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내가 왔다, 살아있으면 대답해!”

저장소 안의 화재는 더욱 심각해져서 과열된 연료팩들이 연달아 폭발하고 있었다. 걸오는 아까 하볼인을 두고 온 장소로 달려가며 외쳤지만 불길 일렁이는 소리와 폭발음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저기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걸오는 고통과 공포, 절망에 휩싸인 채 사라져가는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크윽…컥컥.”

허리 아래로 잘려나간 하볼인은 불에 타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기어서 도망가고 있었다. 걸오가 내려준 곳에는 얼마 있지 않아 불길이 엄습해와 그는 살기 위해 한쪽 팔과 부러진 날개로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려 발악했다.

“아아악! 커헉!”

이미 전투약의 기운은 떨어졌다. 외부로 흘러나온 장기들이 달궈진 바닥에 지져지자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고통이 온몸을 타고 흘렀고 한 번씩 기어갈 때마다 살갗은 바닥에 눌어붙어 피부가 벗겨져나갔다.  

“우우, 어머니~.”

날개의 깃털이 그을려 타 들어가고 점차 몸에도 불길이 옮겨 붙었다.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필사적으로 뒹굴어보았지만 이미 그의 주변에는 불길이 가득 에워싸고 있었다.

“안돼에에에에-----.”

갈라진 부리 사이로 마지막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감겨진 두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검게 탄 볼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불꽃과 매연에 휩싸여 죽어가는 그가 다시 느낀 것은 고통스러운 뜨거움이 아니라 편안한 따스함이었다.

“아직 살아있었구나!”

걸오는 사라져가는 하볼인의 생명을 간신히 붙잡은 뒤 몸에 붙은 불을 두들겨 껐다. 그리고 반 토막이 난 그를 안은 뒤 불길과 폭염을 헤치며 달려 나갔다. 멀리서 연료팩들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저장소 내부를 휘몰아치고 있는 열풍들도 이제는 발악적이었다.

“젠장,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걸오는 자신을 살라먹으려 덤비는 불길들을 피하며 계속해서 입구 쪽으로 달렸다. 이미 사출된 연료 저장소지만 아직 방법이 있었다. 그나마 체력이 남아있는 지금이라면 성공가능성이 꽤 높은 방법이.
그러나 불행히도 과열된 연료탱크 하나가 마침 걸오가 지나가려는 찰나에 폭발해 버렸다.

“크앗!”

폭풍과 파편에 휩쓸린 걸오는 부상자를 놓치며 불타는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걸오가 다시 일어나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 그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먼저 저기서 뒹굴고 있는 자신의 왼팔. 붙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저런 꼴이라니 한숨이 먼저 나온다. 다음은 등을 뚫고 가슴까지 뚫고 나온 길다란 파편들. 마지막으로 신경들의 강렬한 경고에 뒤를 돌아보자 걸레짝이 된 등판을 멋지게 감상할 수 있었다.    

“...모질게도 당했군...”

지금의 폭발로 척추 대부분이 끊겨져 나갔고 몸 안으로 뚫고 들어온 파편들은 폐와 심장, 기타 장기 할 것 없이 모조리 회를 치듯 헤집어 놓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기 쓰러져있는 하볼인은 걸오가 품 안에 안고 있던 터라 더 이상 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장과 폐라…이건 곤란한데.”

소화기관이라면 어찌 해볼 여지가 있지만 심폐기관이 정지하면 육체의 기동에 상당한 무리가 온다. 더구나 중추신경계마저 박살 났으니 치명적이다.
뇌에 혈액공급이 중단되고 산소유입이 줄어들자 점차 걸오의 의식도 흐려져갔다.

“아아. 무리인가?”

그들이 있는 연료 저장소는 이미 우주공간으로 사출된 상태이고 주위에선 연료팩들이 줄줄이 터져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걸오는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다른 이의 목숨마저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 혼자라면 그다지 위험한 상황은 아니겠으나 바로 앞에서 숨이 끊어져 가는 하볼인이 걸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회색 바닥과 청색의 천장, 붉은 불길과 검은 매연.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갈색 대지와 녹색의 평원,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나는 왜 그곳을 떠난 거지?  

“뭐 나라 이름은 한검이라고 하지만…지구인이라고 부르쇼.”

“땅 구슬의 사람이란 말이렸다. 이것도 인연인가.
라출노그인이란 물 구슬의 사람이란 뜻이니라.”

아아, 기억난다. 모우왕자와의 첫 대면이었다.

“흐음, 주역이라. 책이냐?”

“그게 조금 복잡한데 말이지.”

퀴즈파리단. 미안, 난 너의 죽음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 말인즉슨 네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 해도 그건 결국 네 선한 욕망 때문에
생겨난 이기적 행동이란 거잖아.”

“자식아, 그냥 정신적 딸딸이라고 쉽게 말해.”

여전하군. 하비.

“안됐군. 네놈은 타인의 행복한 모습을 원할 뿐 타인과 행복을 나누진 못해.”  

쩹멧디오프. 이 새끼는 누구더라?

“그대는 세레이트란인가 안힐레타인가.”

이건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자의 질문이다. 아니면 만났던 적이 없는 과거의 일이던가. 걸오는 이미 죽어버린 육체 속에서 영혼마저 과거의 물결에 휩쓸려 익사해가고 있었다.

“주역 찾을 거야?”

륜?

‘내가 뭐라고 대답했었지? 아니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낮게 중얼거리는 걸오는 더 이상 3차원적 존재가 아니었다.



“이거 놔! 안돼!”

