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렉스 선생님? 여긴 어디죠? 저는 지워졌나요?”

목소리는 분명 헬렌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헬렌이 말을했다면 욕부터 먼저 했을것이다.

나는 한동안 말을 못했다.

“제 프로그램 그래픽 부분의 이상인가요 아니면 외부인식 수치프로그램 이상인가요? 계속 이상한 신호들이 입력되는데 전혀 수치화 되어 있지가 않아요. 거기계신분이 알렉스 선생님 맞으신가요? 탈출하시 않으셨나요?”

온통 어둠이었다. 차라리 매트릭스 안이라면 그냥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한채 목소리만 들렸으리라....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면서 말을 시작했다.

“너는 누구지?”

“선생님 거기 계셨군요, 저는 helper 71호 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탈출 안하셨나요? 매트릭스가 다운된거 아닌가요?”

나의 질문에 들려온답은 내가 불길하게 예상했던 바 대로였고 나는 한동안 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2.
“헬렌은 어디있어?”

“저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매트릭스상에서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헬렌선생님을 만난적이 없다구요”

무의미한 문답이 계속되었다. 아마도 내가 어찌할바를 몰라 우왕좌왕 하기때문일것이다.

“그런데 네가 왜 헬렌안에 들어가 있냐구....매트릭스는 벌써 꺼져버렸고 밖에는 산성비 천지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고 그 잘난 네오는 나를 이런 이상한곳에 떨궈놓고는 자기는 매트릭스와 함께 지워져 버리고....도대체 네오가 왜 헬렌의 몸에 너를 집어넣었냐구?”

“.................”

잠시후 가늘게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또 시작이군’

“이 이해할수 없는 입력 신호들이 인간의 감각 이라는 것이군요. 그리고 여긴 매트릭스 밖이고 저는 헬렌 선생님의 몸을 빌려서 매트릭스 밖으로 나온것이군요.”

다시 어색한 침묵과 흐느낌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helper 71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원하신다면 저를 ‘헬렌’이라고 부르셔도 좋읍니다. 저 또한 제 데이터 중에 헬렌선생님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들을 불러내서 헬렌 선생님의 행동패턴을 익히고 그대로 행동하겠읍니다. 선생님이 원하신다면.....”

나는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누가 너더러 헬렌 행세하래? 매트릭스 안이든 밖이든 내 이름을 부를수 있고 네 자신의 이름을 안다면 그냥 너 자신으로서 살아. 설령 헬렌의 몸속에 들어가 있고 내가 그걸로 기분 상해도 그건 그거고 너는 너 자신이란 말이야. 혹시 그래도 헬렌 행세를 하려면 당장 내앞에서 꺼져버려”

helper 71호(헬렌 속에 들어가 있는 helper 71호라고 해야 옳지만 편의상 helper 71호라고 부르겠다.)는 계속 흐느끼면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고 나는 온몸이 쓰리고 뻐근하지만 살 방도를 찾기위해 몸을 움직였다.

“선생님 어디가시는 거죠?”

helper 71호는 당황한 듯이 나에게 물었다.

“이대로 영원히 누워있을 것도 아니쟎아? 살길을 찾아야지. 이젠 너도 ‘인간’이니까 살아남아야하고. 하지만 내가 움직이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여기 꼼짝말고 누워있어. 혹시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까.”

helper 71호도 어둠속에 홀로남겨진다는걸 두려워하는걸까? 하기는 프로그램이 울수도 있다면 다른것도 못느낀다고 할 수는 없겠지. 단지 자신이 무얼느끼느냐를 모른다고도 말할수 있을까? 그건 나중에 상황이 나아지면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helper 71호가 겁먹을까봐 일부러 크게 노래를 부르면서 주변을 더듬거리면서 이동을 했다. 밖에 빛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까 해서 일단은 빗소리가 들리는 입구방향으로 더듬거리면서 이동을 했고 다행이도 나와 helper 71호가 들어왔던 커다란 동굴 입구 가장자리에 경비 초소 같은 것을 발견할수 있었다. 다행히도 경비초소 안에서 렌턴을 발견할수 있었고 나는 그 랜턴을 켜자마자 깜짝 놀랐다. 물론 뼈만 남은 사람시체가 초소안에 누워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방 진정을 하고는 랜턴을 비추면서 helper 71호한테 갔다.

“어떻게 몸은 움직일수 있겠어? 하긴 말을 하는걸 보면 몸도 움직일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helper 71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했다.

