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만 그런 게 아니다. 걸오와는 면식이 없는 식탁 너머에서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쑥덕쑥덕 뒷담화가 시작되었다.

“일급이라 불리면 백 기는 격추했다는 얘긴데…”

“백 기가 뭡니까. 닥탄이라고 불렸으니 만 기 일겁니다.”

“게다가 같은 닥탄인 스제거 중령이 존대를 하지 않소.
그렇다면 저 스제거 중령의 전과를 넘었다는 얘긴데...무섭군요.”

“들리는 바에 의하면 걸오 소령이 에바워심 학살의 주범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 말에 걸오는 뜨끔했다. 에바워심 학살은 30시간 여 만에 치두남 단 한대로 행성 전체를 불모지로 만들어 버린 사건을 말한다. 원래는 그 행성에 주둔 중이던 템 후방부대를 공격하려다가 터무니 없이 일이 커지는 바람에 후환이 두려워 어찌어찌 은폐했던 옛날 일인데 그걸 아는 사람이 여기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마침 그 말을 들은 락샤헤이론 중령이 걸오를 돌아보는데 눈매가 그리 곱진 않다. 지상군과 우주군은 평소엔 사이가 좋았지만 가끔씩 껄끄러워질 때가 있었는데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우주군의 무차별적인 행성공격이었다.
  
“저 말이 사실인가, 소령?”

눈매뿐 아니라 말에도 가시가 좀 돋쳐있다. 하긴 지상군들이 어떻게 하면 이 행성을 손상 없이 점령할 수 있을까 하고 박 터지게 작전 짜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우주군이 시간낭비라는 둥 귀찮다는 둥 궤도공격을 날려 적은 물론이고 점령해야 할 주요거점마저 도매금으로 초토화 해버리니 도저히 좋게 볼 수 없었다.

“아뇨, 음, 지상군이 깝치길래…조금.”

“그래서? 무슨 무기를 썼나?”

그렇게 묻는 락샤헤이론의 온몸이 꿈틀대는 게 만에 하나 메디우급 병기를 썼다면 바로 전투형태로 변신할 분위기다. 지상군이 우주군을 싫어한다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무기로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찰 비행을 하다가 일어난 우연한 사고입니다.”

“정찰 비행을 했는데 에바워심에 있던 템 부대가 전멸하고 거기다 행성조차
그 꼴이 되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실제로 에바워심은 템이 오랜 기간에 걸쳐 테라포밍을 한 행성이라 연방의 많은 종족들도 거주가 가능했고 그런 이유로 전략적 가치가 상당히 높아 연방군으로서도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었다. 결국 지상군 사령부는 행성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며 점령하기 위해 최정예 맥워리어 부대인 505연대의 투입을 결정했고 그 지원부대로 요청한 것은 여러 의미로 우주군 최강이라 불리는 17연대였다.
그리고 505연대는 전투에 앞서 17연대에 정찰을 부탁했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에바워심에 점령가치 없음’이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부랴부랴 직접 가보니 거점이란 거점은 모조리 초토화 된데다 그렇게나 푸르렀던 에바워심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505연대는 망연자실해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공병대에 복구가능성을 타진해 봤지만 묵묵부답. 당시의 공병부대장은 505연대가 무슨 앙심을 품고 그런 질문을 한 걸로 지레짐작하고 잔뜩 얼었다고 한다.
당연히 505연대장은 길길이 날뛰며 17연대에 에바워심의 전투기록을 요청했지만 17연대는 ‘본 부대는 에바워심에서 전투작전을 펼친 적이 없음.’이란 대답을 끝으로 점프해 버렸다.
그러니 락샤헤이론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말이 되는 게…사실 그때 치두남의 자기장 날개 출력을 최대로 하고 덤으로
플라스마 충각모드 한 다음에 대기권 내려가서 조금, 뭐 남극북극을 왔다리갔다리…”

그 말에 당시 17연대 소속이 아니었던 사람들의 안색이 기괴하게 바뀐다. 템인은 산소호흡생명체다. 그리고 그들이 살게 테라포밍된 행성은 성층권에 오존층이 형성되어 우주에서 내려오는 방사선으로부터 지상을 지켜준다. 그런데 고열의 자기체가 남극북극으로 오락가락 했으니 그쪽 오존층과 자기장대는 당연히 개박살, 이후 행성이 자전하면서 지상은 골고루 구수하게 익었을 거다.
자리에서 일어난 락샤헤이론이 천천히 걸오에게로 걸어왔다. 이제 근위소대 얘기는 안중에도 없는 듯싶다.

“…행성 자연계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은 에캡 니르그 조약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나?”

락샤헤이론의 서슬 퍼런 말투에 걸오에게 붙어있던 미카가 낼름 떨어져 스제거의 품에 안긴다. 걸오는 슬금슬금 모우 쪽을 살폈지만 이 양반 눈치를 보아하니 앞서 불완전 연소로 끝난 활극의 2회전을 기대하는 것 같다. 오호,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정찰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대로 따른 것뿐입니다.
저는 선의의 피해자에요”

“그렇다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도대체 누구지?”

“짐이니라.”

모우의 무덤덤한 대답. 그러나 장성용 고급 번역기는 라출노그어에 담긴 ‘그래서 어쩔 텐가 중령.’이란 뉘앙스마저 완벽하게 구현해 주었다. 이에 락샤헤이론은 잠시 경직되었으나 다시 걸오를 노려보았다.

