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연대기 - 작가 : magegarden
글 수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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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2/12
요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달이 머리위에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지석은 고글의 스캐너를 작동시켜 마을을 살펴보았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생물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류사의 발에 걸린 돌이 굴러가서 하얀 벽돌에 부딪혔다. 모래에 합성수지를 섞어 만든 이곳의 보편적인 건축물들이 계단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적이 있었다면 벌써 쐈을 겁니다."
"그래."
고글에 건물의 하얀 벽이 아프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렇겠군."
블록 위로 모래가 밟혀 자근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긋지긋한 모래. 그리고 바람.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지석은 이 별에 처음 상륙했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 별을 증오했다. 이 별을 개척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대단히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공포스러운 황량함을 그는 예상하지 못한 걸까.
앞서 나가던 요한이 머뭇거리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청음센서, 꽂고 있습니까?"
지석은 두건 속을 더듬어 청음센서를 귀에 쑤셔넣었다.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의를 집중하자 뭔가가 잡혔다. 쿵쿵거리는 낮은 울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류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 - 아마도 루나인의 방언이었을 것이다. - 로 투덜거렸다.
요한은 청음센서를 귀에 댄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군용장비는 아닙니다."
핸드 그립에 표시된 기호를 식별하면서 요한은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압니다. 이건 자동펌프가 작동하는 소리죠."
메다산이 어눌한 말투로 단정지었다. 메다산은 머리를 긁적이며 일행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펌프?"
"제가 있던 곳에서는 말입니다."
"그래. 네가 있던 곳에서는 그랬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있던 그 구질구질한 사막말이야."
낮고 빠른 말로 메다산의 말을 거칠게 끊은 류사는 공기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뱀의 숨결처럼 낮은 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확실히 군용장비는 아니군."
검색을 마친 지석의 핸드그립에도 결과가 출력되었다.
"부닥쳐 보면 알 수 있겠지."
원래 달의 크기가 크지 않은 까닭에 달빛은 강한 편이 아니지만 하얀 색깔의 벽들 때문에 주위의 광경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지향사격자세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는 동안 쿵쿵 울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지석의 발 밑을 자극했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스며들었다.
마을 광장을 지나쳐 골목을 도는 순간 지석은 자기도 모르게 왼손을 번쩍 들었다. 일행은 흩어졌다.
그 곳에는 자동펌프가 파란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작동하고 있었다.
"맙소사."
엄폐물의 뒤에서 걸어나오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군복을 입은 시체가 펌프의 활대에 걸려있었다. 펌프가 위아래로 작동할 때마다 시체의 머리부분이 펌프의 추에 깔려서 짓눌리고 있었고 이미 바싹 말라버린 시체는 머리가 눌릴때마다 움찔움찔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군이군."
"예. 아군입니다."
메다산이 시체를 끌어당겼다. 군복과 펌프의 기계뭉치가 엉켜붙어 시체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그건 시체라기 보다는 말라붙은 넝마조각에 가까웠다. 찌그러져서 납작해진 머리가 몸통에서 늘어져 건들거렸다.
"메다산, 잠깐."
메다산은 일행을 쳐다보았다.
지석은 메다산의 뒤쪽을 가리켰다. 시체가 더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수십, 수백명의 시체였다.
창문, 골목 구석구석, 그리고 도로가의 간판 뒤에까지 사방에 시체가 쌓여있었다. 하나같이 오래 전에 미이라가 된 것들이었다.
옥상에서 분대지원화기에 매달린 채로 죽은 시체가 상체를 반쯤 내밀고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요한의 목에서 반옥타브 정도 높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해봐."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아키텐은 펌프 옆에서 멍청하게 서있었고 요한과 류사가 이 시체, 저 시체를 오가며 상태를 살폈다.
"아군.....아군들입니다."
류사의 중얼거리는 말투에는 기묘하게 뒤틀린 감정이 실려있었다.
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전멸당한 것이다. 도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전투를 되풀이 했다. 어쩌면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요한이 손짓을 했다. 요한이 가리킨 곳에는 보병구축전차가 뒤집어진 채 파괴되어 있었다. 납작한 보병구축전차의 장갑에는 루나인 군대의 마크가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지석은 전차를 들여다보았다. 전차의 내부는 모래와 티끌, 그리고 파괴된 잔해로 가득 차 있었다.