“제가 인간의 입으로 말할수 있다는것도 이해를 할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아직 인간의 감각 신호에 익숙하지 않아서 지금 당장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 같읍니다.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하긴 helper 71호는 아직 자기가 헬렌과 섞인걸 모를테니까. 일단 나는 한손에 렌턴을 들고 다른 한팔로는 helper 71호를 부축하면서 빗소리를 등진 채 끝이 안보이는 어두운 동굴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3.
“여기는 일곱 번째 시온 예정지 이군요.”

나는 무슨소리인가 의아해 하면서 helper 71호를 보았다.

“이제야 제 데이터 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읍니다. 선생님이 탈출하시기 직전에 저는 헬렌 선생님의 몸속에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아마도 네오님이 그렇게 하신거 같읍니다. 그리고 네오님이 저를 헬렌 선생님의 몸속에 집어넣기 전에 이곳에 대한 데이터를 제게 입력하신 것 같읍니다.”

나는 속으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helper 71호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이곳 지리를 알겠네?”

“네”
helper 71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은 7번째 시온의 예정지라고 한다. 매트릭스의 메인 프로그램에 의해 6번째 시온이 멸망하고 몇몇 선택된 아이들을 이곳으로 데려온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아마도 그 선택된 아이들이 몇십년간 생존하기 위한 보급품들이 갖춰져 있을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비상통제실이 있을거고 거기에 들어가서 스위치 조작을 하면 한 1시간 정도 버틸수 있는 비상전원을 가동시킬수 있읍니다. 그러면 그 1시간 이내에 발전실로 가셔서 메인전원을 가동시키시면 됩니다.”

나는 렌턴을 들고 helper 71호를 부축하고는 helper 71호의 길안내를 받으면서 이곳의 전원을 가동시켰다. 다행히도 모든 보급품과 시설, 전원등은 helper 71호의 말 그대로였다.

단지 helper 71호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모든 통로들이 용접한 듯이 절단이 나 있었다는것과 통로마다 방마다 즐비한 사람들의 해골들일것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건 과거 기계와의 전쟁의 결과이고 helper 71호 또한 말할 필요가 없어서 말을 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명이 제대로 들어온뒤 나는 한번더 놀랐다.  helper 71호나 나나 온몸이 벌겋게 부어있어서 사람 몰골이 아니었던것이다. 나는 급하게  helper 71호에게 의무실 위치를 물어봐야했다.

4.
별장보다는 못하지만 다시 아늑한 생활이 찾아왔다.
창고에는 약간의 알콜성 음료도 있었고 군용 음식들도 이것저것 있었고 일광부족을 해소하기위한 조명장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건 식물들의 씨앗과 조명이 설치된 온실이 있어서 이 땅속 공간에서 제대로된 녹색을 음미할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씩 이곳 동굴의 출구로 나가보지만 밖은 항상 비가 왔다 그게 부슬비든 소나기든 항상 흐린날씨에 대기는 시큼한 냄새의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공기중에 시큼한 냄새를 맡을 때마다 이곳에 처음와서 비를 맞고 고생한 생각이 들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나는 비가 그치길 기대하면서 가끔 동굴 입구너머 먼하늘을 보기도 한다.

구름낀 흐린 하늘이지만 언 듯 구름사이로 파란색이 보이는 것 같았다.

5.
“자 이건 단맛이라고 하는거야, 먹어봐”

나는 설탕을 숟가락 끝에 살짝 뭍혀서  helper 71호에게 먹였다.
helper 71호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인공지능 관련 학회라도 있었으면 지금 이 광경을 보고 몇십편의 논문과 보고서를 써 제낄것이고  helper 71호를 실험대상으로하는 각종 프로젝트를 계획하면서 정부든 기업이든 프로젝트 비용을 얻어내려고 하는 사람들로 바글거렸으리라.

일단 헬렌의 의식이 지워지긴 했지만 그동안  helper 71호와 섞여서 남아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주로 감정과  관련된 부분들이고 그러한 감정들도 아주 극한 감정이 아닐경우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다음 문제는 감각이었다.  helper 71호가 매트릭스상에 있었을때는 분명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었고 게다가 매트릭스상의 모든 지표들은 수치였기 때문에  helper 71호가 생활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인간의 의식이 매트릭스상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상력 과 그 상상력이 필요로하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을 뇌파의 자극으로 바꿀수 있는 일종의 번역 프로그램이 필요했었다. (물론 사빅의 ‘교체’인간도 있었지만 그 경우는 인간의 의식을 고스란히 복제해놓고 필요한 부분만 조종해놓은것이기 때문에 감각이나 감정에 대해서는 크게 건드릴게 없었다.)

하지만  helper 71호라는 프로그램이 인간의 뇌로 들어온 경우는 모든 것을 숫자로 인식하는 존재가 감각이라는 부정확한 입력장치를 통해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감각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같은 감각도 다르게 느껴질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부분들을  helper 71호에게 설명해야하지만 당장은 설명가능한 기본적인 감각부터 가르치기로 했다. 물론 감각의 정도는 아직 불가능하고 가장 단순한 감각의 종류부터 가르치기로 한것이다.

