이곳 프라임에선 그런 모양이었다.

1년 365일 내내 반복되는 일에 대해서 드는 느낌 치곤 좀 웃기다 싶긴 했지만, 도시 건물들이 붉게 물들며 그 뒤로 강렬한 햇빛에 대조되는 검은 그림자를 완만한 시가지에 드리우는 모습은 왠지 뭔지 모를 섬뜩함마저 안겨준다 싶을 정도였다. 킴은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으면서도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보았다. 결국 강한 빛에 눈이 부셔올 때까지도 킴이 아직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좌석을 돌아보고 알게 된 운전기사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설명했다.

“대기오염이 심해서 빛의 굴절이 심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도 프라임이 처음 세워졌을 적보단 좀 덜 시뻘겋수다. 댁들처럼 딴 동네에서 오는 사람들은 덕분에 보고 놀라곤 합디다만 뭐 그런 게 중요하겠수까.”

킴은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곤 십여 초쯤 더 바라보다가 눈을 비비고 PDA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킴은 요금을 지불하고 시의회 앞에서 내렸다. 그리스나 로마 시대를 연상케 할 화려하고 고전적인 모습의 의회 건물은 단지 프라임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다는 것 말고서라도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뭔가의 느낌을 주는 게 있었다. 그리고 프란츠 가우딘 시의원의 사무실은 의회 건물의 5층이에 있었다. 어리다싶을 정도의 남자 비서는 외모에 걸맞지 않게도 꽤 능숙하게 가우딘에게 연락했고 조금만 기다리면 그가 올 테니 기다리라고 말했으며 커피 한 잔을 끓여다주는 친절까지 선보였다.

그녀는 5분쯤 앉아서 기다리다가 지루해졌고, 일어서서 그닥 넓진 않은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장식조차 없는 책장이며 탁자며 의자며 어쩐지 무뚝뚝한 느낌이다 싶어 쿡 웃기도 하면서. 천천히 잔을 홀짝이며 흠집이 군데군데 남은 낡은 책상 위에 놓여진 종이 책들을 훑어보다가 잠시 시선이 유리 액자에 끼워진, 2차원 방식의 낡은 가족사진에 머물렀다. 가족, 육군 정복 차림의 젊은 가우딘. 늘 그렇듯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웃고 있지만……다 죽었지. 가우딘만 빼고. 킴도 잘 알고 있었다.

별로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에 고개를 젓고, 시선을 옮기면 탁자 뒤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큼지막한 플라즈마 소총 한 정이 묵직하게 걸려 있었다. 낡은 물건인 듯 두툼한 강철 총몸에 씌워진 검은 산화방지제가 군데군데 떨어져나가고, 긁힌 흠집도 꽤 눈에 띄었지만 손질은 제대로 되어 있는 듯 상태는 좋아 보였다. 옆에는 충전된 상탠지 모르겠지만 탄창형 배터리조차도 몇 개 걸려 있었다. 외계인 전쟁 기념관에서나 볼법한 물건을 향해 킴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배터리만 끼우면 지금 당장이라도 쓸 수 있지.”

킴이 뒤돌아보자 가우딘이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가우딘을 껴안았고 가우딘은 그녀의 주름진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여전하시군요.”

“이틀짜리 여행에 불편한 점은 없었던가 모르겠군. 남편은 잘 지내나?”

“오래 걸리긴 했지만 신경써주신 덕분에 괜찮았습니다. 남편이야 잘 지냅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요.”

“좀 앉지. 앉아.”

사무실 가운데의 소파에 걸터앉은 가우딘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킴도 마주 웃었다. 소행성대에서 지구까지 운행하는 행성간 우주선은 꽤 비쌌고, 애당초 지구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던 킴에게 있어 프라임까지 와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었다. 가우딘을 본지가 이미 4년이 다 되어가던가.

“5년만이지……그래서, 프라임에 대한 소감은?”