지석은 고개를 들고 왼손을 허리에 짚었다.
"시체가 더 있을 거다."
이럴 때는 자신의 목소리 마저 공허하게 들린다.
"하지만 신경 쓸 거 없어. 여기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고글을 밀어올린 요한의 눈이 달그늘 속에서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이렇게 시체가 많이 있는 건 처음 봤습니다. 다른데선.... 그러니까 저희들이 있었던 적도 근방에선 사람이 많이 죽긴 했어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마치..그리고 적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지석은 오른손을 들어 요한의 말을 중단시켰다.
"마치, 뭐. 사람이 죽는 건 전쟁중엔 흔히 있는 일이야. 여기에서 작전단 하나가 전멸당했다. 설명이 됐나?"
"중위도 방위선의 작전단은 모두 퇴각해서 적도로 내려간 것 아니었습니까?"
"거짓말이야."
지석은 팔짱을 꼈다.
"몰랐나?"
"그럴 수가."
"사령부가 거짓말을 한 거다. 아벤 전단이 여기에서 전멸당했어. 퇴로를 차단당했겠지. 그게 다야."
지석은 말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펌프소리 사이로 삐걱거리는 간판소리가 끼어들었다. 건물 문앞에 세워져 있건 입간판이 시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쓰러졌다.
"아벤 전단이라면......"
"정리해보지. 우리 임무는 원래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외딴 곳을 정찰 하는 거야. 이미 여기엔 적도 아군도 없는 것 같으니까 그건 필요가 없다. 이 근방 어딘가에 통신기가 있을 거다. 일단 그 통신기를 찾아서 작전단으로 연락을 하자."
"좋습니다. 아군은 전멸되었다 치고, 그럼 적군은 어디 있습니까?"
"전투를 끝내고 떠나버렸겠지."
"그건 조금 이상합니다. 조장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루나인의 특성상 이런 오아시스 도시는 굉장히 중요한 전략거점입니다. 사방 수백킬로미터 내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이곳 뿐입니다. 이런 도시를 이렇게 비워둔 채 어디로 가버린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그만해, 요한."
"조장님."
"요한, 네가 모르는 건 나도 몰라. 나도 궁금해."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만일 작동하는 위성 통신기가 없으면 그 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있어. 우리가 이 텅 빈 마을에 왜 왔겠나. 망할 통신기 한 대가 작전단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야. 통신기를 찾아서 어떻게든 연락을 취하면 작전단에서 차량을 보내주든가 수송기를 보내주든가 하겠지. 우린 그걸 타고 돌아간다. 걸어갈 수는 없으니까."
"통신기 얘기는 없었잖습니까. 그냥 정찰임무라고만 전달받았습니다."
"있었어."
"그럼 애초에 통신신호를 수신하는 장비를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잘못했군요."
지석은 걷기 시작했다. 통신장비를 가지고 왔더라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통신위성은 단 한 대도 없을 테니까.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자. 시체가 너무 많아."
지석은 실토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이 기분나쁜 이야기의 결말을.
마을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지석의 기준으로는 마을이라기보다는 작은 도시에 가까운 규모였다. 방향을 잃어버리기 딱 좋게 지어진 도로 사이로 고고한 정적이 도사리고 앉아 숨쉬는 것들을 지독하게 노려보았다. 길은 미로가 되어 위장을 자극하고 있었고 똑같은 하얀 벽들은 달빛을 받아 거친 반사광을 내뿜고 있었다.
상당한 경사를 오르고 나자 건물이 듬성듬성해지고 공터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체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버려져 있었다. 어께를 잇대고 있던 건물들이 끝나고 민둥산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단급의 통신기라면 아마 높은 곳에 설치되었을 겁니다. 깨끗한 통신이 가능해지니까. 높은 곳이라면......."
요한의 말이 짧은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틱하는 소리와 함께 류사가 바닥에 엎어졌다.
"어디야!"
말보다는 동작이 빨랐다. 건물의 그늘로 몸을 숨긴 지석은 청음센서를 귀에 꽂았다. 연이어 두 발의 총탄이 벽에 부딪히고 하얀 모래가 흘러내렸다.
"위쪽입니다! 바위산 쪽에서 누군가 저격하고 있습니다!"
지석은 왼쪽 손목에 부착된 핸드 그립의 디스플레이를 눈앞으로 가져갔다. 디스플레이의 파란 막대기는 진행중이었다.
