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물 속에서 내 페니스는 형편없이 오그라들었고 수초처럼 흐느적거리는 음모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실체만 확인하면 된다. 물 속에서 눈을 뜨는 것은 조금만 익숙해지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도까지 물이 차올라 답답했지만 집중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흰 색 옷을 입은 일련의 사람들과 정장을 입은 두 남자였다. 우렁찬 전화벨이 나를 현실로 불렀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내 핸드폰 소리였다.
잠에서 깨어나 머리맡의 핸드폰을 급하게 확인했지만 전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환청이었다. 밤새 전화는커녕 문자 메시지조차 오지 않았다.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긴 한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폐에 물이 찬 것처럼 답답했다. 나는 윗입술을 깨물며 제이에게 전화했다.
“나야.”
“여어, 아침부터 웬일이야?”
“만났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어려울 것 같은데. 내일 안 될까?”
“지.금.당.장.”
녀석은 혀를 끌끌 차더니 알겠다며 호텔 커피샵에서 만나자고 했다.
대충 세수하고 옷을 걸쳐 입은 다음 아차산 대교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커피샵에 도착한 것은 약속 시간 10분전이었다. 전화 통화 후 한 시간 뒤로 약속을 잡았으니 50분 만에 약속 장소에 나온 것이었다.
의외로 제이가 먼저 나와 있었다. 토스트와 버터, 그리고 커피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지만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녀석은 심각한 표정으로 오전의 강변 북로를 달리는 차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구름이 점령한 하늘은 햇살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늘 비가 내릴 지 일기 예보도 확인해두지 않았다. 평소 일상을 견고하게 유지시켜주던 나의 꼼꼼함은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나는 제이의 맞은 편에 앉아 레몬티를 주문했다. 어차피 마실 생각도 없어서 아무렇게나 시킨 것이었다. 웨이터가 자리를 떠나자 제이가 나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바빠. 용건만 이야기해.”
“언제나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어.”
“논쟁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도 않고.”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리가 안 되었으면 말하지 마. 나중에 이야기하자.”
제이는 당장 일어날 듯한 자세를 취했다.
“도대체 아버지가 원하는 건 뭐지?”
제이는 나의 질문에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아버지의 거대한 계획이 무엇인지는. 그건 아버지 본인만 알고 있지.”
“넌 팀장이잖아?”
“나 역시 조직의 톱니바퀴에 불과해.”
“그래도 나보다 많이 알고 있겠지.”
제이는 뭔가를 말하려다 주저하더니 사라피 재킷의 앞주머니에서 던힐 밸런스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B4 계획에는 악의가 가득해. 사람을 죽이는 게 결코 떳떳치 못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나도 권력의 하수에 불과하다는 것도. 하지만 내 친구를 죽이라는 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결국 내 눈 앞에서 죽게 하는 것은 분명 강렬한 악의가 개입된 거야.”
“네 눈앞에서 죽지 않을 수도 있었어. 네가 쓸 데 없는 사람을 만나며 회사의 뒤를 캐고 다녔기 때문에 대가를 치른 거야.”
“유도를 없애겠어.”
“유도를 죽인다고 달라지나? 유도 역시 일개 요원에 불과해. 한 번의 항명은 용서될 수 있지만 두 번은 용서될 수 없어. 그리고 넌 유도를 이길 수 없어. 녀석은 너와 차원이 달라.”
“친구로서 걱정해주는 건가?”
“진심으로 충고하지.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이쯤에서 손 떼. 그러면 더 이상 이 계획에 연관된 일거리만큼은 절대 주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시작했으니 끝장을 봐야지. 게다가 내가 시작한 것도 아니잖아.”
“자네의 안전을 보장하지.”
“그럼 다른 사람들은?”
제이는 질문을 무시하며 묵묵히 크리스탈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다른 어느 때보다 우악스런 손놀림이었다.
“이제 그만하자.”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보이며 걸어 나가려 했다. 나는 녀석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래서 내 대역까지 만들었나?”
제이는 잠시 움찔했지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녀석은 그대로 다리를 절며 커피샵을 빠져 나갔다. 나는 왼손으로 턱 언저리를 만지다 며칠 째 면도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호텔에서 집까지는 1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급작스레 엄습하는 졸음 때문에 차가 중앙선을 넘지 않도록 바싹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잠을 깨기 위해 차창을 활짝 열자 아스팔트에서 비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코가 좋지 않아 냄새를 거의 맡지 못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가을은 애매해서 싫다.
집으로 돌아와 가죽 소파에 누워 담요를 폈다. 익숙한 내 체취를 맡을 수 있었지만 좀처럼 헝클어진 기분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지독히 졸렸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는 거의 작동시키지 않는 VHS 플레이어 위에 둔 핸드폰을 보며 누군가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원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말이 없었고, 나는 많은 말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 숨기는 것이 많았다. 우울할 때 고민거리를 늘어놓거나 의지하고 싶어지면 항상 말다툼으로 발전했다. 나는 원에게만큼은 나약함과 우울함을 드러내며 기대고 싶었지만 원은 그것을 부담스러워해 내가 한결같이 이성적이기만을 바랐다.
원과 사귀며 고민했던 것들을 류에게 자주 털어놓곤 했다. 반년동안 연락하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그러다 만나도, 어제 만난 친구처럼 고민거리들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류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충고하지 않고 항상 냉정함을 유지했지만, 나는 류가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이제 류는 없다. 나는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TV에서는 시즌 막바지에 다다른 메이저리그를 중계하고 있었다. 뭔가 틀어놓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켜두었지만 중계는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캐스터와 아나운서는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처럼 과도하게 흥분했지만 내겐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핸드폰이 울렸다.
“저예요. 급한 일인데 당장 와줄 수 있어요?”
