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200X년 9월 15일

복도에서 원을 보았다. 여전히 혼자였는데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인사를 하지도 않았지만 교회 사건 이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과는 달리 오늘만큼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쳐 지나갔다.

수업을 들을 때에도 내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반드시 그녀를 손에 넣고야 말겠다.[[/I]]

수화기에서는 백 스트리트 보이즈의 ‘애즈 롱 애즈 유 러브 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는 미리 팀장에게 말해 빌린 소나타를 공터에 세웠다. 핸드폰을 열고는 한 달 전에 입력했지만 처음으로 써먹는 번호로 전화했다. 동네는 서울 시내에 아직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개발이 덜 되어 고즈넉했다. 소나타의 보닛에 왼손을 얹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 스트리트 보이즈의 노래가 들려오는 그 순간 조는 시간이 멈춰진 채 영원히 화석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이미 학년 초에 조는 3학년 학생들의 학번과 집 주소, 이메일 주소와 핸드폰 번호가 적힌 주소록을 받았다. 과대표가 1학기 개강 후 3주후에 나눠준 것이었다. 조는 주소록을 받으며 과연 쓸모가 있을지 의문스러웠지만 그래도 호텔의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 무엇이든 버리지 않고 보관해둔 장소를 기억해둔다면 쓸모가 생기는 법이다. 스릴러 영화 속 주인공이 초반부의 사소한 단서로 큰 사건을 해결하듯이 말이다. 인간의 삶이란 끝없는 스릴러와 같은 것이다.

조가 주소록을 꺼내 원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한 것은, 시계를 통해 원의 모습을 훔쳐보기 시작한 자신을 긍정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집 주소를 참고로 도서관에서 1:50,000 지도책을 꺼내 원의 집 위치를 확인했다. 사실 조는 사무실의 컴퓨터를 이용하면 편하게 원에 대한 모든 신상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아마 원의 집의 시간별 수도 사용량이나 선호하는 TV 프로그램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꺼림칙해 진작부터 그 방법은 포기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심연으로 가라앉아 가는 조를 건져 올리는 듯한 원의 목소리. 조가 원의 목소리를 전화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는 차분한 원의 목소리가 좋아 성우를 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는 자신의 이름을 댔다. 원은 한참 있다 반응했다.

“...안녕하세요.”

“아아, 안녕하지. 여기 공터야. 슈퍼마켓이 있고 바로 옆에는 문방구. 그리고 옆에는 세탁소. 두산 건설이 짓고 있는 아파트 건설 현장. 그러니까 원의 동네라는 거지.”

“예?”

“만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 나와 줄래?”

그녀는 다시 말이 없었다. 조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다가는 영원히 듣지 못할 것 같아 기다리고 있을게, 라고 말한 후 끊었다. 상대방의 우유부단함을 이용하는 강경한 수단. 조는 긴장을 풀기 위해 엔니오 모리꼬네의 ‘언터쳐블’의 오프닝 크레딧에 나오는 메인 타이틀을 흥얼거렸다. 갱이 있고 수사관이 있다. 카포네는 연방수사관 네스를 막으려 하고 네스는 목숨을 걸고 카포네를 검거하려 한다. 동료가 무참히 죽어도 네스는 포기하지 않는다. 카포네는 네스를 감옥에 넣는데 성공한다. 단순 명료한 이분법의 세상. 세상이 그렇게 단순명료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자가 우리 동네로 나를 만나러 오는 일 따위는 생길 리 없어. 괜찮아.

평소 화장을 하지 않는 원인데 나오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여자들이란 원래 그러니까. 조는 차 안에서 기다리다 두근거림을 가눌 수 없어 차 밖으로 나와 선글라스를 썼다. 당황한 눈빛을 보여주지 않는 데에도 안성맞춤이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원이 나타났다. 조는 사선에 목표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수처럼 거리가 적당히 좁혀질 때까지 최대한 기다렸다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원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학교가 아닌 공간에서 만나는 원은 색다른 데가 있었다. 학교에서 보여주는 정갈한 모범생의 이미지와는 분명 달랐다. 팔짱을 끼고 목을 집어 잔뜩 움츠린 채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조를 바라보았다. 조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안 될 거라 생각했다.

“타.”

조는 그렇게 말한 후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원은 조수석에 앉았다. 조는 시동을 걸고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왔다. 원은 흘끔흘끔 차 안과 조를 번갈아 둘러보았다.

“내 차는 아냐. 아버지 차쯤이라고 해두지. 부잣집 아들은 아니라고. 운전면허 있어?”

“아뇨. 따고 싶다는 생각도 안했어요.”

“하긴 나도 그랬어. 군대에서 면허를 땄거든.”

주마등처럼 훈련소와 후반기 교육이 떠올랐다. 제이와 만나고 회사에 소속되기까지의 시간들.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그 시절에 대해 말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원에게 말하기 부적절한 화제이기도 했다.

조가 엄혹했던 후반기 교육을 떠올리는 동안 화제가 끊겼다. 지도를 통해 익히긴 했지만 실제 와보는 것은 처음이었고 옆에 원이 타고 나서는 더욱 긴장되었다. 헤드 유닛에도 CD를 걸지 않아 한동안의 침묵에 원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볼 여유도 없이 조는 운전에만 집중했다. 10여분이 흐른 후 천호대로에 차가 올라섰을 때 조는 다소 여유를 찾았다.

“영화 좋아해?”

“네.”

“어떤 영화를 좋아해?”

“선배는요?”

