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집으로 돌아와 겉옷을 벗어 던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들고는 소파에 누웠다. 케이블 TV의 뉴스 채널을 볼까 하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종이 신문을 보지 않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케이블 TV의 뉴스 채널을 틀어놓아야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문기 의원 건 뿐만 아니라 일주일 전의 권중호와 그 일당을 말살한 건 이후에 뉴스를 보는 일이 두려워졌다. 물론 진이라는 여기자가 쓴 ‘박문기 의원의 죽음에 관한 의문’ 이후에는 회사에서 제법 힘을 썼는지 권중호 일당에 관한 기사는 모두 조폭 간의 세력 다툼으로 규정하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일간지나 TV보다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타블로이드판 주간지와 지하철 무가지들이 열심히 다뤄주어 연예인 스캔들 수준으로 치부되었지만 그래도 뉴스를 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소파에서 잠이 깼을 때 깜짝 놀라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여기자와의 약속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한 다음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하고 애프터쉐이브와 로션을 발랐다. 기분을 전환하는 의미에서 CK의 이터니티도 뿌렸다. 이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없지만 기억할 수는 있다. 소나기 뒤의 늦여름 저녁과 같은 상쾌하고도 가벼운 향기. 원과 처음 만났던 때에만 하더라도 이터니티의 향을 맡을 수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원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뒷맛이 개운치 않을 뿐이다.
보라색 반팔 티셔츠에 아끼는 흰색 재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해가 많이 길어졌다. 이제 여름이 멀지 않았다. 아파트 주위에는 늦봄을 즐기며 뛰노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뜰의 녹음과 이터니티의 향을 맡기 위해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지만 아쉽게도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광화문역에 내려 지상으로 나왔을 때 해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평소와 달리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약속 장소인 카페로 걸어갔다. 카페에는 여자 혼자 있는 테이블은 없었다. 나는 창가에 앉았다. 소파는 사람들의 손때를 탔고 적당히 푹신거렸다. 혹시 몰라서 권총을 홀스터에 넣어 오기는 했지만 양손이 자유롭고 싶어서 일부러 가방은 들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때울 만한 것은 없었다. 큰 볼륨으로 가요가 나왔지만 도통 누구의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가요 따위를 듣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약속 시간인 정각을 조금 넘었지만 여기자로 보이는 여자는 창밖을 보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날씨가 더워져 여자들의 옷차림은 가벼워 보였다. 미니스커트와 슬리브리스 차림의 시원해 보이는 여자들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문득 원이 올해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점심 때 나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 나는 조금 더 여유롭지 못했을까. 사람을 죽이는 일에조차 침착한 내가 왜 사랑하는 여자에게만 평정심을 잃고 마는 것일까. 어린애 같은 후회가 들 무렵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나의 상념을 날려버렸다.
카페의 통유리 윈도우 밖으로 새까만 가와사키 바이크가 날렵하면서도 난폭하게 멈췄다. 역시 번쩍거리는 검정색 헬멧 밖으로 샛노란 긴 머리가 출렁거렸다. 헬멧을 벗은 여자는 허리에도 못 미치는 짧은 재킷과 초미니 스커트, 그리고 부츠까지 모두 검정색으로 통일해 입었다. 머리카락을 제외한다면 검정색이 아닌 부분은 달라붙은 스판 티셔츠뿐이었는데 의외로 티셔츠는 깊이 파이지 않았으며 새빨간 색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듯한 스타일의 여자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카페에 들어와 주저 없이 내 앞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놀라셨군요? 어떻게 제가 알아 맞췄는지.”
“...네.”
이성과 육감이 모두 마비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하하하. 간단하죠. 이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는 아저씨 밖에 없었거든요?”
“아저씨라뇨? 고작 스물아홉 밖에 안 먹었어요.”
“어휴, 저하고 여섯 살이나 차이나네요. 그럼 아저씨 맞죠.”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바이크 정말 멋진데요.”
나는 화제를 애써 전환했다. 단번에 일 이야기를 하는 건 무리니까 천천히 일에 가깝게 화제를 접근시키는 방법이다.
“그렇긴 한데, 우리 팀장은 제가 기자답지 않다고 맨날 혼내요. 추레하고 촌티 나는 스테레오 타입의 기자. 그런 거 난 딱 질색이에요. 덕분에 다른 기자들하고 친하기 어렵지만...”
“흠.”
그녀는 가쁜 숨을 고르며 종업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종업원은 그녀의 바이크를 카페 뒤쪽에 주차시키겠다며 열쇠를 받아갔다. 그녀는 이 집의 단골인 것 같았다.
“참, 계획에 대해 알려주실...”
엄청난 폭발음과 카페의 통유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카페 안쪽으로 세차게 밀며 함께 엎드렸다. 등에 유리 조각이 박혀 쓰라린 고통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던 종업원의 사지는 흉물스럽게 찢겨져 사방으로 널려있었다.
“보지 말아요!”
그녀는 너무 놀라 새하얗게 질린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지만 말을 하기는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무릎을 꿇은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 안팎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종업원 이외에도 죽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반경 10m 이내에 제 정신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페에서 이대로 밍기적거리면 위험했다.
“어서!”