메다산은 고중력강으로 만들어진 조립식 방패를 펼쳐들고 류사가 엎어져 있는 곳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연이어 두발의 총탄이 메다산의 방패에 부딪혔다. 충격으로 방패가 놓칠뻔한 메다산은 잇새로 신음소리를 냈다.
그자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비좁은 골목을 벗어나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석은 메다산을 쳐다보다가 디스플레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건.
지석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핸드그립에 표시된 정보는 적의 무기가 베이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음원이 이렇게 확실하다면 청음센서가 오작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석은 포켓에서 신호용 발광막대를 꺼내 반으로 꺾었다. 그리고 벽 바깥쪽으로 툭 집어던졌다. 피아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청색 발광봉이다.
QK-1 베이직은 크리식에서 제조한 연방 육군의 제식소총이었다. EM레일을 사용하는 고속 레일건이고 소구경탄과 대구경 총류탄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이다. 고속레일건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고작 30년전의 일이었다. 그 이전에는 대량살상이 가능한 플래체트나 확산유탄이 보병화기의 주류였다. 하지만 섬유소재가 발전하면서 단방향 경직성 탄소섬유가 대량생산 되기 시작하자 보병의 방어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단방향 경직성이란 다른 모든 방향에 대해 유연하게 움직이지만 한쪽 방향에 대해서는 순간적으로 높은 압축-인장강도를 나타낸다는 말이다. 보병들이 이러한 탄소섬유재질의 전투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자 파편이나 유산탄은 더 이상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보병화기는 과거로 돌아갔다. 보병의 방어복을 관통할수 있는 고속의 소구경 총탄으로 말이다. QK-1은 이러한 연방 육군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레일건이었다. 하지만 사용방법이 복잡하고 명중률도 낮아 별로 인기가 없었다.
따라서 적군은 베이직을 노획해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갑자기 사격이 중단되었다. 신호봉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깜빡이다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신호봉의 빛이 망막에 노란 잔상을 남겼다. 지석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방이 청음센서를 귀에 꽂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석은 두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최대한 고압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연방 MEU(우주 함대 소속 원정군) 일등 전투관이다! 그 쪽의 소속을 밝혀라!"
잠시 후 청음센서에서 가냘프게 끊기는 목소리가 잡혔다.
"잘 들리지 않는다! 반복하라! 나는 연방군의 일등 전투관이다!"
목소리는 여전히 웅얼거렸다.
지석은 헬멧을 벗어 담벼락 위로 내밀었다. 목소리가 갑자기 선명해졌다. 청음센서는 헬멧에 부착되어 있다.
"반복하라!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연방군이다! 그대의 소속을 밝혀라!"
"당신들은 연방군인가?"
"그렇다. 우리는 연방군이다."
"잘 들리지 않는다. 좀 더 크게 말해라."
"우리는 연방군의 정찰대다! 그 쪽의 소속을 밝혀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메다산은 류사에게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러자 갑자기 류사가 벌떡 일어나 메다산의 방패 안으로 뛰어들었다.
수백만 입방미터의 바스락거리는 공기속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냉각되는 모래가 발밑에서 자글거렸다. 밤의 냉기가 압력호스를 거쳐 천천히 코로 스며들어 폐를 어루만진다. 이 별에선 아무리 추워도 입김이 생기지 않는다. 지석은 총을 끌어당겨 몸에 밀착시켰다.
"다시 한번 반복한다! 우리는 연방군 소속의......"
청음센서에 날카로운 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메다산의 발치에서 흙모래가 튀어올랐다. 조립식 방패가 크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인용이다. 세발의 총탄이 연달아 방패의 가장자리에서 불꽃을 퀴겼다. 방패를 쥔 메다산이 낮은 소리로 욕설을 지껄였다. 소리보다 빠르게 다가드는 총알의 운동에너지가 충격력이 되어 망치로 내리찍듯 방패를 두드리는 것이다.
"메다산. 류사는 움직일 수 있나?"
"앗. 예. 괜찮은 것 같습니다!"
메다산의 목소리가 인터컴을 꽂은 왼쪽 귀와 그렇지 않은 오른쪽 귀에 동시에 들려왔다.
지석은 핸드그립을 들여다보았다. 적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대략 600미터 정도.
"요한."
"예?"
"저격할 수 있겠나?"
