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머니, 절 아세요?”
나는 혹시 내 기억의 일부가 지워져서 그 노파를 기억못하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그 노파에게 물어보았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면 나를 알아볼텐데.....하긴 젊은이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면 여기서 지워질 걱정을 하지 않았을텐데....아직도 나를 안건네 줄껴?”
노파는 안건네 주면 큰일날것처럼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저는 지금 지워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다구요, 할머니도 얼마 안 있으면 지워질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할머니를 걱정하는 말투로 이야기를 했으나 그 속뜻은 ‘당신이 지워지든 말든 나는 살아남아야 겠다’는 내용일 뿐이었다.

내가 말을 마치자 마자 노파는 서운하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내가 갖고 있던 볼펜을 휙 낚아챘다.  

“나 강건너주기까지는 못줘!!”

그 노파는 어찌나 힘이 세던지 내가 아무리 노파의 팔을 잡고 볼펜을 빼앗으려고 해도 볼펜을 빼앗을 수 없었다.

한동안 할머니와 씨름을 하다가 나는 체념을 하고 말을 했다.
“아~알았어요, 거 되게 이상한 할머니네.....”

나는 할머니에게 등을 건네고 할머니를 업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할머니의 몸무게가 낮익다고 할까?

2.
“옳지, 착한 젊은이구만. 그래 자자 내가 가자는데로만 가자구”
노파는 마치 아는 길인것처럼 허리까지 차오른 하얀 물길 (도대체 주변과 구분이 안되었다, 단지 내가 빠져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구분이 안되었다.)을 안내했다.
나는 노파말대로 하얀 물길을 걷다가 곰곰이 생각을 했다. 도대체 이게 누구 몸무게더라.....

“젊은이 무얼 그리 열심히 생각하는겨? 그래 이제 앞으로 한발만 더 내딛어”
나는 노파의 그한마디를 들으면서 불쑥 생각이 났다. 내가 업고 있는 사람의 몸무게가 누구의 몸무게인지....그러나 뒤돌아 보면서 말을 건네기도 전에 나는 온몸이 하얀 물 깊숙이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에이, 이제야 알았어요? 이사님? 눈치없으신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시네요. 게다가 이 볼펜, 다른여자가 준거라고 이렇게 고이 간직한거 아니예요?
하여튼 남자란 족속들은 한눈을 팔면 안된다니까....”
낮익은 목소리가 내 가슴속으로 울려퍼졌다.

노파는 어느새 헬렌으로 변해 있었고 내게 미소를 지으면서 점점 수면으로 멀어져 갔고 나는 점점 하얀 물 깊숙이 허우적 거리면서 빠져들어갔다.

3.
온몸이 뻐근했다. 마치 몽둥이로 두드려 맞은것처럼......
나는 아직도 하얀 물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허우적 거리며 눈을 떳으나 내가 있는곳은 철제 우리였다.
바로 내 옆에도 철제 우리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내 바로 앞 건너편에도 철제 우리가 다닥 다닥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철제 우리 안에는 벼라별 종류의 덩치 큰 개들이 컹컹 거리면서 목청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목이 죄어오는 것을 느꼈고 이내 목을 만졌다. 그런데 내 목을 죄고 있는 것은 바로 개 목걸이였다.

“인간들은 참 취향도 특이하군, 이젠 이런 걸 프로그램이라고 만들어 보내? 이거 불량 프로그램 아니야? 이런 모양 가지고 제대로 작동이나 하겠어? 차라리 옛날이 좋았지....”

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웅크리고 있던 철장 바로 앞에선 인상 험악한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점점 주변 상황을 파악하게 되면서 추위를 느꼈고 나는 중요한 부분만 가린채 발가벗겨졌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벗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은지 얼마 안되어서 helper 71호가 그 인상 험악한 사내의 옆에 나란히 섰다.

