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데시코 외전 : 호넷 - 작가 : Frank
글 수 87
2202년 07월 07일. 목성 연합군 전함 히타카제
"적 함대가 계속 도주합니다."
"저 녀석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히타카제의 함교에선 절대로 아군과 교전하려 하지 않는 적 함대의
대응에 대단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제독님, 보고드립니다! 함대 전방에 다수의 전파 발신원이 포착 됐
습니다!"
"적 함대인가? 규모는?"
"그, 그것이..."
오퍼레이터는 덜덜 떨다가 간신히 마저 말했다.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뭐야?"
2202년 07월 07일. 한국 해군 항모 청해진
"쉽게 걸려 들었군.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제독님, 그렇지만 역사에 남을 싸움을 벌일 수 있게 됐지 않습니
까?"
"그렇기야 하네만..."
잠시 말끝을 흐린 '한신수' 제독은 함대 전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명령을 내렸다.
"공격을 시작하라."
그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함정이 목표로 배당 받은 목성
군 함정을 노리고 대함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발사된 미사일
의 대부분은 BGM-140 하푼IV였다. 예산상의 문제로 모든 계획이
중지된 채 보잉사의 자료실에 설계도면만이 남아 있던 이 무기는
보손 점프의 무력화로 빛을 보게 되는데 이 전투가 하푼IV의 공식
적인 데뷔전이었다.
목성군 함대 공격에 동원된 것은 하푼IV만이 아니었다. 출격할 수
있는 모든 함재기와 인간형 병기, 기동 병기들이 한도껏 무장을 탑
재하고 출격해 공격에 나선 것이다.
2202년 07월 07일. 미 해군 항모 호네트
-Ready on Cat.(캐터펄트에서 대기하라.)
우주복을 착용한 관제관의 지시에 따라 밋첼 중위는 샤이안을 캐터
펄트로 이동시킨 후 출격 허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곧 관제관이
유도봉을 흔들었다. 캐터펄트를 가동하겠다는 신호였다.
곧 샤이안의 자세를 조절한 그는 부스터의 출력을 높였고, 그와 동
시에 빠른 속도로 호네트로부터 벗어나 미리 출격해 대기 중이던
F-12 편대와 합류했다. 케이블에 의해 예인되기 시작한 인간형 병
기들은 그렇게 전장으로 향했다.
-그레그, 저거 보이냐?
"못 보던 종류인데..."
-그루먼이 만든 거래. 이름이 코르세어IV라는군. 샤이안이 배치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새 신형을 찍어내다니...
파란색과 하얀색을 적절히 사용한 해군 제식 도색이 칠해진 코르세
어IV들은 항공기에 의해 예인되지 않은 채 자력으로 이동하면서도
항공기보다도 빠른 순항 속도를 자랑했다.
"저게 대량으로 배치된다면 전쟁은 금방 끝나겠군."
-그레그, 위를 조심해!
"뭐? 우왓!"
난데 없는 사태에 당황한 밋첼 중위는 황급히 주위를 살피고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프랑스 군의 비 인간형 기동병기 '슈페르 에텡다
르'였다. 숫자가 부족한데다 장기간 작전도 힘들지만, 전함급의 화력
에 뛰어난 가속력과 기동성을 지닌 이 기체는 이전의 여러 전투에
서 목성군의 게키강 타입들을 축출해내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었
다. 지금 그 경이의 기동 병기가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연합군
수뇌부가 이번 작전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길! 프랑스 녀석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너무 불평하지마. 서로 주고 받는 때라는 게 있는 거야.
얼마 후 최대 사정거리 안에 진입한 연합군의 모든 항공기와 인간
형 및 기동 병기들이 대함 미사일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성급하기
그지 없게 아군에게 목을 내민 목성군 함대는 이것으로 전멸을 피
할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2202년 07월 07일. 목성 연합군 전함 히타카제
"함대공 미사일 대응합니다."
"적 대함 미사일 3파가 몰려옵니다!"
"연속 공격인가?"
"이대로 가다간 전멸입니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에 상관 없이 유키시로 제독은 눈을 감은 채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성급하게만 추격하지만 않았어도 실지는 지
킬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우리는 도망칠 곳이 없다. 이래 저래 죽으나 결과가 똑같다면
우리가 택할 길은 하나뿐. 우리도 적에게 그만한 타격을 입히는 것
이다."
그렇게 말한 후 유키시로 제독은 별이 반짝이는 함교 유리창 너머
로 시선을 옮겼다.
2202년 07월 07일. UN 상비군 나데시코-D
"함장, 방어벽을 내리겠습니다."
"알았어. 리리스쨩."
미사일이 함교에 피탄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함교 방어벽을 내리
기 시작한 리리스는 갑판에서 발진하는 십 수대의 인간형 병기와
항공기들을 바라보며 몹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두 명심하라. 우리의 1차 임무는 대함 미사일 공격이다. 적 함재
기와 인간형 병기와의 싸움은 부차적일 뿐이다. 쓸데없는 교전은 반
드시 피해라."
출격에 앞서 모두에게 당부한 다케다 대령은 에스테 바리스를 캐터
펄트 구획으로 이동시켰고, 곧 빠른 속도로 이함했다.
우수한 탑재력을 자랑하는 미드웨이급에 기반한 나데시코-D에서 발
진한 수많은 함재기와 인간형 병기들도 다른 항모에서 발진한 기체
들처럼 대함 미사일 세례를 퍼부은 후 공대공 임무를 맡은 기체들
을 제외하고는 미련 없이 모함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2202년 07월 07일. 목성 연합군 전함 히타카제
"처음 부터 함포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생각인가?"
"너무 많습니다. 이 상태로 갔다간..."
"보고 드립니다! 아군 함재기와 인형 병기들이 적에게..."
"궤멸당하고 있다는 말인가?"
"..."
"그렇다면 이제 우리 차례로군."
유키시로 제독은 피식 웃은 후 전방을 주시했다. 히타카제를 비롯
목성군의 모든 전투함들은 대함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수직 발사기가 일제히 개방되면서 수납
된 함대공 미사일들이 일제히 발사되기 시작했다.
현재 까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지구 각국 해군이 발사한 대함 미사
일은 대략 2500발에 달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20세기 중후
반때였던가? 미 해군을 비롯한 서방 각국 해군을 겨냥한 구 소련의
함대 결전이 실행될 경우 이를 위해 발사될 대함 미사일은 많아야
200발 정도가 한계였었다. 그럼에도 미 해군은 수많은 방공 전투함
과 뛰어난 함재기들을 보유하고서도 이를 제대로 막기 힘들 거라고
밝힌 적이 많았다. 구시대가 남긴 개념이 가져다준 공포에 맞닥 뜨
린 그로선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니, 대응할 방법 자체
가 없었다.
어느새 함대공 미사일들은 1파의 대함 미사일과 조우하기 시작했다.
우주 공간에 수많은 섬광이 번쩍이면서 수많은 미사일들이 폭발했
지만, 적지 않은 수가 용케 요격망을 빠져나와 계속 비행했다. 이들
을 포함해 2파의 대함 미사일을 노린 함대공 미사일들이 해당 공역
에 이르렀고, 또 한 차례 섬광의 정원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완전 요격은 불가능했다. 어느새 3파의 미사일들도 같은 과정을 거
쳤고, 1, 2, 3파의 남은 미사일은 모두 합해 800발 가량이었다.
"개함 방공 미사일 대응합니다!"
근접 방어전에 들어가기 전에 미사일 숫자를 안심할 수 있을 정도
로 줄여 놓기 위해 개함 방공 미사일들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이들
도 앞서 대응한 함대 방공 미사일들처럼 비슷한 장관을 이루었지만,
역시나 완전 요격은 무리였다.
최후의 저지선인 근접 방어 무기들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히타카제를 향해 내리꽂듯이 돌진하기 시작한 하푼IV가 십 수발의
명중탄을 맞고 산산 조각나는 것을 시작으로 적지 않은 수의 대함
미사일이 요격당했지만, 곧 중과 부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이
벌어졌다. 히타카제의 함교에 러시아제 초대형 대함 미사일 야혼트
III가 명중한 것이다. 전함 히타카제의 함교 상부를 뚫고 들어간 야
혼트의 2톤 짜리 최신형 탄두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단 한 차례
의 폭발로 히타카제의 함교가 아예 흔적도 없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은 야혼트 뿐만이 아니라 하푼IV의 군집 가운데 조금씩
섞여서 날아온 슬램IV도 보여주었다.
미사일에 난타당하기 시작한 목성 연합군 함대는 그렇게 전멸당하
고 말았다.
2202년 07월 07일. 목성 연합군 34번 이동 군사 콜로니 부근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적의 콜로니 강습을 막아라!"
'야마다 나가노' 소령은 머리 한 쪽을 붕대로 감을 정도로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Ki-31Kai를 조종해 콜로니에 강습
하려는 미군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Ki-31Kai의 다연발 캐논에 명
중 당한 십 수대의 MV-45가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났지만, 그들은
무제한 그 자체였다. 얼마 후 자국군 강습대를 엄호하기 위해 출동
한 F-12 전투기들이 AIM-14 이글 미사일을 난사했고, 그 중 한 발
이 야마다 소령의 편대원 중 한 명이 타고 있던 Ki-31에 명중했다.
-편대장님~!
그 절규와 함께 Ki-31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야마다 소령은 그
대로 절규하고 말았다.
"크아아아! 네놈들이!"
분노한 그의 공격 앞에 적지 않은 UN군이 쓰러졌지만, 죽음의 그림
자는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최신형 MW 코르세어IV 1개 편대는
그를 조준하기가 무섭게 십 수발의 초고속 경량형 대함 미사일을
발사했고, 그들은 정확하게 Ki-31Kai의 사지에 한 발씩 명중했다.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소령은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
다.
콜로니로의 강습을 방해하던 목성군 방어 부대가 패퇴하는 가운데
병력과 장비를 가득 실은 MV-45들은 목성군의 대공 화망을 무시하
면서 콜로니에 차례차례 침입했고, 싣고 있던 병력과 중장비를 무섭
게 내리기 시작했다.
"가자! 놈들은 우리의 적수가 아니다!"
지구 내에서의 작전을 마치기가 무섭게 이번 작전에 미 해병 3공간
양륙 군단 최고 지휘관으로서 참가한 밴더 와일리 소장은 지휘봉을
들며 자국 해병대원들을 독려했고 하나 같이 IA를 착용한 해병대원
들은 악에 받힌 듯 함성을 지르며 콜로니의 민간인 거주지에 난입
하기 시작했다.
"하, 항복! 항복할게!"
"이 도마뱀 자식들아! 항복이 어딨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려던 목성군 병사를 향해 미 해병대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총알을 퍼부었고, 곳곳에 구멍이 뚫린 시신들이 바닥
을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목성인들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다
른 사람을 죽이는 악귀일 뿐이었다.
