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탈출

2204년 03월 12일. 09시 35분. 온두라스 쥬티칼파

정체를 숨기기 위해 온두라스 군의 전투복을 입은 미군들은 인기척
을 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마을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반군이 곧
있을 기습을 눈치채는 것을 막기 위해 상공에 떠 있는 정찰 수단은
인공 위성과 초고공 정찰기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후 마을 가까이에 이른 미군은 각자 담당한 지점을 향해 총을
겨누었고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후 그들이 착용한 단
안식 고글에 명령문이 떴다.

-Attack.

그 즉시 대원들이 들고 있는  모든 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개미처럼 흩어졌고, 마을에 머물던  반군들
은 총을 들며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몸 곳곳에 구멍
이 뚫리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전원 돌격!"

그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계를 맡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원
전원이 마을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1999호라고 불리운  미군은
식량이 저장된 창고를 유탄으로 날려버린 후 마악 건물에서 뛰어나
온 반군 병사의 이마 한 가운데에 총알을 먹였다. 사방에 피와 뇌수
가 튀는 것을 보고도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다음 목표
를 찾아 움직였다.

"오빠, 무서워..."
"쉿! 조용히 있어."

이름 모를 남매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숨어 있는 은신처에서 나오지  않은 채 밖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비명을 들으며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마을 어른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두 사람은
정부군이 매우 강한 사람들을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후 총소리가 멎었고,  남매는 이내 안심한 나머지  은신처에서
나왔다. 그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처참하게 불탄 마을과 한 곳
에 차곡차곡 쌓인 사람들의 시신이었다.
남매는 말없이 서로를 감싸며 흐느낀 후  서로의 손을 잡고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반군이 장악한 다른 마을로 도망치는 것만이 그
들이 살 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얼마 못가 눈 앞에서  미군과
마주쳤고, 그는 말 없이 총을 겨누었다. 자신들의 운명을 깨달은 듯
남매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감쌌고, 곧 십 수발의  총성이 메아리
쳤다.

"..."

남매를 죽인 1999호라 불리운 미군은 무언가  떠오른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싸매며 고통이 가득 한 절규를 했다.

"1999호, 응답하라. 1999호, 응답하라. 반복한다."
"대체 무슨 일인가?"
"1999호가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헬멧 부착 카메라의  화면도 끊겼
고, 심박 체크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큼지막한 장갑차 내부에 설치된 지휘소에선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
는 1999호의 행방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로 그  때 지휘소
밖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고, 곧 장갑차 뒤편의  출입문이 열리면
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1999호?"
"..."
"1999호,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빨리 무기를 버려라."

장교 한 명이 그렇게 말하면서 무기를  버릴 것을 종용하는 제스쳐
를 취하자 기관총을 들고 있는 1999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날 숫자로 부르지 마라. 내 이름은 '케빈 글렌'이란 말이다!"

곧 그는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고, 수 십발의 총탄이  지휘소 내부
를 휩쓸기 시작했다. 기관총탄에  맞은 전원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
다. 그렇게 요란한 파티를 끝낸 케빈은 서스팬더에 매어둔 수류탄의
핀을 뽑아 지휘소 내부에 집어던진 후 도망쳤다.

2204년 03월 12일. 10시 10분.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뭣이? 1999호가 탈영했다고?"
"유감스럽게도..."
"에잇! 바보같은 것들! 대체 병력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뒤늦게 보고를 받은 부대장은 책상과 문짝을  때려 부수며 씩씩 거
리고는 입을 열었다.

"추적대를 편성해라. 놈이 기억을 되찾은 거라면 반드시  본토로 돌
아가려고 할 거다. 그 전에 놈을 막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추적대에 1896호를 넣어라.  놈을 잡으려면 녀석이  필요하
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실수 없이 처리하도록."

2204년 03월 12일. 12시 20분. 찰스턴

냉전 이래로 뱅거, 킹스 베이와 더불어 미 해군 잠수함들의 삼대 모
항이라 불리운 이곳 찰스턴은  예전의 명성과 달리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도 군사 요충지로 분류되고 있다지만 이곳에  기항하고
있는 배는 몇 척의 구축함과 잠수함만이 전부였다.
그런 이 항구에 한 척의 잠수함이 입항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소음
감소를 최우선시하는 잠수함의 외관은 21세기 때와 큰 차이가 없었
다. 음향 흡수 소재들 위에 칠해진  검은 페인트, 빙해 작전을 중시
하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형태의 사령탑들은 잠수함이 예전과 비교
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제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네."