원은 고개를 45도 돌린 채 조에게 되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스릴러, 갱스터, 느와르야. 다 비슷비슷하지. 뒤통수를 맞은 듯 치밀한 반전이 돋보이는 스릴러, 법과 질서, 경찰뿐만 아니라 보스와 동료까지 적으로 돌린 채 파멸하는 갱스터, 질척거리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다 결국 패배하는 느와르... 결국 사는 건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원은 아무 말 없이 조를 빤히 쳐다보았다. 부연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보다는 실패와 더 가깝잖아. 성공은 쉽게 잊혀지지만 실패는 잊혀지지 않는 법이고. 나도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그런 장르의 영화에 끌리는 걸지도 몰라. 원은 어때? 그 나이 또래 여자들은 로맨틱 코미디나 멜러 영화 좋아하잖아?”

“눈물 짜는 멜러 영화는 싫어요. TV에서 해주면 울면서 보긴 하는데 극장까지 찾아가서 보지는 않구요... 칼싸움하는 영화 좋아요.”

“칼싸움? 이를테면...?”

“아, 『13번째 전사』 같은 영화요.”

“『13번째 전사』? 존 맥티어난 감독,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

“예. 다 기억하시네요?”

“공부는 못했는데 쓸 데 없는 건 잘 기억해. 음, 나도 『13번째 전사』 좋아해. 막상 보니까 진짜 주인공은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아니라 족장 불바이 역의 블라디미르 쿨리치였어.”

“예, 맞아요. 사실 겁이 많아서 칼싸움 장면이 나오면 부들부들 떨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니까요.”

조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며 떨고 있는 원의 작은 몸집과 앳된 표정을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어느새 차는 올림픽 대교를 시원스레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 가는지 여쭤 봐도 되요?”

“아, 이제 다 왔어.”

조는 올림픽 공원을 끼고 가다 유턴을 한 후 레스토랑 앞에 세웠다. 주차장에서 넥타이를 맨 20대 중반의 남자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띠고 열쇠를 받아 발레 파킹했다. 원은 세련된 7층짜리 건물과 건너편의 공원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았다. 조는 레스토랑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고 원도 뒤따라왔다.

“이 동네 처음이야?”

“네, 쭉 강북에만 살아서...”

조는 원이 먼저 들어가도록 뒤로 물러났다. 입구에서 기다리던 말쑥한 차림의 웨이터가 문을 열어주었다. 원은 미소 지으며 들어갔다. 조는 웨이터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고 웨이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의 예약석으로 안내했다. 웨이터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를 뒤로 빼며 원을 앉혔다. 원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으로 레스토랑 내부의 풍경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절제된 선과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의 동양적이면서도 심플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이런 데 자주 오세요?”

“설마... 아르바이트 관련해서 온 적이 있었어.”

“아르바이트요?”

“응, 아르바이트....”

원은 아르바이트와 관련해서 궁금해 했지만 조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조는 원이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다. 조는 이곳에 전역 회식을 위해 팀원들과 함께 왔었다. 이곳에서 정은 연어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아가씨가 있는 술집으로 갔어야 했다고 투덜거렸었다.

스트라이프 스커트 정장을 입은 웨이트리스가 테이블 앞에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았다.

“혹시 못 먹는 고기 있어?”

“네, 돼지고기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럼 소고기는 괜찮지?”

“예.”

조는 메인 디시로는 둘 모두 송아지 스테이크를 시키고 조는 양파 수프와 아스파라거스 샐러드를, 원은 게살 크림 수프와 자연 송이를 곁들인 양상치 샐러드를 주문했다. 둘은 수프와 샐러드가 나오는 동안 말없이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였다. 원은 깨작거리는 것처럼 천천히 먹었지만 남기지는 않았다. 평소 음식을 빠르게 먹는 편인 조는 원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신경쓰며 천천히 씹었다. 스테이크가 나왔을 때 비로소 조는 입을 열었다.

“송아지 스테이크 먹어 본 적 있어?”

“아뇨.”

“쇠고기하고 똑같아. 보다 부드러운 것뿐이지.”

원은 나이프로 고기를 썰어 입에 넣고 조심스레 씹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묘한 표정이었다.

“괜찮아?”

“네, 부드럽고 맛있어요. 그런데 제가 치아 교정중이라...”

“아, 참, 그렇지. 그 생각을 못했네. 어디 죽 잘하는 데로 갔어야 했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치아 교정한 지는 얼마 안 됐어?”

“네, 처음 했을 때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울었어요. 너무 아파서요.”

조는 작고 귀여운 원이 하루 종일 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아팠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원에게 성큼 다가가 와락 안아주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조는 신용 카드로 결제했다. 원은 세 걸음 떨어진 뒤에서 조가 결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음식값을 지불할 때 뒤에서 지켜보는 원의 모습에 남자친구가 없으며 사귄 적도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남자와 데이트를 많이 해본 여자는 남자가 음식값을 치룰 때 아예 밖으로 나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영수증에는 노란 포스트잇에 색연필로 집 모양을 그리고 색 볼펜으로 글씨를 쓴 메모가 들어있었다. ‘맛있는 식시되셨어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라며 웃는 모양의 이모티콘까지 있었다. 조는 원에게 포스트잇을 보이며 말했다.

“이것 봐. ‘식시’래. 시체를 먹는다는 뜻인가?”

조의 농담에 원은 치아교정기에 신경 쓰지 않고 이를 드러내고 까르르 웃으며 조의 팔꿈치를 툭 쳤다. 조도 원을 보며 웃었다. 원의 그 미소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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