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END - 작가 : 레가드(kasi)
글 수 80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메모리 스틱을 USB 포트에 연결했다. 대상을 확인했을 때 본능적인 불쾌감이 엄습했다. 60대 초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올린 낯익은 남자가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를 받으며 활짝 웃는 사진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사진의 주인공 옆에는 9시 뉴스의 헤드라인을 일주일에 세 번 장식하는 사내가 서있었다. 대통령이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자가 된 현 대통령과 여당의 실세 중진인 박 의원이 기자들 앞에서 악수하며 포즈를 취한 사진이었다. 이 사진과 영상을 신문과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어디선가 이미 본 인물을 제이에게서 받은 메모리 스틱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처리했던 대상 중에 제이에게 자료를 받기 이전부터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대상은 정치에 무관심한 나조차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늘 그렇듯이 제이의 메모리 스틱에는 대상이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 같은 것은 없었다.
현 대통령은 3년 전 대통령 선거 당시 당내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국민 경선에서 승리는 요원해보였다. 여당 국회의원 중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그는 지방 선거에서조차 패해 원외에 머물고 있는 장외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당내 중진이었던 박 의원이 그에게 가장 먼저 지지를 선언했고, 인터넷 팬클럽이 대대적으로 바람몰이를 하면서 지지도의 급상승에 힘입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인터넷 팬클럽이 표를 몰아주었다면, 박 의원은 그가 경선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자금과 조직을 대주었다. 아무리 네티즌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더라도 박 의원의 지지가 없었다면 경선 선거 운동조차 할 수 없었기에 박 의원의 기여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 박 의원은 당직을 맡거나 입각하지 않았지만 청와대 비서실과 내각, 여당의 주요 당직은 박 의원의 계보로 채워졌다. 정권 최고의 실세가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그런데 박 의원이 지금 내가 처리할 대상이 된 것이다.
나는 지난 대상이었던 제약회사 중역 김승수가 박 의원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정치 자금이 오간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대상이 얼마나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순전히 내 일에 관련된 예외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우선 일의 간격이 매우 좁았다. 보통 2-3주에 한번씩 대상을 처리하며 일했지만 이번 일은 지난 일에서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하나의 사건에 연관된 대상들을 연속으로 맡기는 것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 회사에는 개인적으로 일하는 요원들이 다수 있어서 내가 한 사건에 관련된 대상들을 연이어 처리하는 경우는 없었다. 직감적으로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많이 바빠질 것이라는 제이의 말이 떠올랐다.
창 밖의 강변북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미끄러지듯 무심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아마도 차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살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미래가 없는 초로의 남자의 생사의 향방과는 무관하게 한강은 흐르고 있었다. 주변 건물들과 올림픽 대교,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반사하는 시커먼 한강은 죽음의 빛을 띠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에는 마루와 방, 부엌의 먼지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정성스레 닦았다. 400장 정도 수집한 DVD 장식장도 먼지를 털고 훔쳤다. 집안이 깨끗해지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버석거리며 맨발바닥을 건드리는 마룻바닥의 먼지와 흉하게 널부러진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깔끔해졌다. 원의 긴 머리카락도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도 내 집에 머리카락이 나뒹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걸레를 베란다의 세탁기 앞에 던져두고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자 미리 앉혀둔 전기밥솥이 휘파람 소리를 냈다. 깨끗이 물기를 털어내고 온 몸에 바디 로션을 바른 다음, 속옷과 티셔츠,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낮에 장을 봐둔 살치살을 구웠다. 9시 뉴스는 봄을 맞아 가족 단위의 인파가 공원과 고속도로를 메웠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하얀 쌀밥에 부드럽게 익은 고기와 쌈장, 무순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가벼운 반주라도 곁들이고 싶었지만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 참기로 했다. 내일 밤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 샤워하고 맥주를 마시면 된다. 배가 고프면 24시간 피자집에 주문하면 된다.
설거지를 마친 후 나는 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 중이었다.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지만 괜히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 통화해 원과 다투기라도 하면 내일 일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더 이상 전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자 친구조차 거의 없는 원에게, 이 밤중에 전화를 걸어대는 건 도대체 누구인지 의문을 떨치지 못한 채 나는 ‘터미네이터’의 DVD를 플레이어에 걸었다. 기독교적 메시아 사상과 B급 SF 영화의 절묘한 조화. 하지만 주제의식보다는 완벽한 킬러 터미네이터가 부러웠다. 그가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터미네이터라면 중요한 임무를 앞둔 전날 여자친구 때문에 마음을 쓰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아침이 되자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찜찜한 기분은 그런대로 떨칠 수 있었다. 인간은 무엇이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일이 있는 날은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때문에 일하러 가기 전에 외출하지 않는다. 제이가 준 자료를 꼼꼼히 살피며 동선을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반복해 그리며 어디쯤에서 총을 발사하고 어떻게 돌아 나올지 다양한 상황을 시나리오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제이의 자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서 몇 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해두면 그 이상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약속된 장소에 가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상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LCD 모니터로 박 의원의 주상복합 아파트의 집 앞 동선을 확인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조금 놀란 나는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 폴더를 열고 귀에 댔다.
“뭐했어?”
원이었다.
“글쎄.”
오래 사귀면 말투마저 닮는 법이다. 그녀와 처음 사귈 때에는 모호한 말투가 싫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 말투를 닮아갔다.
“나 오늘 학원 안가.”
학원에 가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좋아. 우리 놀러 가자.’라는 대답을 원했던 것이 분명한 그녀는 나의 침묵의 의미를 알 것이다.
“……”
“뭐야? 내가 지난번에 말했잖아. 토요일은 학원에서 문제 만들고 일요일에는 쉴 수 있다고 했잖아.”