사령탑에 서서 항만을 바라본 백발이 무성한 노제독은 주위를 돌아
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목성 연합과의 전쟁이 끝난  후 세계
각국의 군비 경쟁은 점점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그  동안
개발을 중지했던 신형 기동병기들을 다시 무기 시장에 내놓아 분쟁
중인 국가들에게 팔아 넘겼고,  영국은 목성 연합과의 전쟁이  끝난
후 필요가 없게 된 재고 무기들을  헐값에 처분하느라 정신이 없었
다.
그리고 NATO를 탈퇴한 러시아는 화성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기 시
작했고, 미국도 이에 맞서 기지를 설치해 운명의 시계는  다시 위기
직전임을 나타내는 자정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 후 잠수함은 부두에 접안했고, 노제독은 잠수함에서 내려 기다
리고 있던 군수 회사 관계자들과 악수를 주고 받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최고의 배를 만들었소. 즉시 국방성에 이  잠수함을 대량
건조해야 한다고 보고하겠소."
"감사합니다. 제독님."

얼마 후 그들과 헤어진 노제독은 자신의 주차장으로 향했고, 그곳에
세워진 자신의 차에 탔다. 키를 꽂고 돌리려던 그는  갑자기 뒤돌아
보지 않은 채 등 뒤로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장난은 정도껏 하게."
"역시 전직 SEAL 대원다워. 나이가 들었어도 실력은 여전하군."
"용건만 말해."
"좋아. 본론으로 들어가지. 남미 쪽에서 연락이 왔네."
"?"
"우리에서 맹수 한 마리가 탈출했어."
"누가 말인가?"
"확인해 보니 자네의 옛 친구였어. 아마 우리를 찾아 오겠지."
"..."
"두렵나?"
"전혀."
"이번엔 실수 없이 끝내게. 그 때처럼 온정을 베풀려다가 산통 깨지
마. 그녀를 생각..."
"경고하는데 그녀에게 손을 댔다간 죽여 버리겠어!"
"농담도 못하나? 이제 우리 수중에 남은  마지막 유적의 귀중한 콘
트롤러를 해칠 정도로 난 그리 바보가 아니야. 게다가 자넨 그 아이
에 대한 애정은 이미 다 버렸다고 했지 않나?"
"..."
"잘 처리하게."

육군 장성은 씨익 웃으며 노제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후 차
에서 내렸다. 차에 남은 노제독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지갑
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바라보았다.

2204년 03월 12일. 화성. 사이도니아

"어떤가?"
"여전합니다. 저 녀석들 포위망을 풀 생각이 없나 봅니다."
"일이 터진지 1개월째다.  시민들에게 계속  물자가 공급되지  않으
면..."

프랑스 육군의 '쟝 피엘' 중장은 거기까지 말한 후 걱정스러운 표정
을 지으며 전자 광학식 쌍안경으로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러시아군
은 서방권 국가들의 목성인 관리 방식을 문제 삼아 공동 관리 구역
으로 지정된 사이도니아를 포위했는데 이를 1차적으로 해제해야 할
프랑스 육군은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권당인 사회당은 러시아와의  충돌을 우려해  자국군의 적극적인
개입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군과 영국군을 주축으로  11개
국가의 군대만이 러시아 군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용케 언론이 눈치채지 않았군요."
"천만 중 다행이지."

중장은 무료함을 달래고자 TV를 켰다. 바로 그 순간 그의 귀에  엄
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사령관님, 저길 보십시오!"
"대체 뭐길래? 맙소사!"

중장은 부관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목표 지점 상공에 도착했다. 예정대로 착륙을 강행한다."
-행운을 빌겠다.

상공에 떠 있는 미 공군의 전략  수송기들은 호위 전력을 대동하지
않은 채 사이도니아 공항에 착륙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의
전투기들이 그들을 미행했지만, 사태 확산을 우려했기 때문인지  어
느 누구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옵니다."
"어서 서둘러!"

