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클어진 마음을 애써 억누른 지루한 낮과 저녁을 보내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 올림픽 대교를 건너 남부 순환로를 탔다. 자정이 넘은 남부 순환로에는 차가 드물었다. 제한 속도 70km의 남부 순환로의 과속 단속 카메라 위치를 잘 알고 있어서 기분도 전환할 겸 100km를 넘는 속도를 냈다.

인간이 시속 세 자리 수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50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개인이 자유로이 도로를 운행하는 자동차가 아니라 정해진 철로 위를 달리는 철도를 이용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자동차 시속 100km는 우습다. 고속철도는 시속 300km를 달린다. 그래도 인간은 아직 속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마샬 맥루한은 랄프 왈드 에머슨의 싯구를 인용해 ‘매체는 인간의 연장’으로 ‘자동차는 다리의 연장’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빨라진 속도 덕분에 인간이 행복해진 것일까. 만약 자동차 따위가 없었다면 인간은 주변 사람들의 위협에만 충실히 대비하면 되었을 것이다. 살해당하는 자도 암살자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이사르처럼 말이다. 하지만 교통 기관의 발달 덕분에 케네디처럼 자신이 누구에게, 어떻게 죽는 것인지조차 모르고 죽어간다. 죽는 순간,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나는 죽음을 직시하고 싶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발광체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속도를 줄일 수 없었고 빛은 차바퀴 아래로 깔려 들어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 핸들을 거쳐 양 손과 척추를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고양이를 치인 것이다. 80km 정도로 떨어졌던 속도를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다시 100km로 끌어올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조. 괜찮을 거야”

차도 위에서 개나 고양이, 비둘기와 같은 동물을 발견했을 때 어설프게 급브레이크를 밟거나 옆 차선으로 피하다가는 대형 사고가 날 수 있다. 바퀴와 바닥이 고양이의 피와 살 조각, 뼈 등으로 지저분하겠지만 내가 죽는 것보다는 낫다. 백미러에 비친 내 표정에는 불안의 빛이 역력했다.
  
도곡동 주상 복합 아파트 주위의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린 다음 전조등을 껐다. 어두워진 차의 운전석에서 나이프의 수납과 총의 장전 상태를 확인하고는 양말을 추켜올렸다.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귀를 때렸다. 차에서 나와 운전석을 잠근 것을 두 번 확인한 후 70m 정도를 걸어 아파트 입구에 도달했다. 경비원은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지만 나는 그를 쳐보다지 않는 척하며 지문 인식기에 손가락을 찍은 다음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모든 것은 제이와 회사에서 준비한 대로였다. 워낙 지체 높거나 유명한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지문과 비밀 번호 입력에 문제가 없다면 경비원은 말을 걸거나 아는 척 하지 않는다. 이곳의 입주자의 사생활과 방문자에 대해 경비원이 일일이 아는 척을 하다가는 스포츠 신문과 인터넷은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의 스캔들로 포화상태를 이루게 될 것이다. 내 모습이 CCTV에 찍히겠지만 일을 마치고 나오면 녹화 내역을 회사에서 즉시 삭제할 것이다. 유명한 사람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지 않고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을 회사 직원들에게 내가 긴장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41층에 내려 중진의 집으로 향했다. 결코 빨리 걷거나 반대로 멈추지 않고 천천히, 그것도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며 귀에 신경을 집중해 박 의원의 집안에서 나오는 소리나 기척을 확인했다. 회사에서 준비한 대로 손잡이를 돌리는 것만으로 현관문이 열렸다. 현관의 등은 꺼져 있었다. 나는 안도했다. 소리 없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인간은 아니었다. 숨죽인 나는 그것이 네 다리가 길고 허리를 곧추 세운 우아한 그레이하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지만 귀족적인 이 녀석은 잘 짖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별안간 핸드폰에서 문자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놀란 그레이하운드가 컹, 하고 짖었다. 나는 양말 속의 나이프를 그레이하운드를 향해 던졌고 나이프는 녀석의 목에 부드럽고 깊숙이 박혔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레이하운드는 모로 쓰러졌다.

“누구세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 동시에 현관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다급하게 왼쪽 옆구리의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부인의 명품 홈드레스의 허벅지를 관통한 총탄이 원목 마룻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룻바닥은 허벅지 뒤쪽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벌써부터 흥건해져 있었다. 부인은 악, 비명을 지르며 피범벅이 된 허벅지를 감싸 쥐려 했다. 머리나 가슴이 아니라 허벅지를 맞춘 이 순간 아마도 내 얼굴은 평정심을 잃고 꼴사납게 찌푸려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소음 권총은 늘 그렇듯 부인의 머리와 명치를 정확히 피로 물들였다.

“헉!”

아내의 비명에 뛰어나온 박 의원은 회색 치노 바지와 카키색 브이넥 스웨터 차림으로 오른손에는 파일을 들고 있었다. 지체 높은 분은 집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집에 혼자 있으면 때에 전 반팔 면 티셔츠와 고무줄이 망가져 흘러내리는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인데 말이다.

“자네는...!”

박 의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나는 가슴에 두 발, 이마에 한 발을 명중시키며 트리플 텝을 밟았다. 그는 오른팔에 쥐고 있던 파일을 떨어뜨리며 쓰러졌다. B4 크기의 파일에는 ‘B4’라고 씌어져 있었다. 급하게 뛰어나오면서도 파일을 들고 나온 것이 이상해 손을 뻗어 파일의 내용을 보려는 순간 집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는 현관 바로 앞의 서재 입구에 몸을 붙이고는 숨을 죽였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팀의 처리가 벌써 시작된 것일까,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내 이마를 향하는 총구를 느끼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귀를 찢는 소음기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나는 나이프를 꺼내 녀석의 정강이를 그었다. 톱니 모양의 나이프 날이, 살이 거의 없는 정강이뼈를 두둑, 하고 긁는 느낌이 오른손에 울렸다. 훅, 하는 단말마와 함께 녀석은 쓰러졌다. 녀석의 권총을 오른발로 멀리 차버린 후 소음 권총을 꺼내 가슴을 쏘았다. 얼굴이 어떻게 생긴 녀석인지 보고 싶어서 이마에는 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눈동자를 현관문 쪽으로 향해 들어오는 사람이 더 없는지 확인했다. 더 이상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나는 축 늘어진 총잡이를 보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검정색 정장에 검정 구두, 깨끗이 발라넘긴 머리까지 정부 일을 한다는 것을 광고하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아디다스 스니커와 첼시의 트레이닝 재킷 차림의 나와는 여러모로 대조되는 총잡이였다. 사람 하나만 처리하면 될 걸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세 명에 개 한 마리까지 제이의 자료가 지나치게 어긋났다. 고양이까지 생각하면 예외로 가득 찬 날이었다. 하긴 사람일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 그것이 고통을 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재미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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