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와 원은 사귀고 나서도 학교에서는 사귄다는 사실을 알리기는커녕, 원과 서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조는 학교에 친구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원도 그때쯤 다시 친해진 김을 제외하면 친구가 많지 않아서 굳이 알릴 사람도 없었다.

조는 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호텔 사무실을 나와 원룸을 얻었다. 최근 들어 팀장과 정은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 많았고 출근하더라도 잠깐 동안 머물다 가는 식이었다. 따라서 호텔은 제이가 혼자 지키는 일이 많았다. 조는 전역한 이후 현역병이었던 시절보다 수입이 늘어나 넉넉히 돈을 쓰고 있었다. 정식으로 회사의 직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입도 늘어난 데다 여자친구도 생긴 조에게 요즘처럼 행복한 시기는 없었다.

책도 빌려 읽기보다 주로 사서 읽게 되어 도서관에 가는 일도 뜸해졌다. 조는 학교를 나와 사무실로 향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 겨울로 접어들었지만 마음이 훈훈해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벨이 울려 가방에서 꺼내 받았을 때 조는 원의 전화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안녕? 설마 날 잊지 않았지?”

비음 섞인 목소리. 잊을 리 없다.

“와,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

조는 류에게 순수한 반가움을 드러냈다.

“그럼, 너무 잘 지내서 탈이지. 오늘 시간 있어? 내가 저녁 살게. 너희 학교 근처야.”

‘너희 학교’라는 말이 담담한 울림을 주었다. ‘우리 학교’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회사에 들러야 하지만 최근에는 팀장이나 정이 출근하지 않는 날도 많으니 저녁만 먹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잡은 약속장소는 조의 학교 근처의 족발집이었다.

그녀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 조는 자신의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조에게 그리운 것은, 손 한 번 못 잡아 보고 2년을 못 본 류가 아니라 어제도 함께 있었고 진한 페팅을 주고받은 원이었다. 조가 족발집에 들어갔을 때 입구를 응시하고 있던 류가 오른팔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조는 갈색 스웨이드 로퍼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도 안변했네. 남자가 군대 갔다 오고 나서도 변하지 않기는 힘든데.”

“너도 여전한데.”

“뭐가 여전해. 살쪘잖아. 그렇지?”

결혼식 이후 2년 반 만에 마주한 류는 얼굴을 비롯해 살이 조금 올라 있었다. 하지만 원래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던 류가 휘청거린다는 느낌이 줄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물론 조는 그런 감상을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살이 쪘다는 말은 어떤 여자에게도 해서는 안 될 말이다.

“혹시... 아이...?”

조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눈치는 여전하네. 맞았어.”

“그랬군. 축하해. 딸?”

“잘 아네? 어떻게 알았어?”

“감이지.”

둘은 상쾌하게 웃었다. 감정적으로 거치적거리는 게 없어서 조도 편했다. 족발이 가득 담긴 커다란 접시와 소주가 나왔다.

“여긴 족발만 하니까 그냥 먼저 시켰어. 소주 괜찮지?”

“그럼. 좋아.”

조는 사무실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오늘도 팀장이나 정이 없을 것 같아 그냥 마시기로 했다. 류는 한 손으로 조의 잔을 채운 다음 자신의 잔도 직접 채웠다.

“내가 자작하게 놔두네? 그러면 3년 동안 여자 친구를 못 사귄다는데.”

“이미 생겼어.”

“정말?”

“응, 학교 후배야. 두 학 번 아래. 자, 건배.”

조와 류는 소주 한 잔 씩을 비웠다. 조는 류의 잔에 따라주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그러면 내 후배가 될 뻔 했네. 내가 너희 학교에 남았다면 말이지. 어떤 타입이야?”

“평범하고 내성적인 타입. 조용해서 좋아. 난 말 많은 여자는 싫어.”

“널 많이 좋아해줘?”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사실 사귄 지 얼마 안 되었거든.”

“보통 사귀기 시작할 때 서로에게 가장 잘하는 법 아냐?”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이런. 넌 말야, 평소에는 차분하고 차가워 보이는 편이지만 뭔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극단적으로 변하는 타입이야.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면 넌 잔인해질 수 있지. 너는 뭔가 집착하면 끝장을 보려 할 텐데 여자친구가 그걸 채워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조는 류의 말에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세요? 아줌마의 조언 잊지 않을게. 아줌마 결혼 생활은 어떠신가?”

조는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백유석을 떠올렸다.

“너 결혼식장에 왔었나?”

“못 갔어. 가고 싶었는데 뭔가 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지난 일이라 기억나지 않지만.”