총성이 잠깐 멎었다. 건너편 골목에서 요한이 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총을 맞아준다면 가능하겠군요."
"요한. 넌 아직 발각되지 않았으니까 시도해봐."
"조장. 놈이 프리즘 가스나 스모크 같은 걸 쓰고 있으면 저격은 불가능합니다."
요한의 말이 맞다. 프리즘 가스를 쓰면 좁은 지역의 공기가 굴절되어 목표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된다. 지석은 라디오를 켰다.
"아니, 요한. 넌 그냥 견제만 해주면 돼. 내가 우회해서 저 새끼한테 접근할 거니까."
라디오는 적의 청음을 막기 위해 쓰는 장치이다. 라디오의 불규칙한 잡음에 섞여 지석의 목소리가 마이크로폰으로 빨려들었다.
요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허리춤의 프리즘 가스 그레네이드를 떼어 안전핀을 분리하는것까지 보고 나서 지석은 돌아섰다.
등 뒤에 웅크리고 있던 아키텐과 눈이 마주쳤다. 아키텐은 고글과 두건을 머리뒤고 젖히고 있었다.
"전....저는 어떻게 합니까?"
움푹 들어간 아키텐의 눈과 양 볼에 진한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그냥 이 자리에 있어. 꼼짝하지 말고."
"예?"
그레네이드의 쉭쉭거리는 소리. 지석은 라디오를 끄고 부스터를 벗어 내려놓았다.
아키텐의 크게 벌려진 두 눈이 그의 옆얼굴을 스쳐갔다.
이따금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총소리. 레일건에 실린 탄환이 자기장에 떠밀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그리고 턱밑까지 차오르는 거친 호흡. 지석은 그늘에 몸을 바싹 붙였다. 대강의 위치는 짐작할 만 했다. 총을 잡은 손으로 땅을 짚고 왼손을 벽 바깥으로 내밀었다. 왼손의 핸드그립에 부착된 거울면에 야트막한 바위산이 뿌옇게 떠올랐다.
저 꼭대기의 바위 뒤에 있을 것이다. 숨을 고르며 지석은 거울을 노려보았다. 다시 총성. 그리고 거울면에 아주 희미한 불꽃이 스쳐갔다.
EM레일에 탄환이 마찰하면서 내는 희미한 빛이다. 놈은 낡은 총을 쓰고 있다. 새 총이라면 저렇게 불꽃이 심하게 나지는 않는다.
지석은 머릿속으로 크게 선회해서 접근하는 경로를 그려보았다. 엄폐물은 많이 있다.
마음속으로 셋을 세고 뛰어나가려는데 갑자기 비명소리.
지석은 근육을 긴장시킨 채로 우뚝 멈추어섰다. 누구일까. 요한?
바싹 마른 입술이 입가에서 바스락거렸다.
지석은 다시 셋을 헤아렸다. 그리고 뛰어나갔다.
소총의 무게가 손목과 팔꿈치를 거쳐 어께로 전해진다.
총을 집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십분의 일초마다 백번씩 반복하면서 지석은 동산을 기어올랐다. 눈앞에 커다란 바위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처럼 평평하게 생긴 돌 위에 달빛이 창백하게 쏟아지고 있다. 지석은 지면을 딛고 뛰어올랐다. 등 뒤에 차가운 바위벽이 부딪혔다. 총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바위 밑에 웅크리고 지석은 숨을 죽였다.
알고있을까? 아마 당연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청음장치를 쓰고 있다면.
지석은 소리없이 포켓에서 캡슐을 끄집어냈다. 손끝의 감촉으로 캡슐의 종류를 확인했다.
고리가 두 개 달린 노이즈메이커다. 적어도 일분간은 효과가 지속된다. 엄지와 검지로 눌러 반대편으로 힘껏 던졌다. 프레리 마스커까지 있다면 완벽한 기습이 가능하겠지만 시간이 없다. 노이즈 메이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있다면 그 쪽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석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뛰쳐나갔다.
달빛.
한 남자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있다. 텅 빈 푸른 빛.
달콤하게 속삭이는 노이즈 메이커의 거짓말들.
눈 앞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너도 똑같아.'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이 방아쇠울에 걸려있었다.
'왜 하필이면 나야! 난 살고싶어! 난.........난! 지석아. 미안해.'
지석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민아. 미안해. 미안해. 난 아직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어.