“좋은 도시 같습니다. 여기 오면서 좀 둘러본 게 전부지만 흠잡을 데는 별로 없는 성 싶더군요. 제가 있던 소행성 자치구 정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지라 둘러보는 데만도 한참 걸리겠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지구가 황폐해졌다 쳐도 인공중력에 테라포밍까지 해야 하는 저중력 소행성 따위완 비교가 안 되죠. 사람들도 활기찬 성 싶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 보이고. 하지만 일단은…….”

킴이 주저하다 말끝을 흐렸다. 가우딘은 말을 계속하라고 손을 저어 주었다.

“……절 부르신 이유가 있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대외계인 작전을 경찰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특수기동대 이름이 ALERT라던가요……오늘 들어오니까 어제 작전을 펼쳤다는 뉴스가 막 돌고 있더군요. 하지만 그래봤자 경찰입니다. 전 프라임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병력이 필요하시다면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소행성대에서 제 병력들을 좀 빼온다고 해서 당장 전쟁이 난다거나 할 리는 없을 겁니다. 화성이나 달의 치안유지군들도 좀 빠듯하긴 하겠지만 약간 융통할 여지는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외계인들이 쳐들어왔다는 상황을 대놓으면 그 정도 지원 따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말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괜찮으셔서 다행입니다.”

“아니, 메가폴의 어떤 한심한 녀석이 오발을 해서 다칠 뻔한 일은 있었네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자네 쪽 애들 반응은 어땠나? 뭐 수상쩍은 건 없었나?”

“소행성대에서도 그 뉴스 덕에 난리였습니다. 다들 2차 전쟁과 같은 꼴 나게 되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죠. 아직은 별다른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만 부하들 통제하기가 좀 버거웠습니다. 이미 공식 보고서를 보셨겠지만 우리 쪽의 센서 시스템은 지난 몇 년간 UFO 비슷한 것도 포착 못했습니다. 애당초 일레륨 채굴 기지를 중심으로 제한된 범위만 감시하도록 되어 있는 물건이라 확신은 못하겠습니다만 최소한 놈들의 UFO는 차원이동이나 공간이동 같은 걸 쓴다는 분석 결과가 맞는가 보더군요.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조기경보위성 몇 개를 외행성 방면으로 돌려두긴 했습니다만 효용이 얼마나 있을 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필요하다면 조기경보위성뿐만 아니라 다른 지원도…….”

가우딘은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야.”

“가우딘, 이건 전쟁이 될지도 모릅니다. 놈들이 쳐들어올지 안 올지 우린 몰라요. 하지만 대비하고 있어서 손해볼 건 없지 않습니까? 절 부르신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지휘관직을 맡기시겠다는 게 가장 현명한 행동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굳이 원하신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가우딘은 킴이 말하는 내내 계속 고개만 젓다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맞는 말이긴 하네만……자네 혹시 메가폴이 민영 기업이란 걸 알고 있나?”

킴은 대답 없이 가우딘을 바라보았다. 민영 기업? 프라임의 경찰이? 킴으로서는 꽤 난감한 이야기였다.

“자넨 화성에서 태어났으니 모르겠지만, 프라임에서 정부를 제외한 모든 기관은 실상 민영일세. 1, 2차 전쟁 당시 구시대의 국가연합체였던 UN이 외계인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건 자네도 역사 교과서에서 읽었으니 알 테지……정작 인류를 구한 건 외계인들을 소탕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던 하나의 기업이자 용병, 엑스컴이었다는 걸 말일세. 우리는 프라임을 건설할 때 그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네. 아니 조금 많이 염두에 두었지. 그래서 현재의 프라임 정부에게 있어선 실상 별 직접적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아. 소위 ‘작은 정부’지.”

킴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요.”