왼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와 카페를 등지고 달렸다. 예상대로 이쪽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드는 검정색 중형 승용차가 있었다. 승용차 밖으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상체를 내밀었다. 그의 손끝에서 머신 건 총구가 빛났다. 나는 그녀를 어깨로 밀면서 오른손으로 권총을 뽑아 승용차의 앞바퀴를 겨냥하고 발사했다. 한 발이면 충분했다. 승용차는 통유리가 날아간 카페 안으로 굉음과 마찰음을 내며 사라졌고 더욱 큰 폭발이 카페를 집어 삼켰다. 낼름거리는 검붉은 불길과 함께 연기가 치솟았다. 그녀는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
“까악! 내 바이크! 오늘 산 건데!.”
소파에서 잠이 깼을 때 깜짝 놀라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여기자와의 약속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한 다음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하고 애프터쉐이브와 로션을 발랐다. 기분을 전환하는 의미에서 CK의 이터니티도 뿌렸다. 이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없지만 기억할 수는 있다. 소나기 뒤의 늦여름 저녁과 같은 상쾌하고도 가벼운 향기. 원과 처음 만났던 때에만 하더라도 이터니티의 향을 맡을 수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원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뒷맛이 개운치 않을 뿐이다.
보라색 반팔 티셔츠에 아끼는 흰색 재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해가 많이 길어졌다. 이제 여름이 멀지 않았다. 아파트 주위에는 늦봄을 즐기며 뛰노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뜰의 녹음과 이터니티의 향을 맡기 위해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지만 아쉽게도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광화문역에 내려 지상으로 나왔을 때 해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평소와 달리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약속 장소인 카페로 걸어갔다. 카페에는 여자 혼자 있는 테이블은 없었다. 나는 창가에 앉았다. 소파는 사람들의 손때를 탔고 적당히 푹신거렸다. 혹시 몰라서 권총을 홀스터에 넣어 오기는 했지만 양손이 자유롭고 싶어서 일부러 가방은 들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때울 만한 것은 없었다. 큰 볼륨으로 가요가 나왔지만 도통 누구의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가요 따위를 듣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약속 시간인 정각을 조금 넘었지만 여기자로 보이는 여자는 창밖을 보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날씨가 더워져 여자들의 옷차림은 가벼워 보였다. 미니스커트와 슬리브리스 차림의 시원해 보이는 여자들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문득 원이 올해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점심 때 나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 나는 조금 더 여유롭지 못했을까. 사람을 죽이는 일에조차 침착한 내가 왜 사랑하는 여자에게만 평정심을 잃고 마는 것일까. 어린애 같은 후회가 들 무렵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나의 상념을 날려버렸다.
카페의 통유리 윈도우 밖으로 새까만 가와사키 바이크가 날렵하면서도 난폭하게 멈췄다. 역시 번쩍거리는 검정색 헬멧 밖으로 샛노란 긴 머리가 출렁거렸다. 헬멧을 벗은 여자는 허리에도 못 미치는 짧은 재킷과 초미니 스커트, 그리고 부츠까지 모두 검정색으로 통일해 입었다. 머리카락을 제외한다면 검정색이 아닌 부분은 달라붙은 스판 티셔츠뿐이었는데 의외로 티셔츠는 깊이 파이지 않았으며 새빨간 색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듯한 스타일의 여자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카페에 들어와 주저 없이 내 앞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놀라셨군요? 어떻게 제가 알아 맞췄는지.”
“...네.”
이성과 육감이 모두 마비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하하하. 간단하죠. 이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는 아저씨 밖에 없었거든요?”
“아저씨라뇨? 고작 스물아홉 밖에 안 먹었어요.”
“어휴, 저하고 여섯 살이나 차이나네요. 그럼 아저씨 맞죠.”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바이크 정말 멋진데요.”
나는 화제를 애써 전환했다. 단번에 일 이야기를 하는 건 무리니까 천천히 일에 가깝게 화제를 접근시키는 방법이다.
“그렇긴 한데, 우리 팀장은 제가 기자답지 않다고 맨날 혼내요. 추레하고 촌티 나는 스테레오 타입의 기자. 그런 거 난 딱 질색이에요. 덕분에 다른 기자들하고 친하기 어렵지만...”
“흠.”
그녀는 가쁜 숨을 고르며 종업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종업원은 그녀의 바이크를 카페 뒤쪽에 주차시키겠다며 열쇠를 받아갔다. 그녀는 이 집의 단골인 것 같았다.
“참, 계획에 대해 알려주실...”
엄청난 폭발음과 카페의 통유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카페 안쪽으로 세차게 밀며 함께 엎드렸다. 등에 유리 조각이 박혀 쓰라린 고통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던 종업원의 사지는 흉물스럽게 찢겨져 사방으로 널려있었다.
“보지 말아요!”
그녀는 너무 놀라 새하얗게 질린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지만 말을 하기는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무릎을 꿇은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 안팎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종업원 이외에도 죽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반경 10m 이내에 제 정신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페에서 이대로 밍기적거리면 위험했다.
“어서!”
왼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와 카페를 등지고 달렸다. 예상대로 이쪽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드는 검정색 중형 승용차가 있었다. 승용차 밖으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상체를 내밀었다. 그의 손끝에서 머신 건 총구가 빛났다. 나는 그녀를 어깨로 밀면서 오른손으로 권총을 뽑아 승용차의 앞바퀴를 겨냥하고 발사했다. 한 발이면 충분했다. 승용차는 통유리가 날아간 카페 안으로 굉음과 마찰음을 내며 사라졌고 더욱 큰 폭발이 카페를 집어 삼켰다. 낼름거리는 검붉은 불길과 함께 연기가 치솟았다. 그녀는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
“까악! 내 바이크! 오늘 산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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