"목성 따위가 무슨 대수냐? 어차피 망할 나라는 똥 오줌도 안돼! 마
음껏 죽이자!"
목성인들에 의해 가족을 잃었다고 하는 어느 부사관이 목청껏 소리
높여 외치는 가운데 미 해병대에 이어 진입한 한국 해병대의 전차
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제 승패는 분명해졌다.
"여단장님! 콜로니에 적이 진입했습니다!"
"..."
'야마자키 타무라' 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콜로니의 각 지
역에 설치된 카메라가 전송하는 화면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야마다
소령의 제안 대로 시가전을 하지 않고 콜로니 밖에서 적을 막으려
고 했지만, 결국엔 이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일선 지휘관들에게 전투 행위를 중지하고 투항하라고 하게."
"네?"
"귀먹었나? 투항하라고 했네."
"여단장님... 흐흑..."
"진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냐. 차라리 운 없고 못난 나를 원망하
게."
"아닙니다. 여단장님은 우릴 훌륭히 지휘하셨습니다. 이건 모두 다
그 바보같은 크사카베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목성의 미래를 망
쳤습니다. 그리고 지긴 했지만 잘 됐습니다. 우린 살아서 다시 일어
설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나는 아니네."
"네?"
곧 야마자키 준장은 권총을 들어 자기 머리에 겨누고는 말했다.
"나는 패전 책임을 지어야만 하네. 이렇게라도..."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총성이 울렸고 사방에 피와 뇌수가 튀겼다.
2202년 07월 07일. 한국 해군 항모 청해진
"제독님, 보고 드립니다. 한미 양국 해병대가 34번 콜로니를 함락시
켰다고 합니다."
"수고했다고 전하게."
"네."
"제독님, 이제 바그라찌온 결행에 필요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킬 수
있게 됐군요."
"아직은 아닙니다. 이것은 겨우 첫 출발이니까요."
"그렇지만, 이 승리의 의미는 너무나도 큽니다."
곧 미리 준비해둔 와인을 꺼낸 '한신수' 제독은 느긋하게 뚜껑을 따
포도주잔에 이를 부으며 말했다.
"목성 쪽바리들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망상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
는지 확실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일본처럼 애매하게 끝내선 안 됩니
다. 적어도 제국주의 시절의 독일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해야죠."
"동감입니다. 하하하..."
2202년 07월 07일. UN 상비군 나데시코-D
"함장, 한미 양국 해병대가 콜로니를 함락시켰데요."
"피해는?"
"정확한 수치는 나오지 않았지만, 목성 연합 민간인만 40만이 죽었
다고..."
그 말이 나오자 유리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싸웠길
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미군이 어린 여자애를 달리는 전차 앞에다
던졌다는 소문도 있어요."
"그리 놀랄 것도 없군..."
"무, 무슨 말씀이세요?"
"2차 대전 때 독소전에선 후반에 사실상 승리를 확정지은 구 소련
군 병사들은 독일이 자국에 가한 비인도적인 행위에 같은 방법으로
보복했어. 마이애미 등지에 가해진 무차별적인 공격에 미군들의 분
노가 하늘을 찌를 거라는 건 세 살 먹은 애들도 짐작할 수 있지. 안
됐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전적으로 목성인들의 책임이다.
그들은 그 어느 누구한테도 동정 받을 자격이 없어."
"대령님, 저도 목성인입니다."
"미안하네. 자네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아니요. 괜찮습니다. 언젠가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았으니
까요. 하지만..."
'다카스키 사부로타'는 거기 까지 말하고는 머리를 싸맨 채 전투가
종료되었지만, 곳곳이 심하게 손상된 콜로니를 바라보았다.
7.바그라찌온(2)
34번 콜로니를 함락한 후 미군을 주력으로 한 UN군은 여러 전장에
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며 화성에 강하하기 시작했다. '마샬 워커
패튼' 중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5 혼성기계화 군단은 엄청난 전투
력과 기동성을 앞세워 화성 전역을 휩쓸었다.
그들을 시작으로 UN군에 참여한 각국의 지상군 주력들도 여기에
가세해 전과 경쟁에 몰두했고, 어느새 화성의 79퍼센트가 그들의 손
아귀에 떨어졌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 목성 연합군의 저항이 매
우 거세어지자 화성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면 목성으로 향할 수 없
음을 잘 알고 있는 UN군 수뇌부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202년 07월 14일. UN 상비군 나데시코-D
"참 지루하네요."
"리리스쨩, 우리 '모노폴리'(보드 게임의 일종이다.)나 할까?"
"유키나씨, 알고 보니 어려운 거 하시네요."
"이래 뵈도 내가 그런 거에 일가견이 있다고."
그렇게 해서 리리스와 유키나가 모노폴리를 하는 가운데 유리카는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아 있는 아키토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아키토."
"왜?"
"우리 이 전쟁이 끝나는 대로..."
"..."
무언가를 느낀 듯 아키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함교 너머로
보이는 별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무언의 표시
인 듯 했다. 결혼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지만, 두 사람은 아이를 갖
질 않았다. 결혼하기로 확약한 다케다 대령과 료코가 일찌감치 아이
를 예약해 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에휴~. 다들 나태한 하루를 보내는군."
그렇게 말하며 잠시 레이더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 미나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또 폭격인가? 그나저나 대체 이 비행기들은 어느 정도의 성능을 지
녔을까?'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벌어지자 등장한 미군의 신형 B-36 폭격기
들은 너무나도 불가사의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미 본토에서
발진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 먼 곳에서 이곳 화성 부근 까지 단숨
에 날아와 화성 곳곳에 자리한 목성 연합 관할의 도시들을 폭격하
곤 했었다. 지금 까지 단 한 대도 격추당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생각
하면 궁금해지는 부분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번엔 둘이지? 정찰이라도 3대 이상이 날아왔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중 그녀는 혹시나하는 생각에 통신 주파수를 조절
하면서 레이더에 포착된 미군 폭격기 두 대와 교신을 시도했다.
"여기는 UN 상비군 나데시코-D 입니다. 귀측의 행선지와 임무를
말하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미나토가 줄기차게 응답을 요구하는 가운데 무슨 일인지 궁금해한
리리스가 윈도우를 통해 상황을 살피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미나토씨,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후 리리스는 몇 가지 방법으로 미군의 통신망에 침투
해 두 대의 폭격기가 주고 받는 교신을 도청했다.
-여기는 에놀라 게이II, 박스카II...
-여기는 박스카II... 알았...
-예정대로 산개...
-알았다. 예정대...
잡음이 섞인 가운데 들려오는 교신 내용에 모두들 의아한 가운데
때마침 들어온 다케다 대령에게 리리스가 말했다.
"대령님, 이것 좀 들어보세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물으면서 교신 내용을 들은 다케다 대령의 표정이 순식간에
납덩이가 되고 말았다.
"마, 맙소사... 설마?"
"대령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함장, 어서 저것들을 막아야 돼!"
바로 그 때 가만히 앉아 있던 루리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총을 꺼내
어 유리카를 겨누었다.
"죄송합니다. 모두들..."
"루, 루리쨩?"
"루리루리, 대체 무슨 짓이야?"
얼마 후 함교로 들어오는 모든 문이 열리면서 UDT/SEAL 대원들
이 함교내의 모든 이들을 꼼짝 못하게 했다.
"이, 이럴수가..."
"헐스 소령님,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아가씨, 죄송합니다. 명령은 명령입니다."
리리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헐스 소령은 그저 팔짱
을 낀 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소령님. 여기 남으시는 것이..."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어요"
UDT/SEAL 지휘관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루리는 조용히 함교를 떠
나려고 했다. 바로 그 때 하리가 소리쳤다.
"루리 함장! 저는 저는 원망하지 않아요. 루리 함장은 우리들의 동
료에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동료라구요! 크흐흑..."
2202년 07월 14일. 09시 35분(화성 시각) 코스모스 시티
"목성인들은 들어라.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니 즉시 무기를 버
리고 투항하라. 투항하면 제네바 협정에 의거, 정당한 대우를 해주
겠다."
마이크에 입을 대고 선무 공작을 벌이고 있는 장교를 바라보는 패
튼 중장의 얼굴엔 착잡함이 가득했다. 목성인들은 줄기차게 저항했
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할 행위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 따르는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수밖에 없
었다.
"그만하게. 좋게 말한다고 해서 들을 자들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곧 지휘소로 돌아가던 그의 앞으로 장교 한 명이 황급히 뛰어와 경
례한 후 보고했다.
"장군님, 본국으로부터 긴급 명령입니다. 지금 즉시 모든 부대를 시
가지로부터 40Km이상 떨어진 지점 까지 이동시키라고 합니다."
"뭐야? 그렇다면 후퇴하라는 얘긴가?"
지휘소로 들어가는 대로 즉시 시가지 진입을 명령하려던 장군의 입
장에선 어이가 없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곧 지휘소로 들어간
그는 휘하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즉시 모든 부대에 40Km 후방으로 이동하라고 하게. 라피스, 어서
짐을 챙기거라."
"네. 아버지."
곧 모든 병력이 철수 준비에 들어간 가운데 코스모스 시티를 방어
중인 목성군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레이더에 적 폭격기가 포착 됐습니다."
"규모는?"
"두 대 뿐입니다."
"뭐야? 다른 때 같으면 수 십대를 보내더니만, 이번엔 웬일이지?"
난데 없이 적은 숫자의 폭격기만이 이리로 날아온다고 하자 목성군
지휘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궁금해하는 가운데 추가 보고가
올라왔다.
"적 폭격기들이 산개한다고 합니다. 한 대는 이쪽으로, 다른 한 대
는 북쪽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정찰을 하려는게 아닐까요?"
"다른 때 같으면 세 대입니다. 이번엔 너무 적어요. 단 한 대만으로
제대로 정찰을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참 찝찝하군요."
"미사일로 격추하면 좋겠지만, 겨우 딱 한 대뿐인 적에게 쓰기도 참
뭣하고..."
"쏜다고 해서 꼭 맞는 일도 없죠."
"미제는 다 괴물이군요."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셈이죠."
목성군 지휘관들은 그렇게 폭격기의 단기 침입에 대수롭지 않은 반
응을 보였고, 폭격기가 맡은 진짜 임무를 통보 받지 못한 지구권 각
국 지상군 지휘관들의 반응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장군님, 모든 부대가 후방 이동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이제 여기서 대기하기만 하면 돼."
"장군님,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놓고 생각한다
면..."
거기 까지 말한 패튼 중장은 지휘차 내부에 설치된 테이블에 놓인
달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우리는 역사상 길이 남을 일을 목격하겠지."