그는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희뿌연 달빛 속에서 남자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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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달이 머리위에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지석은 고글의 스캐너를 작동시켜 마을을 살펴보았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생물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류사의 발에 걸린 돌이 굴러가서 하얀 벽돌에 부딪혔다. 모래에 합성수지를 섞어 만든 이곳의 보편적인 건축물들이 계단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적이 있었다면 벌써 쐈을 겁니다."
"그래."
고글에 건물의 하얀 벽이 아프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렇겠군."
블록 위로 모래가 밟혀 자근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긋지긋한 모래. 그리고 바람.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지석은 이 별에 처음 상륙했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 별을 증오했다. 이 별을 개척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대단히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공포스러운 황량함을 그는 예상하지 못한 걸까.
앞서 나가던 요한이 머뭇거리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청음센서, 꽂고 있습니까?"
지석은 두건 속을 더듬어 청음센서를 귀에 쑤셔넣었다.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의를 집중하자 뭔가가 잡혔다. 쿵쿵거리는 낮은 울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류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 - 아마도 루나인의 방언이었을 것이다. - 로 투덜거렸다.
요한은 청음센서를 귀에 댄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군용장비는 아닙니다."
핸드 그립에 표시된 기호를 식별하면서 요한은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압니다. 이건 자동펌프가 작동하는 소리죠."
메다산이 어눌한 말투로 단정지었다. 메다산은 머리를 긁적이며 일행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펌프?"
"제가 있던 곳에서는 말입니다."
"그래. 네가 있던 곳에서는 그랬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있던 그 구질구질한 사막말이야."
낮고 빠른 말로 메다산의 말을 거칠게 끊은 류사는 공기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뱀의 숨결처럼 낮은 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확실히 군용장비는 아니군."
검색을 마친 지석의 핸드그립에도 결과가 출력되었다.
"부닥쳐 보면 알 수 있겠지."
원래 달의 크기가 크지 않은 까닭에 달빛은 강한 편이 아니지만 하얀 색깔의 벽들 때문에 주위의 광경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지향사격자세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는 동안 쿵쿵 울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지석의 발 밑을 자극했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스며들었다.
마을 광장을 지나쳐 골목을 도는 순간 지석은 자기도 모르게 왼손을 번쩍 들었다. 일행은 흩어졌다.
그 곳에는 자동펌프가 파란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작동하고 있었다.
"맙소사."
엄폐물의 뒤에서 걸어나오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군복을 입은 시체가 펌프의 활대에 걸려있었다. 펌프가 위아래로 작동할 때마다 시체의 머리부분이 펌프의 추에 깔려서 짓눌리고 있었고 이미 바싹 말라버린 시체는 머리가 눌릴때마다 움찔움찔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군이군."
"예. 아군입니다."
메다산이 시체를 끌어당겼다. 군복과 펌프의 기계뭉치가 엉켜붙어 시체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그건 시체라기 보다는 말라붙은 넝마조각에 가까웠다. 찌그러져서 납작해진 머리가 몸통에서 늘어져 건들거렸다.
"메다산, 잠깐."
메다산은 일행을 쳐다보았다.
지석은 메다산의 뒤쪽을 가리켰다. 시체가 더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수십, 수백명의 시체였다.
창문, 골목 구석구석, 그리고 도로가의 간판 뒤에까지 사방에 시체가 쌓여있었다. 하나같이 오래 전에 미이라가 된 것들이었다.
옥상에서 분대지원화기에 매달린 채로 죽은 시체가 상체를 반쯤 내밀고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요한의 목에서 반옥타브 정도 높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해봐."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아키텐은 펌프 옆에서 멍청하게 서있었고 요한과 류사가 이 시체, 저 시체를 오가며 상태를 살폈다.
"아군.....아군들입니다."
류사의 중얼거리는 말투에는 기묘하게 뒤틀린 감정이 실려있었다.
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전멸당한 것이다. 도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전투를 되풀이 했다. 어쩌면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요한이 손짓을 했다. 요한이 가리킨 곳에는 보병구축전차가 뒤집어진 채 파괴되어 있었다. 납작한 보병구축전차의 장갑에는 루나인 군대의 마크가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지석은 전차를 들여다보았다. 전차의 내부는 모래와 티끌, 그리고 파괴된 잔해로 가득 차 있었다.
지석은 고개를 들고 왼손을 허리에 짚었다.