“별반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잖은가. 그렇게 해서 프라임 경찰은 무기를 넘치도록 갖고 있고 - 물론 그건 범죄자들도 마찬가지네만 - 외계인이 쳐들어온다는 상황에서 제외해놓을 수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네. 우린 그렇게 하라고 시킬 수도 없어.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로 자율적 행동이 보장되네. 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 뭐가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확신할 수 없고,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게 자네가 필요한 이유야. 물론 킴, 자네가 훌륭한 지휘관이란 건 자네만큼이나 나도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욘 없네. 일단 군사 자문역 정도는 추천해 놓겠네.”

킴은 빈 플라스틱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가우딘은 살짝 웃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프라임이 흠잡을 데 없는 곳이란 말은 그냥 칭찬인지 아니면 의도한 말인지는 모르겠네만, 적어도 이 도시가 겉보기와는 좀 다른 곳이란 것만은 사실이야. 이 도시는 경찰이 지대공 화기를 운용해서 UFO를 격추할 능력을 가진 곳일세. 그만큼 분위기가 날카로워. 지구 위에 있었던 어떤 나라도 다 그랬지만, 가진 자들은 풍요롭고 편하게 흠잡을 곳 없는 곳에서 살고 있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렇지 않는 게 현실이지.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네만 그때 우리의 선택은 그런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고 결국 그게 도시를 이렇게 바꿔놓았네. 난 가끔 언젠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네…….

시의회 5층에 위치한 가우딘의 사무실 창문 밖으로는 프라임의 전경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십여 층 남짓한 낮고 아담한 건물들이 스카이라인을 구성하고, 시 중앙엔 화려한 장식의 중심가가 멀리서 의회 건물에서조차도 뚜렷하게 보였다. 외계인들이 1차 침공을 개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도시가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지구상에 단 하나만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계인들은 많은 걸 바꾸어버렸다. 그리고 인류도 마찬가지로.

“……이 도시의 첫 주춧돌이 세워질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지. 인류를 다시 지구에서 부흥시키겠다는 의욕에 불타는 젊은 장교로서 말이네. 하지만 지금 모습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나도 확신이 서지 않아…….”

말을 마친 가우딘은 천천히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시가지의 풍경을 주시했다.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돔의 경계선 사이로, 프라임 건국 이후로 규모가 줄어들지 않고 있는 슬럼가의 실루엣이 아득히 드러났다. 한때 수천 단위였던 슬럼 거주민은 현재 프라임 인구의 근 1/10을 차지하고 있었다. 슬럼이란 말이지……그는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로 짧게 말했다.

“처음부터 너무 암울한 이야기만 한 성 싶군. 일단 장기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머물러 보게.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지켜봐야 하니 말일세.”




사방의 건물 벽에는 벽돌들이 비어져나온 틈사이로 요란한 페인트 글귀들이 쓰여 있었다. 교차로 끝에선 녹슬어가는 철조망들이 구겨진 끝을 더러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 바람에 맞춰 긁어댄다. 클레어는 그 반대편으로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핸들을 왼쪽으로 돌렸다. 슬럼에서의 운전은 늘 위험한 일이었다. 파란색 바탕에 흰색 줄이 그어진 방탄 순찰차 안에서 메가폴 로고 그려진 방탄복 입고 나 경찰이에요 하고 광고하고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하지만 어쨌건 그게 메가폴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파트너는 조수석 문 안쪽에 걸린 기관단총 위로 오른손을 불안하게 흔들거리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ALERT로 가버리고 나서 같이 순찰 돌 사람 한 명 새로 보내 달랬더니 경찰학교 갓 졸업한 신참내기가 하나 온 것이다. 클레어로서는 에드워드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참은 다시금 주변을 살피곤 불안하게 물었다.

“괜찮겠죠?”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메가폴 호버카 두 대가 경광등을 조용히 반짝이며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다가오는 왼쪽 건물 옥상에선 길다란 파이프 같은 것을 어깨에 멘 누군가가 그 끝을 호버카 편대를 향해 겨냥하다가 내려놓고 있었다. 지원군이 있다는 것도 왠지 별로 안심이 되지 않는 동네가 이곳이다. 괜찮을 리가 없지. 약간의 식은땀이 핸들을 쥔 손바닥에 배어나고 있었다.