코스모스 시티 상공에 진입한 B-36 폭격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폭탄창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실린 거대한 폭탄을 투하
했다. 뚱뚱하기 그지 없는 Mk-2는 그렇게 지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탄두부에 탑재된 레이더로 지형 지물을 확인하면서 시가지 한복판
을 향해 순조롭게 낙하한 이 폭탄은 100m 상공에 이르자 폭발을
일으켰다. 방사선과 핵낙진만 없을 뿐 그 과정은 핵폭발 그 자체였
다. 폭발 직후 발생한 고열에 노출된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
했다. 충격파와 그 충격파가 지면에 접촉해 발생한 마하파가 피해를
줄 수 있는 범위 안에 자리한 모든 것들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거대한 버섯 구름이 피어올랐다.
"오... 하느님 맙소사..."
작전을 끝내고 현지 협력자들과 같이 근거지로 귀환 중이던 영국군
SAS 대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참극이 벌어진 코스
모스 시티를 바라보았다. 얼마 후 현지 협력자 중 한 명이 SAS 일
선 지휘관의 멱살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이 거짓말쟁이들! 어떻게 사람들 머리 위에 저런 걸 떨어뜨릴 수가
있어!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미안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믿어 주세요."
"크흐흑..."
코스모스 시티 공략에 어려움을 느끼던 미군들의 반응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병사들 대부분이 방탄 헬멧을 벗으며 도시를 향해 묵
념했고, 몇몇은 아예 주저 앉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
에는 라피스도 있었다.
"라피스..."
"아빠... 저 사람들한테 왜 그런 짓을..."
"전쟁이기 때문이란다. 인간은 상황에 순응해 갈 수밖에 없어. 게다
가 그들이 저지른 짓들을 생각해 봐라.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 그래도 이건..."
거기 까지 말하고는 라피스는 흐느끼면서 시가지의 대부분이 흔적
도 없이 사라져 버린 도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저희들을 용서해 주세요..."
이날 가해진 단 두 차례의 비방사선 신형 핵폭탄 투하로 목성 연합
은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 모두 2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결과
목성 연합의 화성에서의 치열한 저항은 종말 단계에 접어들었고,
UN군은 여세를 몰아 크사카베 체포와 목성 연합군 지상군 주력 격
멸을 목적으로 멘티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2202년 07월 18일. 화성 멘티스
"돌비치, 대령. 각하께선 오스나츠(러시아 해군 특수부대)에 큰 기대
를 걸고 있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귀관의 특임
대가 크사카베를 체포해야만 하네."
"장군님, 저희 부대원들은 잦은 임무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있습니다.
하다 못해 충분한 지원이라도..."
"그건 걱정말게.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자네와 자네 부하들에게 그만
한 지원이 없으면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이와 같이 각국 군대는 먼저 크사카베를 체포하겠다는 생각에서 자
국이 자랑하는 정예 부대들을 앞다투어 이곳에 파견했고, 이들과는
별개로 시가지에 진입하려는 각국 정규군들도 속속 집결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는 대로 난 집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을래."
"버즈, 너 답지 못하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군인으로 지내는 게 지긋지긋해. 이제 더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그 일 때문이구나..."
"봐선 안 될 걸 봤어. 제기랄!"
'버즈 레노' 중위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먹으로 벽을 쳤다. 레노 중위
가 군대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폭탄 투하가 아니었다.
3일 전에 통상적인 정찰 임무를 맡아 마악 점령한 어느 이름 모를
마을을 둘러보던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러
시아 군인들이 목성 연합에 속한 10살도 채 못된 일본계 소녀를 강
간하고는 그대로 달리는 전차 앞에 던져 버린 것이었다.
워낙에 끔직한 광경인지라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더더욱 놀라
웠던 것은 러시아 전차병들이 주먹을 쥐고 흔들며 함성을 지른 것
이었다.
"그 녀석들, 잘도 이런 걸 뿌렸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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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라! 죽여라!
밟아라! 밟아라!
목성인 중에 쓸모 있는 것들은 한 놈도 없다. 우리 러시아 인의 분
노를 담아 놈들을 우리의 탱크로 밟아주자!
한 명의 목성군, 여자아이 할 것 없이 마음껏 죽이고 취하자! 우리
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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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다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럴지도 모르겠군..."
밋첼 중위는 조용히 담배를 물고는 전날에 리리아와 찍은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헤어져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자 서글픈 감이 없지 않았지만, 두 사람에겐 각자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그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뭣들 하고 있어? 출격 명령이 떨어졌단 말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
하면 종전은 사실상 확정임을 잊지마라."
곧 원을 이루어 한 곳에 모인 호네트의 MW 파일럿들은 '게리 반
즈' 대령으로부터 일장 훈시를 받았다.
"모두 평소 하던 것처럼 싸워라. 이 전투를 무사히 끝내는 대로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러니 모두들 살아서 돌아와
라. 절대로 죽지마라! 알겠나?"
곧 곳곳에서 "네. 알겠습니다!"가 터져나왔고, 대령은 목에 힘주어
말했다.
"가자! 이 망할 전쟁을 끝내러!"
곧 호네트에선 싸울 수 있는 모든 샤이안이 발진했고, 이들은 지상
군과 호흡을 맞추며 시가지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리리스, 내 말 들리냐?"
-네. 대령님. 아주 잘 들려요.
"목적지 까지의 지름길을 알려줘."
-네.
에스테 바리스를 타는 대신 IA를 착용한 다케다(임대형) 대령은 뒤
따르는 UN 상비군 소속 특수전 부대원들에게 수신호로 대기할 것
을 지시한 후 속속 들어오는 정보를 확인한 후 말했다.
"1팀과 2팀은 23번가로 향하라. 나는 3팀을 이끌고 지름길로 가겠
다."
곧 산개해서 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가서 그들은 다른 목적을
띄고 행동하던 한국군과 마주쳤지만, 서로의 임무가 워낙 급한지라
그냥 스치듯이 지나갔다. 하지만 대령은 그렇지 않았다.
"중위, 자네가 3팀을 맡게. 난 있다가 따라가겠다."
"대, 대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볼 일이 좀 있거든. 걱정하지 말게. 곧 뒤따라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부하들을 먼저 가게 한 대령은 한국군이 향한 쪽으로 이동
했고 곧 그가 그토록 찾던 상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김낙형'
대령이었다.
"오랜만이군..."
"살아계셨군요.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때 왜 날 배신한 거냐?"
"개인적인 목적은 없었습니다. 단지 조국을 위해서였죠."
"조국을 위해서라니? 그러면 이 전쟁 자체가..."
"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랬던 겁니다."
"조국을 위해서라고? 이 더러운 자식! 네 놈 덕분에 나는 대한민국
을 판 반역자가 됐단 말이다! 게다가 원치 않은 살인까지 저지른
걸 생각하면 네놈을 용서할 수 없어!"
"단단히 이를 가신 모양이군요.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당신에게 용
서를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러면 결판을 내 볼까요?
김 대령은 그렇게 말한 후 오른팔 옆 부분에 부착된 중기관총을 쏘
기 시작했다. '임대형'(다케다)은 공격을 민첩하게 피하면서 소리쳤
다.
"흥! 네 녀석의 공격 따윈 가소롭다!"
"이건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곧 김 대령의 IA에서 무언가가 발사됐고, 대형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대전차 미사일이었다.
"한 번 피해보시지요."
"그까짓 것!"
여유 있게 중기관총으로 미사일을 요격한 대형은 재빨리 다가가 대
검으로 '김낙형'을 베려고 했지만, 그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
다. 곧 두 개의 대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고, 대형은 일단 공
격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그러자 '김낙형'은 그에게 도발을 걸기 시
작했다.
"복수를 하시겠다면서 실력은 키우지 않았다니 참 서글프군요."
"네놈이!"
화가 치민 대형은 중기관총을 쏘아댔지만, 낙형은 여유 있게 피하면
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너무 재미 있군요. 나름 대로 스릴이 있으니 말입니
다."
"'김낙형' 이놈!"
"하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이 싸움을 끝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김낙형'은 중기관총을 겨누고는 그대로 쏘기 시작
했다. 십 수발의 명중탄이 생기면서 대형의 IA가 연기를 내뿜자 그
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끝났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놀랄 일이 벌어졌다. 대형의 IA가 별안간 재기
동하더니 대검을 그의 복부에 박아 넣은 것이다. 장갑을 꿰뚫고 들
어온 대검의 날이 복부를 찌르자 그는 피를 토하고는 바닥에 쓰러
졌다.
"크윽... 당신이 입은 IA를 너무 얕잡아 봤군... 서, 설마?"
"그래. 팬톰이다. 워울프 대원용으로 만들어진..."
"지금은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은 걸 잘도 구했군요... 크으윽..."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다."
"좋아요. 어차피 죽게 됐으니 대답해 드리죠."
"네녀석의 배후는 대체 뭐냐?"
"흐흐흐... 대답할 수 있는 걸 물으시죠."
"닥쳐! 네놈이 양심이 있다면 이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서라도 털어놔야 할 거 아니야!"
"쳇... 당신 답군. 좋아요. 대답해 드리죠. 당신의 새 동료들을 위협
했던 것도 실은 나였소. 정확히 말하면 내 뒤에 계신 분들이지만..."
"그들은 대체 누구지?"
"바로..."
김 대령이 마악 대답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기관포탄 한 발
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그대로 즉사해 버렸다.
"제기랄..."
거의 배후를 알아낼 뻔 했다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임대형'
은 한 숨을 쉬었다.
"적의 저항을 분쇄했다. 기지 안으로 들어가겠다!"
밋첼 중위는 곧바로 자신의 샤이안을 기지 안으로 몰아 전투를 속
개했다. 샤이안이 쏘아대는 레일건의 직격을 받은 게키강 타입 한
대가 간단하게 파괴당한 것을 확인한 그는 잔챙이나 다름 없는 목
성군 병사들의 소화기 사격을 깨끗이 무시하면서 계속 진입한 끝에
마지막 저항을 분쇄한 후 마악 피신하려는 목성 연합의 요인들을
확인했다. 그 중에는 크사카베도 끼어 있었다.
"당신이 크사카베인가? 연행하겠다."
바로 그때 그의 샤이안을 노리고 미사일이 날아왔고, 밋첼 중위는
재빨리 이를 피했다. 빗나간 미사일은 그 직후 건물 벽에 큰 구멍을
남긴 채 폭발했다.
"누구냐?"
-흐흐흐... 또 만났군.
"뭐, 뭐라고?"
-빅 스톤에서의 일을 기억하나? 네가 상대했던 기동 병기를 몰았던
자가 바로 나다. 이렇게라도 알게 됐으니 이름이나 알자.
"닥쳐!"
-너의 이름을 들을 순 없겠군. 나는 '호쿠신'이다. 오랫 동안 '크사카
베 하루키' 각하에게 봉사해 왔다.
"너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숱한 개조 시술로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닥쳐라. 나는 과학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일 뿐. 괴물이 아니
다!
"그러면 그 잘난 힘을 보여주시지."
-원한다면!
곧 두 기체 간에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선공을 건 호쿠신의 공
격을 민첩하게 피한 밋첼 중위의 샤이안이 레일건을 연사했지만, 호
쿠신도 여유있게 이를 피하고는 기관포를 쏘아댔다.