선두의 수송기가 활주로에 착륙하자 대기하고  있던 목성인 인부들
과 영국 공군 UN 파견단의 지상 근무병들이 일제히 트럭과 지게차
를 몰고 수송기에 다가갔다.  수송기는 재빨리 기수와 동체  후부의
화물 출입문을 열었고, 인부들과 근무병들은 신속하게 물자를  트럭
으로 옮긴 후 안전 위치로 대피했다. 곧 물자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떠나자 수송기는 그 즉시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갔다.
얼마 후 두 번 째 수송기가 활주로에 착륙해 물자를 내리기 시작했
다.

"..."
"사령관님, 어쩌실 겁니까? 저대로 내버려 뒀다간..."
"아직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 섣불리 움직여선 안돼."

러시아 육군의 '이고르 포크리쉬킨' 소장은 사이도니아에 물자를 공
수하기 시작한 미군 수송기들을 바라보고는 한 숨을 쉬었다. 미국인
들은 기어이 정면 돌파를 택했다. 러시아가 베를린 봉쇄  때처럼 결
국 자기들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저들의 행동을 막을 필요가 없다. 명령이 내려올 때까
지 기다리는 거다."
"알겠습니다."

2204년 03월 12일. 14시 30분. 뉴욕

"뭐야? 그게 정말인가? 알았어."

곧 '로드니 휴즈' 회장은 전화를 끊은  후 앞에 서 있는 미나토에게
말했다.

"나쁜 소식이야. 화성에서 일이 터졌어."
"언론은 눈치 챘습니까?"
"아직은..."
"시간을 벌어 둬야 겠군요. 연막을 치겠습니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군..."
"사태가 해결된 후에 걷으면 문제 없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미나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회장의 집무실에서 나가려
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언니~!
"윽?!"
"?"
-큰일났어! 친구랑 연락이 되질 않아! 사이도니아로  들어가는 회선
이 다 불통이라구!
"미, 미스 하루카. 이 아이는...?"
"유키나, 조용히 해. 회장님 앞이야."
-미, 미안...
"그렇게 하지 말게. 애가 무안해하지 않나. 그래 네 이름이...
-유키나, '시라토리 유키나'에요.
"친구랑 연락이 되질 않는다고 했니? 내가 도와주마. 단  비밀을 지
켜줘야 한다."
-고맙습니다.

유키나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듣자  회장은 가볍게 웃은  후 조치를
취해줬다. 곧 유키나의 얼굴이 뜬 윈도우가 사라지자 미나토는 어찌
해야 좋을지 몰랐지만, 회장은 사람 좋게 웃으며 물었다.

"미스 하루카, 그 아이는 친동생인가?"
"아, 아닙니다. 아는 사람의 여동생이에요."
"아는 사람이라고?"
"그것과 관련해선 더 이상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흐음..."

회장은 몹시 궁금해 했지만, 예의상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곧 미
나토가 집무실을 나서자 회장은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2204년 03월 12일. 14시 40분. 볼티모어

"뭐라구요?"
"죄송합니다. 우리 해군은 귀사가  제안한 전투함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요?"
"저건 이미지가 너무 기괴합니다.  시커멓고 길죽한 상자처럼  생긴
전투함은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 전투함의 성능은  최상이요. 현재 쓰이는 인트리피드
급과 비교해 4배 이상의 전투력을 지녔소. 그리고  비상시엔 네르갈
의 유칼리스처럼 단 한 명만이 조작할 수도 있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안 된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록히드 마틴이 자랑하는 스컹크 웍스팀 산하 함선 설
계반의 총책임자인 '놈 히긴스'는 그  이유를 곧장 눈치채고는 빈정
거리는 말투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죠. 우리 배가 세상에 나왔다간 당신네 상관
들이 그 많은 전투함과 병력을 유지할 명분을 잃고 말 테니까요. 잘
하면 그루먼이 만든 그 잘난 미드웨이급도 저 녀석 앞에선 종이 호
랑이라는 게 알려지면..."
"그만 얘기 하시죠.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곧 해군의 구매 담당 장교가 사무실을 나섰고, '놈 히긴스'는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씩씩 거렸다.
SF를 좋아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이 곳에서 활동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