진의 낮은 목소리는 다급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것인가. 나는 그녀의 집주소를 확인한 후 화장실에 들어가 가글하고 면도한 다음 이터니티의 애프터쉐이브를 발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잠에서 깨어나 머리맡의 핸드폰을 급하게 확인했지만 전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환청이었다. 밤새 전화는커녕 문자 메시지조차 오지 않았다.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긴 한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폐에 물이 찬 것처럼 답답했다. 나는 윗입술을 깨물며 제이에게 전화했다.
“나야.”
“여어, 아침부터 웬일이야?”
“만났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어려울 것 같은데. 내일 안 될까?”
“지.금.당.장.”
녀석은 혀를 끌끌 차더니 알겠다며 호텔 커피샵에서 만나자고 했다.
대충 세수하고 옷을 걸쳐 입은 다음 아차산 대교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커피샵에 도착한 것은 약속 시간 10분전이었다. 전화 통화 후 한 시간 뒤로 약속을 잡았으니 50분 만에 약속 장소에 나온 것이었다.
의외로 제이가 먼저 나와 있었다. 토스트와 버터, 그리고 커피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지만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녀석은 심각한 표정으로 오전의 강변 북로를 달리는 차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구름이 점령한 하늘은 햇살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늘 비가 내릴 지 일기 예보도 확인해두지 않았다. 평소 일상을 견고하게 유지시켜주던 나의 꼼꼼함은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나는 제이의 맞은 편에 앉아 레몬티를 주문했다. 어차피 마실 생각도 없어서 아무렇게나 시킨 것이었다. 웨이터가 자리를 떠나자 제이가 나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바빠. 용건만 이야기해.”
“언제나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어.”
“논쟁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도 않고.”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리가 안 되었으면 말하지 마. 나중에 이야기하자.”
제이는 당장 일어날 듯한 자세를 취했다.
“도대체 아버지가 원하는 건 뭐지?”
제이는 나의 질문에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아버지의 거대한 계획이 무엇인지는. 그건 아버지 본인만 알고 있지.”
“넌 팀장이잖아?”
“나 역시 조직의 톱니바퀴에 불과해.”
“그래도 나보다 많이 알고 있겠지.”
제이는 뭔가를 말하려다 주저하더니 사라피 재킷의 앞주머니에서 던힐 밸런스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B4 계획에는 악의가 가득해. 사람을 죽이는 게 결코 떳떳치 못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나도 권력의 하수에 불과하다는 것도. 하지만 내 친구를 죽이라는 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결국 내 눈 앞에서 죽게 하는 것은 분명 강렬한 악의가 개입된 거야.”
“네 눈앞에서 죽지 않을 수도 있었어. 네가 쓸 데 없는 사람을 만나며 회사의 뒤를 캐고 다녔기 때문에 대가를 치른 거야.”
“유도를 없애겠어.”
“유도를 죽인다고 달라지나? 유도 역시 일개 요원에 불과해. 한 번의 항명은 용서될 수 있지만 두 번은 용서될 수 없어. 그리고 넌 유도를 이길 수 없어. 녀석은 너와 차원이 달라.”
“친구로서 걱정해주는 건가?”
“진심으로 충고하지.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이쯤에서 손 떼. 그러면 더 이상 이 계획에 연관된 일거리만큼은 절대 주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시작했으니 끝장을 봐야지. 게다가 내가 시작한 것도 아니잖아.”
“자네의 안전을 보장하지.”
“그럼 다른 사람들은?”
제이는 질문을 무시하며 묵묵히 크리스탈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다른 어느 때보다 우악스런 손놀림이었다.
“이제 그만하자.”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보이며 걸어 나가려 했다. 나는 녀석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래서 내 대역까지 만들었나?”
제이는 잠시 움찔했지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녀석은 그대로 다리를 절며 커피샵을 빠져 나갔다. 나는 왼손으로 턱 언저리를 만지다 며칠 째 면도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호텔에서 집까지는 1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급작스레 엄습하는 졸음 때문에 차가 중앙선을 넘지 않도록 바싹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잠을 깨기 위해 차창을 활짝 열자 아스팔트에서 비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코가 좋지 않아 냄새를 거의 맡지 못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가을은 애매해서 싫다.
집으로 돌아와 가죽 소파에 누워 담요를 폈다. 익숙한 내 체취를 맡을 수 있었지만 좀처럼 헝클어진 기분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지독히 졸렸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제는 거의 작동시키지 않는 VHS 플레이어 위에 둔 핸드폰을 보며 누군가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원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말이 없었고, 나는 많은 말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 숨기는 것이 많았다. 우울할 때 고민거리를 늘어놓거나 의지하고 싶어지면 항상 말다툼으로 발전했다. 나는 원에게만큼은 나약함과 우울함을 드러내며 기대고 싶었지만 원은 그것을 부담스러워해 내가 한결같이 이성적이기만을 바랐다.
원과 사귀며 고민했던 것들을 류에게 자주 털어놓곤 했다. 반년동안 연락하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그러다 만나도, 어제 만난 친구처럼 고민거리들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류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충고하지 않고 항상 냉정함을 유지했지만, 나는 류가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이제 류는 없다. 나는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TV에서는 시즌 막바지에 다다른 메이저리그를 중계하고 있었다. 뭔가 틀어놓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켜두었지만 중계는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캐스터와 아나운서는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처럼 과도하게 흥분했지만 내겐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핸드폰이 울렸다.
“저예요. 급한 일인데 당장 와줄 수 있어요?”
진의 낮은 목소리는 다급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것인가. 나는 그녀의 집주소를 확인한 후 화장실에 들어가 가글하고 면도한 다음 이터니티의 애프터쉐이브를 발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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