-하하하. 미국인, 그 여유는 어디 갔나?
"너야말로!"
밋첼 중위는 그렇게 소리친 후 미사일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지막 전투가 될 게 확실한 이상 아까울 것이 없었다.
곧 미사일들은 탄막을 형성하듯 호쿠신의 기체를 강타했고, 호쿠신
은 분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크아악! 내가 이렇게 끝날 것 같으냐?
얼마후 호쿠신의 기체는 불길에 휩싸였고, 밋첼 중위는 피식 웃은
후 도망갈 곳을 잃은 목성 연합의 요인들 틈에 끼어 있는 크사카베
에게 기관포를 겨눈 후 말했다.
"크사카베, 당신을 체포한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책임이라고? 하하하...
"뭐가 우스운 거냐?"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한단 얘긴가?
"네놈의 그 잘난 정의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책임을 지란
얘기다!"
-잘 들어라. 내 유일한 책임은 한 때 너희 나라의 흰집 주인에게 속
아 이용당한 것 뿐이다. 그 책임을 져야한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크사카베는 곧 품 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어 자기 머리에 겨누고
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비겁한 자식! 겨우 자살하는 것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거냐?"
중위는 그렇게 분노한 후 샤이안을 움직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
다. 기지 전체가 흔들리면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는 의아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지?"
-어이 그레그. 빨리 밖으로 나와. 큰일이 터졌어!
"알았어. 이것들부터 빨리 넘기고."
그는 곧이어 난입해 들어온 특수전 부대에 요인들을 인계한 후 황
급히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저건 대체?"
"정보가 없는 기동 병기입니다."
"그것보단 지금 저녀석이..."
거기 까지 말하고는 햄튼 제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느닷없이 땅
이 꺼짐과 동시에 나타난 목성군의 기동 병기는 사방에 고출력 입
자 무기를 난사해 작전 중이던 UN군 기체들을 파괴했다. 지금 당장
은 몰라도 이런 형국이 계속 되다간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함재기는 대체 뭘 하는 거야?"
-우리 힘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어.
느닷 없이 나타난 거대 기동 병기의 공격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밋첼 중위는 샤이안의 부스터를 가동해 날기 시작했다. 다른 아군기
들도 같은 행동을 취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곧 탑재한 무기의 최대 사정거리 내에 진입한 모든 샤이안들과 그
밖에 다른 인간형 병기들이 일제히 미사일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하
지만 이 기동 병기는 재머 등의 방어 장비로 이를 대부분 빗나가게
만들거나 기만당하지 않은 일부는 근접 방어 무기로 요격하고는 거
꾸로 십 수대의 인간형 병기들을 격추시켰다.
"이러다간 다 죽겠어!"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이젠 이 수밖에 없어!"
-그레그, 무모한 짓 하지마!
레노 중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동 병기를 향해 샤이안을 접근시킨
밋첼 중위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하하. 역시 예상대로군. 잘 왔다.
"끈질긴 놈!"
-네놈에게 진 빛을 꼭 갚고 말테다!
"영원히 못 갚게 해주마!"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지~. 흐흐흐...
호쿠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기동 병기의 화력을 밋첼 중위의 샤이안
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우왓! 엄청난 화력이다!!"
-하하하, 이 녀석 앞에선 너의 그 잘난 기체도 파리에 불과하다!
"닥쳐!"
방금 전의 공격으로 오른쪽 팔이 떨어져 나간데다 부스터의 출력
까지 저하된 가운데 밋첼 중위는 기회 닿는 대로 공격을 가했지만,
엄청난 방어력을 지닌 듯 호쿠신의 기동 병기는 끄떡도 하지 않았
다.
"제기랄, 저 놈은 대체..."
그렇게 고심하던 찰나 밋첼 중위는 별안간 자신의 샤이안과 호쿠신
의 기동병기와의 거리차를 좁히기 시작했다.
-네, 네놈 무슨 짓이냐?
"보고도 모르냐?!"
-아, 안돼!
무언가를 눈치챈 듯 호쿠신은 절규했다. 밋첼 중위의 샤이안은 기동
병기의 코어로 짐작되는 부분에 달라붙기가 무섭게 왼팔에 내장된
기관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떨어져라!"
까가강 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는 가운데 기동 병기는 곳곳에서
스파크가 일더니 폭발하기 시작했다. 급하게 만든 무기임을 보여주
는 증거였다.
-크... 분하다... 이렇게 죽을 수는...
"잘 가라."
화염에 휩싸이며 지면을 향해 추락하는 기동병기로부터 벗어나려던
밋첼 중위는 샤이안의 출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는 한 숨을 쉬었다.
"돌아가기는 틀렸군..."
비슷한 시각 호네트의 함교에선 기동 병기의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시가지 중심부를 보고 다들 경악에 빠져 있었다. 리리아는
아예 머리를 싸맨 채 흐느꼈고, 햄튼 제독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눈
앞의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다.
"엔젤22, 응답하라! 엔젤22, 응답하라! 밋첼 중위! 살아 있으면 뭐라
고 한 마디라도 해!"
"소용 없어. 녀석은 죽은 거야..."
"이 자식 재수없게 그딴 소리냐?"
"모두 그만둬!"
함교 안에서 싸움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자 햄튼 제독까지 직접 나
서서 이를 말렸다.
"중위님은 돌아오실 거예요. 절대로 죽으실 리가 없어요..."
"리리아..."
간신히 고개를 든 후 밋첼이 살아 있을 거라고 확언한 리리아는 한
편으론 불안함을 떨칠 수 없는지 부르르 떨면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살아서 돌아와 주세요... 오빠...'
다들 낙담한 가운데 레이더 화면을 주시하고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
다.
"레이더에 무언가 잡혔습니다!"
"밋첼 중위의 기체인가?"
"한 대가 더 있습니다."
"뭐야?"
"광학 센서로 확인해 봐야 겠습니다. 이 위치라면 충분하겠죠."
곧 광학 센서가 잡은 선명한 영상이 들어왔고, 모두들 놀라운 표정
을 지었다.
"'텐카와 아키토'가 밋첼을 구했다!"
"뭐야? 그 어둠의 왕자가?"
"방금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갑판에 내리겠다고 합니다!"
"모두 서둘러! 의무반도 대기시켜!"
호네트를 비롯해 모든 UN군 소속 함정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
운데 밋첼 중위는 아키토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당신의 신세를 졌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지마. 순전히 유럽에서 진 빛을 갚은 것 뿐이야. 그리
고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잠시 말 끝을 흐린 아키토는 곧 결심한 듯 마저 얘기했다.
-자네가 찾는 사람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무슨 말씀이시죠?"
-곧 알게 될 거야.
아키토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씨익 웃었다. 얼마 후 호네트의 비행
갑판에 내린 두 기체 주변에 함상용 소방차들이 몰려들어 만일의
화제에 대비했고, 갑판 요원들이 급히 달려와 구조 활동을 지원했
다. 곧 기진맥진한 채로 조종석에서 내린 밋첼 중위는 갑판 요원들
이 건네준 음료수를 마시고는 저 멀리서 차를 타고 오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야, 그레그!"
곧 차에서 내린 수많은 동료 파일럿들이 뛰어와 그를 들고는 헹가
래를 시작했다. 삽시간에 영웅이 된 밋첼 중위는 다른 동료들에 의
해 무등이 태워진 채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무사 귀환을 자축했다.
바로 그때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리리아를 본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됐어. 그만 내려줘."
"이봐. 그레그. 왜 그러는 거야."
"곧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내려줘."
"알았어."
곧 갑판 위에 두 발로 선 밋첼 중위는 리리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리리아, 돌아왔어."
"중위님..."
곧 밋첼 중위는 리리아를 끌어안았고, 리리아는 잠시 얼굴을 붉힌
후 입을 열었다.
"돌아와서 고마워요. 오빠... 미안해요. 사실을 숨겨서..."
그 말이 나오자 주위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리아, 아니지... 에이미, 이 세상에 자기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없어."
그렇게 말한 후 밋첼 중위는 리리아의 볼에 키스를 했다. 모두가 의
아해하는 가운데 마악 호네트의 갑판에 내린 아크엔젤 소속의
MV-45에서 내린 파리스는 이 상황을 보고는 뒤돌아 선 채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밋첼 중위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
다.
"파리스 함장."
"..."
"선배님?"
"리리아... 당신이 이겼군요."
"아니에요. 이 분은 제 오빠에요."
"?"
"파리스 함장, 마음 애타게 한 것 미안합니다. 그리고..."
거기 까지 말하고는 밋첼 중위는 파리스와 포옹했고, 두 사람은 곧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모두가 환호하기 시작했다.
후세의 사가들에게 3차 세계 대전으로 기록된 이 전쟁은 화성에서
사실상 끝을 맺었다. 목성으로 진격한 UN군을 상대할 여력이 없게
된데다 지도자까지 잃은 목성 연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이를
받아들인 UN군은 총사령관인 미 육군의 '아서 웨인라이트' 원수를
대표로 파견해 전함 미주리호에서 종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전쟁으
로 말미암아 태양계의 질서는 뉴욕 체제에 의해 재편되었고 2차 대
전 말기의 추축국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 목성 연합은 16등분 되
어 주요 승전국들의 군정 통치를 받게 되었다.
나데시코-D를 비롯 그동안 위치가 애매했던 UN 상비군의 주요 함
정들도 독자 행동권을 보장 받음으로서 효율적인 작전이 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조용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뉴욕 체
제는 통합에 불만을 품었던 과거 선진 국가들에겐 대단히 우호적이
었지만 언제나 빈곤할 수밖에 없었던 3세계 국가들을 배려하지 않
았고, 일본 주도하의 통합에 의존해온 동남아 및 아프리카 각국은
통합 붕괴에 따른 경제 혼란과 정치 불안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
야만 했다. 그리고 미국은 그간 통합의 눈치로 적극적으로 간섭할
수가 없었던 남미 각국의 반미적 경향의 반정부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CIA를 앞세운 더러운 전쟁을 재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을 잃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실권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전
혀 깨닫지 않았다.
2202년 09월 01일. 08시 00분. 플로리다 마이애미
밋첼 남매는 마이애미 한 가운데에 자리한 공원의 오벨리스크 앞에
서 있었다. 튤립 낙하에 의해 희생된 자들의 이름이 하나 하나 새겨
진 이 오벨리스크 앞의 제단에 리리아는 들고 있던 백합 다발을 놓
았다. 그레그는 그런 리리아를 잠시 바라본 후 오벨리스크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돌아가신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군요.
한 때 저는 이곳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 했었습니다.
하지만, 헤어졌던 에이미와 함께 이곳에 돌아왔습니다. 어디까지나
저와 에이미는 이곳에서 살다간 두 분의 아이들이니까. 이제 편히
잠드세요.'
곧 정복 차림의 밋첼 중위는 정모를 고쳐 쓴 후 오벨리스크를 향해
경례했다. 리리아와 함께...
