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일출의 햇볕이 따가워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가을의 평일 아침 바닷가에는 인적이 없었다. 서너 마리의 갈매기가 울어대는 소리는 내가 감정을 이입해서인지 처절하게 들렸다. 두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켜고 차 밖으로 나왔다. 내 차가 아니라 어색했다. 침대가 없는 곳에서 밤잠을 자고 일어나면 아침이 낯설다. 온몸도 찌뿌드드했다. 하지만 다행히 오른쪽 옆구리의 상처는 그다지 쑤셔대지 않았다.

나는 갈매기를 눈으로 쫓다 눈부시게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았다. 벌써 태양은 수평선 위로 한 뼘 이상 올라와 있었다. 언젠가 원과 함께 바다를 보러 온 적이 있었다. 아마 작년 이맘 때였을 것이다. 국도 변에는 새빨간 단풍이 우거졌고 살랑거리는 가을바람이 상쾌했다. 나와 원은 해를 바라보며 옆으로 껴안다시피 했다. 그때 내 목덜미를 간질이던 그녀의 따뜻한 숨결과 내 겨드랑이에 닿은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기억은 내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아마도 조라는 사내의 기억일 것이다. 그러면 원은 조를 사랑했던 것일까. 원에게 있어 나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눈을 감고 파도 소리에 귀 기울였지만 해답을 알 수는 없었다. 사람의 말소리나 차 소리조차 없이 자연음만이 나를 감싸는 이곳에서 음산한 한기를 느꼈다. 성큼 겨울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겨울이 없다. 처음에는 나에게 남은 날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체념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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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울로 갈 일은 없다. 나는 차를 영동 고속도로에 얹고는 제멋대로 속도를 높였다. 단속 카메라에 찍히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번호판도 가짜였다. 내가 이 차를 손에 넣은 것은 제이 덕분이었다. 제이가 죽고 집이 날아간 다음 나는 며칠 동안 변두리의 여관을 전전했다. 모텔보다는 여인숙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허름하고 지저분한 곳들이었다. 소멸하는 날까지 내내 호텔에서 지내도 될 정도로 돈은 충분했지만 지명수배를 피하려면 방법이 없었다.

집이 날아간지 3일 뒤에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예약 전송된 메시지였다. 제이 역시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포토 메일에는 한강변 공용 주차장의 위치와 번호판이 크게 찍힌 실제 차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동차 열쇠는 필요 없었다. 열쇠가 없어도 여는 것은 쉬웠다. 나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 한강에 가서 차를 찾아낸 다음 문을 따고 들어갔다. 대시 보드의 수납함에는 열쇠가 들어 있었다. 열쇠 없이 차문을 여는 것은 쉽지만 시동을 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는 제이의 배려에 감사하며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며 무너지듯 한숨을 내질렀다.

시동을 걸자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동을 건 채로 트렁크 문을 열어 보았다. 트렁크에는 무기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권총이나 머신 건, 수류탄뿐만 아니라 일본도와 두 발이 장전된 대전차 바주카포까지 들어 있었다. 제이의 마지막 선물은 푸짐했다. 나는 트렁크 문을 닫고 빙긋 웃으며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간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집이 날아간 다음에 처음으로 웃어보는 것 같았다. 덕분에 여유가 생겼고 플랜트로 직행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동해안으로 향했다. 나는 지명수배 되었지만 수염과 머리를 길렀고 차 또한 대포차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안심했다. 조는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버려둘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노인과 만나는 것을 알면서도 방조했고 유도에게 나를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내 주변 사람들을 모두 죽이면서도 나만은 살려두고 있었다. 물론 나도 3일 뒤에는 소멸하지만 나를 남겨둔 것은 뭔가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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