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녀석은 헤어지기 직전 1기가 메모리 스틱을 손에 쥐어 주며 씩 웃었다.

“앞으로 많이 바빠질 거야. 자넨 최고 수준의 킬러이니까. 이번에는 일요일이야.”

녀석이 나보다 한 수 위다. 내 성격상 일을 준다는 것을 알았으면 편안히 술을 마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하고 술이라도 편안히 먹을 수 있도록 일이 없다고 처음에 둘러댄 것이다.

청담역에서 지하철 7호선에 몸을 실은 나는 원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시간은 자정을 넘었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그녀가 잠이 들 시간이었다. 원은 학원이 밤늦게 끝나도 반드시 자정에는 잠이 들었고 아침 7시에는 일어났다. 나 같은 올빼미 타입과는 달랐다.

“잤어?”

“아니. 이제 자야지.”

“오늘 별일 없었어?”

“응.”

“교재는 많이 만들었어?”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그녀의 핸드폰에서 툭툭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 다른 전화가 온 것이었다.

“나 전화 왔다. 먼저 잘게.”

“그래, 잘 자. 사랑해.”

나는 누가 들을까봐 핸드폰의 수신부와 입을 왼손으로 감싸 쥐며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그녀에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지하 구간을 빠져 나와 청담대교를 건너는 지하철의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올림픽 대교 위의 네온 장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 장식물을 헬기로 설치하다 3명이 죽었다. 올림픽 대교의 차량을 통제하고 설치하던 와중에 장식물을 매단 와이어가 헬기에서 분리되지 않아 추락했는데 탑승했던 파일럿을 비롯한 군인 3명이 사망한 것이다. 사람이 죽는 방법도 가지가지이다. 나는 죽는 이유를 늘리지 않기 위해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그렇다고 병원의 침대 위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병원을 떠올리자 키가 큰 류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도 병원에 있을까, 아니면 퇴근해서 남편과 함께 있을까. 전화를 했다가 남편이 옆에 있다면 류가 곤란해질 수 있으므로 문자를 보냈다. ‘지금통화가능해?’

건대 입구 역에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는 순간 전화가 왔다.

“잘 지내?”

약간 비음 섞인, 부정확한 발음의 류의 목소리가 내 안부를 물었다.

“덕분에. 너는?”

“잘 지내.”

“내가 방해한 건 아냐?”

“병원이긴 한데 괜찮아, 요즘 좀 바쁘네.”

류가 전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병원에 남아 있는 덕분이었다. 류의 남편은 동갑인 나와 류보다 6살이 많은 30대 중반으로 류와 같은 병원의 의사였다. 류와 남편 사이에는 귀여운 딸이 하나 있었다.

“남편은 잘 있어?”

“몰라. 집에 아예 못 들어오는 날도 많고. 넌 어때?”

“그냥 저냥. 늘 그렇지.”

신호음이 플랫폼에 울리며 열차의 바퀴가 철로를 긁어대는 굉음이 귀를 때렸다.

“차 왔나 봐. 시끄럽다. 잘 지내. 언제 한번 보자.”

“그래. 네가 쏘면 만나주지.”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바지 주머니의 메모리 스틱을 만지작거리며 2호선 지하철의 막차에 몸을 실었다. 헤어지기 직전 제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내가 ‘최고’가 아니라 ‘최고 수준’이라고? 나보다 더 잘하는 녀석이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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