(끝)--->'기동전함 나데시코 - 귀향'으로 넘어갑니다!
"적 함대가 계속 도주합니다."
"저 녀석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히타카제의 함교에선 절대로 아군과 교전하려 하지 않는 적 함대의
대응에 대단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제독님, 보고드립니다! 함대 전방에 다수의 전파 발신원이 포착 됐
습니다!"
"적 함대인가? 규모는?"
"그, 그것이..."
오퍼레이터는 덜덜 떨다가 간신히 마저 말했다.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뭐야?"
2202년 07월 07일. 한국 해군 항모 청해진
"쉽게 걸려 들었군.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제독님, 그렇지만 역사에 남을 싸움을 벌일 수 있게 됐지 않습니
까?"
"그렇기야 하네만..."
잠시 말끝을 흐린 '한신수' 제독은 함대 전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명령을 내렸다.
"공격을 시작하라."
그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함정이 목표로 배당 받은 목성
군 함정을 노리고 대함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발사된 미사일
의 대부분은 BGM-140 하푼IV였다. 예산상의 문제로 모든 계획이
중지된 채 보잉사의 자료실에 설계도면만이 남아 있던 이 무기는
보손 점프의 무력화로 빛을 보게 되는데 이 전투가 하푼IV의 공식
적인 데뷔전이었다.
목성군 함대 공격에 동원된 것은 하푼IV만이 아니었다. 출격할 수
있는 모든 함재기와 인간형 병기, 기동 병기들이 한도껏 무장을 탑
재하고 출격해 공격에 나선 것이다.
2202년 07월 07일. 미 해군 항모 호네트
-Ready on Cat.(캐터펄트에서 대기하라.)
우주복을 착용한 관제관의 지시에 따라 밋첼 중위는 샤이안을 캐터
펄트로 이동시킨 후 출격 허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곧 관제관이
유도봉을 흔들었다. 캐터펄트를 가동하겠다는 신호였다.
곧 샤이안의 자세를 조절한 그는 부스터의 출력을 높였고, 그와 동
시에 빠른 속도로 호네트로부터 벗어나 미리 출격해 대기 중이던
F-12 편대와 합류했다. 케이블에 의해 예인되기 시작한 인간형 병
기들은 그렇게 전장으로 향했다.
-그레그, 저거 보이냐?
"못 보던 종류인데..."
-그루먼이 만든 거래. 이름이 코르세어IV라는군. 샤이안이 배치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새 신형을 찍어내다니...
파란색과 하얀색을 적절히 사용한 해군 제식 도색이 칠해진 코르세
어IV들은 항공기에 의해 예인되지 않은 채 자력으로 이동하면서도
항공기보다도 빠른 순항 속도를 자랑했다.
"저게 대량으로 배치된다면 전쟁은 금방 끝나겠군."
-그레그, 위를 조심해!
"뭐? 우왓!"
난데 없는 사태에 당황한 밋첼 중위는 황급히 주위를 살피고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프랑스 군의 비 인간형 기동병기 '슈페르 에텡다
르'였다. 숫자가 부족한데다 장기간 작전도 힘들지만, 전함급의 화력
에 뛰어난 가속력과 기동성을 지닌 이 기체는 이전의 여러 전투에
서 목성군의 게키강 타입들을 축출해내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었
다. 지금 그 경이의 기동 병기가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연합군
수뇌부가 이번 작전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길! 프랑스 녀석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너무 불평하지마. 서로 주고 받는 때라는 게 있는 거야.
얼마 후 최대 사정거리 안에 진입한 연합군의 모든 항공기와 인간
형 및 기동 병기들이 대함 미사일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성급하기
그지 없게 아군에게 목을 내민 목성군 함대는 이것으로 전멸을 피
할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2202년 07월 07일. 목성 연합군 전함 히타카제
"함대공 미사일 대응합니다."
"적 대함 미사일 3파가 몰려옵니다!"
"연속 공격인가?"
"이대로 가다간 전멸입니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에 상관 없이 유키시로 제독은 눈을 감은 채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성급하게만 추격하지만 않았어도 실지는 지
킬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우리는 도망칠 곳이 없다. 이래 저래 죽으나 결과가 똑같다면
우리가 택할 길은 하나뿐. 우리도 적에게 그만한 타격을 입히는 것
이다."
그렇게 말한 후 유키시로 제독은 별이 반짝이는 함교 유리창 너머
로 시선을 옮겼다.
2202년 07월 07일. UN 상비군 나데시코-D
"함장, 방어벽을 내리겠습니다."
"알았어. 리리스쨩."
미사일이 함교에 피탄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함교 방어벽을 내리
기 시작한 리리스는 갑판에서 발진하는 십 수대의 인간형 병기와
항공기들을 바라보며 몹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두 명심하라. 우리의 1차 임무는 대함 미사일 공격이다. 적 함재
기와 인간형 병기와의 싸움은 부차적일 뿐이다. 쓸데없는 교전은 반
드시 피해라."
출격에 앞서 모두에게 당부한 다케다 대령은 에스테 바리스를 캐터
펄트 구획으로 이동시켰고, 곧 빠른 속도로 이함했다.
우수한 탑재력을 자랑하는 미드웨이급에 기반한 나데시코-D에서 발
진한 수많은 함재기와 인간형 병기들도 다른 항모에서 발진한 기체
들처럼 대함 미사일 세례를 퍼부은 후 공대공 임무를 맡은 기체들
을 제외하고는 미련 없이 모함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2202년 07월 07일. 목성 연합군 전함 히타카제
"처음 부터 함포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생각인가?"
"너무 많습니다. 이 상태로 갔다간..."
"보고 드립니다! 아군 함재기와 인형 병기들이 적에게..."
"궤멸당하고 있다는 말인가?"
"..."
"그렇다면 이제 우리 차례로군."
유키시로 제독은 피식 웃은 후 전방을 주시했다. 히타카제를 비롯
목성군의 모든 전투함들은 대함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수직 발사기가 일제히 개방되면서 수납
된 함대공 미사일들이 일제히 발사되기 시작했다.
현재 까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지구 각국 해군이 발사한 대함 미사
일은 대략 2500발에 달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20세기 중후
반때였던가? 미 해군을 비롯한 서방 각국 해군을 겨냥한 구 소련의
함대 결전이 실행될 경우 이를 위해 발사될 대함 미사일은 많아야
200발 정도가 한계였었다. 그럼에도 미 해군은 수많은 방공 전투함
과 뛰어난 함재기들을 보유하고서도 이를 제대로 막기 힘들 거라고
밝힌 적이 많았다. 구시대가 남긴 개념이 가져다준 공포에 맞닥 뜨
린 그로선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니, 대응할 방법 자체
가 없었다.
어느새 함대공 미사일들은 1파의 대함 미사일과 조우하기 시작했다.
우주 공간에 수많은 섬광이 번쩍이면서 수많은 미사일들이 폭발했
지만, 적지 않은 수가 용케 요격망을 빠져나와 계속 비행했다. 이들
을 포함해 2파의 대함 미사일을 노린 함대공 미사일들이 해당 공역
에 이르렀고, 또 한 차례 섬광의 정원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완전 요격은 불가능했다. 어느새 3파의 미사일들도 같은 과정을 거
쳤고, 1, 2, 3파의 남은 미사일은 모두 합해 800발 가량이었다.
"개함 방공 미사일 대응합니다!"
근접 방어전에 들어가기 전에 미사일 숫자를 안심할 수 있을 정도
로 줄여 놓기 위해 개함 방공 미사일들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이들
도 앞서 대응한 함대 방공 미사일들처럼 비슷한 장관을 이루었지만,
역시나 완전 요격은 무리였다.
최후의 저지선인 근접 방어 무기들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히타카제를 향해 내리꽂듯이 돌진하기 시작한 하푼IV가 십 수발의
명중탄을 맞고 산산 조각나는 것을 시작으로 적지 않은 수의 대함
미사일이 요격당했지만, 곧 중과 부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이
벌어졌다. 히타카제의 함교에 러시아제 초대형 대함 미사일 야혼트
III가 명중한 것이다. 전함 히타카제의 함교 상부를 뚫고 들어간 야
혼트의 2톤 짜리 최신형 탄두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단 한 차례
의 폭발로 히타카제의 함교가 아예 흔적도 없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은 야혼트 뿐만이 아니라 하푼IV의 군집 가운데 조금씩
섞여서 날아온 슬램IV도 보여주었다.
미사일에 난타당하기 시작한 목성 연합군 함대는 그렇게 전멸당하
고 말았다.
2202년 07월 07일. 목성 연합군 34번 이동 군사 콜로니 부근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적의 콜로니 강습을 막아라!"
'야마다 나가노' 소령은 머리 한 쪽을 붕대로 감을 정도로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Ki-31Kai를 조종해 콜로니에 강습
하려는 미군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Ki-31Kai의 다연발 캐논에 명
중 당한 십 수대의 MV-45가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났지만, 그들은
무제한 그 자체였다. 얼마 후 자국군 강습대를 엄호하기 위해 출동
한 F-12 전투기들이 AIM-14 이글 미사일을 난사했고, 그 중 한 발
이 야마다 소령의 편대원 중 한 명이 타고 있던 Ki-31에 명중했다.
-편대장님~!
그 절규와 함께 Ki-31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야마다 소령은 그
대로 절규하고 말았다.
"크아아아! 네놈들이!"
분노한 그의 공격 앞에 적지 않은 UN군이 쓰러졌지만, 죽음의 그림
자는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최신형 MW 코르세어IV 1개 편대는
그를 조준하기가 무섭게 십 수발의 초고속 경량형 대함 미사일을
발사했고, 그들은 정확하게 Ki-31Kai의 사지에 한 발씩 명중했다.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소령은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
다.
콜로니로의 강습을 방해하던 목성군 방어 부대가 패퇴하는 가운데
병력과 장비를 가득 실은 MV-45들은 목성군의 대공 화망을 무시하
면서 콜로니에 차례차례 침입했고, 싣고 있던 병력과 중장비를 무섭
게 내리기 시작했다.
"가자! 놈들은 우리의 적수가 아니다!"
지구 내에서의 작전을 마치기가 무섭게 이번 작전에 미 해병 3공간
양륙 군단 최고 지휘관으로서 참가한 밴더 와일리 소장은 지휘봉을
들며 자국 해병대원들을 독려했고 하나 같이 IA를 착용한 해병대원
들은 악에 받힌 듯 함성을 지르며 콜로니의 민간인 거주지에 난입
하기 시작했다.
"하, 항복! 항복할게!"
"이 도마뱀 자식들아! 항복이 어딨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려던 목성군 병사를 향해 미 해병대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총알을 퍼부었고, 곳곳에 구멍이 뚫린 시신들이 바닥
을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목성인들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다
른 사람을 죽이는 악귀일 뿐이었다.
"목성 따위가 무슨 대수냐? 어차피 망할 나라는 똥 오줌도 안돼! 마
음껏 죽이자!"