조는 결혼식장에 갔었고 신랑도 어떤 사람인지 봤다고 이야기하기 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결혼식장에 갔다고 말하는 것은 류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고, 동시에 조 스스로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류의 남편은 허우대 멀쩡하고 잘 생긴 사람이었지만 왠지 자기 여자에게는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신랑 만나기 전에는 내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든지, 아니면 적어도 서른은 넘어야 결혼할 줄 알았어. 그런데 첫 시간 수업에 들어온 그 사람한테 홀딱 반했지 뭐야. 물론 의대에는 삼수 이상을 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긴 하지만 내가 사수를 하고 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 쉽지 않았어. 대신 공부 때문에 이것저것 물어보다 사귀고 금방 결혼하게 된 거지. 신랑이 나이도 있고 했으니...”

“아기는 몇 개월 안 되었지?”

“응. 일부러 방학 때 맞춰서 낳았어. 휴학하는 게 싫었거든.”

“대단해. 역시 너다워. 그럼 어떻게 키우는 거야?”

“사실 신랑은 집에 봐주는 사람을 두자고 했어. 경제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니까. 아니면 시어머니께서 맡아주신다고도 했고. 그런데 내가 고집 부려서 우리 엄마한테 맡겼어. 주말에만 아이를 보고 지내.”

조는 항상 오버페이스하는 듯한 류의 삶에 확실히 거리감을 느꼈다. 정말 이 여자와 나는 타입이 다르구나, 나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연관되어 있어도 느긋함을 잃는 게 싫은데... 하고 생각했다. 사수를 하며 까먹은 시간들을 몰아치듯 만회하고 있는 류에 대해서 거리감과 동시에 연민 같은 것도 들었다.

“신랑하고는 잘 지내? 그러니까 교수와 학생의 관계, 연인 관계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잖아?”

“야한 이야기라도 듣고 싶은 거야? 하하.”

“하하하. 그런 게 아니라...”

“알고 있어. 솔직히 신랑은 일 밖에 몰라. 그게 멋있어서 결혼한 거고. 요즘은 정부 쪽 일을 따내려 하고 있는데 내막은 나한테 잘 이야기 안 해. 그래도 밖에 있었던 일을 집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든.”

1년 반이 조금 못되어 만난 탓에 둘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류는 테스트를 준비하기 위해 가야한다고 했다. 힐끗힐끗 계속 손목시계를 훔쳐보는 조의 사정을 눈치 채고 그러는 것 같았다. 조는 그녀의 센스에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은 류가 하겠다고 했지만 조가 일찌감치 계산서를 확보해 먼저 계산했다. 조도 회사 덕분에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류는 앞으로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며 흐뭇한 표정으로 조를 보냈다. 조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 류에게는 더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구실이 된 것 같았다.

조는 자신에게 술 냄새가 나지 않았는지 얼굴이 빨개지거나 화끈거리지 않았는지 뺨을 매만지고는 버스 정류장 매점에서 껌을 사서 씹으면서 종로의 사무실 쪽으로 걸었다. 저녁은 먹었는지 원이 잠들기 전에 전화하려 했지만 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곧바로 원에게 전화하는 것은 꺼림칙하게 여겨져 참았다. 회사에 들어가 아무 일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 전화하려고 했다. 제이에게 먼저 전화할까 하다가 말았다. 약간 남아 있는 술기운이 있는 상태로 팀장이나 정이 제이의 전화를 빼앗아 통화해 불호령이라도 터뜨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디에도 전화하지 않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 로비에 도착해 거듭 입 냄새와 얼굴색을 확인한 다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긴장한 것 같았지만 술에 취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4층에서 내려 붉은 카펫을 소리 없이 밟으며 사무실 앞에 섰을 때 조는 안에 인기척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보다는 긴장감이 생겼다. 팀장과 정이 없는 것은 괜찮지만 사무실을 지키고 있어야 할 제이는 어디에 간 것일까? 조가 원룸을 구한 이후 제이는 혼자 사무실을 지켰지만 최소한 비울 때에는 미리 연락해 조가 대신 지키곤 했다. 즉, 사무실에 근무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드키를 꽂고 비밀 번호를 입력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같은 방법을 반복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에 인기척은 없었고 피 냄새 같은 것도 나지 않았다. 조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다음 권총을 뽑은 후 경계자세를 취하며 문을 따고 들어갔다. 정면과 측면에 사격 자세를 취했지만 사무실 안은 변한 것은 없었다. 컴퓨터와 집기, 무기와 침대까지 그대로였다. 진동으로 바꿔둔 핸드폰이 불길하게 몸을 떨었다. 제이였다.

“노인네가 당했다.” (7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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