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년 01월 03일. 21시 20분. 미국 시카고

"으아~. 오늘 내로 끝내지 못하면 원고 펑크야!"
"톤은 내가 붙여줄게!"
"펜터치는 제가 해드릴게요!"

히카루는 원고 위에다 열심히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었
다. 그녀의 동거남 '에릭 바렛'과 그의 여동생도 마감 기일을 지키는
것을 돕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바로 그때 초
인종이 울렸고, 에릭의 여동생이 급히 뛰어가 인터폰으로 용무를 물
었다.

"누구시죠?"
-UN 상비군의 '사부로 다케다' 대령입니다. '히카루 아마노'씨를  만
나러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언니~."
"무슨 일이야?"
"밖에 손님이 왔어. '사부로  다케다'라는 사람이 언니를  만나고 싶
대."
"들어오라고 해."
"알았어."

곧 에릭의 여동생은 문을 열어주었고, 다케다 대령을 포함 네 명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루리루리, 료코, 케빈, 사부로씨~."
"히카루, 너무 오버하지마."
"다들 와 줘서 고마워. 나 실은..."
"?"
"마감 일정을 못 맞추면 나 마블 코믹스에서 쫓겨나~!"
"히카루, 그러길래 내가 말했잖아. 마블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그러면 자기는 왜 군대를 그만둔 거야?"
"흰집에서 군비를 줄이는 데 별 수 있겠어? 게다가 난 예비역이 된
지 1주일도 되지 않았단 말이야."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먼저 히카루씨의 일을  도와드리는 게
좋겠어요."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
"나도 찬성."

어느새 네 사람이 일을 거들어  주면서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난 후 작업은 완벽하게 끝났다.

"휴... 땀이 비오듯 하는군."
"히카루씨,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말하기 뭣 하지만 늘 이래. 시간에 쫓기랴, 원고 독촉에다... 흐휴~.
생각 같아선 때려 치우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
니니..."
"그쪽은?"
"예전엔 공군 탐색 구조대의 파일럿이었는데 지금은 백수에요. 군비
축소로 대우가 자꾸 나빠져서 관두는 수밖에 없었죠."

에릭은 그렇게 말한 후 손을 내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대우
가 지독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사실 전쟁 기간  중에 양적으
로 빠른 속도로 커질 수밖에 없는  군대는 평화가 도래하면 일시적
으로 전력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북으로는 중국, 동으로는
일본을 견제하느라 GDP대비 3퍼센트의 국방비를  유지해온 한국도
3차 대전이 종결되기가 무섭게 주변국과의  전력 지수를 맞추기 위
해 고집스럽게 사용한 구형 장비들을 자신과 친밀한 관계인 동남아
각국에 공여해버릴 정도였으니 다른 국가들이라고 오죽할까?

"히카루씨, 예전의 나데시코 시절이 그립지 않으세요?"
"내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그런데 그 얘기는 왜 꺼낸거
야?"
"UN 상비군에서 탐사 함대를 구성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 넷은
거기에 합류하기로 했죠."
"그러면..."
"우리 모두 다시 모이는 거예요."
"좋아. 나도 같이 갈래. 이런 생활은 너무 지루했단 말이야."
"자, 잠깐. 히카루, 나를 두고..."
"바렛 준위, 여기 서류가 있네. 애인을 혼자 보내기 싫다면 즉시 군
에 복귀하게. 물론 선택은 자유."
"네? 말도 안 됩니다. 두 번 다시 고생하기는 싫어요."
"탐사 함대의 일원으로 참가할 경우 한 달 급여가 무려 5000달러에
달하네. 그밖에 수당을  더하면 10000달러는 가뿐하게  받을 수  있
지."
"..."
"오빠, 괜히 따라가지마! 이건 함정이라고!!"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결국 서류에 사인해  버렸다. 물
론 히카루도...

2205년 01월 04일. 16시 30분. 일본 도쿄

"자, 이것만 붙이면..."
"여보, 왠지 불안해요. 이제 그만하시는 게..."
"아빠..."

예전의 갖은 고생 덕분에  세운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자신의
안드로이드 가게에 자리한 작업실 안에서 '우리바타케 세이야'는 가
족들의 불안함이 가득 한 시선을 뒤로 한 채 안드로이드 개조에 열
중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제작중인 안드로이드는 민수용으로  팔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불법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여기에
무기가 내장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 현장이 당국에 적발되는
날엔...

-계십니까?
"아빠, 손님이 왔어요."
"네가 나가봐라. 만약에 나를 찾으면 절대로 없다고 해라."
"네."

곧 그의 아들은 곧장 작업실 밖으로 나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 손
님 앞으로 걸어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사업상 너희 아버지를 뵈러 왔단다. 지금 여기 계시니?"
"아니요. 아버지는 일이 있어서 나가셨어요."
"그래... 나가셨단 말이지..."

