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宙易)
글 수 47
“어랍쇼?”
걸오는 자신의 급여 명세표를 보고 놀랐다. 지난번에 비해 35%이상 올랐지 않은가? 후방에서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기 때문에 월급이 오를 거란 생각은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인 떡인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세금이 하나도 떼이지 않았다. 콩다콩닥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통장을 열어보니 무슨 영문인지 여기는 또 세금이 떼인 채로 입금되어있다.
“어쭈?”
고개를 갸웃한 걸오는 모우를 찾아갔다. 정확히는 이 일에 모우가 관계되었을 거란 낌새를 채고 한번 찔러보려는 것이다.
“으음? 이런 게 갔단 말인가? 분명 조작한 것으로 바꾸었을 터인데…”
모우는 그답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이거이거~어찌된 겁니까? 세금이 안 떼이다뇨? 뭔가 꽁수를 부리셨습니까?”
걸오가 능글능글 몰아붙이자 모우는 아가미를 한번 씰룩하더니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리 된 이상 사실을 말하는 수 밖에.
현재 아이사타호는 제루님 채향관의 포교구역일세
뭐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종교지역이라 일종의 면세구역이지.
자네야 잘 모를 테지만 현재 연방의 징세체계는 상당히 허술하다네.”
“오메.”
모우의 말인즉슨, 연방의 법률과 제도는 여러 종족들의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안전장치라서 좋게 말해 탄력적으로 짜여 있으며 나쁘게 말해 구멍 뚫린 그물이다. 이번의 세금사건도 애초에 떼고 주는 게 아니라 준 다음 다시 거두는 방식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걸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뭔가 중요한 사건이 스리슬쩍 진행된 것에 놀랐지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모우는 허술한 연방의 급여체계에 반격을 가해 대박을 잡은 것이다. 아이사타호 정도의 거대전함이면 탑승자는 물론이고 여기저기에 다양한 세금이 붙는데 그걸 통째로 꿀꺽하면 엄청난 액수가 된다.
그렇다고 모우가 이걸 착복하느냐? 전혀 아니다. 17연대시절 내 새끼들 밥값 내놔라 하면서 보급장교들 협박하는 게 하루 일과 중 하나였고 자기 사재를 털어서 부하들 장비 갖춰주는 게 모우였다. 이번 자금도 이러저리 갹출하여 아이사타호의 공적자금으로 쓰려고 했던 게 뻔할 뻔자.
그렇다고 걸오가 여기서 물러서느냐? 전혀 아니다.
“함장님, 나 뽀찌.”
“…이번 자금의 관리는 관령에게 일임했네만.”
물론 모우가 제루님의 성격을 몰라서 돈을 맡기는 게 아니다. 어차피 무슨 수로든 빼내어 갈 거라면 처음부터 책임소재를 명확히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연말정산 때 개인면담이 수월하다는 계산.
근데 이런 음흉한 일에 걸오나 미카를 빼놓을 제루님이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 해서 걸오는 왜 제루님이 자신을 빼놓았을까, 하며 곰곰이 근래의 일을 되새겨보았다. 그러고 보니 짐작 가는 게 없지 않다. 얼마 전 담프사에서 비행전대 신입 환영회 때의 일이다.
“꺄하하~관령님, 관령님! 노래 한 곡 뽑으시죠?”
얼큰하게 달아오른 미카가 부추기자 제루님이 마지못해 마이크를 들었다.
“어허~통역기는 빼시라니까요!”
그러자 제루님이 통역기를 벗고 노래를 한 곡 불러 제꼈는데 알다시피 케트쿤인은 더듬이에서 나오는 페로몬으로 대화를 한다. 그 페로몬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성분이 변하는데 격한 감정일수록 휘발성이 높아진다. 열창의 냄새를 맡은 걸오의 콧등이 장난스럽게 실룩거리더니 이를 놓칠세라 잽싸게 점화시켰다.
-뽕야
앙증맞은 폭발이 제루님의 더듬이 사이에서 일어났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것을 문제는 제루님이 놀라서 잠시 어리버리하다가 곧 대경실색하여 비명을 질렀고, 이 가연성의 비명은 더욱 크게 불타올라 불쌍한 케트쿤인은 더듬이로 화염을 내뿜으며 데굴데굴 구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꺄하하하! 나도 할래요 나도!”
미카가 입에 술을 가득 머금더니 해드뱅잉과 동시에 내뿜으며 불을 붙였다.
“가소로운 년! 분위기 흐린다.”
걸오는 입으로 마신 술을 코로 내뿜으며 불을 붙였다.
“껄껄껄! 주도를 모르는 것들! 담프사 비전의 물레방아를 보여주마!”