"시체가 더 있을 거다."
이럴 때는 자신의 목소리 마저 공허하게 들린다.
"하지만 신경 쓸 거 없어. 여기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고글을 밀어올린 요한의 눈이 달그늘 속에서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이렇게 시체가 많이 있는 건 처음 봤습니다. 다른데선.... 그러니까 저희들이 있었던 적도 근방에선 사람이 많이 죽긴 했어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마치..그리고 적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지석은 오른손을 들어 요한의 말을 중단시켰다.
"마치, 뭐. 사람이 죽는 건 전쟁중엔 흔히 있는 일이야. 여기에서 작전단 하나가 전멸당했다. 설명이 됐나?"
"중위도 방위선의 작전단은 모두 퇴각해서 적도로 내려간 것 아니었습니까?"
"거짓말이야."
지석은 팔짱을 꼈다.
"몰랐나?"
"그럴 수가."
"사령부가 거짓말을 한 거다. 아벤 전단이 여기에서 전멸당했어. 퇴로를 차단당했겠지. 그게 다야."
지석은 말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펌프소리 사이로 삐걱거리는 간판소리가 끼어들었다. 건물 문앞에 세워져 있건 입간판이 시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쓰러졌다.
"아벤 전단이라면......"
"정리해보지. 우리 임무는 원래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외딴 곳을 정찰 하는 거야. 이미 여기엔 적도 아군도 없는 것 같으니까 그건 필요가 없다. 이 근방 어딘가에 통신기가 있을 거다. 일단 그 통신기를 찾아서 작전단으로 연락을 하자."
"좋습니다. 아군은 전멸되었다 치고, 그럼 적군은 어디 있습니까?"
"전투를 끝내고 떠나버렸겠지."
"그건 조금 이상합니다. 조장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루나인의 특성상 이런 오아시스 도시는 굉장히 중요한 전략거점입니다. 사방 수백킬로미터 내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이곳 뿐입니다. 이런 도시를 이렇게 비워둔 채 어디로 가버린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그만해, 요한."
"조장님."
"요한, 네가 모르는 건 나도 몰라. 나도 궁금해."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만일 작동하는 위성 통신기가 없으면 그 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있어. 우리가 이 텅 빈 마을에 왜 왔겠나. 망할 통신기 한 대가 작전단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야. 통신기를 찾아서 어떻게든 연락을 취하면 작전단에서 차량을 보내주든가 수송기를 보내주든가 하겠지. 우린 그걸 타고 돌아간다. 걸어갈 수는 없으니까."
"통신기 얘기는 없었잖습니까. 그냥 정찰임무라고만 전달받았습니다."
"있었어."
"그럼 애초에 통신신호를 수신하는 장비를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잘못했군요."
지석은 걷기 시작했다. 통신장비를 가지고 왔더라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통신위성은 단 한 대도 없을 테니까.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자. 시체가 너무 많아."
지석은 실토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이 기분나쁜 이야기의 결말을.
마을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지석의 기준으로는 마을이라기보다는 작은 도시에 가까운 규모였다. 방향을 잃어버리기 딱 좋게 지어진 도로 사이로 고고한 정적이 도사리고 앉아 숨쉬는 것들을 지독하게 노려보았다. 길은 미로가 되어 위장을 자극하고 있었고 똑같은 하얀 벽들은 달빛을 받아 거친 반사광을 내뿜고 있었다.
상당한 경사를 오르고 나자 건물이 듬성듬성해지고 공터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체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버려져 있었다. 어께를 잇대고 있던 건물들이 끝나고 민둥산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단급의 통신기라면 아마 높은 곳에 설치되었을 겁니다. 깨끗한 통신이 가능해지니까. 높은 곳이라면......."
요한의 말이 짧은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틱하는 소리와 함께 류사가 바닥에 엎어졌다.
"어디야!"
말보다는 동작이 빨랐다. 건물의 그늘로 몸을 숨긴 지석은 청음센서를 귀에 꽂았다. 연이어 두 발의 총탄이 벽에 부딪히고 하얀 모래가 흘러내렸다.
"위쪽입니다! 바위산 쪽에서 누군가 저격하고 있습니다!"
지석은 왼쪽 손목에 부착된 핸드 그립의 디스플레이를 눈앞으로 가져갔다. 디스플레이의 파란 막대기는 진행중이었다.