“이걸 인간들이 말하는 단맛이라고 하는군요. 그럼 쓴맛은요?”

나는 잘되었다 싶어서 일부러 마이신 가루를 살짝 뭍혀서  helper 71호에게 주었다.
helper 71호는 마이신을 맛보자 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쓴맛이라고 하는가요? 이 감각신호는 오래 유지하고 싶지가 않군요. 이것도 고통이라고 불리는건가요? 무언가 지속되기를 중단하고자 하는 감각 신호 같은거 말이예요”

나는  helper 71호에게 물컵을 건네주었고  helper 71호는 물컵의 물을 허겁지겁 마셨다.

뭐라고 할까? 한번도 수영장 구경을 해본적 없는 사람한테 수영방법에 대한 책을 달달 외우게 하고 수영장 한가운데 빠트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허우적 댈것이다.

지금 인간의 몸에 들어온  helper 71호도 마찬가지이고 나는  helper 71호에게 입력신호 즉 감각의 명칭을 다시 가르쳐 주고 있는것이다.

처음에  helper 71호는 고통은 느끼는데 그것의 이름을 몰라서 한참 해멨었다.

언젠가는 손을 문틈에 찧었서 엉엉 울면서 내앞에 왔는데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손이 문틈사이에 찧었읍니다. 손에서 자꾸 이상한 감각 신호가 오는 것 같은데 이러한 감각신호를 계속 받아들이기가 싫어요. 어떻게 해야하지요? 이 감각 신호를 차단할 수는 없나요?”

나는 그냥 말없이 약을 발라주고 후후 불어주었다.

그러나 재미있는건 helper 71호가 감각이라는걸 하나씩 알아가면서 감각과 감정을 연결시키기도하고 상황에 따라 감각과 감정 등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더 고차원적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감각의 정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6.
나와 helper 71호가 이곳에 온지 1년이 지났다. 비는 그쳤으나 이제는 반대로 이상하게 맑은날이 계속되었다. 나무들은 이전에 내린 비의 영향으로 거의 없어졌고 동굴 입구 주변에는 거의 쓰러진 나무잔재들이 흐물흐물 하게 널려있었다.

그러나 비가 그치고 맑은 날이 몇 달동안 계속되면서 풀한포기 나지 않는게 이상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동굴밖을 나섰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원래 내가 입고 있던 옷은 진한 파란색이었는데 몇분돌아다니니까 옷의 색깔이 하늘색 가까이 변한것이다.

나는 놀라서 얼른 동굴로 되돌아왔다. 혹시 눈이 너무 부셔서 그런게 아닌가 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피부에서 하얀 가루같은 것이 일어났고 내가 입던옷은 푸석푸석해졌다.

장기간의 비가 아마도 대기권상의 오존층과 같은 보호층을 없앤것같다.
아마도 이 동굴밖에서 제대로 활동하려면 조금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일단 부리나케 샤워실로가서 샤워를 했다.

다행히도 이곳에는 지하수 펌프가 있었고 비상시를 대비한 대용량의 물탱크와 염소 소독장비도 있었다.

7.
“이게 뭐죠?”

helper 71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내 손에 들려진 것을 보고 물어보았다.

“이거? 모양은 엉성하지만 케잌이라고 하지.”

나는 과자를 엉성하게 쌓아놓은 쟁반에 큰 양초 하나를 꽂아놓고 불을 붙이고는 helper 71호에게 케잌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원래 케잌은 인간들이 태어난 날이라든지 특별한날 먹는거 아닌가요?”

“응 그래 오늘이 네 생일이잖아”

helper 71호의 질문에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helper 71호는 눈물을 글썽거렸고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제인’ 이야”

8.
“자 소원을 빌고 초를 꺼”

나는 ‘인간’을 대하듯이 ‘제인’을 대했고 ‘제인’은 어색하다는 듯이 머뭇거리면서 초를 껏다.
어쩌면 인간이나 기계나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이런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원 이라는게 ‘인간’들 사이에서는 무언가 원하는걸 이야기하는거 맞죠?”

‘제인’의 버릇은 항상 사전적인 정의를 나한테 물어본다는 것이다.

“원한다기보다는 바란다고 말해야하겠지. 당장에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무언가 좋은것들 말이야. 그런데 ‘제인’은 소원 빌었어?”

하지만 나는 한가지 실수를 했다 원래 소원을 빌면서 그 소원을 다른사람한테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안했던 것이다. 제인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했다.

“선생님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