목성인들에 의해 가족을 잃었다고 하는 어느 부사관이 목청껏 소리
높여 외치는 가운데 미 해병대에 이어 진입한 한국 해병대의 전차
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제 승패는 분명해졌다.
"여단장님! 콜로니에 적이 진입했습니다!"
"..."
'야마자키 타무라' 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콜로니의 각 지
역에 설치된 카메라가 전송하는 화면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야마다
소령의 제안 대로 시가전을 하지 않고 콜로니 밖에서 적을 막으려
고 했지만, 결국엔 이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일선 지휘관들에게 전투 행위를 중지하고 투항하라고 하게."
"네?"
"귀먹었나? 투항하라고 했네."
"여단장님... 흐흑..."
"진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냐. 차라리 운 없고 못난 나를 원망하
게."
"아닙니다. 여단장님은 우릴 훌륭히 지휘하셨습니다. 이건 모두 다
그 바보같은 크사카베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우리 목성의 미래를 망
쳤습니다. 그리고 지긴 했지만 잘 됐습니다. 우린 살아서 다시 일어
설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나는 아니네."
"네?"
곧 야마자키 준장은 권총을 들어 자기 머리에 겨누고는 말했다.
"나는 패전 책임을 지어야만 하네. 이렇게라도..."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총성이 울렸고 사방에 피와 뇌수가 튀겼다.
2202년 07월 07일. 한국 해군 항모 청해진
"제독님, 보고 드립니다. 한미 양국 해병대가 34번 콜로니를 함락시
켰다고 합니다."
"수고했다고 전하게."
"네."
"제독님, 이제 바그라찌온 결행에 필요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킬 수
있게 됐군요."
"아직은 아닙니다. 이것은 겨우 첫 출발이니까요."
"그렇지만, 이 승리의 의미는 너무나도 큽니다."
곧 미리 준비해둔 와인을 꺼낸 '한신수' 제독은 느긋하게 뚜껑을 따
포도주잔에 이를 부으며 말했다.
"목성 쪽바리들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망상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
는지 확실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일본처럼 애매하게 끝내선 안 됩니
다. 적어도 제국주의 시절의 독일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해야죠."
"동감입니다. 하하하..."
2202년 07월 07일. UN 상비군 나데시코-D
"함장, 한미 양국 해병대가 콜로니를 함락시켰데요."
"피해는?"
"정확한 수치는 나오지 않았지만, 목성 연합 민간인만 40만이 죽었
다고..."
그 말이 나오자 유리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싸웠길
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미군이 어린 여자애를 달리는 전차 앞에다
던졌다는 소문도 있어요."
"그리 놀랄 것도 없군..."
"무, 무슨 말씀이세요?"
"2차 대전 때 독소전에선 후반에 사실상 승리를 확정지은 구 소련
군 병사들은 독일이 자국에 가한 비인도적인 행위에 같은 방법으로
보복했어. 마이애미 등지에 가해진 무차별적인 공격에 미군들의 분
노가 하늘을 찌를 거라는 건 세 살 먹은 애들도 짐작할 수 있지. 안
됐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전적으로 목성인들의 책임이다.
그들은 그 어느 누구한테도 동정 받을 자격이 없어."
"대령님, 저도 목성인입니다."
"미안하네. 자네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아니요. 괜찮습니다. 언젠가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았으니
까요. 하지만..."
'다카스키 사부로타'는 거기 까지 말하고는 머리를 싸맨 채 전투가
종료되었지만, 곳곳이 심하게 손상된 콜로니를 바라보았다.
7.바그라찌온(2)
34번 콜로니를 함락한 후 미군을 주력으로 한 UN군은 여러 전장에
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며 화성에 강하하기 시작했다. '마샬 워커
패튼' 중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5 혼성기계화 군단은 엄청난 전투
력과 기동성을 앞세워 화성 전역을 휩쓸었다.
그들을 시작으로 UN군에 참여한 각국의 지상군 주력들도 여기에
가세해 전과 경쟁에 몰두했고, 어느새 화성의 79퍼센트가 그들의 손
아귀에 떨어졌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 목성 연합군의 저항이 매
우 거세어지자 화성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면 목성으로 향할 수 없
음을 잘 알고 있는 UN군 수뇌부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202년 07월 14일. UN 상비군 나데시코-D
"참 지루하네요."
"리리스쨩, 우리 '모노폴리'(보드 게임의 일종이다.)나 할까?"
"유키나씨, 알고 보니 어려운 거 하시네요."
"이래 뵈도 내가 그런 거에 일가견이 있다고."
그렇게 해서 리리스와 유키나가 모노폴리를 하는 가운데 유리카는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아 있는 아키토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아키토."
"왜?"
"우리 이 전쟁이 끝나는 대로..."
"..."
무언가를 느낀 듯 아키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함교 너머로
보이는 별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무언의 표시
인 듯 했다. 결혼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지만, 두 사람은 아이를 갖
질 않았다. 결혼하기로 확약한 다케다 대령과 료코가 일찌감치 아이
를 예약해 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에휴~. 다들 나태한 하루를 보내는군."
그렇게 말하며 잠시 레이더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 미나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또 폭격인가? 그나저나 대체 이 비행기들은 어느 정도의 성능을 지
녔을까?'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벌어지자 등장한 미군의 신형 B-36 폭격기
들은 너무나도 불가사의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미 본토에서
발진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 먼 곳에서 이곳 화성 부근 까지 단숨
에 날아와 화성 곳곳에 자리한 목성 연합 관할의 도시들을 폭격하
곤 했었다. 지금 까지 단 한 대도 격추당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생각
하면 궁금해지는 부분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번엔 둘이지? 정찰이라도 3대 이상이 날아왔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중 그녀는 혹시나하는 생각에 통신 주파수를 조절
하면서 레이더에 포착된 미군 폭격기 두 대와 교신을 시도했다.
"여기는 UN 상비군 나데시코-D 입니다. 귀측의 행선지와 임무를
말하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미나토가 줄기차게 응답을 요구하는 가운데 무슨 일인지 궁금해한
리리스가 윈도우를 통해 상황을 살피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미나토씨,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후 리리스는 몇 가지 방법으로 미군의 통신망에 침투
해 두 대의 폭격기가 주고 받는 교신을 도청했다.
-여기는 에놀라 게이II, 박스카II...
-여기는 박스카II... 알았...
-예정대로 산개...
-알았다. 예정대...
잡음이 섞인 가운데 들려오는 교신 내용에 모두들 의아한 가운데
때마침 들어온 다케다 대령에게 리리스가 말했다.
"대령님, 이것 좀 들어보세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물으면서 교신 내용을 들은 다케다 대령의 표정이 순식간에
납덩이가 되고 말았다.
"마, 맙소사... 설마?"
"대령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함장, 어서 저것들을 막아야 돼!"
바로 그 때 가만히 앉아 있던 루리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총을 꺼내
어 유리카를 겨누었다.
"죄송합니다. 모두들..."
"루, 루리쨩?"
"루리루리, 대체 무슨 짓이야?"
얼마 후 함교로 들어오는 모든 문이 열리면서 UDT/SEAL 대원들
이 함교내의 모든 이들을 꼼짝 못하게 했다.
"이, 이럴수가..."
"헐스 소령님,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아가씨, 죄송합니다. 명령은 명령입니다."
리리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헐스 소령은 그저 팔짱
을 낀 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소령님. 여기 남으시는 것이..."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어요"
UDT/SEAL 지휘관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루리는 조용히 함교를 떠
나려고 했다. 바로 그 때 하리가 소리쳤다.
"루리 함장! 저는 저는 원망하지 않아요. 루리 함장은 우리들의 동
료에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동료라구요! 크흐흑..."
2202년 07월 14일. 09시 35분(화성 시각) 코스모스 시티
"목성인들은 들어라.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니 즉시 무기를 버
리고 투항하라. 투항하면 제네바 협정에 의거, 정당한 대우를 해주
겠다."
마이크에 입을 대고 선무 공작을 벌이고 있는 장교를 바라보는 패
튼 중장의 얼굴엔 착잡함이 가득했다. 목성인들은 줄기차게 저항했
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할 행위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 따르는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수밖에 없
었다.
"그만하게. 좋게 말한다고 해서 들을 자들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곧 지휘소로 돌아가던 그의 앞으로 장교 한 명이 황급히 뛰어와 경
례한 후 보고했다.
"장군님, 본국으로부터 긴급 명령입니다. 지금 즉시 모든 부대를 시
가지로부터 40Km이상 떨어진 지점 까지 이동시키라고 합니다."
"뭐야? 그렇다면 후퇴하라는 얘긴가?"
지휘소로 들어가는 대로 즉시 시가지 진입을 명령하려던 장군의 입
장에선 어이가 없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곧 지휘소로 들어간
그는 휘하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즉시 모든 부대에 40Km 후방으로 이동하라고 하게. 라피스, 어서
짐을 챙기거라."
"네. 아버지."
곧 모든 병력이 철수 준비에 들어간 가운데 코스모스 시티를 방어
중인 목성군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레이더에 적 폭격기가 포착 됐습니다."
"규모는?"
"두 대 뿐입니다."
"뭐야? 다른 때 같으면 수 십대를 보내더니만, 이번엔 웬일이지?"
난데 없이 적은 숫자의 폭격기만이 이리로 날아온다고 하자 목성군
지휘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궁금해하는 가운데 추가 보고가
올라왔다.
"적 폭격기들이 산개한다고 합니다. 한 대는 이쪽으로, 다른 한 대
는 북쪽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정찰을 하려는게 아닐까요?"
"다른 때 같으면 세 대입니다. 이번엔 너무 적어요. 단 한 대만으로
제대로 정찰을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참 찝찝하군요."
"미사일로 격추하면 좋겠지만, 겨우 딱 한 대뿐인 적에게 쓰기도 참
뭣하고..."
"쏜다고 해서 꼭 맞는 일도 없죠."
"미제는 다 괴물이군요."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셈이죠."
목성군 지휘관들은 그렇게 폭격기의 단기 침입에 대수롭지 않은 반
응을 보였고, 폭격기가 맡은 진짜 임무를 통보 받지 못한 지구권 각
국 지상군 지휘관들의 반응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장군님, 모든 부대가 후방 이동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이제 여기서 대기하기만 하면 돼."
"장군님,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놓고 생각한다
면..."
거기 까지 말한 패튼 중장은 지휘차 내부에 설치된 테이블에 놓인
달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우리는 역사상 길이 남을 일을 목격하겠지."
코스모스 시티 상공에 진입한 B-36 폭격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폭탄창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실린 거대한 폭탄을 투하
했다. 뚱뚱하기 그지 없는 Mk-2는 그렇게 지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탄두부에 탑재된 레이더로 지형 지물을 확인하면서 시가지 한복판
을 향해 순조롭게 낙하한 이 폭탄은 100m 상공에 이르자 폭발을
일으켰다. 방사선과 핵낙진만 없을 뿐 그 과정은 핵폭발 그 자체였
다. 폭발 직후 발생한 고열에 노출된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
했다. 충격파와 그 충격파가 지면에 접촉해 발생한 마하파가 피해를
줄 수 있는 범위 안에 자리한 모든 것들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거대한 버섯 구름이 피어올랐다.