그런데 그게 담배연기도 아니고 코와 입 사이를 들락날락할 게 아니지 않은가. 콧수염, 턱수염, 구레나룻, 가슴털 할 것 없이 활활 타오르는 도리볼이 비명을 지르며 제루님을 뒤따라 온 휴게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런 분위기에 묻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제루님은 의외로 쪼잔한 면이 좀 있다. 몇 억에 달하는 최신병기는 껄껄대며 내주지만 재미 삼아 한두푼 뽀리쳤다가는 박살난다. 해서 웬일로 그런 변을 당하고도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뒤로는 이런 흉악한 짓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걸오는 냅다 격납고나 병기창등 제루님 서식지로 내달리려고 했는데 그때 모우의 말이 발목을 잡았다.
“걸오 소령, 자네 혹시 크루갈레시난 가문에 대해 아는가?”
“크루갈레시난요?”
반문한 걸오는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별달리 아는 것은 없었다. 미카의 가문이면서 무어쪽에선 무문의 명가라는 것. 그리고 대부분 육상전투부대 관련이지 스타파이터는 미카 혼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글쎄요. 귀족가문이라면 저보다는 함장님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흐음, 이번에 충원하기로 한 인원 중 락샤헤이론 크루갈레시난 중령이 있다네.
해서 오미크론과 절친한 자네라면 뭔가 알까 해 물어본 거네만.”
락샤헤이론 크루갈레시난이라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걸오는 짚이는 게 있었다.
“락샤헤이론이라…그렇다면 혹시 헤일? 일까 싶은데요?”
“헤일이라? 그렇다면 친구란 말인가?”
무어인들이 애칭으로 부르는 건 교류를 나눈 친구들뿐이다. 그래서 미카는 자신의 무어인 부하들을 부를 때도 친구가 아니면 반드시 실명으로 부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뭐, 그 헤일이라면 미카의 사촌이자 소꿉친구였다네요.
자세한 건 미카가 더 잘 알 겁니다.”
“으흠, 그러한가. 알았네.”
물론 모우에게 락샤헤이론 중령에 대한 서류는 다 있다. 그러나 서류에 없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게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모우였기에 일부러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대답 마치기 무섭게 걸오는 제루님을 찾아 내달렸다. 재수 좋게도 첫 시도에 격납고 옆의 자재창고 쪽 통로에서 제루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령님, 나 뽀찌~뽀찌.”
-미치고팔짝뛸지경야이새캬지금그거땜에미카년쳐들어왔다!너도도왐마!
아닌 게 아니라 지금 통로의 안전 차단벽이 강제로 내려와 있고 벽 너머에서 뭔가가 쿵쿵 부딪히고 있었다. 이럴 때는 상황판단이 빨라야 하는 법.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제루님이 무너졌다.
-경고, 심신상실입니다. 경고, 심신상실입니다. 조속한 의료조치가 필요합니다.
원인, 걸오소령에 의한 후방 신경절 공격. 원인, 걸오소령에 의한 후방 신경절 공격.
걸오는 통역기를 끈 뒤 제루님의 백을 뒤져 통장과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제 막대한 비자금이 걸오의 손에 통째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날로 먹다간 후환이 있는 법.
걸오는 맹렬히 울려대는 인터폰을 힐끗 본 다음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차단벽 너머의 인물과 거래를 시작했다.
-엣헴, 걸오소령. 7대3이당. 명령에 복종해.
“오미크론 전대장님, 이럴 때만 부하 취급입니까? 3대7이다.”
-우이씨잉! 6대4.
“그럼 안녕.”
-후에에~기다려! 다음 함장님 면담 때 총알받이 제공할게! 5대5! 히이잉.
“흐음, 딜.”
걸오는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아뿔싸! 이미 비행전대 전원이 미카의 뒤에서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눈빛이 이만저만 흉흉한 게 아니다. 그리고 그 눈빛들은 일제히 걸오의 손에 들린 통장과 카드에 집중되었다.
“이런 씨발년이! 나만 왕따 시킨거냐아아아!”
“꺄하하, 걸오 니 호봉이 젤루 높잖아.”
아차! 방심했다. 미카가 중령이라고 하지만 호봉은 걸오가 위고 훈장수여다 뭐다 별별 수당이 붙어서 실급여는 걸오가 제루님과 모우 다음으로 3위다. 즉 이번 비자금의 근원은 걸오가 3위. 고로 제거 1순위란 얘기다.
“그리고 너만 제끼면 니몫도 우리거란 얘기.”
“도리볼 이 배신자 새끼! 뒷일은 각오한다 이거지?”
“천만에! 우리의 우정은 이런 사소한 트러블에 깨질 것이 아니잖아?
겨우 이깟 돈 따위에 말이다. 그러니 난 너와의 우정을 믿고 이러는 거야.