메다산은 고중력강으로 만들어진 조립식 방패를 펼쳐들고 류사가 엎어져 있는 곳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연이어 두발의 총탄이 메다산의 방패에 부딪혔다. 충격으로 방패가 놓칠뻔한 메다산은 잇새로 신음소리를 냈다.
그자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비좁은 골목을 벗어나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석은 메다산을 쳐다보다가 디스플레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건.
지석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핸드그립에 표시된 정보는 적의 무기가 베이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음원이 이렇게 확실하다면 청음센서가 오작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석은 포켓에서 신호용 발광막대를 꺼내 반으로 꺾었다. 그리고 벽 바깥쪽으로 툭 집어던졌다. 피아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청색 발광봉이다.
QK-1 베이직은 크리식에서 제조한 연방 육군의 제식소총이었다. EM레일을 사용하는 고속 레일건이고 소구경탄과 대구경 총류탄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이다. 고속레일건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고작 30년전의 일이었다. 그 이전에는 대량살상이 가능한 플래체트나 확산유탄이 보병화기의 주류였다. 하지만 섬유소재가 발전하면서 단방향 경직성 탄소섬유가 대량생산 되기 시작하자 보병의 방어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단방향 경직성이란 다른 모든 방향에 대해 유연하게 움직이지만 한쪽 방향에 대해서는 순간적으로 높은 압축-인장강도를 나타낸다는 말이다. 보병들이 이러한 탄소섬유재질의 전투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자 파편이나 유산탄은 더 이상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보병화기는 과거로 돌아갔다. 보병의 방어복을 관통할수 있는 고속의 소구경 총탄으로 말이다. QK-1은 이러한 연방 육군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레일건이었다. 하지만 사용방법이 복잡하고 명중률도 낮아 별로 인기가 없었다.
따라서 적군은 베이직을 노획해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갑자기 사격이 중단되었다. 신호봉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깜빡이다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신호봉의 빛이 망막에 노란 잔상을 남겼다. 지석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방이 청음센서를 귀에 꽂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석은 두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최대한 고압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연방 MEU(우주 함대 소속 원정군) 일등 전투관이다! 그 쪽의 소속을 밝혀라!"
잠시 후 청음센서에서 가냘프게 끊기는 목소리가 잡혔다.
"잘 들리지 않는다! 반복하라! 나는 연방군의 일등 전투관이다!"
목소리는 여전히 웅얼거렸다.
지석은 헬멧을 벗어 담벼락 위로 내밀었다. 목소리가 갑자기 선명해졌다. 청음센서는 헬멧에 부착되어 있다.
"반복하라!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연방군이다! 그대의 소속을 밝혀라!"
"당신들은 연방군인가?"
"그렇다. 우리는 연방군이다."
"잘 들리지 않는다. 좀 더 크게 말해라."
"우리는 연방군의 정찰대다! 그 쪽의 소속을 밝혀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메다산은 류사에게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러자 갑자기 류사가 벌떡 일어나 메다산의 방패 안으로 뛰어들었다.
수백만 입방미터의 바스락거리는 공기속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냉각되는 모래가 발밑에서 자글거렸다. 밤의 냉기가 압력호스를 거쳐 천천히 코로 스며들어 폐를 어루만진다. 이 별에선 아무리 추워도 입김이 생기지 않는다. 지석은 총을 끌어당겨 몸에 밀착시켰다.
"다시 한번 반복한다! 우리는 연방군 소속의......"
청음센서에 날카로운 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메다산의 발치에서 흙모래가 튀어올랐다. 조립식 방패가 크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인용이다. 세발의 총탄이 연달아 방패의 가장자리에서 불꽃을 퀴겼다. 방패를 쥔 메다산이 낮은 소리로 욕설을 지껄였다. 소리보다 빠르게 다가드는 총알의 운동에너지가 충격력이 되어 망치로 내리찍듯 방패를 두드리는 것이다.
"메다산. 류사는 움직일 수 있나?"
"앗. 예. 괜찮은 것 같습니다!"
메다산의 목소리가 인터컴을 꽂은 왼쪽 귀와 그렇지 않은 오른쪽 귀에 동시에 들려왔다.
지석은 핸드그립을 들여다보았다. 적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대략 600미터 정도.
"요한."
"예?"
"저격할 수 있겠나?"
총성이 잠깐 멎었다. 건너편 골목에서 요한이 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총을 맞아준다면 가능하겠군요."