단기간에 프라임을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궁극적으로 말해 프라임은 완전히 새로운 곳에 세운 새로운 도시라기보다는, 그냥 존재하는 도시를 기반으로 해 그 위에 세운 것에 불과했다. 애당초 철저한 계획도시였기에 낮고 고풍스런 건물에서부터 공업, 주거, 상업구역과 복고풍의 호버택시 디자인까지 모든 것은 철저히 계산되었으며, 그 계산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구 도시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은 부분은 슬럼화되었다.

이곳이 엄밀히 말해 프라임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진 의문이었지만, 과세도 있었고 정부 정책도 있었고 학교도 있었고 시의원도 있긴 했다. 그리고 갱들도. 그들은 미처 철거되지 않은 구 도시 전체를 뒤져 프라임엔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고 따라서 가져가지 않았던 물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 오십 년쯤은 되었을 듯한 산탄총을 덜렁거리는 몇 명이 무너져가는 건물 옆에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 무기가 몇 살이 되었건 간에 사람을 쏘면 죽는 물건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신참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이라도 탁 뱉으려다가 방탄처리가 된 1센티미터 두께의 창문을 열기 두려운 듯 도로 삼켰다.

“저 쓰레기들 같으니.”

“저쪽에서도 그렇게 생각할 텐데.”

파트너가 괜히 불안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클레어는 간단히 쏘아붙여 주고는 다음 교차로를 통과했다. 깨져나간 아스팔트 바닥 위로는 두꺼운 주사바늘에 감긴 뱀 문양이 요란하게 그려져 있었다. 사이케, 이 슬럼을 지배하는 그렇고 그런 세력 중 꽤 규모 큰 하나였다. 문양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의미했다. 메가폴이 순찰을 돌 수 있는 영역은 불과 슬럼 안으로 십여 개 블록 들어온 지역까지가 끝이었다. 경찰력은 슬럼 내에서 그저 명맥만 유지할 뿐, 선 너머의 일에는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슬럼은 그저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없으면 좋을 골칫거리. 경찰은 도시 안에 틀어박혀 선을 넘지 않으려 했지만, 아니 선 근처에 오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슬럼은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선을 넘으려 들었다. 이를테면……지금처럼.

선 너머, 딱 지나치게 구석지지도 지나치게 노출되지도 않은 골목 틈새에서 건장한 남자 둘이서 여자 한 명을 잡아 비틀고 있었다. 방탄유리 너머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고통에 잔뜩 구부린 몸 탓에 얼굴은 길다란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느다란 팔뚝 위로는 빨간 생채기가 남는다. 말려 올라간 짧은 스커트 자락 아래로 보이는 창백한 살결.

젠장, 선 너머다. 클레어는 짧게 주저했다.

슬럼은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슬럼 나름대로 법이 있고 규칙이 존재하는 세상이긴 하다. 하지만 그 법과 규칙이 정당화되는 건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강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란 듯이 저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슬럼 거주민의 태반은 20대가 되기 전에 친구 몇몇쯤은 총격전에 죽어나가는 경험을 겪고, 그렇기에 길거리엔 쓰레기가 넘쳐나고, 그렇기에 건물들은 무너져 내린 채로 복구조차 되지 않고, 그렇기에 범죄가 범죄가 아니고……오히려 그렇기에 보란 듯이 순찰차를 노려보고 웃음까지 지어 보이는 모습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클레어는 젊었다. 젊은 경찰이란 건 얄팍하나마 사명감 같은 것 없인 할 수 없는 일이다. 규율을 지키고 수호하고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다른 누구보다도 공헌하고 있다는 명예감, 정의감, 약자를 위한 배려……뭐라고 불러도 좋았다. 나가면 안 된다,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이성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클레어는 시선을 고정한 채 신참의 등을 치고 짧게 말했다.

