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12.
어머니의 양수와 같은 포근한 감각을 느끼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폐까지 차오르는 물 속에서 나는 눈곱만치도 평온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익숙함이라는 무기가 있다. 나는 몇 번 반복된 꿈속에서 확실히 상황을 진전시키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관의 물 속에 갇혀 있었고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꼴사납게 사지를 버둥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주변의 상황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차분히 집중해야만 했던 데다가 유리관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유리관 주변에는 예닐곱 명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몰모트와 같은 실험체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유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진으로 보이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손에 철제 서류판을 쥐고 나를 보며 여러 항목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보다 가까운 곳에는 네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중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은 한 명이었는데 그는 내 친구의 남편이었다. 적당히 마르고 보기 좋게 키가 큰 그는 자신감 어린 표정으로 주변의 세 남자들을 두리번거리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덩치가 큰 사내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호기심 어린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마치 서울랜드의 돌고래 쇼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 앞에는 구부정하게 선 채 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내가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이 실험실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탐탁치 않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실험실 안에서 가장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것은 바로 스미스였다. 아니, 나였다.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백유석에게 뭔가를 말하자 백유석은 고개를 조아리며 황송해했다. 스미스는 다시 나를 보았는데 그의 미소는 만족스런 것이었는데 순수함보다 불순함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마치 성폭행범이 강제로 일을 마치고 짓는 득의만만함과 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불쾌감에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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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잠이 들 수 있던 것일까. 야구장에서 스미스의 뒤를 쫓았어야 했지만 이성이 마비되어 그럴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스미스는 이미 사라졌고 노인은 죽은 채였다. 거기서 더 시간을 끌어서 다른 관중들이 노인의 죽음을 알아차린다면 곤란해질 것이라는 데 간신히 생각이 미쳤다. 나는 야구장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꿈을 꾸었고 아침이 된 것이다. 클론에게 당한 오른쪽 옆구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쑤셨는데 내가 깨어난 곳은 침대도 소파도 아니라 신발장 바로 앞의 마룻바닥이었다. 누운 것도 아니고 엎드린 채였다.
나는 양 손으로 몸을 일으켰다. 옷도 입은 그대로였고 신발도 벗지 신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은 다음 안방으로 들어와 옷을 하나씩 벗었다. 익숙해진 행위들을 본능적으로 행하며 어제 벌어진 일들을 처음부터 정리해보려 했지만 어제 벌어진 일들만 꿰어 맞춰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단서를 줄 노인이 죽었고 제이와 원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제이나 원에게 물을 바에는 스미스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옷장 속에서 희미하게 규칙적인 비퍼음이 들렸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번뇌를 끊게.’
노인의 메시지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내가 종합운동장 역에 도착했을 때쯤에 들어온 것이었다. 아마 그가 죽음을 맞기 직전에 보낸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때쯤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스미스를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내게 메시지를 보낸 것인지 모른다. 최근에 내 주변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먼저 인식하고 준비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준비할 시간이 짧았다는 것은 아쉬웠을 것이다. 노인은 죽는 순간까지 끝끝내 나와 선문답을 즐기고 있었다. 단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문자 메시지에서 나는 함의를 읽고자 노력했지만 쉽게 답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양수와 같은 포근한 감각을 느끼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폐까지 차오르는 물 속에서 나는 눈곱만치도 평온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익숙함이라는 무기가 있다. 나는 몇 번 반복된 꿈속에서 확실히 상황을 진전시키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관의 물 속에 갇혀 있었고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꼴사납게 사지를 버둥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주변의 상황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차분히 집중해야만 했던 데다가 유리관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유리관 주변에는 예닐곱 명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몰모트와 같은 실험체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유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진으로 보이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손에 철제 서류판을 쥐고 나를 보며 여러 항목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보다 가까운 곳에는 네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중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은 한 명이었는데 그는 내 친구의 남편이었다. 적당히 마르고 보기 좋게 키가 큰 그는 자신감 어린 표정으로 주변의 세 남자들을 두리번거리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덩치가 큰 사내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호기심 어린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마치 서울랜드의 돌고래 쇼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 앞에는 구부정하게 선 채 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내가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이 실험실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탐탁치 않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실험실 안에서 가장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것은 바로 스미스였다. 아니, 나였다.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백유석에게 뭔가를 말하자 백유석은 고개를 조아리며 황송해했다. 스미스는 다시 나를 보았는데 그의 미소는 만족스런 것이었는데 순수함보다 불순함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마치 성폭행범이 강제로 일을 마치고 짓는 득의만만함과 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불쾌감에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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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잠이 들 수 있던 것일까. 야구장에서 스미스의 뒤를 쫓았어야 했지만 이성이 마비되어 그럴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스미스는 이미 사라졌고 노인은 죽은 채였다. 거기서 더 시간을 끌어서 다른 관중들이 노인의 죽음을 알아차린다면 곤란해질 것이라는 데 간신히 생각이 미쳤다. 나는 야구장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꿈을 꾸었고 아침이 된 것이다. 클론에게 당한 오른쪽 옆구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쑤셨는데 내가 깨어난 곳은 침대도 소파도 아니라 신발장 바로 앞의 마룻바닥이었다. 누운 것도 아니고 엎드린 채였다.
나는 양 손으로 몸을 일으켰다. 옷도 입은 그대로였고 신발도 벗지 신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은 다음 안방으로 들어와 옷을 하나씩 벗었다. 익숙해진 행위들을 본능적으로 행하며 어제 벌어진 일들을 처음부터 정리해보려 했지만 어제 벌어진 일들만 꿰어 맞춰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단서를 줄 노인이 죽었고 제이와 원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제이나 원에게 물을 바에는 스미스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옷장 속에서 희미하게 규칙적인 비퍼음이 들렸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번뇌를 끊게.’
노인의 메시지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내가 종합운동장 역에 도착했을 때쯤에 들어온 것이었다. 아마 그가 죽음을 맞기 직전에 보낸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때쯤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스미스를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내게 메시지를 보낸 것인지 모른다. 최근에 내 주변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먼저 인식하고 준비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준비할 시간이 짧았다는 것은 아쉬웠을 것이다. 노인은 죽는 순간까지 끝끝내 나와 선문답을 즐기고 있었다. 단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문자 메시지에서 나는 함의를 읽고자 노력했지만 쉽게 답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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