"요한. 넌 아직 발각되지 않았으니까 시도해봐."
"조장. 놈이 프리즘 가스나 스모크 같은 걸 쓰고 있으면 저격은 불가능합니다."
요한의 말이 맞다. 프리즘 가스를 쓰면 좁은 지역의 공기가 굴절되어 목표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된다. 지석은 라디오를 켰다.
"아니, 요한. 넌 그냥 견제만 해주면 돼. 내가 우회해서 저 새끼한테 접근할 거니까."
라디오는 적의 청음을 막기 위해 쓰는 장치이다. 라디오의 불규칙한 잡음에 섞여 지석의 목소리가 마이크로폰으로 빨려들었다.
요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허리춤의 프리즘 가스 그레네이드를 떼어 안전핀을 분리하는것까지 보고 나서 지석은 돌아섰다.
등 뒤에 웅크리고 있던 아키텐과 눈이 마주쳤다. 아키텐은 고글과 두건을 머리뒤고 젖히고 있었다.
"전....저는 어떻게 합니까?"
움푹 들어간 아키텐의 눈과 양 볼에 진한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그냥 이 자리에 있어. 꼼짝하지 말고."
"예?"
그레네이드의 쉭쉭거리는 소리. 지석은 라디오를 끄고 부스터를 벗어 내려놓았다.
아키텐의 크게 벌려진 두 눈이 그의 옆얼굴을 스쳐갔다.
이따금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총소리. 레일건에 실린 탄환이 자기장에 떠밀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그리고 턱밑까지 차오르는 거친 호흡. 지석은 그늘에 몸을 바싹 붙였다. 대강의 위치는 짐작할 만 했다. 총을 잡은 손으로 땅을 짚고 왼손을 벽 바깥으로 내밀었다. 왼손의 핸드그립에 부착된 거울면에 야트막한 바위산이 뿌옇게 떠올랐다.
저 꼭대기의 바위 뒤에 있을 것이다. 숨을 고르며 지석은 거울을 노려보았다. 다시 총성. 그리고 거울면에 아주 희미한 불꽃이 스쳐갔다.
EM레일에 탄환이 마찰하면서 내는 희미한 빛이다. 놈은 낡은 총을 쓰고 있다. 새 총이라면 저렇게 불꽃이 심하게 나지는 않는다.
지석은 머릿속으로 크게 선회해서 접근하는 경로를 그려보았다. 엄폐물은 많이 있다.
마음속으로 셋을 세고 뛰어나가려는데 갑자기 비명소리.
지석은 근육을 긴장시킨 채로 우뚝 멈추어섰다. 누구일까. 요한?
바싹 마른 입술이 입가에서 바스락거렸다.
지석은 다시 셋을 헤아렸다. 그리고 뛰어나갔다.
소총의 무게가 손목과 팔꿈치를 거쳐 어께로 전해진다.
총을 집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십분의 일초마다 백번씩 반복하면서 지석은 동산을 기어올랐다. 눈앞에 커다란 바위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처럼 평평하게 생긴 돌 위에 달빛이 창백하게 쏟아지고 있다. 지석은 지면을 딛고 뛰어올랐다. 등 뒤에 차가운 바위벽이 부딪혔다. 총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바위 밑에 웅크리고 지석은 숨을 죽였다.
알고있을까? 아마 당연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청음장치를 쓰고 있다면.
지석은 소리없이 포켓에서 캡슐을 끄집어냈다. 손끝의 감촉으로 캡슐의 종류를 확인했다.
고리가 두 개 달린 노이즈메이커다. 적어도 일분간은 효과가 지속된다. 엄지와 검지로 눌러 반대편으로 힘껏 던졌다. 프레리 마스커까지 있다면 완벽한 기습이 가능하겠지만 시간이 없다. 노이즈 메이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있다면 그 쪽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석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뛰쳐나갔다.
달빛.
한 남자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있다. 텅 빈 푸른 빛.
달콤하게 속삭이는 노이즈 메이커의 거짓말들.
눈 앞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너도 똑같아.'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이 방아쇠울에 걸려있었다.
'왜 하필이면 나야! 난 살고싶어! 난.........난! 지석아. 미안해.'
지석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민아. 미안해. 미안해. 난 아직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어.
그는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희뿌연 달빛 속에서 남자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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