“앞으로 센티널들이 인간들과 일할 기회가 많아져서, 인간형태의 센티널 프로그램을 제작한거라고 하더군요. 조만간 인간과 센티널들이 서로 익숙해지게 되면 매트릭스상에서 자신의 센티널들을 파트너 삼아서 만나게 할 계획도 있다고 하던데요.”
helper 71호는 기계적인 표정을 하고는 인상 험한 사내한테 말을 걸고 금새 그 사내 등뒤에서 나에게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인간들이란 생각하는게 참.....모든걸 다 자신의 복사 내지는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니까. 기계는 기계일때가 제일 편한거야. 인간은 왜 기계마저 인간모양으로 만들어놔서 기계자신이 기계인지 인간인지 헛갈리게 만드는거야? 그래놓고서 기계가 ‘난 인간이오’하면 화들짝 놀라서 그 기계를 부숴버릴거면서 말이야....”
인상이 험악한 사내도 프로그램인가보다. 아무튼 인상 험악한 사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려운 이야기를 내뱉듯이 던져놓고 수많은 철제 우리들 사이로 사라져 갔고 helper 71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 바싹붙어서 내게 말을 했다.

“선생님도 ‘교체’되었어요, 지금 일단 선생님께서 하실일은 선생님의 정착지로 가셔서 선생님과 ‘교체’된 선생님의 의식을 매트릭스에 접속시키는 일이예요.”

나는 ‘어떻게’라고 물으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helper 71호에게 입막음을 당했다.

“지금 이곳은 센티널 프로그램 저장장소 거든요. 선생님이 만약에 지금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를 했다가는 센티널 프로그램들의 의심을 사고 이곳 전체에 경보음이 울릴거예요. 지금은 제가 하는 말만 듣고 그대로 따라 주셔야 해요”
helper 71호의 말투는 예전과 달리 많이 부드러워졌다. 프로그램도 인간과 자주 접촉할수록 변하는 건가?

“아마 조금 있으면 방금 그 감독 프로그램이 모든 우리의 문을 열어줄거예요, 그러면 다른 센티널 프로그램들과 같이 행동을 하면되요. 일단 선생님도 다른 센티널 프로그램들처럼 밖으로 나가자 마자 풀숲으로 뛰어드시면 되는데요 풀숲에 뛰어들면 여러 정착지의 명칭들이 보일거고 거기서 다시 선생님의 정착지 이름을 찾아서 들어가시면 거기에 여러 구멍이 보일꺼예요, 그냥 공간에 시커먼 구멍이요.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가면 선생님의 의식이 센티널안에 들어가게 되거든요, 그다음에는 선생님의 노력여하에 달린건데....아무튼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군요. 일단 제 말씀대로 선생님의 본체와 ‘교체’된 의식을 찾아서 저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그 해변가로 와주세요. 기다릴께요”
helper 71호는 다급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내가 있는 우리에서 떨어졌다.

“어이 뭐해? 그새 인간형 프로그램과 정이 들었나? 아님 인간을 애완용으로 키우고 싶어?”
감독 프로그램이 멀리서 helper 71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말끝에 프랑스어 같은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네 알았어요, 메로빈지언씨”
helper 71호는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면서 멀어져갔다.

4.
“삐익~삑”
철제 우리가 열리면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고 덩치큰 개들은 메로빈지언이라고 불리운 감독 프로그램 앞으로 몰려들었다.

“알았지? 앞으로 3시간 동안 작업을 한다. 단 언제라도 호루라기가 두 번 울리면 돌아와야해. 그리고 너 인간처럼 생겼다고 인간처럼 행동하면 국물도 없을줄 알아!! 이래뵈도 이곳 센티널 프로그램들은 예전에는 인간들을 사냥하던 사냥개였다고.”
다른 개 들이 컹컹 거리고 짇는 동안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을 했다. 하는 수없이 네 발 짐승처럼 엎드려서 컹컹 소리를 냈으나 다른 개들의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삐~~~익”
호루라기가 길게 한번 울렸고 개들은 밖을 향해 뛰쳐나가서는 풀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도 다른 개들처럼 엎드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기어서 풀숲속으로 들어갔고 그 안에는 풀숲과 프로그램 언어가 교묘하게 섞인 장소가 나왔다.

다른 개들은 시각 정보보다 냄새를 맡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는 수많은 기호중에 겨우 겨우 내가 있던 정착지의 주소를 찾아내어 그쪽 풀숲으로 들어갔고 거기에는 helper 71호의 말 그대로 풀숲과 프로그램 언어가 섞여진 가운데 시커먼 구멍들이 여러개 있었다.

나는 서둘러 아무 구멍에나 뛰어들었다.