“내리자.”

신참이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소리를 냈지만 신경 쓰지 않고 클레어는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문을 천천히 열고 내리는 동안 두 남자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분히 음흉해 보이는 눈길이 클레어의 몸 위를 훑었지만 클레어로서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무기는 익숙한 기관단총을 택했다. 경찰차에는 소총탄을 쓰는 경기관총이 실려 있지만 쓸데없이 중화기 휘둘러봐야 괜히 반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필요하다면 그들도 싸구려 로켓포 따위는 넉넉히 준비할 수 있으니까……아니, 반감이 아니라 비웃음만 받게 될지도 모르지. 총이란 건 그저 장식일 뿐이다. 총을 겨눈다는 것도 그저 상징적 의미 이상의 것은 못 된다. 그래도 클레어는 그렇게 했다. 단단히 견착하고 목소리에 날을 세운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않기는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뎁쇼.”

여자 오른쪽에서 팔을 붙들고 있던 남자가 씨익 웃었다. 비웃음, 그래 비웃음이다. 반대편에 있던 남자는 그제서야 그를 따라서 웃는다. 할 말, 할 행동조차도 미리 정해둔 성 싶은 게 보아하니 오른쪽이 리더인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 말을 이었다.

“천천히 손 들고 뒤로 물러서. 여자는 내버려두고.”

“야, 너 이게 마음에 안 드냐?”

리더가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탈색된 듯 창백한 긴 금발이 굵고 더러운 손가락 사이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클레어는 여자가 뭐라 하기도 전에 말을 씹어 뱉었다.

“그 손, 치우고 천천히 물러서.”

두 남자는 말 그대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마냥 여유 있는 행동 사이로 어떻게 하는가 두고 보겠다는 눈빛이 강렬하게 전해와 클레어는 살짝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받쳐 들고 있던 손이 사라지자 여자는 그대로 몸을 수그리고 앉아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클레어는 여자를 데리러 가기 위해 선을 넘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놓고 다소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선이란 건 무슨 국경분쟁도 아니고 센티미터 단위로 따지는 것도 아니다……하지만 이건 분명히 선 너머 일이었다. 결국은 끝까지 가려면 끝까지 가는 거고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도 없을 거다 싶었다. 데리러 가자. 데려가자. 데려가서 사정 청취 좀 하고 집에까지 데려다주든지 본서에 데려가서 커피 한 잔이라도 주든지…….

겨누려는 건지 말려는 건지, 신참은 어정쩡하게 기관단총을 치켜들고 뭔가 쭈뼛거리고 있었다. 클레어는 어쨌거나 신참에게 엄호하라고 말하곤 막 첫 걸음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때 신참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갑시다.”

“뭐?”

“돌아가잔 말입니다.”

꽤 긴장한 듯 보이는 말투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무척 강경했다. 너 지금 주제에 반항하는 거냐? 클레어는 한순간 기가 차서 말을 못할 지경이었는데 순간 헤드셋으로 연락이 들어왔다. 신참이 무전기를 모니터 모드로 바꾼 모양이었다.

[……P26. 상황보고 받았다. HQ 귀환하기 바란다. 반복. HQ 귀환.]

신참이 그새 못 참고 본부에 보고를 넣어버린 모양이었다. 위쪽 사람들이 좋아할 거 없었고 허가해줄 리도 만무한 일이었다. 썅, 망할 자식. 세상이 어떻게 되든 오로지 원칙뿐이지. 그래서 클레어는 신참을 싫어했다.

“뭐야?”

상황에 불을 댕기기라도 하듯 타이밍 좋게 몇몇 다른 인간들이 골목 귀퉁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중 서넛은 덩치 좋은 등 뒤로 총끈을 덜렁이고 있기도 했다. 총이란 건 굳이 등 뒤에 메야지만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총이란 장식품인걸. 경찰이란 상대방을 위협하기 위한 장식.