가게를 찾은 두 백인 사내는 가게를 두리번 거리더니 갑자기 벽을
두드리고는 몇 가지 도구를 꺼내어 벽면을 뜯어내버렸다.

"헉?"
"'우리바타케 세이야', 관계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안드로이드 개
조 및 무기 장착은 불법이요. 원칙대로라면 우리는 일본  정부에 당
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통보해야 하오."
"빠, 빠져나갈 길은 없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그, 그게 뭐요?"
"이 서류에 사인하시오."
"거기에 서명하면 해결되는 겁니까?"
"물론이오.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은 책임질 수 없지만..."
"감옥에 가기 싫은데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리겠소?"
"뭐 그러시다면..."

세이야는 허겁지겁 서류에 사인했고,  백인 사내들은 씨익  웃더니
그를 주먹으로 패 기절시킨 후 포대자루에 담고 가게를 떠났다.

2205년 01월 04일. 02시 50분. 볼티모어

"돌비치 대령, 굳이 이번 탐사 함대에 자원할 이유가  있나? 후배들
에게 맡겨도 될 텐데?"
"그러고 싶었습니다만, 이고르가 잘 해낼지 걱정되어서..."
"어쨌든 자네가 합류해 줬으니 기쁘네."
"그러고보니 나데시코 승조원들 중에  '고트 호리'가 있다고 들었습
니다."
"안면이 있나?"
"네. 1년 전에 콩고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콩고라... 통합 붕괴 이후 UN 체제로 다시 전환되고 나서  지구 각
지에선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어. '지구의  망령'들을 쓴 '로버트 포
사이스' 소장(캐나다 육군)의 예견이 틀리지 않았네."
"그 책은 저도 읽었습니다. 식은 땀이 흐를 정도로 책의  내용 하나
하나가 오싹했었죠."
"큰일이야. 각지에선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는데도 강대국의 정치가
들은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어. 최근엔 소말리아에서 다시 말썽이 터
졌다는데 이대로 가다간 일이 커지고 말거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슈톨로프 제독과 같이 걸으면서 대화를 나눈 '이반 돌비치' 대령은
잠시 도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르갈의 일본내 도크에서 분해되
어 볼티모어로 긴급 공수된 나데시코-B는 엄청난 대수술을 받아 모
습이 많이 변해 있었다.  돌출된 특징적인 함교는 그대로  납작해졌
고, 3차 대전을 시발점으로 장거리 실탄 병기의  횡포가 시작되면서
효용성이 떨어진 고출력의 그라비티 블래스트는  지상군 지원과 일
반적인 함포전에 적합한 신형 레일건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특히 함
수 양 옆이 대개조를 받아 비행 갑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네르갈의 개념은 비효율적이었어. 중량이 무려 30000톤대에 이르는
함선이 상륙 모함의 기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  낭비였네.
미 해군이 배치시킨 나데시코와 비슷한 외양을 지닌 롱비치급이 상
황에 따라선 1개 여단분의 병력과 장비를 싣고 항해하는 것이 가능
한 것을 생각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영국 해군의 스콧 제독은 네르갈에  대해서 군수 산업보다는 민수
산업이 더 어울리는 회사라고 평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그 회사가 서구의 군수 산업
체들을 제대로 뛰어넘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입니다. 그 점에선 크림
존도 마차가지 입니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한국의 군수 산업체들
까지 지금은 서구권 국가의 군수 회사들 앞에선 한 수 접는 추세라
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 러시아는 어떨까?"
"아직은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화성에서의 분쟁에서 미국의 저돌성
에 우리가 밀린 것을 생각하면 많이 노력해야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돌비치 대령과 제독은 도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잠시  멈칫했고,
곧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파리스 블뤼허'는 두 사람 앞에 서
서 경례한 후 말하였다.

"오랜만입니다."
"이제 블뤼허라는 성을 버리는 게 좋지 않겠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길 순 없습니다. 이해
해주세요."
"..."

손녀의 단호한 대답에 슈톨로프 제독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
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늘 듣던  대답이었기 때문이
었다.

"싫다면 할 수 없지."

곧 세 사람은 함께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네가 함대에 합류할 거라는 얘기는 들었다. 그리고 이번 항해의 목
적이..."
"네 잘 알고 있어요. 그 뒤엔 매우 어두운 과거가 있다는 것도..."
"마음 단단히 먹어라. 3차 대전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인 지구권으로
서는 또 한 번의 큰 전쟁은 파멸을 낳고 말아. 우리는  반드시 그들
과 화해해야만 해."
"쉽지 않을 거예요. 목성인들과 달리 완전히 버림  받았던 사람들이
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요. 포기해선 안 되죠. 그들과 평화를 공유할지의 여부는 만나
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는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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