"오... 하느님 맙소사..."
작전을 끝내고 현지 협력자들과 같이 근거지로 귀환 중이던 영국군
SAS 대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참극이 벌어진 코스
모스 시티를 바라보았다. 얼마 후 현지 협력자 중 한 명이 SAS 일
선 지휘관의 멱살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이 거짓말쟁이들! 어떻게 사람들 머리 위에 저런 걸 떨어뜨릴 수가
있어!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미안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믿어 주세요."
"크흐흑..."
코스모스 시티 공략에 어려움을 느끼던 미군들의 반응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병사들 대부분이 방탄 헬멧을 벗으며 도시를 향해 묵
념했고, 몇몇은 아예 주저 앉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
에는 라피스도 있었다.
"라피스..."
"아빠... 저 사람들한테 왜 그런 짓을..."
"전쟁이기 때문이란다. 인간은 상황에 순응해 갈 수밖에 없어. 게다
가 그들이 저지른 짓들을 생각해 봐라.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 그래도 이건..."
거기 까지 말하고는 라피스는 흐느끼면서 시가지의 대부분이 흔적
도 없이 사라져 버린 도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저희들을 용서해 주세요..."
이날 가해진 단 두 차례의 비방사선 신형 핵폭탄 투하로 목성 연합
은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 모두 2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결과
목성 연합의 화성에서의 치열한 저항은 종말 단계에 접어들었고,
UN군은 여세를 몰아 크사카베 체포와 목성 연합군 지상군 주력 격
멸을 목적으로 멘티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2202년 07월 18일. 화성 멘티스
"돌비치, 대령. 각하께선 오스나츠(러시아 해군 특수부대)에 큰 기대
를 걸고 있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귀관의 특임
대가 크사카베를 체포해야만 하네."
"장군님, 저희 부대원들은 잦은 임무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있습니다.
하다 못해 충분한 지원이라도..."
"그건 걱정말게.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자네와 자네 부하들에게 그만
한 지원이 없으면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이와 같이 각국 군대는 먼저 크사카베를 체포하겠다는 생각에서 자
국이 자랑하는 정예 부대들을 앞다투어 이곳에 파견했고, 이들과는
별개로 시가지에 진입하려는 각국 정규군들도 속속 집결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는 대로 난 집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을래."
"버즈, 너 답지 못하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군인으로 지내는 게 지긋지긋해. 이제 더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그 일 때문이구나..."
"봐선 안 될 걸 봤어. 제기랄!"
'버즈 레노' 중위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먹으로 벽을 쳤다. 레노 중위
가 군대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폭탄 투하가 아니었다.
3일 전에 통상적인 정찰 임무를 맡아 마악 점령한 어느 이름 모를
마을을 둘러보던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러
시아 군인들이 목성 연합에 속한 10살도 채 못된 일본계 소녀를 강
간하고는 그대로 달리는 전차 앞에 던져 버린 것이었다.
워낙에 끔직한 광경인지라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더더욱 놀라
웠던 것은 러시아 전차병들이 주먹을 쥐고 흔들며 함성을 지른 것
이었다.
"그 녀석들, 잘도 이런 걸 뿌렸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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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라! 죽여라!
밟아라! 밟아라!
목성인 중에 쓸모 있는 것들은 한 놈도 없다. 우리 러시아 인의 분
노를 담아 놈들을 우리의 탱크로 밟아주자!
한 명의 목성군, 여자아이 할 것 없이 마음껏 죽이고 취하자! 우리
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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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다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럴지도 모르겠군..."
밋첼 중위는 조용히 담배를 물고는 전날에 리리아와 찍은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헤어져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자 서글픈 감이 없지 않았지만, 두 사람에겐 각자 가야 할
길이 있었다. 그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뭣들 하고 있어? 출격 명령이 떨어졌단 말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
하면 종전은 사실상 확정임을 잊지마라."
곧 원을 이루어 한 곳에 모인 호네트의 MW 파일럿들은 '게리 반
즈' 대령으로부터 일장 훈시를 받았다.
"모두 평소 하던 것처럼 싸워라. 이 전투를 무사히 끝내는 대로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러니 모두들 살아서 돌아와
라. 절대로 죽지마라! 알겠나?"
곧 곳곳에서 "네. 알겠습니다!"가 터져나왔고, 대령은 목에 힘주어
말했다.
"가자! 이 망할 전쟁을 끝내러!"
곧 호네트에선 싸울 수 있는 모든 샤이안이 발진했고, 이들은 지상
군과 호흡을 맞추며 시가지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리리스, 내 말 들리냐?"
-네. 대령님. 아주 잘 들려요.
"목적지 까지의 지름길을 알려줘."
-네.
에스테 바리스를 타는 대신 IA를 착용한 다케다(임대형) 대령은 뒤
따르는 UN 상비군 소속 특수전 부대원들에게 수신호로 대기할 것
을 지시한 후 속속 들어오는 정보를 확인한 후 말했다.
"1팀과 2팀은 23번가로 향하라. 나는 3팀을 이끌고 지름길로 가겠
다."
곧 산개해서 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가서 그들은 다른 목적을
띄고 행동하던 한국군과 마주쳤지만, 서로의 임무가 워낙 급한지라
그냥 스치듯이 지나갔다. 하지만 대령은 그렇지 않았다.
"중위, 자네가 3팀을 맡게. 난 있다가 따라가겠다."
"대, 대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볼 일이 좀 있거든. 걱정하지 말게. 곧 뒤따라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부하들을 먼저 가게 한 대령은 한국군이 향한 쪽으로 이동
했고 곧 그가 그토록 찾던 상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김낙형'
대령이었다.
"오랜만이군..."
"살아계셨군요.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때 왜 날 배신한 거냐?"
"개인적인 목적은 없었습니다. 단지 조국을 위해서였죠."
"조국을 위해서라니? 그러면 이 전쟁 자체가..."
"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랬던 겁니다."
"조국을 위해서라고? 이 더러운 자식! 네 놈 덕분에 나는 대한민국
을 판 반역자가 됐단 말이다! 게다가 원치 않은 살인까지 저지른
걸 생각하면 네놈을 용서할 수 없어!"
"단단히 이를 가신 모양이군요.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당신에게 용
서를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러면 결판을 내 볼까요?
김 대령은 그렇게 말한 후 오른팔 옆 부분에 부착된 중기관총을 쏘
기 시작했다. '임대형'(다케다)은 공격을 민첩하게 피하면서 소리쳤
다.
"흥! 네 녀석의 공격 따윈 가소롭다!"
"이건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곧 김 대령의 IA에서 무언가가 발사됐고, 대형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대전차 미사일이었다.
"한 번 피해보시지요."
"그까짓 것!"
여유 있게 중기관총으로 미사일을 요격한 대형은 재빨리 다가가 대
검으로 '김낙형'을 베려고 했지만, 그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
다. 곧 두 개의 대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고, 대형은 일단 공
격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그러자 '김낙형'은 그에게 도발을 걸기 시
작했다.
"복수를 하시겠다면서 실력은 키우지 않았다니 참 서글프군요."
"네놈이!"
화가 치민 대형은 중기관총을 쏘아댔지만, 낙형은 여유 있게 피하면
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너무 재미 있군요. 나름 대로 스릴이 있으니 말입니
다."
"'김낙형' 이놈!"
"하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이 싸움을 끝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김낙형'은 중기관총을 겨누고는 그대로 쏘기 시작
했다. 십 수발의 명중탄이 생기면서 대형의 IA가 연기를 내뿜자 그
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끝났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놀랄 일이 벌어졌다. 대형의 IA가 별안간 재기
동하더니 대검을 그의 복부에 박아 넣은 것이다. 장갑을 꿰뚫고 들
어온 대검의 날이 복부를 찌르자 그는 피를 토하고는 바닥에 쓰러
졌다.
"크윽... 당신이 입은 IA를 너무 얕잡아 봤군... 서, 설마?"
"그래. 팬톰이다. 워울프 대원용으로 만들어진..."
"지금은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은 걸 잘도 구했군요... 크으윽..."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다."
"좋아요. 어차피 죽게 됐으니 대답해 드리죠."
"네녀석의 배후는 대체 뭐냐?"
"흐흐흐... 대답할 수 있는 걸 물으시죠."
"닥쳐! 네놈이 양심이 있다면 이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서라도 털어놔야 할 거 아니야!"
"쳇... 당신 답군. 좋아요. 대답해 드리죠. 당신의 새 동료들을 위협
했던 것도 실은 나였소. 정확히 말하면 내 뒤에 계신 분들이지만..."
"그들은 대체 누구지?"
"바로..."
김 대령이 마악 대답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기관포탄 한 발
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그대로 즉사해 버렸다.
"제기랄..."
거의 배후를 알아낼 뻔 했다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임대형'
은 한 숨을 쉬었다.
"적의 저항을 분쇄했다. 기지 안으로 들어가겠다!"
밋첼 중위는 곧바로 자신의 샤이안을 기지 안으로 몰아 전투를 속
개했다. 샤이안이 쏘아대는 레일건의 직격을 받은 게키강 타입 한
대가 간단하게 파괴당한 것을 확인한 그는 잔챙이나 다름 없는 목
성군 병사들의 소화기 사격을 깨끗이 무시하면서 계속 진입한 끝에
마지막 저항을 분쇄한 후 마악 피신하려는 목성 연합의 요인들을
확인했다. 그 중에는 크사카베도 끼어 있었다.
"당신이 크사카베인가? 연행하겠다."
바로 그때 그의 샤이안을 노리고 미사일이 날아왔고, 밋첼 중위는
재빨리 이를 피했다. 빗나간 미사일은 그 직후 건물 벽에 큰 구멍을
남긴 채 폭발했다.
"누구냐?"
-흐흐흐... 또 만났군.
"뭐, 뭐라고?"
-빅 스톤에서의 일을 기억하나? 네가 상대했던 기동 병기를 몰았던
자가 바로 나다. 이렇게라도 알게 됐으니 이름이나 알자.
"닥쳐!"
-너의 이름을 들을 순 없겠군. 나는 '호쿠신'이다. 오랫 동안 '크사카
베 하루키' 각하에게 봉사해 왔다.
"너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숱한 개조 시술로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닥쳐라. 나는 과학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일 뿐. 괴물이 아니
다!
"그러면 그 잘난 힘을 보여주시지."
-원한다면!
곧 두 기체 간에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선공을 건 호쿠신의 공
격을 민첩하게 피한 밋첼 중위의 샤이안이 레일건을 연사했지만, 호
쿠신도 여유있게 이를 피하고는 기관포를 쏘아댔다.