클레어는 리더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리더는 클레어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여자를 몇 번 더 쓰다듬었다. 훌쩍이던 여자가 고개를 들자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보였다. 상당히 마른 체형이었는데도 얼굴은 예쁜 편이다 싶었는데 그때 여자 얼굴을 똑똑히 볼 기회가 생겼다. 그 얼굴은…….

클레어는 눈을 감고 싶어졌지만 대신에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결정타로군. 이젠 어쩔 수 없었다. 클레어가 몸을 돌리자마자 신참이 부리나케 차 안으로 뛰어들어 문을 닫아걸었다. 클레어는 속도를 내지 않았다.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느리게 문을 걸고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까지 걸었다. 신참이 거의 절망적일 정도의 눈빛을 하고 클레어를 열렬히 바라보며 말없이 채근하고 있었는데도 클레어는 천천히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신참이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어서 갑시다.”

클레어는 이를 갈았다.

“그렇게 당하고도 꽁지빠지게 도망치라고?”

“당하다뇨. 도망치다뇨. 방금 무전 내용 못 들었습니까? 포기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게 도망치는 거 아니면 뭐냐. 넌 대체 아직도 상황을 모르고 뭘 어쩌겠다는 거야?”

“상황을 왜 제가 모릅니까. 신참이라고 무시하시는 겁니까? 애초에 경사님이 그냥 보고 넘겨버렸으면 될 것 아니었습니까? 슬럼 깡패들 따윈 우리 담당이 아닌데 그네들 어떻게 되건 어떤 짓 하건 우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야, 이 나쁜 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순찰대야?”

참다못해 욕설을 내뱉곤 클레어는 충동적으로 무전기의 다이얼을 돌려 본부에 연결시켰다. 이런 녀석하고 이야기해봤자 별 소용도 없을 것 같았다. 오퍼레이터가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나서 운전대 위의 화면에 반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클레어는 순찰차를 출발시키지조차 않은 채 다짜고짜 따졌다.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습니다. 반장님.”

[아, 크로셋 경사. 알다시피 요즘 분위기가 뭣하잖나. UFO니 외계인이……상부에서 인력도 빼가고, 예산도 좀 빠듯해졌거든. 자네도 알겠지만 ALERT 때문에……그래서 조만간에 슬럼 바깥쪽으로 순찰 경로를 바꿀 것 같네. 이제 와서 괜히 무리할 필요가 없지.]

“무엇보다 슬럼 순찰이 돈이 안 되서겠죠?”

클레어가 정확히 말하자 반장은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잘 아는구먼.]

“그 돈이란 게 로봇까지 동원해다가 이런 노골적인 조롱을 줘도 참고 넘어가야 할 만큼인가요?”

[그래. 너무 열 내지 말고 돌아오게. 이 바닥이 다 그렇지.]

결국 클레어는 심호흡 한 번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이 꺼지자 신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띄웠다.

“아까 무슨 말씀이셨습니까? 무슨 로봇을 동원했는데요?”

아직도 눈치 못 채는 꼴하곤. 클레어는 대답할 생각조차 없어서 그냥 쏘아붙였다.

“그 여자 얼굴 봤어?”

“……예? 어째서……아니, 무슨……난데없이……아까 그 여자는 상처도 있었고 로봇이라긴…….”

“몰랐으면 입 닫아!”

참다못해 클레어가 더듬거리던 말을 잘라버리자 신참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는 혼자 뭐라 중얼거리더니 침묵했다. 클레어는 차내 거울에 비치는 여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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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노골적인 복선, 설정 전달 및 새로운 등장인물 소개용 에피소드입니다. 덕분에 쓸데없이 대사만 많습니다. 에피소드 구성 및 배열 능력을 좀 더 배양할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집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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