이러는 날 이해해 줄 거지? 으응?”
“개새-으악!”
잠시 육박전이 있었지만 걸오는 요령 있게 내뺐다. 현 아이사타호의 비행전대는 연방 유수의 엘리트 스타파이터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걸오도 안면이 있거나 이름쯤은 들어본 사람들-다시 말해 대단히 위험한 놈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선 스타파이터전 외에 육박전에서도 쟁쟁한 실력가들이 많다. 일단 바로 뒤에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쫓아오는 오미크론 크루갈레시난만 해도 걸오와 일대일 맞짱을 뜨는 괴물이다.
그때 복도 모퉁이에서 레헤미와 테테루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 소령님.”
“안녕하십---.”
“조또 이런 짬 안되는 새파란 애새키들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레헤미와 테테루는 우연히 마주친 걸오에게 인사했다가 답례로 날아온 호쾌한 래리어트에 그냥 휩쓸렸다. 그리고 이 난동은 자재창고에서 조용히 시작되었으나 곧 격납고와 주통로, 식당을 가로지르며 점차 피해가 커져갔고 급기야 해병대가 출동해서 폭동에 가담한 자들을 전원 체포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꽤 흐른 뒤의 이야기. 일단의 흉악한 무리들이 사라지자 기절해 있던 제루님이 천천히 일어나 통신기를 켰다.
-더듬이가 근질근질 함장님, 예상대로입니다.
-과연, 이로써 놈들에 대한 약점은 하나 추가. 다루기가 한결 편해지겠구먼.
-살살 눈치를 보는 듯 그럼 이번 자금에 관해서는…
-약조대로 자네에게 일임함세. 뭐 자네 덕에 생긴 돈 아니던가. 껄껄껄.
-간사하게 케케케, 거듭 감사합니다.
“이런 가공할 음모였을 줄이야.”
걸오는 근신처분을 받고 자기방 침대에 누워 이를 갈고 있었다. 무언가 수상하다는 낌새가 들긴 했었지만 돈에 눈이 돌아가 이런 실책을 하다니. 이번 사건은 애초에 모우와 제루님이 꾸민 음모였다.
에이스 스타파이터들은 하나같이 자존심 강한 존재들이다. 일단 전투에 돌입하면 충실한 부하지만 사석에선 다루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을 정도. 해서 이런 일을 숱하게 겪어온 모우와 제루님이 초반에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꾸민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꽤 효율적인 연극이다. 결국엔 해병대를 공식적으로 출동시켜 정당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개개인의 약점을-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잡아챈 것이다. 자기와는 미카는 그렇다 쳐도 다른 스타파이터들의 앞날을 생각하니 옛날 생각이 나 머리가 아파지는 걸오였다.
“걸오야 놀자.”
그때 걸오의 방 천정의 환기구가 열리며 미카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긴 흑발이 치렁치렁 늘어져 걸오의 이마를 간질였다.
“너도 근신이잖아.”
“어~나 내방 문 밖으로 안 나갔는데.”
씨도 안 먹힐 변명을 하면서 미카는 걸오의 침대로 쏙 떨어졌다. 그리고 걸오의 배에 정통으로 명중.
“커헉! 너너…옷은?”
“응, 중간에 걸리적 거려서 벗었어.”
지금 미카는 빨간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채 걸오 위에 앉아 밝게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카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너 락샤헤이론 크루갈레시난 알지?”
“어어? 왜?”
걸오의 물음에 미카의 세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 사람 아이사타호로 온다던데?”
“후에?”
미카는 놀라서 걸오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언제 온대? 헤일 걔 언제 온대?”
“몰라, 이번 충원 이라던데?”
그러자 미카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꽤 겁먹은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해 하고 있었다.
“걸오야, 나 갈게~.”
미카는 걸오를 박차고 뛰어올라 천정의 환기구로 들어갔고 그 바람에 걸오는 침대 구석으로 고꾸라졌다. 걸오가 씨발씨발하며 일어서는데 미카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린다.
“아와와와와~걸오야~도와줘.”
용맹한 무어인 전사가 환기구에 엉덩이가 끼어 아둥바둥대는 진귀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걸오는 이걸 찍어 모우와 제루님에게 넘기면 어떤 이득이 생길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지만 되려 미카로 하여금 자신을 공격하게 할 구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발 좀, 발 좀 받쳐줘.”
걸오는 한숨 한번 내쉰 다음 허리를 굽혀 파닥이는 미카의 발에 어깨를 대주었다. 순간 엄청난 충격과 함께 걸오는 방바닥에 납작하게 처박혔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이나 어떤 인사도 없이 바바박하고 기어가는 소리만이 천장에서 점차 작아져 갔다.
“좋다. 0대1. 각오해라.”
--------------
드디어 2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