“난 일요일에 시간이 안 된다고 했잖아.”
“늘 편한대로만 하지?”
“그만 좀 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원은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침대에 핸드폰을 던졌다. 4년 째 사용하고 있는 커플 간 무제한 무료 전화를 당장 없애고 싶었다.
현 대통령은 3년 전 대통령 선거 당시 당내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국민 경선에서 승리는 요원해보였다. 여당 국회의원 중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그는 지방 선거에서조차 패해 원외에 머물고 있는 장외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당내 중진이었던 박 의원이 그에게 가장 먼저 지지를 선언했고, 인터넷 팬클럽이 대대적으로 바람몰이를 하면서 지지도의 급상승에 힘입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인터넷 팬클럽이 표를 몰아주었다면, 박 의원은 그가 경선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자금과 조직을 대주었다. 아무리 네티즌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더라도 박 의원의 지지가 없었다면 경선 선거 운동조차 할 수 없었기에 박 의원의 기여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 박 의원은 당직을 맡거나 입각하지 않았지만 청와대 비서실과 내각, 여당의 주요 당직은 박 의원의 계보로 채워졌다. 정권 최고의 실세가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그런데 박 의원이 지금 내가 처리할 대상이 된 것이다.
나는 지난 대상이었던 제약회사 중역 김승수가 박 의원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정치 자금이 오간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대상이 얼마나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순전히 내 일에 관련된 예외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우선 일의 간격이 매우 좁았다. 보통 2-3주에 한번씩 대상을 처리하며 일했지만 이번 일은 지난 일에서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하나의 사건에 연관된 대상들을 연속으로 맡기는 것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 회사에는 개인적으로 일하는 요원들이 다수 있어서 내가 한 사건에 관련된 대상들을 연이어 처리하는 경우는 없었다. 직감적으로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많이 바빠질 것이라는 제이의 말이 떠올랐다.
창 밖의 강변북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미끄러지듯 무심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아마도 차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살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미래가 없는 초로의 남자의 생사의 향방과는 무관하게 한강은 흐르고 있었다. 주변 건물들과 올림픽 대교,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반사하는 시커먼 한강은 죽음의 빛을 띠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에는 마루와 방, 부엌의 먼지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정성스레 닦았다. 400장 정도 수집한 DVD 장식장도 먼지를 털고 훔쳤다. 집안이 깨끗해지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버석거리며 맨발바닥을 건드리는 마룻바닥의 먼지와 흉하게 널부러진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깔끔해졌다. 원의 긴 머리카락도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도 내 집에 머리카락이 나뒹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걸레를 베란다의 세탁기 앞에 던져두고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자 미리 앉혀둔 전기밥솥이 휘파람 소리를 냈다. 깨끗이 물기를 털어내고 온 몸에 바디 로션을 바른 다음, 속옷과 티셔츠,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낮에 장을 봐둔 살치살을 구웠다. 9시 뉴스는 봄을 맞아 가족 단위의 인파가 공원과 고속도로를 메웠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하얀 쌀밥에 부드럽게 익은 고기와 쌈장, 무순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가벼운 반주라도 곁들이고 싶었지만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 참기로 했다. 내일 밤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 샤워하고 맥주를 마시면 된다. 배가 고프면 24시간 피자집에 주문하면 된다.
설거지를 마친 후 나는 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 중이었다.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지만 괜히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 통화해 원과 다투기라도 하면 내일 일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더 이상 전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자 친구조차 거의 없는 원에게, 이 밤중에 전화를 걸어대는 건 도대체 누구인지 의문을 떨치지 못한 채 나는 ‘터미네이터’의 DVD를 플레이어에 걸었다. 기독교적 메시아 사상과 B급 SF 영화의 절묘한 조화. 하지만 주제의식보다는 완벽한 킬러 터미네이터가 부러웠다. 그가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터미네이터라면 중요한 임무를 앞둔 전날 여자친구 때문에 마음을 쓰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아침이 되자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찜찜한 기분은 그런대로 떨칠 수 있었다. 인간은 무엇이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일이 있는 날은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때문에 일하러 가기 전에 외출하지 않는다. 제이가 준 자료를 꼼꼼히 살피며 동선을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반복해 그리며 어디쯤에서 총을 발사하고 어떻게 돌아 나올지 다양한 상황을 시나리오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제이의 자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서 몇 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해두면 그 이상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약속된 장소에 가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상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LCD 모니터로 박 의원의 주상복합 아파트의 집 앞 동선을 확인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조금 놀란 나는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 폴더를 열고 귀에 댔다.
“뭐했어?”
원이었다.
“글쎄.”
오래 사귀면 말투마저 닮는 법이다. 그녀와 처음 사귈 때에는 모호한 말투가 싫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 말투를 닮아갔다.
“나 오늘 학원 안가.”
학원에 가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좋아. 우리 놀러 가자.’라는 대답을 원했던 것이 분명한 그녀는 나의 침묵의 의미를 알 것이다.
“……”
“뭐야? 내가 지난번에 말했잖아. 토요일은 학원에서 문제 만들고 일요일에는 쉴 수 있다고 했잖아.”
“난 일요일에 시간이 안 된다고 했잖아.”
“늘 편한대로만 하지?”
“그만 좀 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원은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침대에 핸드폰을 던졌다. 4년 째 사용하고 있는 커플 간 무제한 무료 전화를 당장 없애고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SF 소설을 즐겨 읽고 습작으로 쓰고 있는 연재할 곳을 찾아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암살대상이 대통령이라는데
'말도 안돼!' 라든가
'이건 불가능해!' 따위의 소리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걸 보니
진짜 프로페셔날인가 보군요.
월급은 얼마나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연애가 뭐랄까. 너무 리얼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