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가 나간 뒤 나는 제이가 했던 말들을 차근차근 곱씹어보았다. 며칠 동안 대화는커녕 나 자신의 상념을 제외한 그 어떤 단어와도 접촉하지 않아 제이의 말들은 하나하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된 것처럼 느껴졌다. ‘쓸 데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누군가를 강하게 암시하는 듯 했다. 진? 아니면 노인?

나는 허겁지겁 랩탑을 켜고 구글에서 ‘백유석’을 검색했다. 놀랍게도 오늘 오전에 작성된 신문 기사에서도 백유석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었다. ‘사망’, ‘피살’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백유석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난치병을 유발하는 유전적 원인이 되는 DNA를 발견해 동물 임상 실험을 마친 상태이며 이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실험이 남아 있으니 몇 년 이내에 난치병 치료에 혁명적 변화가 야기될 것이라고 밝힌 기사였다. 나는 그 기사의 내용보다 백유석 개인의 진위 여부가 궁금해 YTN 정시 뉴스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백유석이 맞았다. 결혼식에서 그를 처음 본 이후 매스 미디어에서 주목해왔던 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호남형에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는 시원한 미소, 상냥한 말투... 나는 처리한 대상의 부고는 여러 차례 보았지만 죽은 사람의 대역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죽는 것을 보았으니 지금 동영상에서 생글거리는 것은 분명 가짜였다.

나는 강렬한 허기를 느꼈다. 제이가 가져온 피자는 내가 키보드와 리모콘을 애무하는 동안 식어 있었다. 하지만 맛있었다. 맥주병 밖으로 이슬이 맺힐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움직여야 했다. 맥주는 잊기로 했다.

회사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아이디와 비밀 번호는 여전히 유효했다. 제이는, 아니 아버지와 회사는, 나라는 카드를 아직 버리지 않은 것 같았다. 더 쓰임새가 있어 이용하기 위해 놓아둔 것임에 틀림없었다. 필요한 정보를 확인한 후 랩탑을 끄고 차가운 물에 샤워했다. 9월말인데도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머리를 감았지만 면도는 하지 않았다. 정말 뒷머리가 제법 자라 있었다.

나는 짙은 노란 색이 들어간 뿔테 안경을 끼고 자주색 폴로 셔츠와 스트레이트 블랙진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지하철역까지 걷는 동안 숨이 막힐 듯 덥지는 않았지만 겨드랑이와 등에서는 땀이 났다. 더운 가을. 여름과 다를 바 없는 가을. 올 가을은 류와 함께 사라진 것일까.

광화문역에서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을 때 40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교보의 핫트랙스와 인문 서적 코너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때웠다. 프랑스 문화원에서 영화를 즐겨 보던 대학 시절에는 틈틈이 교보에 들러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지만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서 오프라인 서점에 나가는 것이 귀찮아졌다.

미행이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을 확인하며 교보를 나와 신문사 앞에 도착한 것은 진의 퇴근 시간 10분전이었다. 간단한 해킹을 통해 침입한 신문사 인트라넷의 근무 스케줄에 의하면, 오늘 진은 정시 퇴근이었다. 나는 신문사 건물을 등지고 정문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체크했다. 이미 회사의 인트라넷을 통해 신문사 내부 CCTV의 영상을 보고 진의 옷차림을 확인했기 때문에 뒷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진의 옷차림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녀의 뒤에서 삽입했을 때 그녀의 발목부터 매끄러운 잔등, 깊이 파인 쇄골과 노란 생머리까지 실루엣을 완벽하게 각인시켜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실루엣과 살결의 촉감을 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끈적한 상상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 죽은 친구를 위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15분쯤 기다렸을 때 단아한 검정색 스커트 정장을 입은 풍성한 긴 머리의 진이 나왔다. 그녀의 다리는 무릎 뼈가 옆으로 튀어 나오지 않고 곧게 뻗은 일자여서 보기 좋았다.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덕수궁 방향으로 걷더니 시청역 1번 출구로 들어가 플랫폼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어도 확실히 그녀는 주목을 끌 만큼 객관적으로 예뻤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알고 지내던 여자들 중에 객관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진을 제외한다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동시에 미행이 없는지 주의했다.

그녀가 1호선 인천 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을 때 나는 천천히 옆문으로 탔다. 열차가 지하 서울역에서 남영역으로 나가며 1,500볼트의 직류에서 25,000 볼트의 교류로 전환되어 형광등이 꺼지고 관성으로 운행하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도에 관심 있으세요?”

“아뇨... 어?”

진은 놀랐지만 반가워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원망과 두려움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다.

“오늘은 또 뭐죠? 어제는 날 죽일 것처럼 그러더니.”

“예?”

“어, 머리하고 수염이... 변장했어요?”

“아뇨. 전혀요.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된다고 화낼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이에요? 어제 나한테 전화해서 회사 앞 스타벅스로 불러내고는, 정장 입고 와서, 더 이상 캐면 죽이겠다고 했잖아요?”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창 밖을 보았다. 열차는 한강철교를 건너고 있었다. 흉물스런 건물이 들어선다는 노들섬을 바라보며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내립시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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