-하하하. 미국인, 그 여유는 어디 갔나?
"너야말로!"
밋첼 중위는 그렇게 소리친 후 미사일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지막 전투가 될 게 확실한 이상 아까울 것이 없었다.
곧 미사일들은 탄막을 형성하듯 호쿠신의 기체를 강타했고, 호쿠신
은 분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크아악! 내가 이렇게 끝날 것 같으냐?
얼마후 호쿠신의 기체는 불길에 휩싸였고, 밋첼 중위는 피식 웃은
후 도망갈 곳을 잃은 목성 연합의 요인들 틈에 끼어 있는 크사카베
에게 기관포를 겨눈 후 말했다.
"크사카베, 당신을 체포한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책임이라고? 하하하...
"뭐가 우스운 거냐?"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한단 얘긴가?
"네놈의 그 잘난 정의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책임을 지란
얘기다!"
-잘 들어라. 내 유일한 책임은 한 때 너희 나라의 흰집 주인에게 속
아 이용당한 것 뿐이다. 그 책임을 져야한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크사카베는 곧 품 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어 자기 머리에 겨누고
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비겁한 자식! 겨우 자살하는 것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거냐?"
중위는 그렇게 분노한 후 샤이안을 움직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
다. 기지 전체가 흔들리면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는 의아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지?"
-어이 그레그. 빨리 밖으로 나와. 큰일이 터졌어!
"알았어. 이것들부터 빨리 넘기고."
그는 곧이어 난입해 들어온 특수전 부대에 요인들을 인계한 후 황
급히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저건 대체?"
"정보가 없는 기동 병기입니다."
"그것보단 지금 저녀석이..."
거기 까지 말하고는 햄튼 제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느닷없이 땅
이 꺼짐과 동시에 나타난 목성군의 기동 병기는 사방에 고출력 입
자 무기를 난사해 작전 중이던 UN군 기체들을 파괴했다. 지금 당장
은 몰라도 이런 형국이 계속 되다간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함재기는 대체 뭘 하는 거야?"
-우리 힘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어.
느닷 없이 나타난 거대 기동 병기의 공격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밋첼 중위는 샤이안의 부스터를 가동해 날기 시작했다. 다른 아군기
들도 같은 행동을 취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곧 탑재한 무기의 최대 사정거리 내에 진입한 모든 샤이안들과 그
밖에 다른 인간형 병기들이 일제히 미사일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하
지만 이 기동 병기는 재머 등의 방어 장비로 이를 대부분 빗나가게
만들거나 기만당하지 않은 일부는 근접 방어 무기로 요격하고는 거
꾸로 십 수대의 인간형 병기들을 격추시켰다.
"이러다간 다 죽겠어!"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이젠 이 수밖에 없어!"
-그레그, 무모한 짓 하지마!
레노 중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동 병기를 향해 샤이안을 접근시킨
밋첼 중위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하하. 역시 예상대로군. 잘 왔다.
"끈질긴 놈!"
-네놈에게 진 빛을 꼭 갚고 말테다!
"영원히 못 갚게 해주마!"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지~. 흐흐흐...
호쿠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기동 병기의 화력을 밋첼 중위의 샤이안
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우왓! 엄청난 화력이다!!"
-하하하, 이 녀석 앞에선 너의 그 잘난 기체도 파리에 불과하다!
"닥쳐!"
방금 전의 공격으로 오른쪽 팔이 떨어져 나간데다 부스터의 출력
까지 저하된 가운데 밋첼 중위는 기회 닿는 대로 공격을 가했지만,
엄청난 방어력을 지닌 듯 호쿠신의 기동 병기는 끄떡도 하지 않았
다.
"제기랄, 저 놈은 대체..."
그렇게 고심하던 찰나 밋첼 중위는 별안간 자신의 샤이안과 호쿠신
의 기동병기와의 거리차를 좁히기 시작했다.
-네, 네놈 무슨 짓이냐?
"보고도 모르냐?!"
-아, 안돼!
무언가를 눈치챈 듯 호쿠신은 절규했다. 밋첼 중위의 샤이안은 기동
병기의 코어로 짐작되는 부분에 달라붙기가 무섭게 왼팔에 내장된
기관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떨어져라!"
까가강 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는 가운데 기동 병기는 곳곳에서
스파크가 일더니 폭발하기 시작했다. 급하게 만든 무기임을 보여주
는 증거였다.
-크... 분하다... 이렇게 죽을 수는...
"잘 가라."
화염에 휩싸이며 지면을 향해 추락하는 기동병기로부터 벗어나려던
밋첼 중위는 샤이안의 출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는 한 숨을 쉬었다.
"돌아가기는 틀렸군..."
비슷한 시각 호네트의 함교에선 기동 병기의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시가지 중심부를 보고 다들 경악에 빠져 있었다. 리리아는
아예 머리를 싸맨 채 흐느꼈고, 햄튼 제독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눈
앞의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다.
"엔젤22, 응답하라! 엔젤22, 응답하라! 밋첼 중위! 살아 있으면 뭐라
고 한 마디라도 해!"
"소용 없어. 녀석은 죽은 거야..."
"이 자식 재수없게 그딴 소리냐?"
"모두 그만둬!"
함교 안에서 싸움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자 햄튼 제독까지 직접 나
서서 이를 말렸다.
"중위님은 돌아오실 거예요. 절대로 죽으실 리가 없어요..."
"리리아..."
간신히 고개를 든 후 밋첼이 살아 있을 거라고 확언한 리리아는 한
편으론 불안함을 떨칠 수 없는지 부르르 떨면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살아서 돌아와 주세요... 오빠...'
다들 낙담한 가운데 레이더 화면을 주시하고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
다.
"레이더에 무언가 잡혔습니다!"
"밋첼 중위의 기체인가?"
"한 대가 더 있습니다."
"뭐야?"
"광학 센서로 확인해 봐야 겠습니다. 이 위치라면 충분하겠죠."
곧 광학 센서가 잡은 선명한 영상이 들어왔고, 모두들 놀라운 표정
을 지었다.
"'텐카와 아키토'가 밋첼을 구했다!"
"뭐야? 그 어둠의 왕자가?"
"방금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갑판에 내리겠다고 합니다!"
"모두 서둘러! 의무반도 대기시켜!"
호네트를 비롯해 모든 UN군 소속 함정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
운데 밋첼 중위는 아키토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당신의 신세를 졌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지마. 순전히 유럽에서 진 빛을 갚은 것 뿐이야. 그리
고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잠시 말 끝을 흐린 아키토는 곧 결심한 듯 마저 얘기했다.
-자네가 찾는 사람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무슨 말씀이시죠?"
-곧 알게 될 거야.
아키토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씨익 웃었다. 얼마 후 호네트의 비행
갑판에 내린 두 기체 주변에 함상용 소방차들이 몰려들어 만일의
화제에 대비했고, 갑판 요원들이 급히 달려와 구조 활동을 지원했
다. 곧 기진맥진한 채로 조종석에서 내린 밋첼 중위는 갑판 요원들
이 건네준 음료수를 마시고는 저 멀리서 차를 타고 오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야, 그레그!"
곧 차에서 내린 수많은 동료 파일럿들이 뛰어와 그를 들고는 헹가
래를 시작했다. 삽시간에 영웅이 된 밋첼 중위는 다른 동료들에 의
해 무등이 태워진 채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무사 귀환을 자축했다.
바로 그때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리리아를 본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됐어. 그만 내려줘."
"이봐. 그레그. 왜 그러는 거야."
"곧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내려줘."
"알았어."
곧 갑판 위에 두 발로 선 밋첼 중위는 리리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리리아, 돌아왔어."
"중위님..."
곧 밋첼 중위는 리리아를 끌어안았고, 리리아는 잠시 얼굴을 붉힌
후 입을 열었다.
"돌아와서 고마워요. 오빠... 미안해요. 사실을 숨겨서..."
그 말이 나오자 주위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리아, 아니지... 에이미, 이 세상에 자기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없어."
그렇게 말한 후 밋첼 중위는 리리아의 볼에 키스를 했다. 모두가 의
아해하는 가운데 마악 호네트의 갑판에 내린 아크엔젤 소속의
MV-45에서 내린 파리스는 이 상황을 보고는 뒤돌아 선 채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밋첼 중위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
다.
"파리스 함장."
"..."
"선배님?"
"리리아... 당신이 이겼군요."
"아니에요. 이 분은 제 오빠에요."
"?"
"파리스 함장, 마음 애타게 한 것 미안합니다. 그리고..."
거기 까지 말하고는 밋첼 중위는 파리스와 포옹했고, 두 사람은 곧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모두가 환호하기 시작했다.
후세의 사가들에게 3차 세계 대전으로 기록된 이 전쟁은 화성에서
사실상 끝을 맺었다. 목성으로 진격한 UN군을 상대할 여력이 없게
된데다 지도자까지 잃은 목성 연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이를
받아들인 UN군은 총사령관인 미 육군의 '아서 웨인라이트' 원수를
대표로 파견해 전함 미주리호에서 종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전쟁으
로 말미암아 태양계의 질서는 뉴욕 체제에 의해 재편되었고 2차 대
전 말기의 추축국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 목성 연합은 16등분 되
어 주요 승전국들의 군정 통치를 받게 되었다.
나데시코-D를 비롯 그동안 위치가 애매했던 UN 상비군의 주요 함
정들도 독자 행동권을 보장 받음으로서 효율적인 작전이 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조용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뉴욕 체
제는 통합에 불만을 품었던 과거 선진 국가들에겐 대단히 우호적이
었지만 언제나 빈곤할 수밖에 없었던 3세계 국가들을 배려하지 않
았고, 일본 주도하의 통합에 의존해온 동남아 및 아프리카 각국은
통합 붕괴에 따른 경제 혼란과 정치 불안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
야만 했다. 그리고 미국은 그간 통합의 눈치로 적극적으로 간섭할
수가 없었던 남미 각국의 반미적 경향의 반정부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CIA를 앞세운 더러운 전쟁을 재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을 잃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실권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전
혀 깨닫지 않았다.
2202년 09월 01일. 08시 00분. 플로리다 마이애미
밋첼 남매는 마이애미 한 가운데에 자리한 공원의 오벨리스크 앞에
서 있었다. 튤립 낙하에 의해 희생된 자들의 이름이 하나 하나 새겨
진 이 오벨리스크 앞의 제단에 리리아는 들고 있던 백합 다발을 놓
았다. 그레그는 그런 리리아를 잠시 바라본 후 오벨리스크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돌아가신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군요.
한 때 저는 이곳에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 했었습니다.
하지만, 헤어졌던 에이미와 함께 이곳에 돌아왔습니다. 어디까지나
저와 에이미는 이곳에서 살다간 두 분의 아이들이니까. 이제 편히
잠드세요.'
곧 정복 차림의 밋첼 중위는 정모를 고쳐 쓴 후 오벨리스크를 향해
경례했다. 리리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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