“그랬던 것인가? 그래서 일급이란 칭호를 달았나?
  적과 싸우지 않고 단지 저항할 수 없는 자들을 학살하여 일급 소령이 된 건가?”
  
“어랍쇼? 그건 또 무슨 소리랍니까?”

“자네 일급 소령이라 불리면서도 격추기록은 0이잖아.”

이에 천하의 걸오마저 ‘진짜로’ 겁을 먹었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 모함일까? 아하, 이년이 미쳤구나, 아니면 아까 일로 한이 맺혀 나를 잡으려는 것이로구나. 이를 어쩌나, 선제공격을 해야 하나? 아니다. 지금 치면 내가 발린다. 일단 틈을 만들자.

“예? 그럴 리가 없는데요? 도대체 뭘 보신 겁니까?”

“변명해도 소용없다. 여기 이것이 증거다!”

락샤헤이론은 즉시 개인 단말기를 작동시켜 이전에 자신이 봤던 내용을 보여주었다. 엉거주춤 영상을 살펴보던 걸오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검색을 스타파이터 격추로 하셨군요. 그러면 안 뜹니다.
이거 데이터베이스가 프실론인 식으로 분류되어있어서 좀 엄해요.”

걸오가 다시 검색해서 보여준 기록들은 치두남의 스타파이터가 아닌 함선격침목록이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수치에 락샤헤이론은 잠시 말을 잃었다. 정급은 빼고도 구축함, 순양함, 전함 등이 수두룩하게 격침되어있다. 한 다리 건너 들었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일축했을 허무맹랑한 수치들이 화면에 난무하고 있지만 이것은 엄연히 연방군의 공식기록이다.

“으음, 그러면 자네의 스타파이터 격추기록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치두남의 전투 기록에 뭔가 문제라도 있었나?”

“원래 치두남은 스타파이터를 전투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냥 걸리적거리면 제거해야 할 방해요소로 보죠. 그러니까 좀 더 위험한 파편이랄까요.
그래서 스타파이터 격추기록은 남지 않을 겁니다.
굳이 보자면 모든 전투기록을 다시 조회해야 하는데…중령님?”

이제 락샤헤이론은 완벽히 할말을 잃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걸오가 다시 모우의 눈치를 살피며 눈짓으로 질문했다. ‘지금 칠까요?’ 대답은 ‘하지 마라.’

“락샤헤이론 중령.”

“네, 함장님.”

“그래, 아직도 반대인가?”

“네? 아닙니다. 면목없습니다.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말게. 그 정도 소란이야 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좀더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상당히 아쉬워하는 눈치의 모우였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식사는 어찌어찌 끝났고 이때다 싶어 걸오는 잽싸게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모우에게 붙잡혔다.

“걸오소령. 근위소대 건으로 잠시 좀 보세나.”

걸오가 모우 곁으로 다가가자 그 둘의 주변에 보안용 차폐막이 둘러쳐졌다. 이제 안에서의 영상이나 음성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제야 안심한 걸오가 평소의 건방진 투로 모우에게 물었다.

“저를 이렇게 갑자기 근위소대장으로 임명한 이유가 뭡니까?”

물어보긴 했지만 걸오로서도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니다.

“몰라서 묻는 건가?”

“확인하려고 묻는 겁니다.”

“당연히 짐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년들은 찢어발기는 것이지.”

즉 오미크론과 락샤헤이론의 신분으로 싸울 일은 없으니 미카와 헤일이 아옹다옹하면 근위소대장 걸오가 나서서 정리하란 말이다.

“그러니까 저보고 무어인 전사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 같으면
볼 거 없이 선빵 날리란 거군요?”

“명쾌하도다. 짐의 안목에 틀림이 없음이야.
아, 그 외에도 근위소대가 할 일은 많으니 너무 실망 말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확인사살을 당하자 걸오가 절규한다.

“아니! 그러니까! 왜! 저딴! 미친 년을! 불러들여서! 일을 이렇게 만드는 겁니까!”

모우는 남이 주는 인원들은 절대 받지 않는다. 오직 자기 마음에 든 인재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휘하로 끌어오는데 그렇다면 락샤헤이론도 모우가 데려왔다는 얘기다.

“흐음, 실은 짐에겐 저들의 조모이자 크루갈레시난의 가장인 레이라 크루갈레시난 여사께
빚이 있다네. 저 둘을 함께 있게 해달란 것이 여사의 부탁이어서 흔쾌히 허락했네만…
다행히 락샤헤이론 중령은 실력 있는 사람이었고 또 직접 보니 배짱도 두둑하지 않던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랐고요?”

“아니지, 물론 이런저런 짐작은 하고 있었네. 그래서 자네에게 물어보지 않았던가?
헌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설마 이 정도? 이이이보쇼! 무어인 년이 머리를 썰었단 말요!
  하나는 작살나야 이야기가 끝난다는 걸 모르십니까?”

“고작해야 계집 둘의 싸움에 무얼 그리 흥분하는고?
껄껄껄, 그럼 자네만 믿네. 자 가보시게.”

그러면서 모우는 차폐막을 해제했고 걸오는 정중한 경례와 함께 물러났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걸오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벌써부터 긍정적인 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문제아인 레헤미만 해도 자신의 근위소대에 넣는 것이 관리상 편할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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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비축분 오링.
구 연재분은 3부까지 있지만 그건 도저히 올릴 물건이 못되지요.
그럼 다음 연재는 언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