레헤미는 연료 저장소의 문을 강제로 열려다가 구조대원들에게 붙잡혔다.  

“소위님! 진정하세요,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설마 그런 짓을 할 줄이야.”

“으윽, 소대장님!”

양팔을 붙들린 레헤미는 닫혀버린 저장소의 문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상위종족이라고 잘난 체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죽다니....’

레헤미는 한 때나마 걸오를 증오했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가 종말의 이후에 살아남은 종족이라고 해서, 선택받았던 종족이라고 해서
내가 미워했던 게 과연 옳은 짓이었을까?
지구인들이 다른 자들을 지배하며 무시한 적은 없었어.
결국 나 혼자만의 열등심이었던거야.’

하지만 때늦은 후회를 해봐야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서 정신차리세요,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옆에서 한 구조대원이 일으켜 세우자 레헤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걸오는 이미 죽었다. 설령 죽지 않았더라고 한들 죽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가 입고 있던 연약한 스타 파이터 슈트는 그 격렬한 화재에 견뎌대질 못할 테고 게다가 저장소는 우주로 방출되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라출노그인 한 사람은 구출한 건가.”

구조대원들이 다시 작업을 하기 위해 그곳을 떠나려 할 때 레헤미는 자신의 앞에서 뭔가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 되었다.

“으응?”

그리고 바로 직후, 레헤미의 눈 앞에는 한 사람의 지구인과 하볼인이 3차원의 공간을 뛰어넘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앗! 소...소대장님!”

믿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 연료 저장소 안에서 죽어가야 할 걸오가 바로 이 앞에 나타나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

“아닛! 소령님!”

걸오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자 근처에 있던 자들은 이 놀라운 사건에 당황하여 허둥거렸으나 곧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에게 달라붙었다.

“아~난 괜찮아, 저 녀석이나 치료해주라고.”

입에 물고 있던 왼팔을 뱉으며 걸오가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소대장님. 지금 상처가…빨리 응급처리를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구요.”

잘려나간 왼팔, 가슴을 뚫고 나온 파편들, 게다가 등 뒤쪽은 아예 눈뜨고 못 볼 참상이다. 이런 걸오의 상처들은 의학이나 지구인에 대한 지식이 적은 레헤미의 눈에도 심각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태연하게 몸을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뭐가 심해, 그냥 척추 끊어지고 심장이랑 폐가 파토난 것뿐인데.”

걸오가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에도 몸 속에 박힌 파편들은 하나씩 밖으로 밀려나왔고 잘려나갔던 근육들이 서로 붙는가 하면 이미 없어져 버린 내장 기관들은 다시 생성되고 있었다.
레헤미는 지금 자신 앞에 있는 걸오가 지구인이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지구인이란 종족이 이 정도까지일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러나 걸오 본인에겐 그렇지 않았다. 척추가 잘려나가고 몸 안에 있던 대맥들도 상당수 손상된 상태라 재생이 느렸다.

“야야, 뭐하냐.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예엣, 소대장님.”

걸오의 말이 떨어지자 주위의 구조대원들은 재빨리 부상자들을 들것에 실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였다.
일행이 격납고로 다시 돌아오자 저쪽에서 한 구조대원이 누구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걸오 소령님이시죠? 함장님 호출입니다.”

“호출?”

그가 내민 통신기를 받아 든 걸오는 의아해 했다. 자신의 통신기를 놔두고 왜 사람을 시켜서 찾는단 말인가. 혹시나 해서 손목을 살펴보니 걸오의 통신기는 아까의 북새통에 당한 듯 박살이 나있었다.

-어떻게 된 게냐. 연락이 아예 두절되어있지 않았나!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모우의 불호령이 터져 나온다. 사람을 시켜 찾을 정도라면 꽤 급한 일일 테니 당연하다.

“아아, 뭐 조금 그럴 사정이 있어서요.”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니라, 어서 그곳을 빠져 나오도록.
궤도기지가 더 이상 낙하하기 전에 파괴한다.

현재 궤도기지는 어뢰공격에 피해를 입어 담프사로 낙하하고 있는 상태이다. 아이사타호가 견인하고는 있지만 미완성된 지금의 출력으로는 시간을 끄는 게 고작. 그러니 궤도기지가 담프사에 떨어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중도에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레헤미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사령관의 안위가 다시 걱정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걸오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잠깐만요, 함장님. 기지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통제실 쪽과는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습니다만…”

-구출은 완료다. 사령관도 부상을 입긴 했지만 무사히 구출에 성공했다.

모우의 대답에 레헤미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으나 걸오는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모우는 지극히 ‘경제’적인 판단을 내리는 군인이다. 전략전술적 견지에서 최선이나 차악이라고 판단되면 아군이라 해도 서슴없이, 당연하게 희생시킨다. 실로 케트쿤, 라출노그식 사고방식이지만 이 때문에 걸오가 뒤통수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게…완료입니까, 종료입니까?”

-이 오지랖 넓은 놈아! 한 두 사람 더 살리겠다고 담프사에 대학살을 일으킬 셈이냐!
  네놈이 연료저장소에서 사단을 낸 것을 짐이 모를 줄 알았더냐!
  오오냐, 이번만은 너그러이 인용할까 했으나…

걸오는 눈을 질끈 감으며 통신기를 껐다. 이런 것을 긁어 부스럼이라고 한다. 모우는 지극히 ‘경제’적인 판단을 내리는 군인이다. 또한 ‘자산관리’에도 철저하기에 쓸데없이 나대다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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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일 놈의 확장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