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운동장역에서 내려 시즌이 끝나가는 잠실야구장 외야석으로 향했다. 지하철 역의 계단을 뛰어 오를 때 마다 오른쪽 옆구리가 쑤셨다. 누군가 나를 보면 표가 매진될까봐 매표소로 달려가는 열성 팬처럼 보였을 것이다. 홈 팀은 이미 시즌 최하위를 예약하여 관중은 오히려 어웨이 팀 쪽이 더 많았다. 하지만 어웨이 팀도 준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어 맥 빠지는 경기였다. 3회가 진행 중이었지만 관중 수는 1,000명을 넘지 않았고 가을비 이후 뚝 떨어진 기온 탓에 퇴근 시간이 지나도 관중은 늘지 않았다. 오늘의 용건이 조금이라도 가벼운 것이었다면 나는 재미없는 그라운드에서 관중석으로 시선을 돌려 관중수를 한 명 한 명 정확히 세는데 골몰했을 것이다.

지난 봄 노인과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는 다행히 노인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는데 주변에는 관중들이 거의 없었다. 둔탁한 타구음과 함께 관중석에서 함성이 일었지만 나는 그라운드 쪽은 보지도 않고 노인에게 향했다. 스코어보드와 라이트의 현란한 조명에 현기증이 일었다. 위와 아래로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텅 빈 관중석을 보니 헛구역질이 일었다. 자칫 여기서 구르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혼란한 정신을 수습한 다음 노인 앞에 섰다.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아마도 그라운드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다가갔을 때 그의 자세가 허물어졌다. 마치 흥미없는 수업 시간에 조는 고등학생처럼 앞으로 푹 수그렸다. 머리가 앞좌석 등받이 끝에 힘없이 부딪쳤지만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었다. 목 주위에는 가늘지만 질긴 끈으로 조인 흔적이 불거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권총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총을 꺼냈다가는 에버랜드 사파리의 라이거처럼 시선을 한 몸에 얻게 된다. 노인의 등 뒤로 10m 뒤의 스코어보드 바로 아래에 내 일기장처럼 새하얀 정장을 입은 사내가 오른손을 흔들며 미소 짓고 있었다. 티 없이 맑고 즐거운 미소였다. 그의 손짓에 호응이라도 하듯 관중석에는 다시 함성이 일었다. 더 많은 관중이 입장한 어웨이 팀의 내야수가 파인 플레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의 정장을 빛낸 것은 초록색 니트 넥타이였다. 인사동의 디자이너 샾에서 단 하나만 제작된 물건이라던 바로 그것이었다. 장내 아나운서의 선수 소개와 함께 시끄러운 BGM과 북소리, 박수 소리가 뒤엉켰다. 그 속에서 미미한 합창 교향곡이 울리고 있었다. 트렌치 코트의 속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액정에는 ‘스미스’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말없이 폴더를 열었다.

“여기야, 여기. 프로토.”

어딘가에서 많이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이 목소리를 변성기 이후부터 줄곧 매일같이 들어왔다. 내가 입을 열면 이 목소리가 내 머리 전체로 들린다. 스미스가 여기라고 말했는데, 고개를 들고 보니 하얀 정장을 입은 사내가 WWF 시절의 마초맨 랜디 새비지처럼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치켜든 채 왼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나와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찾고 있나?”

스미스는 전화 속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더니 핸드폰을 든 왼손을 귀에서 떼고 위로 쳐들었다. 그의 왼손을, 휘황한 라이트의 조명을 받아 빛나는 캐주얼 손목시계가 장식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 내 서랍에 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내 서랍 속의 시계는 이미 시계로서의 생명이 다한 것이었고 녀석의 시계는 쌩쌩하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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